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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2-20 (금)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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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679      
[근대] 최시형연구-동학지도층 (유기쁨)
19세기 후반 동학 지도층의 역동적 관계구조 연구

― 최시형과 비판적 지식인들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

유기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Ⅰ. 서론

동학은 19세기 후반에 지배이념으로 작용하던 유교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의 열림(개벽)을 주창한 종교이다. 동학이 창교되자 이에 매력을 느낀 사회적 집단이 동학 내부로 유입되어 함께 공존하면서 동학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동일한 사회적 지향과 종교적 성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출신 계층에 따라서 동학에 입도한 동기, 그리고 추구하는 목표 등에서 차이를 드러내었다. 이런 차이는 향후 동학의 성격 변화와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크게는 농민들이 중심을 형성하고 있던 민중층과 몰락 양반 출신 중심의 지식인층으로 대별된다고 하겠다.

19세기 후반의 민중은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유교(본 논문에서 말하는 유교는 당시 새로운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서 한계에 다다른 19세기 후반의 유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의 종교의식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부패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침입으로 인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민간신앙만으로도 그들의 종교적 욕구가 충족될 수 없었다. 이 무렵 창도된 동학은 이러한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민중에게도 열린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기에 민중은 동학에 강하게 이끌리게 되었다. 이 때 동학에 참여한 민중은 현실적으로 '유무상자(有無相資)' 등 동학이 제시하는 공동체적 경제윤리에 매료되어 입도하는 경우도 많았고, 또한 이들은 동학이 교리적 내용보다는 '주문'을 통한 종교적 수련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유교적 사회질서가 경색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식인층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당시 지배이념으로 작용했던 유교적 지식을 갖추었으나 지배질서에 편입되지 못했고 따라서 지배질서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지배질서에 순응적인 관료적 지식인들과는 그 성향이 매우 달랐으며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동학의 '후천개벽' 등 사회 비판 의식은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때 동학에 입도한 지식인들은 동학이 당시의 지배이념인 유교를 대치할 수 있는 사상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동학에 입도한 지식인들이 가진 비판 의식에 주목하고 이들을 '비판적 지식인들'로 지칭하고자 한다.(최제우 역시 몰락한 양반집의 서자로서 상당한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나 지배질서에 편입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자유로운 비판의식을 소유했던 비판적 지식인에 속했다.)

이렇듯 지식인들과 민중은 동학의 창도기부터 서로 다른 동기를 가지고 동학에 입도했으며 최제우의 포교 방식 역시 이원적이었다. 최제우는 민중을 위해서는 『용담유사』를 집필했고 주문수련을 강조했으며, 비판적 지식인들을 위해서는 『동경대전』을 집필했고 특히 교리문답을 실시하여 이들을 교화했으며(최제우의 주된 교화 방법은 주문수련이었지만,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고 한문을 구사할 수 있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을 위해서는 특히 교리문답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지적 욕구를 해소해 주었다.) 지도층으로 활용했다.(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경전으로 간행된 연대는 각각 1880년, 1881년이지만, 최제우 당대에 이미 대부분이 붓글씨로 필사되어 제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편, 『동학농민혁명과 사회변동』, 한울, 1994. p. 114))

그런데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 시기로 넘어오면서 동학의 내부 구조는 복잡해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2대 교주 최시형이 민중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최제우 재세시부터 비판적 지식인들이 동학의 지도층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민중 출신인 최시형이 최고 지도자로서 동학 교단을 이끌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과정이 아니었다. 최시형은 최고 지도자가 된 후 비판적 지식인들을 지도층으로 재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제우의 사망으로 발생한 종교적 카리스마의 공백상태를 민중 출신인 최시형 개인의 종교성으로 메운다는 것은 힘든 실정이었다. 실제로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최시형과는 다른 지향을 가진 세력을 형성해서 최시형에게, 그리고 동학의 전개 방향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제우 사후 동학의 전개 과정에서 민중 출신의 교단 지도자와 지식인 출신의 역동적 관계구조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동학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교단 조직의 역동적 구조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종교사회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최시형이 2대 교주로서 동학을 이끌어 가던 시기에 민중 출신의 최고지도자와 비판적 지식인들의 관계구조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 때 연구 범위는 최시형이 2대 교주로서 동학을 이끌어 가던 시기의 '동학 지도층'의 활동만으로 제한하기로 한다.

