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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7 (목) 16:08
분 류 사전3
ㆍ조회: 1498      
[현대] 남북협상 (이만열)
남북협상의 배경ㆍ진행과정과 역사적 의의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

I. 머리말

올해 4월은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들이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한 지 어언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하면서도 50여년전 임정의 대표들이 분단정부를 막고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거의 침묵을 지켜 왔다. 그것은 그 동안의 사회적 분위기가 남북협상의 진의와 충정을 무시한 채 그것이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식으로 평가한 측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극단적인 주장은 백범의 그같은 결단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였다는,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흑백논리를 앞세운 극우세력의 주장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협상 반세기를 맞아 우리는 이 글에서 해방정국의 추이와, 조국의 완전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력한 백범의 통일정부 건설노선을 살펴보고, 그것이 주는 역사적 의의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직도 남북협상에 참여하신 사계의 원로들이 생존해 계신 가운데, 협상이 이뤄지던 당시 초등학교 학생으로 있었던 필자가 역사를 공부한다는 이유로 이런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된 것은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당시의 자료를 충실히 반영하여 남북협상의 진정한 의도가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분단조국에 주는 메시지가 어떠한 것인가, 그 소리를 듣는 데에 역점을 두고자 한다. 여러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삼가 기대한다.

Ⅱ.남북협상의 배경

1) 해방정국과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0년대에는 해방을 예견하며 민족운동의 질적 전환을 가져와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사회주의자들도 무장투쟁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활용해보지 못하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소의 권력정치에 희생되어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지 못하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게 되었다.

해방 후, 먼저 건준 인공 등 공산주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통일조직이 모색되고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소외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공산주의 세력은 미 소 분할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채 성급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국내 정국은 좌익의 일방적 주도에서 변화하여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좌익의 인민공화국에 대응한 임정봉대가 주장되었다. 좌 우는 이같이 해방공간에서 대립적으로 성장하였다.

해방공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승리한 연합국들, 특히 주도적 위치로 부상한 미국이 패전국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통치문제를 중심으로 전후 세계질서를 구상하고 있던 정책에서 한국도 예외일 수 없었던 점이라 할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문제가 구상되었는데, 이는 루즈벨트 미국 행정부의 전후 식민지 처리에 대한 정책의 부산물이기도 하였다. 피식민지 국가들의 자치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그들의 독립을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전제에서 구상된 듯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는 기실 한국이 극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어느 일국이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상된 것이었다.

한국의 해방이 국제적으로 처음 약속된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의 선언에 표현된 'in due course'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도 '신탁통치'라는 절차가 이미 구상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외상회의는 전후 세계문제와 함께 한반도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구상해온 한반도에 대한 처리문제를 미 영 중 소 4국에 의한 최고 5년동안의 신탁통치안으로 내놓고, 필요하면 4개국간의 협정으로 다시 5년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은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핵심으로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미국측이 소련이 제시한 문구에 약간 수정만 가해 통과시켜 '先 임시정부 수립, 後 신탁통치'에 합의하였다. 이들이 이처럼 쉽게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소련이 이 안을 통해 자국이익을 반영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

① 한국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미`소점령군사령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諸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한다.

③ 한국민주임시정부와 한국의 민주적 제단체의 참가아래 ㈀한국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 ㈁ 민주적 자치의 발전 ㈂한국의 국가적 독립의 달성을 협력`지원하는 방법 등을 작성하는 것도 공동위원회의 과제다.

공동위원회는 한국임시정부와의 협의아래 미 영 중 소 4대국의 5년간에 걸친 한국신탁통치안을 작성하여 4대국 공동심의에 회부한다.

④ 미 소점령군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회의를 2주안에 개최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협정은 처음부터 한국민의 즉각적인 반대에 봉착하였다. 좌익측이 뒷날 소련의 지시로 반탁에서 찬탁으로 태도를 돌변하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은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반탁운동 세력이 모두 공통된 성격을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도층 상당수가 친일파였다는 약점을 상쇄시키려는 정치적 명분으로 반탁운동을 펼친 한민당과 김구세력의 반탁운동에는 차이가 있었다.

한민당 세력은 반탁을 하되 반미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김구세력은 신탁을 강요하는 어떠한 세력도 투쟁의 상대로 삼았다. 결국 이러한 시국관의 차이, 반탁운동의 차이는 뒷날 單政論과 南北協商論으로 갈라지는 기본 요인이 된다.

이같은 한국인의 반탁운동은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신탁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소집된 두차례에 걸친 미 소 공동위원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결국 미 소공위를 무위로 만들었다.

