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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7 (목)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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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32      
[현대] 대한민국 문화2-예술 문화보존 (민족)
대한민국(문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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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술

[문학]

1945년 8·15광복은 잃었던 모국어를 되찾게 해주고 자유의 지평을 열어 아무런 제약 없이 우리의 글과 말로써 표현하고 제시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해 주었다. 바야흐로 우리 나라의 문학은 ‘해방문학’의 시기를 맞아 민족적 자각과 함께 우리의 문학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문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는 각종 문예지와 종합지 등이 쏟아져 나왔는데, ≪백민 白民≫·≪신문예 新文藝≫·≪대조 大潮≫·≪문예 文藝≫·≪예술조선 藝術朝鮮≫·≪신세대 新世代≫·≪새한민보≫·≪신문학 新文學≫·≪우리문학≫·≪인민≫·≪대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분단은 광복과 건국기의 문학마저 이념적으로 대립시켜 우리 문단은 좌익문학과 우익문학으로 분열되었다. 1946년 좌익계열이 ‘조선문학가동맹’을 발족시킨 데 대하여 우익계열에서는 ‘조선문필가협회’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우익 문학단체가 양립하였고, 이념의 갈등이 문학논쟁으로 나타나서 김동리(金東里)·조연현(趙演鉉) 등 순수문학파와 김동석(金東錫) 등 프로문학파와의 논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그 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식에 입각하였던 좌익문인은 사라지고 순수문학이 한국문학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곧 세력다툼으로 분열, 조선중앙문화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가 대립하였다. 이는 1920년대 등장한 선배들과 일제 말에 신인으로 등장한 청년문인들과의 세대적인 문단대립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유치환(柳致環)·서정주(徐廷柱)·박두진(朴斗鎭)·조지훈(趙芝薰)·박목월(朴木月) 등이 시의 순수성을 고수하면서 광복 후의 시단을 다졌으며, 채만식(蔡萬植)·김동리·황순원(黃順元)·염상섭(廉想涉)·계용묵(桂鎔默) 등이 특히 많은 활동을 하였다. 몇몇 순수작가를 제외한 이들의 작품에는 당시의 사회적 혼란, 남북분단의 현실, 그리고 가난한 생활의 모습을 표현되고 있었다.

이 밖에 이병기(李秉岐)·이은상(李殷相)을 필두로 한 현대시조문학과 유치진(柳致眞)·오영진(吳泳鎭) 등의 희곡문학이 정립기를 맞았으나 수필·아동·번역문학 등은 대체로 부진하였다.

그 뒤 6·25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의 문학은 이러한 민족의 비극을 반영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때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문학은 주로 ‘전쟁문학’에 포함되며, 특히 1953년 휴전 후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주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비롯한 종군문인들에 의하여 주도된 전쟁참여문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전쟁 전의 순수문학과 다른 점은 해방문단에 있어서의 좌우익의 문제가 주로 이념적 논쟁형식으로만 나타난 데 대하여, 전쟁 당시와 그 뒤의 문학은 실제로 전쟁의 비참한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장용학(張龍鶴)의 〈요한시집〉·〈상립신화 喪笠新話〉·〈현대의 야(野)〉, 이범선(李範宣)의 〈학마을 사람들〉, 하근찬(河瑾燦)의 〈수난이대 受難二代〉, 조지훈의 시 〈풍류병영 風流兵營〉, 김동리의 〈밀다원시대 密茶苑時代〉 및 〈흥남철수〉, 강용준(姜龍俊)의 〈철조망〉, 황순원의 〈학〉, 안수길(安壽吉)의 〈제3인간형〉 등은 모두 동족상잔의 참상을 표출한 작품들이다.

한편, 1954년 예술원(藝術院)이 발족하여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딛고 문학은 새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문예 文藝≫를 비롯하여 ≪현대문학≫·≪자유문학≫·≪사상계≫·≪문학예술≫ 등 각종 문예지가 출현하여 신인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그 결과 문단은 양적으로 풍요로워졌으며 작품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시조문학·평론문학·희곡문학 및 수필문학 등이 부흥기를 맞이하여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4·19혁명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겪으면서 현실참여의 문제가 문단에 대두되어, 현실참여문학론이 소설이나 비평문학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시에 있어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순수론과 참여론이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비록, 이 두 논의가 어떤 결말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당시 대한민국 문학에 대한 반성과 자각의 계기를 형성하게 되어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1962년 ≪사상계≫는 ‘전통논의’를 전개하여 반성 없이 흘러온 우리 문학의 전통문제를 근본적으로 논의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1960년대 말부터는 전통적 서정과 현실참여의 방향이 전환기적 요소를 이루면서 범문단적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현실참여문학운동은 반체제사상과 결탁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번져갔다.