그리고 최시형 입도 이후 최고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시기를 '동학교단의 형성기', 동학이 교단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시기를 '동학교단의 완성기', 지도층 내부의 지향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는 시기를 '동학교단의 분열기'로 지칭하고 구분하여 살피고자 한다.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1905년 이후에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전개된다. 본 논문에서 '동학교단의 형성기ㆍ완성기ㆍ분열기'라는 용어는 별다른 지칭이 없어도 제한적으로 최시형 입도 후의 동학의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한다.)

논문 서술 방식은, 각 시기별로 '최시형'과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의 역동적 관계구조를 염두에 두고 중요하게 부각되는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적 관계 속에서 동학 사상과 실천의 전개 과정을 각 시기별로 검토해 보고, 최시형과 비판적 지식인들이 동학의 전개과정에서 담당한 역할을 살펴 볼 것이다.

Ⅱ. 동학교단의 형성기

1. 최시형의 입도 후 초기 위치

최제우의 재세시(在世時) 동학에는 일정한 수준의 진보적 의식을 지닌 비판적 지식인층과 무귀천 사상(無貴賤思想), 유무상자(有無相資)에 매료된 민중이 동시에 존재했다. 최제우는 비판적 지식인들과 함께 詩와 訣을 토론하고 교리문답을 실행했으며, 영해 접주 박하선(朴夏善), 영덕의 강주(姜洙, 姜時元), 단양 접주 민사엽(閔士葉), 경주 부서(府西) 접주 강원보(姜元甫) 등 상당한 학문적 기반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들을 동학의 지도층으로 규합해 나갔다.

최시형은 머슴, 조지소의 고공(傭工), 화전민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민중 출신으로, 용담에서 최제우가 새로운 도를 편다는 소문을 듣고 1861년 직접 최제우를 찾아가 동학에 입도했다. 그러나 동학에 입도(入道)한 최시형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동학의 중심세력으로서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데 비해 그다지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고, 따라서 1862년 12월 말 최제우가 16명의 접주를 임명하였을 때에도 제외되었다.(「崔先生文集道源記書」, 『東學思想資料集』壹, 亞細亞文化社, 1979. pp. 179-80.)

최시형은 교리에 관심을 가졌던 비판적 지식인들과는 달리, 오로지 동학의 가르침의 핵심이 담겨 있는 주문수련을 중심으로 독실한 수련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마침내 종교적 수련을 통해 한울님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였고 신비한 종교체험도 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지배적 유교사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동학에서 닦는 도야말로 무극대도(無極大道)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내가 젊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인줄 알았노라. 요순의 일을 하고 공맹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느냐. 여러분은 내 이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篤工', 「해월신사법설」, 『천도교경전』, 천도교중앙총부, 포덕 138년)

민중 층에 속한 최시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교적 사유체계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에 비판적 지식인들에 비해 이러한 깨달음이 용이했던 것이다.(뒷날 최시형은 자신의 민중적 생활기반을 토대로, 2대 교주로서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과 결합하여 보여주게 된다. 즉, 최제우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현실인식과 비판능력에, 민중으로서 최시형이 가지고 있던 구체적이고 얽매이지 않은 건실한 지도력이 결합되면서 동학은 새로운 전개국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최시형의 입도 초기 신비체험에 대한 자료는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慶翔이 꿇어앉아 묻기를 "기름 반 종지로 21일 밤을 새웠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놀라운 힘(조화)의 큰 체험이다. 그대는 마음에 홀로 기뻐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라"고 하였다. 慶翔은 또 "이후로 포덕을 해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선생은 "포덕하라"고 대답하였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 『東學思想資料集』壹, 亞細亞文化社, 1979. pp. 173-74.)