2)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모스크바 협정에 대한 좌우의 치열한 대결이 전개되는 가운데 미 소 점령군 사이에 미 소공위 예비회담이 46년 1월 16일 개최되었다. 미 소 양측은 의안 심의 초두부터 상당히 다른 시각을 보였다. 미국측은 38도선의 철폐 및 전국을 하나의 행정 경제 단위로 재건하는 문제를 토의하기를 원했고 소련측은 매우 협소한 측면에서 경제 및 행정문제에 대해 토의하기를 원하였다. 이같은 관점 차이는 회의 진행 전과정에 미쳐 예비회담이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예비회담의 합의에 따라 제 1차 미 소공위가 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공위는 처음부터 공위가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협의할 대상인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의 자격을 놓고 대립하였다.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정당 사회단체를 협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한데 반해, 미국은 자신의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우익을 협의의 대상에 참가시키기 위해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소련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양측간에 절충이 이루어져 '공동성명 제 5호'가 작성되었다. 좌익은 이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우익은 여기에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을 들어 서명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우익측의 서명 유도를 위해 신탁통치에 대해 찬반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자 우익도 공위 참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소련측이 '공동성명 제 5호'에 서명했다 해도 반탁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협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미국도 소련의 이러한 주장을 수락할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공위는 더 이상 협상의 진전을 보기 어렵게 되어 결국 1946년 5월 6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3) 남북한의 정국

소련군의 북한 점령에서부터 모스크바 3상회의 때까지 북한에는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연립하여 45년 10월 조만식을 수반으로 5도 행정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시기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자들은 조선공산당 北朝鮮分局을 세웠고, 조만식을 중심으로한 우익민족주의 세력은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소련 군정은 반탁의 태도를 취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조만식을 연금시켰다.

이에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결정적으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들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46년 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신민당을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을 결성했다.(46년 8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칭된다. 이렇게 신탁통치 문제는 남쪽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을, 북쪽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과는 달리, 해방정국에서 남한에는 혼란이 거듭되었다. 남조선민주의원을 최고자문기관으로 두고 있던 미 군정은 제1차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북한과 소련의 공세에 대응하면서 남한 정치세력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인에 의한 자문입법기구를 구상하였다.

미 군정은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 결집의 필요성을 느끼고 김구와 이승만을 배제, 김규식과 여운형이 제휴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서둘렀다. 말하자면 정계통합이라 할 좌우합적위원회의 결성이다. 김규식(우)과 여운형(좌)을 주석으로 하여 전개된 좌우합작운동은 '합작 7원칙에 합의'(46. 10)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나, 한민당과 조선공산당 등 극우와 극좌 세력의 부정적 태도와 방해로 좌초되었다.

미군정은 중간파의 입지를 계속 마련해주고 그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통합을 시도하고자 46년 12월 12일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48.5.29)을 설립하고 김규식을 의장으로 밀었으나, 민선입법위원에 우익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게 됨으로 좌우통합의 균형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편 제 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미 소의 정치 이념이 근본적으로 상이하여 한국에서도 이해관계가 타협이 어려울 것이라고 파악하여 46년 6월 3일 '정읍발언'을 통해 단정수립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을 정치핵심으로부터 배제하려는 미군정의 기도가 계속되자 이승만은 12월 2일 도미하여 미국정부를 상대로 자신의 단정수립론이 소련과의 협력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하는 것이며 반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여론을 탐색하였다. 그의 도미 활동은 당시에는 전폭적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나 미국내에 점증되어 있던 반공분위기와 상승하면서 서서히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반탁운동과 대한독립촉성회(獨促) 운동에서 외형적으로 이승만과 협력관계에 있던 김구는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계기로 노선상의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승만이 단정론을 계속 펼치면서 단정수립을 위한 민족통일통본부(民統)을 결성하게 되자 양자 사이에는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하게 되었다.

1947년 1월 백범은 임정계를 중심으로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이끌며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47년 6월 반탁투위가 미소공위에 참여하려 하자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반탁독립노선을 견지하던 백범은 단정론이 대두되면서부터는 그 토대 위에서 통일독립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게 되었다. 뒤에서 볼 백범의 남북협상은 바로 반탁독립노선과 통일독립노선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4) 제2차 미 소공동위원회

남북한에 상이한 정치상황이 전개되자, 미군정 최고 결정자인 하지는 한국문제 해결위해 미 소 정부가 즉각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국은 내란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였다. 미국정부는 소련외무성과 접촉, 제 2차 공동위원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때쯤이면 미국의 세계정책이 변화되고 있었다.

미국은 핵무기를 갖게 된 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 선언하였다. 미소관계가 이렇게 전개되어 갔던 만큼 1947년 5월 21일에 개최된 제 2차 미 소공동위원회가 원만히 진행되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한국의 통일보다는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로 확보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정당 사회단체의 공위참가 신청을 두고 미 소간에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6월 12일 '공동성명 제 12호'가 공표되어, 소련측은 이전에 신탁통치에 반대했어도 공동성명 제 5호에 서명한 바 있는 우익정당 단체를 협의대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가 북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공위의 협의대상이 되었다.