이 같은 조류는 백낙청(白樂晴)·염무웅(廉武雄)·구중서(具仲書) 등에 의하여 그 운동이 확대되고, 시인 김수영(金洙暎)·신동엽(申東曄)에서 김규동(金奎東)·신경림(申庚林) 등으로 이어지면서 1970년대 이후까지 각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 및 1970년대까지의 문학의 주류는 참여문학이 되면서 계속 순수문학과의 논쟁이 거듭된 셈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각 문예지의 추천제와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하여 유능한 신인들이 배출되어 문학의 황금기를 연상할 만큼 활발한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다. 시에 있어서는 ≪60년대사화집≫·≪현대시≫·≪현실≫·≪시단≫·≪여류시≫·≪시와 시론≫·≪신춘시≫ 등 많은 동인지가 쏟아져 나와 시작활동이 활발하였고, 시의 난해성문제와 더불어 시론(詩論)이 비판적으로 대두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토착어의 구사가 현저해졌으며, 김종문(金宗文)의 〈서울·베트남의 시초(詩抄)〉, 김해성(金海星)의 〈영산강〉, 신동엽의 〈금강〉 등 장시(長詩)가 등장하였고, 시집 출판붐이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민중시·해체시도 등장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1960년 이후 출생한 ‘신세대’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중산층적 감각과 교양으로 자라난 첫 세대로서 이전의 궁핍을 체험한 세대와는 확연한 차별성을 지닌다.

한편, 소설에 있어서는 과거와는 달리 뚜렷한 흐름이 드러나지 않고 주제와 표현이 다양성을 보이는 등 극도의 개별화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장편소설이 양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김의정(金義貞)의 〈인간에의 길〉, 김용성(金容誠)의 〈잃은 자와 찾은 자〉, 강석근(姜錫根)의 〈한국인〉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작가들로는 남정현(南廷賢)·천승세(千勝世)·박용숙(朴容淑)·송상옥(宋相玉)·강용준(姜龍俊)·김의정·김용성·유현종(劉賢鍾)·김승옥(金承鈺)·정을병(鄭乙炳)·서정인(徐廷仁)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이청준(李淸俊)·이문구(李文求)·신상웅(辛相雄)·최인호(崔仁浩)·황석영(黃晳暎)·오찬식(吳贊植)·박완서(朴婉緖)·조해일(趙海一) 등이 1980년대에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박경리(朴景利)의 〈토지〉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 등 대하소설이 출간되어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으나 1990년대에는 신세대적인 감수성이 번득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통하여 세대교체가 논의될 뿐 대작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1960년대 이후는 시조문학·수필문학·희곡문학 등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며, 아동문학과 번역문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약 2,000여 명에 달하는데, 문단에 등록되지 않은 문인들을 더할 경우 그 총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미술]

광복 후 미술계는 일제하 식민지잔재의 불식과 독립국으로서의 민족미술의 재건이라는 커다란 쟁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 3년 동안 좌·우세력의 격렬한 대립으로 미술계도 1945년 10월의 ‘해방기념전’ 이후 좌·우익의 미술단체로 갈려 치열한 이데올로기논쟁으로 혼란을 거듭하였다.

정부수립 전인 1947년 이봉상(李鳳商)·장발(張勃)·김인승(金仁承) 등 온건한 사실파의 미술문화협회를 비롯하여 새로운 조형미술을 지향하는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미술단체 등 여러 조직이 발족하였으나, 정부수립 후인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가 창설되어 사실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 이후 전국적 규모의 전시체제가 마련되었다.

1950년 6·25전쟁은 납북·월북 또는 월남으로 인해 남북작가의 인적 구성에 변화를 야기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현대미술과의 접촉이 활발해져 추상미술이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미술정보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오게 되어 새로운 조형이념의 수용이 가능해졌다.

