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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5 (화) 01:12
분 류 사전3
ㆍ조회: 1526      
[근대] 인천항의 역사 (인천)
인천항의 역사

인천의 연혁

인천은 1883년에 개항된 우리나라 근대 문명의 요람지이며 국제적인 항구도시이다. 인천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 미추홀로 백제 시조 온조왕 의 형 비류가 잡았던 곳이라 하며, 삼국시대에는 여' 제' 라(麗' 濟' 羅) 삼국간 쟁탈의 목표가 되었던 곳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번복 변천을 거듭하다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신라의 신주(新州:漢山州) 에 속하였고 경덕왕 16년(757년)에 소성(邵城)이라 불러 율진군(栗津郡: 果川)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誌) 한산주(漢山州)조에 '매소홀현을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 고 하였으며 '고려사' 지리지(地理誌) 양광도(楊廣道) 조에 '인주(仁州)는 원래 고구려의 매소홀이며 일명 미추홀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인천은 삼국시대에 미추홀 또는 매소홀로 불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이 통일 신라 시대의 경덕왕에 이르러 소성으로 개칭 되었는데 경덕왕은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써서 신라의 제도, 관직 등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되어 있는 지명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로 바꾸었다. 이때 매소홀을 '높다' '언덕' '거친 들' 등을 뜻하는 소(邵)자와 군(郡), 읍(邑), 동(洞) 등을 가리키는 성(城)자로 바꾸어 소성이라 하였던 것이다.

소성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수주(富平)에 속하였으며 숙종 (1095~1105)때에는 인예왕후 이씨(李氏)의 고향이어서 경원군(慶源郡) 으로 올리었고 인종(1122~1146)때에는 또 순덕왕후 이씨(李氏)의 고향이 되어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고쳤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고 이조(李朝) 태조 (太祖) 원년(1392년)에 다시 인주(仁州)로 되고 태종 13년(1413년)에 인천군(仁川郡)이 되고 세조 6년(1461년)에는 소헌왕후의 외향(外鄕) 이므로 해서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다시 중종 21년(1526년)에 수원진(水原鎭)을 바꾸어 이곳에 옮겼으며 그 치소(治所)는 현재는 문학(文鶴)에 있고 현재는 구시가지는 제물포 라는 한촌 이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당시의 인천경내가 동쪽으로 안산(安山: 始興)군계까지 41리 금천(衿川:始興)군계까지 34리, 남쪽으로 대해(大海) 까지 7리, 서쪽으로 제물포까지 17리, 북쪽으로 부평부계까지 24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치(府治)가 지금의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조선조 후기인 영조때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인천도호부(仁川 都濩府)조의 기록을 보면 방리로 10개면을 들고 있는데 부내(府內), 원우이(遠又爾), 주안(朱岸), 조동(鳥洞), 신개고(新介古), 남촌(南村), 황등천(黃登川), 전우(田友), 이포(梨浦), 다소(多少)의 10개 면(面) 으로 인천을 이루었다.

인천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체결된 직후 부터 시대의 각광을 받고 부산, 원산에 이어 개항하게 되었다.

개국 후 고종 20년(1883년)에 인천의 제물포(濟物浦)가 개항되어 이곳에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자 감리가 부사(府使)를 겸하였는데 고종32년 (1895년)에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 331 군(郡)으로 통합하여 부 에 관찰사(觀擦使)를 두었을때 감리서는 폐지 되고 인천은 23부중의 하나로 인천(仁천), 부평(富平), 김포(金浦), 양천(陽川), 시흥(始興), 안산(安山), 과천(果川), 수원(水原), 남양 (南陽), 강화(江華), 통진(通津), 교동(喬洞) 등 12군을 관할 하였다.

그러나 건양(建陽) 원년(1896년)에 다시 부제(府制)를 개정하여 전국을 13도(道) 1목(牧) 9부(府) 329군(郡)으로 나눌때 인천은 9부중의 하나가 되고 감리서가 부활되었으나 광무(光武) 10년(1906년)에 또 다시 폐지되고 인천부윤(仁川府尹)이 감리사무를 수행하였다.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 태서(태서)의 문물 수입구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많은 국제적 분쟁의 와중에서 더욱 신장하여 1899년 경인선(京 仁線)이 개통되고 1910년 인천부(仁川府)가 설치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인천부의 일부와 부평이 병합하여 부천군 (富川郡)이 신설됨으로써 구역이 일시 축소 되었으나 1936년 10월 1일 다주면(多朱面)이 편입되었으며 1918년에 갑문식 독크의 축조는 명실공히 수도의 현관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1940년에 부역(府域)을 확장하여 문학, 부평, 남동, 서곳 등을 편입하 였으며 광복(光復)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는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작약도가 편입되었다.