불만을 가졌으나 문제를 공식화하지 못하고 있던 소련측은 6월 23일 서울 각지에서 반탁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 주도 정당들을 공위와의 협의대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정당은 우익과 중간파의 중요 정당을 망라한 것으로 미국측으로서는 공위에서 주도권 상실을 가져오게 될 이같은 소련측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듭 제시된 타개방안은 더 이상 공위를 계속시킬 수 있는 묘안이 될 수 없었다. 공위는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제2차 공위는 결렬을 예상한 회담이었기 때문에 미 소 양측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미 소 간에 정부차원에서 접촉이 있었다하나 그것은 양국이 한국문제에서 손을 떼는 수순에 불과하였다. 공위의 결렬은 신탁통치안의 공식적인 폐기를 의미하였지만, 한국문제를 UN에 이관시켜 결과적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재래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5)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트루만 독트린'의 선포 이후 미 소 냉전체제가 굳어지면서 더 이상 한국문제의 해결이 미 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해결될 수 없게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고자 하여 제 3차 유엔총회의 의제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한국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된 미소 양국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당시로서는 유엔의 역할이란 것도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양국 모두 초강대국이었고 또 한국에서 그들의 이익을 각기 추구하고 있던 상황에서, 유엔이 한반도 안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측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후 실제 토의과정에서부터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은 미국이 "모스크바 협정에 의거하여 이전 방침을 발전시켜 이를 미 소 영 중 각국정부의 공동심의에 회부시키지 않고 총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결코 온당치 못한 행동을 은폐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엔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미국은 9월 21일 UN총회 운영위원회를 통해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12대 2로 가결시켰다.

총회 제 1위원회가 10월 28일 한국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하기전, 소련대표는 한국민들에게 그들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기회를 주자며 1948년 초까지 미 소 양군을 철수하자는 안건을 제출하였다. 반면 미국측은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한국의 독립이 회복되어야 하며 그후 한국으로부터 모든 점령군이 철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측이 先외군철수 後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비하여, 미국은 先정부수립 後외군철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또 소련이 남북한으로부터 선출된 대표들을 초청하여 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고 주장하자, 여기에 쉽게 반대할 수 없었던 미국측은 남북한 대표선출을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으로 대응하였다. 10월 30일 총회 제 1 위원회는 소련의 제의를 35대 6으로 부결시키고 미국의 제의를 41대 0으로 가결시켜, 이 수정안은 47년 11월 14일 몇가지 부문에 수정을 거쳐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43대 9(기권 6)로 가결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및 우크라이나의 9개국 대표들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n on Korea : UNTCOK)을 설치하고, 이 위원단이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한국에서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및 비밀투표의 원칙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고, 선거 후 가급적 빨리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며, 정부가 남북한의 군정당국으로부터 정부의 여러 기능을 이양받고, 자체의 국방군을 조직하며, 가급적 빨리 가능하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이 철수하도록 조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소련의 협조 없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 실시'라는 규정은 남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유엔의 결의에 승복할 수 없었다. 1948년 1월 7일 서울에 서울에 도착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국제호텔에 본부를 두고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를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소련 및 북한은 임시위원단의 38도선 이북의 입경을 거부하였다.(48년 1월 23일) 그러지 않아도 남한만의 단선을 내심 꾀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입북거부로 단선을 실행할 수 있는 명분과 호기를 얻은 셈이었다. 이 때 미국은 남한만의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임시위원단 위원중 영연방에 속한 3국(호주 캐나다 인도)과 시리아 대표들은 남한만의 선거가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한다는 이유로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유엔으로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통하여 인구비례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 정부를 조직하고 군정을 이양받는다는 그들의 결의를 전면적으로 포기하거나, 아니면 남한에만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 밖에는 없게 되었는데, 미국의 세계정책에 따라 유엔은 결국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그들이 한국으로 파송될 때에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이 문제를 두고 UN소총회와 협의하기로 하였다. 임시위원단의 엇갈린 의견에도 불구하고 위원단의 의장 메논은 UN소총회에 한국문제에 관한 다음 4개 방안을 제시하였다.

①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시킨다. ② 제한된 목적을 위하여 즉 협의대상이 될 수 있는 인민대표를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한다. ③ 남북한의 지도자회담 같은 한국의 민족적 독립을 확립할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며 또한 최소 한도로 그것을 주시한다. ④ UN한국위원단의 업무수행이 불가능한 것을 인정, 모든 문제를 총회에서 처리할 것

이 무렵 한국 내의 여론의 지지도는 A 단선 단정, 11.5%, B 단선 5.0%, C 남북회담 71.0%, D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철수 12.5%였다. 남북회담을 주장하는 김구 김규식이 여론의 지지를 가장 강력하게 받고 있았다. 이 때 임시위원단이 가장 선호한 것은 위의 ②안이었다. 이는 남한 지역의 선거로 유엔과 협의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되 정식 정부는 수립하지 않고, 북한 지역에도 유사한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자는 일종의 절충적인 안이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26일 소총회는, 양군 철수 및 UN한국임시위원단 철수 후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소련측의 주장을 부결시키고, 메논이 제안한 위의 제①안과 같은, 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이 31대 2로 가결되었다. 남한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은 유엔 결의의 형식을 빌어 남한만의 단선단정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미군정 당국은 48년 3월 1일 남한의 총선거를 발표하고 18일 총선거법을 공포하였다.