한편,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로 양분된 세력권 형성에 초연하려는 일부 중견작가들에 의한 순수한 조형이념의 결속과, 광복 후 성장한 신진작가들에 의한 기성 미학에의 도전의식이 1950년대 후반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모던아트협회·창작미협·현대미협·신조형파 등이 1957년 분명한 조형이념 아래 결성되었다.

각 유파의 단체전·그룹전·개인전 등이 활발해졌으며, 프랑스·미국 등지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처럼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의 미술교육도 궤도에 올라 더욱 활기를 띠게 되는 한편, 신진작가에 의하여 세력화된 국전 반대의 움직임은 이른바 ‘현대미술운동’으로 확대, 심화되어 갔다.

이 시기의 주요 그룹전으로는 ‘모던아트전’·‘창작미술전’·‘신조형파전’ 등을 꼽을 수 있고 ,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은 개별적인 그룹활동과 개인활동을 하나의 공동의식으로 묶어주는 추진체로서 차차 현대미술운동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정형의 추상미술이 현대미술의 주류로 부상하여, ‘현대작가초대전’을 비롯하여 ‘문화자유초대전’·‘신인예술상미술전’·‘액추얼전’ 등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비정형이라는 특정 경향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형식을 이루게 되었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극복방법이 1967년과 1968년을 통하여 모색되었으니, ‘청년작가연립전’이 그것이었다. 또한, 1968년부터 국전이 미술계의 전체적인 경향을 참작하여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상과 비구상의 두 경향으로 분리되어 실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70년대 후반 전시대적인 정신을 청산하고 회화를 평면으로 되돌려보려는 논리의 추구가 주요 관심사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전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상업화랑의 증가, 민전(民展)의 대두, 그룹의 난립 등으로 발표기회와 무대 및 방식이 다원화되고 미술개념이 변화하여 창작내용이 다양화되는 등, 1970년대의 미술환경이 크게 변화함으로써 그 목적과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 화단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던 작가로는 서양화 부문에서 유영국(劉永國)·김영주(金永周)·권옥연(權玉淵)·변종하(卞鍾夏)·박석호(朴錫鎬)·전성우(全盛雨)·박서보(朴栖甫)·김서봉(金瑞鳳)·윤명로(尹明老) 등이 있으며, 전통적 동양화를 지향하는 이상범(李象範)·장우성(張遇聖)·배렴(裵濂)·노수현(盧壽鉉), 그리고 동양화에 새로운 재료나 표현기법으로 현대적인 조형을 받아들여 구미의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이응로(李應魯)·김기창(金基昶)·서세옥(徐世鈺)·박노수(朴魯壽)·천경자(千鏡子) 등이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광주비엔날레 등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1997년 강익중은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백남준에 이어 세계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 미술인으로 떠올랐다.

조각에 있어서는 1950년대에 순수창작조각 외 모뉴망조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자가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추상적 조형의 추구가 크게 대두되었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금속재가 조각에 이용되어 조각개념을 혁신시켰다. 1960년대 후반 장르개념을 초월한 대담한 실험들이 추진되었고, 또한 조각가그룹이 잇따라 등장하고 신진조각가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한편, 각 분야에서 민족주의운동의 발흥과 함께, ‘민속공예전’·‘이조백자전’·‘조선문방구·목공예전’·‘조선민화전(朝鮮民畵展)’ 등을 통하여 전통미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1970년대의 조각은 미니멀리즘적 추상조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1980년대의 것은 새로운 형상조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1990년대의 조각은 이러한 분류조차 무의미할개 군정도로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음악]

(1) 국악

국악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궁중음악은 중국 계통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 그리고 우리 나라 고유의 향악(鄕樂)으로 구분할 수 있고, 민속음악은 대부분 조선왕조 후기에 발달한 민간음악이다. 아악은 오늘날 봄·가을로 거행되는 석전(釋奠) 제향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고, 당악은 완전히 한국음악으로 동화되었다.

향악은 지난 날의 우리 나라 전통을 이어온 궁중음악이 그 주류를 이루는데, 현재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가곡(歌曲)·가사(歌詞)·대취타(大吹打) 등이 있다. 민속음악으로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판소리와 시나위·산조·농악 등을 비롯하여, 서민들이 불러오던 잡가와 각 지방의 고유한 민요를 들 수 있는데, 판소리, 거문고산조·가야금산조 및 병창, 서도소리·경기민요 등이 있고, 이 밖에 불교음악으로서 범패(梵唄)가 있다.