1967년 3월에 구청(區聽)제도 실시에 따라 1968년 1월 1일을 기하여 중구(中區), 동구(東區), 남구(南區), 북구(北區)의 4개 구가 설치 되었고 1981년 7월 1일에 직할시(直轄市)로 승격하였다.

인천의 개항

우리나라는 1876년에 외세의 강압으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함으로서 문호개방이 시작 되었다. 강화도조약은 1876년 병자년에 체결된 한.일간의 수호조약(修好條約)으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75년 당시 집권자인 민씨(閔氏)일파는 쇄국주의(鎖國主義)를 고집하여 왔으나 한국으로의 진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 부근에 출동시켜 단정(短艇)으로 한강으로 들어오려 할 때 이를 목격한 강화도 남단 초지진(草芝鎭) 포대의 발포로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을 구실로 일본은 이듬해 병자년에 전권대신 '구로다' 와 부사 '이노우에'를 보내어 수호조약을 요구하게 되자 민씨일파에서는 내심 일본과의 수호통상(修好通商)을 좋와하지 않았으나 당시의 쇠퇴된 국력으로는 신흥 일본에 대항하지 못하고 우의정 '박규수'를 강화도에 보내어수호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그 내용은 12조 항목으로 되었고 그 중 중요한것은 한국은 일본과 대등한 자주국(自主國)임을 확인할 것과, 양국의 사절(使節)을 교환할것, 일본국민이 한국에 왕래 통상함을 인정할것, 부산 외에 새로 2항구를 개항하기로 할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의 성립으로 1876년 부산항의 개항을 효시로 1880젼 원산항의 개항, 그리고 1883년 인천항의 개항으로 폐쇄되었던 조선은 새로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감리서의 설치

개항후 새로운 국제관계에 수반하여 외교사절의 상호교환과 주재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으로 많은 문제가 생겼다. 이에 조선정부는 개항장에 통상사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할 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그 기관을 감리서라 하고 인천감리서는 고종20년(1883) 8월 19일 설치 되었다.

인천항에 설치된 감리서 위치는 내동의 종전의 법원자리이다. 그후 감리서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제도 개편됨에 따라 고종32년(1895) 5월1일 폐지되었다가 1년 4개월만인 건양원년(1896) 8월4일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다시 복설되었다.

복설된 감리서는 일본이 광무 10년(1906) 2월1일에 통감부를 설치, 같은해 9월 24일에 감리서 를 일괄 폐지하고 그 사무를 통감부의 이사청에서 관장토록하니 우리나라의 주권은 사실상 박탈 당한 것이었다.

개항후의 인천항

개항되기 이전 인천항은 우리나라 유일의 군항으로서 제물포라 칭하였다. 1884년 말 인천항에 내도했던 일인상인단체의 주선으로 시행된 항만축조사업은 인천항만축조사업의 효시이다. 그 때에 시설은 잔교1기와 석축돌제부두 한개 뿐이었다.

제 2차 개발사업은 1893년 돌제부두의 증축과 등대, 목표 등 항로표시였으나 원시적인 것으로서 근대 항으로서의 기능을 기대하지는 못하였다. 1906년에는 노일전쟁을 전후하여 물동량급증으로 항만시설확충의 긴급성을 통감, 6개년 사업으로 총공사비 88만여원을 들여 인천역을 우회하는 일대에 부두의 매축 및 호안석벽의 축조등 공사에 착수하여 1911년 3월에 완료하였다.

이때에 완성된 시설로는 물양장 143간, 호안석벽 349간, 길이 60간의 잔교 1기, 길이 40간의 목조잔교 2기, 길이 105간의 잔교 1기가 가설되고 3톤짜리 윈치 1기, 3톤짜리 수동기중기를 설비하였고 세관건물 및 부속건물 3백여평, 창고 2동과 해항검역소 등이었다.

개항후의 해운

조선조는 개항이전에는 쇄국정책으로 중국과의 약간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해외 무역활동은 없었다. 따라서 원양항해를 할만한 선박을 가지지 못하였고 증기선도 없었다. 그후 조선조는 개항초 부터 증기선을 보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883년에 설치된 전운국을 해운담당 부서로서 차관으로 선박을 사들여 운항케하였고 외국선을 용선하여 운항한 적도 있다.

전운국에서 구입한 기선은 해용호, 광만호, 조양호 등으로 지방세곡을 인천항으로 운반함에 주로 쓰였다. 그후 전운국은 조곡운송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운국은 관 기업인 이운사를 설립하여 전운국의 선박들을 인수하여 한강 강운과 군산 인천간의 조곡운반에 취항하는 활동을 하다가 1895년에 일제의 우선회사에 운항을 위탁하였다.