金九, 단독정부수립 배격성명(1947. 12. 22)

김구, 단독정부수립 반대성명(1948. 3. 1) - 이 생명 바쳐 單政을 반대 -

Ⅲ. 남북협상의 전개과정

1) 남한의 정국과 김구의 <6개항 의견서>

1948년 1월 초,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총선거의 임무를 띄고 내한하자(1월 8일) 여기에 대한 남한 여러 정당들의 견해는 여러가지로 타나타게 되었다. 좌익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 자체를 반대한 소련과 궤를 같이하였으므로 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였다. 우익은 대체로 환영하였고 한민당 독촉국민회는 이승만과 함께 남한만의 선거라도 즉각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민족자주연맹(김규식)과 민주독립당(홍명희) 등 중간우익은 다소 애매모호하였는데, 연맹의 지도부와 중간우파는 단독선거 참여를 고려하였음에 비해 민주독립당은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하였으며 연맹내의 좌파를 대표하는 근로인민당과 5당 캄파 계열은 임시위원단 자체를 반대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기류는 1월 23일 소련과 북한측으로부터 북한입경을 거절당한 3일 후(26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이승만과 김구를 만난 데서 표면화되었다. 이 때 이승만은 유엔한위에서 남한단독선거를 강조하였고, 김구는 미소양군 철군 후에 '남북정치요인의 협상'을 통한 '전국적인 총선거'를 주장하여 두 지도자의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김구는 이같은 주장을 김규식과의 협의를 거친 뒤에 표면화시킨 것으로, 그는 이를 좀 더 분명하게 그리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그 이틀 후인 1월 28일에는 자신의 주장을 <6개항 의견서>로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金九, UN한국임시위원단에 제시한 정부수립에 관한 <6개항 의견서>(1948. 1. 28)

(1) 우리는 전국을 통한 총선거에 의한 한국의 통일된 완전 자주적 정부만의 수립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현 군정의 延長이나 혹은 현 군정을 확립강화하게 되는 소위 [남조선 현정세에 관한 시국대책요강](이것은 현재의 군정의 한인고관들이 작성한 것이다)의 전폭적 실현이나 또는 變相的으로 군정을 延長시킬 우려가 있는 소위 남한 단독 정부도 반대하는 것이다.

(2)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자유의사에 의하여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요구한다.

(3) 북한에서 소련이 入境을 거절하였다는 구실로써 UN이 그 임무를 태만히 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한다.

(4) 현재에 남북한에서 이미 구금되어 있으며 혹은 체포하려는 일체 정치범을 석방하기를 요구한다(북한에서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 선생의 석방도 포함).

(5) 미·소 양군은 한국에서 즉시 撤退하되 소위 진공상태로 인한 기간의 치안책임은 UN에서 일시 부담하기를 요구한다.

(6) 남북한인 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

한국문제는 결국 한인이 해결할 것이다. 만일 한인자체가 한국문제 해결에 관하여 공통되는 안을 작성하지 못한다면 UN의 협조도 徒勞無功일 것이다. 그러므로 何時에든지 남북지도자 회의가 필요할 것이다.

위에 제시한 김구의 <6개항 의견서>는 '미 소 양군의 철수 후 남북지도자 회의를 소집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노력하되, 유엔 감시하에 절대자유의사에 의한 전국총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완전자주 정부의 수립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의견서에서 김구가 방법론으로 제시한 '남북 지도자 회의' 에서 말하는 지도자로는 김일성 김두봉 외에 우파 민족주의자인 조만식과 김병조, 김진수 등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이 '의견서로 김구와 김규식의 합작은 충분히 예상되었으나' 두 사람의 주장이 완전히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김규식은 남북요인회담과 전국총선을 주장하는 데서는 김구와 일치하였고 또 단선단정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표명하기는 하였지만, 철두철미하게 단선단정을 반대한 김구와는 달리 김규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단선단정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거기에 비해 김규식과 같은 민족자주연맹에 속해 있던 홍명희는 김구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1948년 1월 초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 활동할 무렵, 백범의 입장을 다른 정파의 주장들과 비교하여 더욱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때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만의 조기선거와 단독정부 수림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좌익계는 미소양군의 철수와 유엔을 배제한 전국총선을 다 같이 주장하였다.