광복 이후 외래음악의 범람 속에서 국악은 그저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으나, 1951년 국립국악원이 정식으로 발족함으로써, 연구와 연주활동의 태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의 국악교육은 1954년에 설치한 덕성여자대학 국악과가 처음이나, 1956년에 곧 폐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서서히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국악교육이 확산되어, 현재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울대학교, 한양대학교, 전주 비사벌국악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추계예술대학, 국악고등학교 등에서 국악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연주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물론, 창작에 있어서 외래음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국악단체로서 국립창극단·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등이 있고, 학술단체로서 한국국악학회가 있다.

(2) 서양음악

서양음악이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3세기경으로 추정되나, 본격적인 서양음악이론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양악은 1885년 아펜젤러(Appenzeller,A.) 등 선교사의 기독교 선교에 따라 찬송가가 소개되면서, 그리고 1900년 군악대가 창설되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서양음악인 창가(唱歌)를 학교교육에서 가르친 것은 1909년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의해서였다. 양악의 선구자들로서 김인식(金仁湜)·이상준(李尙俊)·김영환(金永煥)·홍영후(洪永厚)·현제명(玄濟明)·채동선(蔡東鮮)·안익태(安益泰)·이인선(李寅善)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이 밖에 독일인 에케르트(Eckert,F.)는 우리 나라 양악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광복 이후 서양음악이 널리 대중화되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1962년 ‘서울국제음악제’가 개최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서양음악이 현대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고려교향악단·서울교향악단·해군정훈악대·방송교향악단·국립교향악단·국제오페라사·국립오페라단·김자경(金慈璟)오페라단 등과 이화여자대학교·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경희대학교 등의 음악대학을 통하여 서양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안익태·윤이상(尹伊桑)·김영욱(金永旭)·정명훈(鄭明勳)·정경화(鄭京和) 등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음악가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다. 또한, 레코드와 라디오·텔레비전 등 대중전달매체의 보급과 함께 대중가요도 크게 성장하였다.

[연극]

광복과 함께 연극계는 다시 소생하여 역사상 처음 누리는 자유로운 활동기를 맞아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극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상황과 마찬가지로 연극계도 좌·우익으로 양분되는 시련을 치른 끝에, 1948년 정부수립 후 민족극 수립을 표방한 극예술협회, 민족진영의 총집결체인 한국무대예술원이 발족되었고, 1950년 대초 국립극장이 설립되어 그 전속극단으로 신협(新協)이 등장, 〈원술랑 元述郎〉·〈뇌우 雷雨〉 등을 공연하였다.

6·25전쟁 이후 유치진·김영수(金永壽)·오영진 등의 희곡이 많이 공연되었고, 신협을 중심으로 미국 현대극이 점차 활기차게 수입되었다. 또한, 대학생이 중심이 된 제작극회(制作劇會)는 오스본(Osborne,J.)의 ‘앵그리 영맨’ 계통의 작품을 소개하는 한편, 창작극을 통하여 본격적인 소극장운동을 꾀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실험극장(實驗劇場)에 이어 산하(山河)·민중극장·자유극장·광장(廣場)·가교(架橋) 등 동인제 극단시대가 전개되었고, 까페 떼아트르는 전위극과 창작극·전통극을 배합하여 소극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극단뿐만 아니라 오태석(吳泰錫)·차범석(車凡錫)·임희재(任熙宰)·이용찬(李容燦)·하유상(河有祥)·이근삼(李根三) 등의 극작가와 이진순(李眞淳)·오사량(吳史良)·허규(許圭)·김정옥(金正鈺)·이승규(李昇珪) 등 연출가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는 실험극장의 〈에쿠우스〉와 추송웅(秋松雄)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계기로 연극관객은 크게 증가하였다.

한편, 연극이 다양화되어 전통극의 현대적 계승을 통한 민족극이 모색되고, 동양적인 차원에서의 아르토류의 실험극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오태석의 〈초분 草墳〉·〈태 胎〉 같은 작품들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공연극장의 확대와 극단·관객·공연횟수의 증가 등 연극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고, 해외교류 또한 빈번하였다.