입도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최시형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지위, 그리고 학문적 배경이 별로 없는 민중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수련생활로 점차 동학 내에서 모범적인 제자로 부각되었고, 최제우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2. 비판적 지식인들의 無力化

1863년 12월 9일 宣傳官 鄭雲龜에 의해 최제우와 지도층 제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3월 10일, 최제우는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동학은 교조가 처형되고 지도층 제자들이 유배됨에 따라 지도부의 공백상태를 맞게 되었다. 동학의 지도층으로 활동했던 비판적 지식인들이 상당수 제거되었기에,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중 출신이지만 모범적인 제자로 인정받던 최시형이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유족들을 보살폈으며, 남아있는 교도들과 함께 혼란한 동학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동학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 세력은 최제우의 체포와 처형 과정에서 그 세력이 약해졌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사회현실에 불만을 가진 상당수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필제(특히 이필제는 士族出身의 沒落兩班으로서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동학에 입도한 비판적 지식인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를 중심으로 다시금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이들은 영해 일대에서 신분상승을 꾀하다 탄압을 받은 동학교도들인 영해일대의 新鄕 세력들(당시 영해 일대에는 새롭게 신분상승을 추구하던 新鄕세력들이 동학의 사회비판과 평등사상에 이끌리어 동학에 대거 입교하였으나 舊鄕들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張泳敏, 「1871年 寧海 東學亂」, 『韓國學報』 47. 일지사, 1987.))과, 이러한 新鄕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난을 도모하려는 변란 세력들로 구성되었다.(朴夏善의 아들 朴永琯, 평해 將校 출신으로 무반 全仁哲 등 영해지역 서얼출신 신향세력들을 비롯한 비판적 지식인들이 영해민란의 지도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71년 무렵에는 최시형 중심의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필제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1870년 10월 최시형에게 접근하여 교조신원을 위해 봉기할 것을 설득하였다. 최시형은 이 무렵 동학 내에서 주도권을 확립하지는 못했기에,(특히 최시형은 최제우의 제사를 위해 1866년 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시형이 아니라 강수의 부친이 契長이 되었다.(張泳敏, 「1871年 寧海 東學亂」, 『韓國學報』 47, 일지사, 1987. p. 111)) 이들의 요구를 마침내 수락했고, 1871년 3월 10일에 경상도 일대 19개 고을 교도들 수백 명과 함께 영해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죽었고 영해민란은 5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필제와 그를 뒤따르던 동학의 비판적 지식인층이 '영해민란'을 통해서 목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교조신원'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교조의 신원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동학'이 당시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사상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는 교조신원이라는 종교적 동기보다 사회적 동기가 강했다. 주로 서얼출신 新鄕 세력인 영해지역 동학교도들은 당시의 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영해민란을 통해 이러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사회적 동기가 강했던 동학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최시형보다는 그들과 같은 계층 출신인 이필제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이필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필제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 지식인들은 영해민란의 실패로 대부분 죽거나 유배되었고, 동학 내에서 이들의 세력은 無力化되었다. 따라서, 영해민란으로 인해 동학이 입은 피해가 컸지만, 오히려 1871년 '영해민란'의 실패 직후 동학 안에서 최시형의 지위는 확고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Ⅲ. 동학교단의 완성기

1. 단일지도체제 형성

영해민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최시형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피신생활을 했다. 최시형은 영해민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姜洙(姜時元), 全聖文, 劉寅常(劉時憲) 등 남아있는 비판적 지식인들을 규합해서 1872년 10월부터 12월까지 49일 입산수련을 했다.

이들은 동학 주문을 하루에 2-3만 번 독송(讀誦)하는 49일 기도 수련 등의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 동학의 도가 유ㆍ불ㆍ선을 포함하는 無極大道이며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종교적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집중적 종교수련을 거친 비판적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종교적 깨달음을 얻었기에 민중 출신인 최시형을 적극 보좌할 수 있게 되었다.

적조암 수련 이후 80년대까지, 49일 동안 일정 장소에 머물며 수련하는 의례가 동학의 주요 수련의례로 확립되었는데, 주로 비판적 지식인층을 중간지도자로 양성하는 과정으로 실행되었다.(교단 정비기에 최시형의 교화 방법이 차별화 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매일 동학의 주문을 2-3만독 독송하는 주문수련을 중심으로 49일 수련이 강조한 반면, 동학에 입도한 민중을 위해서는 49일 수련의례와 같은 상징성을 지닌 대중적이며 간편한 제사의례인 설법제(1875), 구성제(1877), 인등제(1879)를 거행했다.)