거기에 비해 김구 김규식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미소양군의 철수 후에 유엔과의 협조 아래 남북회담에 의한 전국총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백범은 미소양군이 철수하고 난 후 힘의 공백상태로 말미암아 야기될지도 모르는 치안상의 혼란을 유엔이 맡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미소철군 후에 힘의 공백상태를 이용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략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 때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이같은 간계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1948년에 들어와서 본격화된 백범의 남북요인회담에 대한 구상은 결코 즉흥적인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통일독립국가를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민족의 장래를 투시하는 역사의식 위에서 진행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하여야만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한 완전독립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난마와 같이 얽혀있는 당시의 국내 정치적인 상황과 국제적인 역학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또 타개하느냐 하는 과제를 무엇보다 남북회담이라는 데에 역점을 두고 풀어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에까지 백범이 우리 민족통일운동사에 끼친 모형적인 공헌이요, 그를 통일운동사에서 우뚝 서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라고 본다.

사실 백범은 남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승만 한민당 진영의 단선단정의 주장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북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련의 단정론도 투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남북회담에 그렇게 무게를 둔 것은 단지 남한의 단정팔에 대한 견제 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단정파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쪽에서는 1948년에 들어 2월 6일에는 인민회의를 소집하여 헌법을 초안하고 인민군을 창설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며, 2월 8일에는 북한인민군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북한에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기미를 의식하고 남쪽의 단선단정의 움직임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백범과 우사는 남북협상의 길이야말로 남북의 이같은 단정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는 백범이 취했던 이 관점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렸을 때 4김회담과 요인회담에서는 바로 이같은 그의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범은, 북한의 지도자들이 남한의 단선단정만 문제로 제기하는 데에 대해서, 그 자신은 북한이 당시 취하고 있던 단정과 관련된 문제를 의제로 끌어올렸던 것을 뒤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백범의 남북협상은, 오늘날까지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남한의 단선단정을 막으려는 차원에서만 이해하지 말고 당시 제기되고 있던 남북의 단정 움직임과 관련해서 볼 수 있을 때에는 새로운 의미로 닥아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1948년의 남북협상을 민족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라야 정당한 평가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2) 남북의 서신 왕래

김구의 '6개항 의견서' 발표(48년 1월 28일)가 남북회담에 일정하게 추진력을 얻게 되자 여기에 반대하는 단정론자들의 백범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백범은 이같은 비난에 대해 2월 10일자로 <삼천만 동포에게 泣告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백범은 이 성명에서 <6개항 건의서>를 발표한 경위를 말하고 자신이 거기서 건의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곁코 분단된 조국을 세우지 않겠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 鐵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瞬息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順應 혹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邪思妄念은 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金九, 삼천만 동포에게 泣告함 - 단독정부 반대 성명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미군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造出하여서 단선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全心力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卵翼下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慫慂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다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동경에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연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위원단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願대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泻情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유엔위원단 제공은 한인과 영원히 不解의 怨을 맺을 것이요 한국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 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내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 鐵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瞬息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順應 혹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邪思妄念은 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미군정의 앞잡이로 인정을 받는 한민당의 영도하에 있는 소위 '韓協'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大驚小怪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써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모욕만 가하였다. 한민당의 喉舌이 되어 있는 東亞日報는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모욕하였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苟且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怨鬼의 곡성이 내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2월 초 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과 협의하에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2월 4일 민족자주연맹을 김규식 주재하에 연석회의를 삼청장에서 개최하고, 남북통일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바라는 서신을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은 신기언이 기초하고 김두봉에게 보내는 서신은 엄항섭이 기초하여 김구, 김규식 양인의 연서로, 私信형식으로 발송할 것을 합의하였다.

金日成에게 보낸 것

<要旨>

1. 우리 民族의 永遠分裂과 完全統一을 판가름하는 最後의 瞬間에 民族國家를 위해 4, 50年間 奔走致力한 愛國的 良心은 袖手傍觀을 許하지 않는다는 것.

2. 아무리 外勢의 制約을 받고 있는 우리의 現實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

3. 南北政治指導者間의 政治協商을 通하여 統一政府樹立과 새로운 民主國家의 建設에 關한 方案을 討議하자는 것.

4. 北쪽 여러 指導者께서도 가지실 줄 믿는 데서 爲先 南쪽에 있어서 南北政治協商을 贊成하는 愛國政黨代表者會議를 召集하여 代表를 選出하려 한다는 것.

金枓奉에게 보낸 것

<要旨>

1. 우리에게 解放을 준 美·蘇兩國의 恩惠는 感謝하나 아직도 獨立이 되지 못하여 暗澹하다는 것.

2. 過去 重慶과 延安間에서 民族의 利益을 爲하여 成見을 버리고 地域의 南北과 派別의 異同을 不問하고 祖國의 獨立을 爲하여 奮鬪하자는 電函의 來往을 重提하여서 彼北의 統一工作을 推進하자는 것.

3. 自體가 支離滅裂하면 友邦의 好意도 接受하지 못한다는 것.

4. 우리 問題는 우리 自身만이 解決할 수 있다는 것을 確信하고 南北指導者 會談을 實現하도록 努力하라는 것.