현재 서울에만도 대소 극단의 수가 50여 개를 넘으며, 1970년 중반부터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탈춤(가면극)·꼭두각시놀음(인형극) 등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민속가면극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1990년대의 연극은 젊은 연극인들이 약진하는 가운데 기업형 대형연극이 관객 몰이에 나섰고, ‘저질연극’의 시비도 있었다. 1997년에는 우리 나라 연극계가 세계화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으며, 세계연극제가 26개 국 47개 팀의 참여 아래 1997년 9월 1일부터 45일 동안 113편의 작품으로 개최되었던 것이다.

[영화]

광복 직후 광복영화들이 많이 나왔고 당시 좌·우익의 사상적 혼란과 분단의 고착이라는 사회적 상황과 관련, 반공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파시 波市〉·〈마음의 고향〉 등 비교적 예술성이 높은 본격적인 작품이 나왔으며,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영화인들은 〈태양의 거리〉·〈낙동강〉·〈고향의 등불〉 등을 제작하였고, 신상옥(申相玉)은 〈출격명령〉 등의 전쟁영화를 만들어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관객층의 대폭적인 증가, 제작편수의 증가, 작품수준의 향상, 경향의 다양화, 영화인의 세대교체 등의 현상을 보이면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규환(李圭煥)의 〈춘향전〉은 이러한 현상의 출발점이었으며, 이병일(李炳逸)의 풍자희극 〈시집가는 날〉은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국제영화제라고 할 수 있는 제3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희극상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성이 강한 예술작품에의 의욕은 이 무렵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유현목(兪賢穆)의 〈오발탄〉, 김기영(金綺泳)의 〈10대의 반항〉, 신상옥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밖에도 멜로드라마 경향의 작품, 스릴러·액션영화 등 여러 가지 영화형식에서 문제성을 띤 작품들이 나왔다.

한편, 1950년대에 와서 대한민국에도 시네마스코프에 의한 영화가 출현하였으니 이강천(李康天)의 〈생명〉이 그것이다. 1960년대 들어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강력한 검열이 시작되면서 1950년대와 같은 문제작은 퇴색되어 갔지만, 그래도 주제의식이나 영상미학을 담으려는 일련의 작품이 1960년대 전반까지는 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1950년대의 리얼리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의식이나 인간적·사회적 진실감 같은 것은 퇴색하고, 그 대신 무난한 주제에 기교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였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경제성장과 함께 텔레비전시대가 본격화되고 각종 레저가 보급됨으로써 사양화하였다.

또, 등록에서 허가제로의 영화법 개정과 유신체제하의 강화된 검열 속에서 영화사는 정비되었으나, 한국영화의 고유한 정신(esprit)은 고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수용(金洙容)·이장호(李長鎬)·김호선(金鎬善) 등 전후 감독들이 활약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영화계는 영화정책의 지양과 함께 질적인 변모를 보여 강렬한 작가의식의 회복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해외영화제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하여 점차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987년에는 임권택(林權澤)의 〈씨받이〉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무대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IMF 구제금융 한파와 스크린쿼터제 폐지논쟁, 직배사의 독점가속화 등으로 한국영화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1997년 한국영화의 제작편수는 60편을 밑돌아 침체를 면치 못하였으나, 흥행기록면에서는 관객동원 10만 명을 넘긴 작품 수가 14편에 이르러 비교적 선전하기도 하였다.

[무용]

무용은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독립하여 존재한 것이 아니고, 항상 음악과 함께 존재하여 음악의 곡명이 곧 무용의 명칭인 것이 우리 무용의 특색이었다. 무용에 있어서도 음악에서와 같이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와 민속무용, 불교의식무용인 작법(作法)으로 대별된다.

정재에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가 있는데, 당악정재는 현재 포구락(抛毬樂)만이 전해지고 있으며, 향악정재도 처용무·무고(舞鼓)·검무·학무 등 몇 편만이 전하고 있다. 민속무용은 흔히 고전무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현재 승무와 각 지방의 검무·무무(巫舞)·소고춤·장구춤·한량무·강강술래·살풀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궁중무용이 구성의 규모가 크고 형식미를 갖추어 화려한 의상에 아름다운 노래를 수반하고 우아한 데 비하여 민속춤은 소박하고 약동미가 있다. 이 밖에 불교의식무로서 나비춤·바라춤·법고춤 등이 있다.