한편, 최시형 중심의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인 1879년에는 최초의 공식적인 교단사인 『崔先生文集道源記書』가 편찬, 간행되었다. 문집 편찬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수련을 계속해 온 강시원 등의 비판적 지식인층 교도들이었으며, 이들은 동학의 도통이 최시형으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또한 동경대전은 1880년, 용담유사는 1881년에 각각 집성, 편찬되었으며,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은 비판적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글 가사체로 지어진 용담유사는 민중 층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18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교단사와 경전이 집대성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해민란 이후 동학 내에서 최시형과 다른 지향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 세력이 일단 수그러들고, 동학 내의 상당수 비판적 지식인층은 최시형 휘하로 흡수되어 최시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둘째,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최시형 중심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셋째, 교세가 크게 확대되어 교단사를 집필하고 경전을 공개적으로 간행할 정도로 교단적 역량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최시형은 188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서 '육임제(六任制)'라는 새 직제를 제정하였다.    육임이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으로 동학의 여섯 임직을 말한다.

최시형은 1887년경부터 육임을 임명하고 육임소를 설치하였다. 육임제를 통해서 최시형은 비판적 지식인층을 중간지도부로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했으며, 육임소 설치를 계기로 지방 조직을 육임소를 중심으로 결속시키고자 했다. 즉, 최시형은 육임제를 통해 혹 이탈할지도 모르는 지향이 다른 비판적 지식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지도층의 역할을 줌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던 것이다.

Ⅲ. 동학교단의 완성기

1. 단일지도체제 형성

영해민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최시형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피신생활을 했다. 최시형은 영해민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姜洙(姜時元), 全聖文, 劉寅常(劉時憲) 등 남아있는 비판적 지식인들을 규합해서 1872년 10월부터 12월까지 49일 입산수련을 했다.

이들은 동학 주문을 하루에 2-3만 번 독송(讀誦)하는 49일 기도 수련 등의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 동학의 도가 유ㆍ불ㆍ선을 포함하는 無極大道이며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종교적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집중적 종교수련을 거친 비판적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종교적 깨달음을 얻었기에 민중 출신인 최시형을 적극 보좌할 수 있게 되었다.

적조암 수련 이후 80년대까지, 49일 동안 일정 장소에 머물며 수련하는 의례가 동학의 주요 수련의례로 확립되었는데, 주로 비판적 지식인층을 중간지도자로 양성하는 과정으로 실행되었다.(교단 정비기에 최시형의 교화 방법이 차별화 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매일 동학의 주문을 2-3만독 독송하는 주문수련을 중심으로 49일 수련이 강조한 반면, 동학에 입도한 민중을 위해서는 49일 수련의례와 같은 상징성을 지닌 대중적이며 간편한 제사의례인 설법제(1875), 구성제(1877), 인등제(1879)를 거행했다.)

한편, 최시형 중심의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인 1879년에는 최초의 공식적인 교단사인 『崔先生文集道源記書』가 편찬, 간행되었다. 문집 편찬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수련을 계속해 온 강시원 등의 비판적 지식인층 교도들이었으며, 이들은 동학의 도통이 최시형으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또한 동경대전은 1880년, 용담유사는 1881년에 각각 집성, 편찬되었으며,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은 비판적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글 가사체로 지어진 용담유사는 민중 층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18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교단사와 경전이 집대성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해민란 이후 동학 내에서 최시형과 다른 지향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 세력이 일단 수그러들고, 동학 내의 상당수 비판적 지식인층은 최시형 휘하로 흡수되어 최시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둘째,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최시형 중심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셋째, 교세가 크게 확대되어 교단사를 집필하고 경전을 공개적으로 간행할 정도로 교단적 역량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최시형은 188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서 '육임제(六任制)'라는 새 직제를 제정하였다.    육임이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으로 동학의 여섯 임직을 말한다.

최시형은 1887년경부터 육임을 임명하고 육임소를 설치하였다. 육임제를 통해서 최시형은 비판적 지식인층을 중간지도부로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했으며, 육임소 설치를 계기로 지방 조직을 육임소를 중심으로 결속시키고자 했다. 즉, 최시형은 육임제를 통해 혹 이탈할지도 모르는 지향이 다른 비판적 지식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지도층의 역할을 줌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던 것이다.