서신을 작성할 즈음, 김구와 김규식은 2월 6일 UN한위 메논 의장, 호세택 UN 한위사무총장과 함께 국제호텔에서 4인회담을 하였다. 이 회담에서 양김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유엔한위에 남북협상안을 제시하여 협조를 구하는 한편 서신을 북한에 보내는 문제도 합의가 이루어져 그 서신을 영국→소련→북한을 통하는 외교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전달해 줄 것이 약속되었다. 동시에 남북요인회담안을 유엔임시한국위원단 회담에 상정해 UN소총회에 반영할 것이므로 이 서한의 회신이 오는 대로 연락해 줄 것도 요청하였다.

김구 김규식이 UN한위와 협의 하에 남북회담의 방법을 진전시켜 나가고 있을 즈음, 메논의장이 2월 10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국제호텔에 초대해 호세택 사무총장, 유어만 중국대표등과 회담을 갖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김규식은 이승만에게 남북지도자회담에 대해 설명하고 이 계획에 대해 당분간 언급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였는데, 이 승만이 이 요청에 동의하여 '3영수 합작설'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승만은 "남북총선거가 불가능한 때에는 남한 총선거에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고, 김규식은 "남북총선이 불가능하면 유엔에서 다시 결정해야 하며, 한국인은 그것을 보고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며 이승만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이 날 회담은 이 승만의 경우 사교적 회담자체가 목적이었고, 김 구는 남북총선에 관한 3영수의 공동성명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볼 때 이승만의 목적만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구는 회담이 있었던 2월 10일, 앞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여 남북을 통일한 완전 독립의 길만이 유일한 숙원이라는 장문의 비장한 성명으로 국민에게 호소했다.

북한에 서신을 발송하고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2월 19일 UN소총회가 개최되었고 2월 26일 미국의 제의에 따라 '가능 지역의 총선거'안이 결정되었다. UN 한위는 선거일을 5월 9일로 발표하였으나, 이날 일식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5월 10일로 변경되었다. 김구는 UN 소총회의 결의에 크게 실망해 "UN 소총회가 소련의 태도를 시정하지 못하고 한국문제를 남한 단선으로 결정한 것은 민주주의의 파산을 세계에 선고함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로부터 세계가 다시 혼란으로 갈 것을 우려한다. 나는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단선도, 북한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남북통일에 최후까지 노력하겠다."고 선언했고, 김규식은 "나는 남한단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정치행동에서 물러나겠다"고 언급하였다.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된 '가능 지역의 총선거안'을 본 백범은 3월 10일 <안도산 선생 애도문>을 통해 그가 해방 후 유엔한위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미군정 3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유엔한위의 배신에 분노 특히 메논과 중국 필립핀 대표 등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남북회담에 대한 비장한 각오 등을 피력하였다. 유엔한위에 크게 기대하면서 김포공항까지 출영나간 바 있는 백범의 분노는 대단히 컸다.

[미 군정하의 친일파와 생활상의 피폐]

그중에도 가장 큰 결함은 과거에 왜적에게 충량(忠良)하던 주구배(走狗輩) 부호배(富豪輩) 등 특수 계급의 등용입니다. 그들은 최근 수년 간에 벌써 군정에 반근착절(盤根錯節)하여 가장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므로, 이제는 군정 당국이 그들은 좌우하기보다 그들이 군정 당국을 좌우하게 되었으므로, 만일 군정 당국이 그들에게 단호한 처단을 하고자 할진대 치안까지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미소공위 실패 후 유엔 한위에 대한 배신과 분노]

이에서 실망한 우리는 유엔의 정의의 발동으로 정당한 해결이 있기를 간망하였습니다. 과연 유엔에서는 한국 문제에 대하여 관면당황(冠冕堂皇)한 결의안을 통과하고, 그 결과로서 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 것입니다. 과연 그 위원단 의장 메논 씨는 그 위원단을 대표하여 환영회 석상에서 혹은 방송국에서 우리에게 굳은 언약을 하였습니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합한 것은 사람이 나눌 수 없다.", "통일이 없으면 독립도 없다.", "이번에 38선은 기어이, 철폐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1개월 후에는 그것을 잊어버린 듯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북한에 입경하겠다는 서한 일 통을 보냈을 뿐, 입경거부가 있은 후에는 하등의 성의 있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노력이 있었다면 뉴욕을 왕래한 것뿐이었고 성공이 있었다면 자기가 파키스탄의 분열에서 맛본 고통을 우리에게 맛뵈려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분열 공작을 성공하는 데는 미국인이 제조한 "북한엥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요언(謠言)이 상당한 효과를 내었다는 것까지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중에도 우리와 가장 길게 환난(患難)을 같이함으로써 친교가 깊은 중국의 대표가 남한의 단선을 주장하여서 한국을 재할(宰割)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합리 합법화하려는 하는 데 노력할 줄은 몽상(夢想)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중국의 내란은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중국의 위신을 국제적으로 타락시키고 있거늘 우리 한국에 동양(同樣)의 화근을 심을 필요야 어디 있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비율빈(필리핀의 취음) 대표가 우리 한국에 미국의 육해군 기지를 건설하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워싱턴 7일발 UP 통신에 의하면 해지(該地) 소식통의 전언으로 "남한 정부 수립 후에라도 일정한 기간은 미국의 보호를 계속하리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면 남한의 전도(前途)는 불보다도 환하게 보이는 것이며 유엔 임시위원단의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동병상린의 처지에 있는 약소국 대표들이 이 공작에 중요한 배우로 출현하는 것은 우리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는 못할진대 하필 우리 자손만대에 영원히 망각할 수 없는 원한이야 끼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남북회담에 대한 비장한 각오]