그러나 일본 우선회사는 계약을 파기하였고 다시 독일상 세창양행에 운항을 위탁하였다. 세창양행은 선박들을 한국 연안에 취항시켜 1901년경에는 인천에서 나가사기와 인천에서 상해등을 부정기로 운항하였다. 한편 민간 선박업자들인 정부세곡의 수송과 선상활동을 하던 경강상인들이 상선회사를 만들고 화륜선을 구입 운영하였다.

인천항에서 활동하던 민간 운수업체로는 삼산상회가 소증기선으로 인천과 마포간을 취항 시켰고 1886년에는 대흥상회, 1888년에는 삼호상회가 설립 인천과 마포간을 취항시켰다. 인천항에서 항운업을 하던 회사는 1890년에 의신회사가 풍서환이란 선박으로 부산과 원산에 취항하였고, 1891년에 제통사, 통운사 등이 있었다.

이들 회사들은 1900년에는 국내 각처와 연해 각 부군에 우편물을 채송하고 여객및 화물수송의 목적으로 대한협동우선회사를 설립하여 개인 소유선과 정부 소유선을 위탁받아 인천을 기점으로 연안항로에 취항하였으나 개업 4년만인 1904년 폐업을 하였다.

일본인의 인천항 항운업은 개항초인 1884년 부터 한강강운업을 비롯 인천 평양 간 정기항로 운항, 인천 군산 목포간 정기항로 운항, 일본 인천 상해의 부정기항로 운항이 있었다.

개항후의 무역

인천에는 개항초기부터 청국, 일본을 비롯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등 구미 여러나라 상인 의 친출이 활발하였다. 1896년에는 재한 외국인 총수가 15,000명 이었는데 그 중 3,908명이 인천에 거주하였고 외국인 상관수도 전국 258개중 48개가 인천에 있었다.

1908년말 인천에 설립된 일인 상사는 26개이며 주요 업종은 무역으로 곡류 해산물 우피 면화 광물 등의 수출과 각종잡화 면사포류 주류 장유 설탕 성냥 약품 등의 수입이었다. 청국상인들 청국상사의 주요업종은 서구산 면직물 중국산견직물 등의 수입으로 한국산 우피 미곡 등과 교환하는 무역업외 도소매업을 하였다.

독일계 무역상사인 세창양행는 무역업을 최초로 진출하여 바늘 면도칼 물감 의 약품 약품등의 생필품과 화약판매업 은행업 광산업 해운업까지 하여 위세를 떨쳤다. 미국계 타운센드 상사는 선박 화약 등의 수입판매에 주력하였다. 이밖에도 영국계 베네트가 설립한 광창양행과 러시아 동보기선회사의 대리점 으로 링거회사가 설립 한국산 미곡을 수출하였다.

무역이 성행한 인천항은 1893년에서 1907년까지 한국무역총액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국제항으로 성장하였다. 인천항은 1890년부터 쌀의 수출이 개시된이래 정미업이 발흥되었고 미곡 검사 기준의 설정과 미두취인소가 설치 미곡수출항으로 발전되었다.

외국과의 통상이 개시된 이래 한국 미곡의 수출항인 인천항은 대중무역의 요충지인것은 물론 1911년까지 한국무역의 50% 이상이 인천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화려한 인천항도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경부 경의선이 완성되는 등 교통수단의 발달에 밀려 그 역활이 감소되었다.

개항후의 항만업무

항만은 수출할 화물을 모아 선적할 때까지 보관하고 목적지별로 구분하여 선박에 적재하는 일련의 작업, 수입하는 화물을 선박으로 부터 내려 보관하고 화주별로 분류 배송하는 일련의 작업,  수량을 대조하고 중량 및 용적을 검사하는 작업이 있고 내국화물을 외국화물로 교체하는 작업등이 있다.

인천항은 개항 당시 화물의 운송, 보관 및 하역은 수출입업자가 겸업을 하였다. 그러므로 외국상인 및 외국상인과 거래하는 우리나라 상인 또는 그 위탁을 받은자가 직접 하역을 하였다.

종래에 객주 및 여객들은 상품의 운반 및 보관업무를 담당하였으나 전문업은 아니었다. 그들은 화주를 위한 창고업, 위탁판매업, 여숙업, 금융업 및 운송 취급업 등의 광범위한 영업을 경영한 상업부문중 유력한 계층이었다. 이러한 객주의 운송취급영업은 옛부터 관습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즉, 오래전부터 하역업자로서의 객주는 수륙운송의 제업을 경영하였는데 하역은 십장 이라는 인솔자가 담군을 편성하여 수요에 응하였다. 그리고 해운업에 종사하는자들도 평소 부주 선두 및 노무자를 준비하고 있다가 화주 또는 운송업자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출전 : 인천항운노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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