2. 비판적 지식인들의 도전

최시형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동학의 교세는 점차 확장되어 1890년대 초에는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뿐 아니라 전라도 서남해안지방까지 이르게 되었다.(1888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있었고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이때 최시형은 '有無相資'를 실천하도록 戊子通文을 내렸으며 어려운 이들을 적극 돕도록 했다. 창도 초기부터 이어져 온 동학 의 유무상자 전통은 동학의 평등사상과 함께 당시 민중이 동학에 入道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萬事知가 밥 한 그릇이니라'는 최시형의 법문도 이때 나온 것이다.(<만사지가 밥한그릇>, 《天道敎會月報》 195, 1927. 3, p. 56)

교세가 커지고 교도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외부적으로는 관의 경계와 탄압이 가중되었고, 내부적으로는 최시형과 비판적 지식인층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즉, 교세가 급성장하면서 최시형의 교세의 지역적 기반이 영남ㆍ영서에서 호남ㆍ호서로 옮아갔고, 따라서 김개남ㆍ김낙철ㆍ김낙봉ㆍ남계천ㆍ김덕명ㆍ윤상오 등 호남과 호서지방의 지도자들이 부상하게 되었는데, 최시형은 1880년대 후반에 입교하여 1890년대 초반에 이르러 휘하 수백 부천명의 연비를 거느리는 대접주의 위치로 성장한 이들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교세 확장기에 대거 입도하여 접주나 대접주로 급성장한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더 많은 교세를 확보하기 위해 접과 접, 포와 포 사이의 경쟁까지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갈등은 1891년 5월의 '남계천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당시 전라도의 동학은 左道와 右道로 나뉘어 각각 便義長이 지도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좌도는 남계천이, 우도는 윤상오가 각각 편의장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두 지도자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백정 출신으로 알려진 남계천을 전라 좌도의 편의장직에 임명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남계천 사건은 천도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김낙삼이 묻기를 「전라도에는 포덕이 많이 될 수 있는 정세이나 남계천이 본래 본토양반이 아니었는데 입도한 뒤에 남계천에게 편의장이란 중책으로 道衆을 통솔케하니 道衆에 낙심하는 이가 많습니다. 원컨대 남계천의 편의장 첩지를 도로 거두시기 바랍니다.」('布德', 「海月神師法說」)

그런데 최고 지도자인 최시형 역시 천한 민중 출신임을 기억한다면, 남계천 사건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이러한 반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최시형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거나, 혹은 최시형에게 도전적인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최시형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소위 班常의 구별은 사람의 정한 바요 道의 직임은 한울님이 시키신 바니, 사람이 어찌 능히 한울님께서 정하신 직임을 도로 걷을 수 있겠는가. (중략)

이제부터 우리 도 안에서는 일체 班常의 구별을 두지말라. 우리나라 안에 두가지 큰 弊風이 있으니 하나는 嫡庶의 구별이요, 다음은 班常의 구별이라. 嫡庶의 구별은 집안을 망치는 근본이요 班常의 구별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고질이니라. (‘布德’, 「海月神師法說」)

우리 도는 오만년 개벽의 운수를 타고 무극대도를 창시하였으니 門地의 낮고 높음과 노소의 차별을 두는 것은 좁은 시야에 미혹한 관습이니 어찌 거론할 가치가 있으리오 비록 門地가 낮고 천한 자라도 두령의 자격을 갖추면 그 지휘를 따라 이 도를 드러냄이 옳으리라 (<本敎歷史>,《天道敎會月報》23. 1913. 6.)