사국신탁과 미·소 공위를 반대한 것이 애국자라 한다면 유엔의 협조 하에 실시하려는 일국 신탁도 반대하는 것이 애국자일 것입니다. 소련만을 의존하는 인민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조국을 분열하는 반역자라 규정하면서 자기 자신의 남한 단정을 수립하려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규정하여야 옳겠나이까? 옛날의 보호조약을 찬성한 것을 매국노라 규정한다면 앞으로 오는 보호조약도 방지하는 것이 당연히 애국자일 것입니다.

선생이여, 선생은 조국의 강토를 수호하고자 방방곡곡에서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려고 기피력진(氣疲力盡) 하였던 것입니다. 망한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만리 이역에서 동분서치(東奔西馳) 하다가 불행히 적의 포로가 되어 영어에서 생명까지 빼앗긴 줄을 단군의 자녀로서는 다 알고 있나이다. 바라건대 삼천만 각개의 뇌수마다 선생의 위대한 정신을 주입하여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영용한 투쟁을 계속하게 하여 주사이다.

선생이여, 옛날에는 조국의 비운이 당두(當頭)하면 수운(愁雲)이 전토에 미만한 중에서 혹은 통곡, 혹은 순사, 혹은 투쟁 등의 각종 방법으로써 민족의 정기가 표현되더니 지금에는 조국의 위기를 담소와 환희와 추종으로 맞는 자가 불소(不少)하나이다. 이러한 정시(正視)하지 못할 현상을 볼 때마다 김구도 일사(一死)로써 그들의 정신을 환기하고자 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한갓 죽는 것보다는 잔명이 있을 때까지 좀더 분투하는 것이 좀더 유효할까 하여 구차히 생명을 연장하고 있나이다. 이것이 행복한 듯한 때도 많으나 도리어 송구하고 고통스러운 때가 더 많습니다.

선생이여, 국난에 양신(良臣)을 사(思)한다 하였거니와 조국의 위기가 점점박두(漸漸迫頭)할수록 위대한 지도자를 추모하는 심회(心懷)가 더욱 간절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날을 당한 우리는 애사(哀辭)를 베풀어 선생의 가신 것을 슬퍼하기보다는 선생에게 오늘의 우리의 처경(處境)을 하소연하면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원하고 싶습니다.

선생이여, 선생의 영혼이 계시면 이날 이때에 편안히 누워 계시지 못하리이다.

김구는 도탄에 빠진 삼천만 동포-그중에서도 특별히 38선 넘어 우리의 그리운 고향에 있는 가련한 동포-를 대표하여 선생께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앞 산에서 두견이 울면 선생이 부르시는 줄 알 것이요, 뒤 창에서 빗소리가 나면 선생이 오신 줄 알 것이니 꿈에라도 나타나서 우리의 갈 길을 일러 주사이다.

한편 김구 김규식의 서한을 받은 북한노동당은 2월 18-20일 사흘간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논의하였다. 정치위원회는 2월 22일 대남연락부장 임해를 서울로 남북회담 제의에 대한 진의를 조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회담제의를 애국적 행위라고 일단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즉각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남한의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것과 유엔소총회의 결정과 거기에 대한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반응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북한은 유엔소총회 후의 남한의 남북회담에 대한 유동적인 상황이 정리된 것은 3월 12일 <7거두 성명>으로 보고 있다.

즉 남한 단선을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은 임정계의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유교대표 김창숙 7인은 빈번한 회합 후, 3월 12일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통일 독립을 위해 여생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남북협상으로 민족자결을 실현할 것을 제시하는《7거두성명》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 반대 7인 성명(1948. 3. 12)