한편, 20세기초 서양무용이 도입되면서 무대상연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되고, 새로운 형태로 창안된 한국무용이 서서히 선보이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남북분단과 관련하여 무용계에도 무용의 해석방법·표현방법을 둘러싸고 커다란 대립이 나타났다. 그 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1962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공연을 하였고 1969년까지 11회에 걸친 무용공연을 하였다.

1973년 국립극장 준공기념공연을 계기로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 발족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각 30여 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무용계의 양대 지주로서 무용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리틀엔젤스’의 활동과 1961년 창립된 한국무용협회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19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용공연과 무용이론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앞으로 대한민국 무용의 부흥기를 맞이할 전망이다. 1990년대에는 30대 젊은 안무가들을 중심으로 한 왕성한 창작 활동이 무대를 주도하였으며, 직업발레단의 외국무대 진출도 이루어졌다.

6. 문화보존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계승, 발전하여 온 독창적이고 고유한 우리 문화는 일제침략으로 역사적 자존심을 손상당하고 민족문화유산이 일제식민지통치와 6·25전쟁으로 인하여 수없이 파괴, 훼손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공업화·서구화의 급격한 진전으로 인한 외래 서구문화에의 경도는 일시적이나마 우리 문화의 전통을 무시, 파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더불어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그 보존에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형·무형을 막론하고 민족이 남긴 역사·학술·예술·국민생활 등의 분야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국가적으로 보호조처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가에서 지정하는 국가문화재와 지방행정관청에서 지정하는 지방문화재의 구분이 있으며, 국가문화재는 다시 국보·보물·중요무형문화재·사적·명승·천연기념물·중요민속자료로 분류된다.

1988년 말에는 국가지정문화재 2,133개, 지방문화재 2,374개였는데, 1995년 3월 1일에는개 군국가지정문화재가 2,491개, 지방문화재가 2,935개가 되었다. 그 뒤 1996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가 2,544개나 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책임 아래 보호를 받으며, 국가소유는 물론 개인소유일지라도 엄격한 감독을 받게 된다. 지방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향토문화 보존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각 시·도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한 것으로서, 그 보호관리는 각 시·도의 책임 아래 행하고, 지방문화재 가운데서 국유 또는 공유재산인 것은 국고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경비로 보호된다. 이러한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도 현상변경 또는 국외수출이 금지되는 것이 있다.

유형문화재는 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제작물이어서 그들의 얼과 정성, 그리고 우수한 예술성과 기술, 당시의 신앙적 배경 등까지도 직접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즉 문화사를 물적 증거로 알게 해주는 문화사료이다.

이 가운데 1988년에는 국보 246개, 보물 974개, 사적 322개가 지정, 보호되고 있었으며, 1995년 3월 1일 현재 국보는 282개, 보물은 1,210개, 사적은 386개가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형문화재는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과 그 밖의 신앙의례·민속놀이·음식요리 등에서 1988년 총 89가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었고, 1995년에는 총 94가지가 지정, 보호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는 그 자체가 무형이므로 그 기능보유자를 보호하는 한편, 그 기능을 다른 사람에게 전승시키도록 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는 1988년 12월 지정 178명이며, 중요무형문화재의 전승현황을 보면 총 76개 종목에 전수자 1,536명이 있었다.

또한, 의례자료·신앙자료·생업자료·의식주자료·예능오락자료·교통운반자료 가운데 1988년 218종류가 중요민속자료로 되어 있었으나, 1995년 현재는 225종류가 중요민속자료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접하면 화학적·물리적·생물학적 손상을 받아 쉽게 변형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의 보존에 관련된 학문으로 이른바 문화재보존과학이 대두되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1980년 말에는 경복궁·창경궁 등 조선시대 왕궁의 복원·정비에 이어 한강 유역에 있는 신석기시대 취락주거지유적과 백제 도읍지 등의 사적공원화를 추진하였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확장되고, 경기도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신축되어 문화예술의 보존에 더욱 이바지하였다. 1990년대 말 현재 국립박물관 7개, 공립박물관 7개, 대학박물관 63개, 그 밖에 사설박물관 13개 등이 있다.

<황성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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