위의 구절은 최시형이 아직도 班常의 구별에 사로잡혀 있는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의 사고구조를 개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종교적 동기보다는 기존의 지배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불만과 사회비판의식을 가지고 동학에 입도한 비판적 지식인들 중 일부는 동학의 중심부에 편입되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들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의식은 가졌으나, 지배이념으로 작동하던 유교적 세계관의 차별적 질서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다. 기존의 차별적 질서관을 脫聖化하고 모든 사람이 ‘班常 구별 없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동학의 종교사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49일 수련의례 등의 집중적 종교의례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한스 몰에 의하면, 종교는 이전의 정체성을 脫聖化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聖化하며, 이 때 의례는 정체성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수련의례가 정체감 형성에 미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Hans Mol, Identity and the Sacred, Basil BlackwellㆍOxford, 1976. pp. 233-245를 참조하라). 이전의 정체성이 강력한 것일수록 새로운 정체성의 聖化를 위해서는 집중적이고 강렬한 의례가 요구된다. 당시 민중에 비해 비판적 지식인들은 유교적 사유체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받았기에, 유교적 세계관의 탈성화를 위해서는 집중적인 수련의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세가 급성장으로 모든 비판적 지식인들을 이와 같은 집중적 수련의례로 포괄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동학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비판적 지식인들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설득과 회유를 통한 최시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최시형은 1891년 두어 달에 걸쳐 전라도를 순방하고서 '도를 아는 자가 드물다'고 소감을 피력했던 것이다 (『海月先生文集』(“湖南一道 遂處遊覽 知道者鮮矣”)).

3. 최시형의 「通諭十條」

전라도를 순회하면서 지도자들간에 갈등 대립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한 최시형은 교세가 급성장하고 관의 탄압은 가중되는 상황에서 49일 수련 등의 종교 의례를 통해 많은 수의 비판적 지식인들을 직접 규합하는 데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이들을 통제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1891년 10월경에 내린「通諭十條」에는 이러한 모색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연원이 바르지 못한 교도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방지하고자 ‘正淵源’    淵源制는 동학의 조직원리이다. 즉, 道統淵源이라해서 포덕을 행한 이와 받는 이 간의 일종의 종교상의 사제지간이 되어 가지를 많이 친 나무와 같은 모양으로 조직되는 것이 淵源이다. (신일철, 「동학사상의 전개」, 『동학사상논총』 제1권, 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포덕123년. p. 52)

이, 해당 접주나 법소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교도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禁淆雜'이 강조되었고, 여기에는 교도들 뿐 아니라 便長(便義長)조차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중벌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두 번째는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윤리를 차용하여 이들을 규합하려는 시도였다.    吳知泳의 『東學史』는 당시 최시형이 “내가 지금에는 너희에게 끌려 따라간다마는 이 다음에는 너희가 도로 나를 따라올 날이 있으리라”는 태도를 보였다고 기록했다. (吳知泳, 『東學史』, 永昌書館版 p. 194)

제1조 明倫에서는, ‘우리 道는 천하의 無極大道이며, 仁義禮智 孝悌忠信의 도리를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고 표명했다.

凡吾道者 卽天下無極大道也 出於天 昭於東 三綱定五倫明矣
仁義禮智 孝悌忠信 莫不畢備於斯道之里 (1891.10.「通儒十條」 明倫條)

최시형은 '주문수련' 등을 통한 종교적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고 道를 깨닫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비판적 지식인들을 위해서, 이들에게 친숙한 유교적 윤리(제 2조 守信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信을 강조한다.)를 통해 동학의 교의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동학의 道가 無極大道이며 그 속에 유교 윤리가 '포함됨'을 강조하는 것이다.(최시형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유교적인 것으로 전환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1885년의 夫和婦順 법설, 1890년의 내칙, 내수도문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최시형은 유교사회의 구습하에서 불평등한 여성의 상황에 주목하고 개선하려 하는 등, 본질적으로 유교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최시형이 「通諭十條」에서 유교 윤리를 강조한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1864년 최제우의 처형이래 지배층으로부터 邪學으로 간주되어온 동학을 기존체제로부터 공인받고자 했던 것이었다. 즉, 당시의 지배적인 유교의 실천윤리인 충효 사상 등이 동학에도 존재하며 동학이 기존체제와 공존할 수 있음을 당시 지배층에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1892년 1월 25일에 하달한 「魚肉酒草를 금지하는 통문」에서도 동학이 하나의 제도종교로서 현실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通諭十條」를 통해 비판적 지식인층을 규합하려는 최시형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관의 탄압으로 인해 상벌을 시행하는 육임소가 폐지되고 최시형 자신도 피신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비판적 지식인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판적 지식인층은 점차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출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BK21 사업단-종교와 민족-유기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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