-통일독립달성을 위한 7巨頭 성명-

金九 趙素昻 趙琬九 曺成煥 金奎植 金昌淑 洪命熹

이 동안, 독촉국민회를 중심으로 이승만계는 총선거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총선거 준비를 전국적으로 진행시켰다. 남한정국은 이렇게 단선파와 총선파로 나뉘어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는 단선단정을 거부하고 총선을 위한 남북연석회의 정국을 주도하는 선명성을 보이게 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같은 선명성은 백범의 정치노선에서 커다란 전환을 의미한다고도 지적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던 3월 북한에서는 20일과 24일 두차례에 걸쳐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특별전원회의에서 남북연석회의에 관해 논의한 후,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제 26차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이날 저녁 평양방송을 통해 "UN결정과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하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 일부터 평양시에서 개최할 것에 대한 의제를 채택하고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남조선 모든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는 참석하여 달라"는 취지의《남조선단정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정당단체에게 고함》을 방송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2월 16일자 김구`김규식이 보낸 서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정당단체에게 고함 (1948. 3. 25)

이어 27일 김구 김규식에게 김일성 김두봉의 연서로 된 서한이 전달되었다. 내용은 2월 16일자 씬을 받았다는 것, 해방 2년 반이 지나기까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는 것,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과 미소공위를 적극 반대한 이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유엔의 결정에 대해 찬성할 수 없다는 것, 양주둔군 철퇴와 조선문제 해결 등은 소련이 유엔에 제기한 바와 같이 조선인에게 맡겨서 할 것, 유엔위원단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를 1948년 4월초 평양에서 소집할 것에 동의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지도자 연석회의의 참여대상을 총 25명으로 하고 북10명 남 15명으로 하되 남측은 우익 중간파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이극로 김붕준 김일청 7명과 좌익계로 박현영 허헌 김원봉 유영준 김창준 백남운 허성택 송을수 등 8명이었다.

김일성·김두봉이 김구·김규식에게 보낸 답신(1948. 3. 25)

3월 25일 북한의 방송과 연석회의 참가요청으로 남한 정계는 다시 혼동이 야기되었다. 2월 26일 UN소총회의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된다는 결정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던 차에, 통일정부수립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남북협상이 성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게 되어 남북협상 참가여부를 두고 김구 김규식을 당황시켰다.

사실 김일성 김두봉이 보내온 회신은 2월 16일자 서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남한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무례한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김구 김규식에 의해 제의된 남북요인회담에 대한 문제가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북조선민전의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개최 결정에 대해 참가요청만 해 온 데다가,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요인회담과 성격이 다른 연석회의를 제시함으로써 이들이 제기한 회의에 참가하는데 김구 김규식에게는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북측의 이중정책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동안 적극적으로 남북협상을 제의했던 김구 김규식으로서는 북측의 제의를 거부할 수는 없어, 3월 31일 그 동안 오고갔던 남북간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협상의 성공여부를 떠나 민족적 명분을 중요시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제 1차 회담을 평양에서 하자는 것이나 라디오 방송시에 남한에서 여하한 제의가 있었다는 것을 발표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제 1차회담도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杞憂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두사람은 남북회담 요구를 한 이상 좌우간 옳다고 본다.(1948. 4.1 조선일보)

이러한 태도는 협상 성패를 떠나 민족주의자로서의 명분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남한정국은 단정파와 협상파 간의 논쟁으로 다시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4월 2일 이승만, 4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6일 미군정의 하지, 7일 한민당은 각각 남북협상에 대하여 부정적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김구와 김규식에 대해 남북연석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직 간접적인 압력이 미군정 당국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거 매우 거세게 가해졌다.

이승만, 남북협상 警戒談話(1948. 4. 2)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남북협상 반대성명(1948. 4. 4)

[하지]장군, 남북협상 반대성명(1948. 4. 6)

韓國民主黨, 남북협상 반대성명(1948. 4. 7)

이에 대하여 4월 3일 김규식이 주도하는 민족자주연맹은《민족자주연맹 중앙위원회의 당면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하고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회의 당면과제에 대한 결의문(1948. 4.3)

3월 25일 밤 남한단선을 반대하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한 평양방송 이후 3월 26일 반탁운동을 전개해오던 임정계 무정부주의자 柳 林의 주동으로 嚴恒燮, 呂運弘, 홍명희 등이 중심이 되어 '통일운동자협의회'가 남북연석회의 준비에 한 참이던 4월 3일 결성되어 통일촉진운동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은 남한의 좌익진영이 북한의 지지와 남북 연석회의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주의 진영에 고압적 태도를 취하며 서둘러 북행하여 남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모임이 어렵게 되자 이 협의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취지서(1948. 3. 26)

통일독립운동자 협의회 강령 및 선언문(1948. 4. 3)

3월 31일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김구와 김규식은 북측의 眞意를 알아보고 참석의 명분을 세워보고자 북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김구 측으로는 安敬根, 김규식 측으로는 權太陽, 兩人을 김일성`김두봉을 직접 만나도록 특파하였다. 4월 8일 출발하여 4월 9일 평양에 도착해서 김일성`김두봉을 만났다.

이 때 김일성이 '통일을 위해 만나 이야기 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다. 두 분 선생께서 무조건 이곳으로 오셔서 우리와 상담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라고 뜻을 밝혔다고 권태양이 귀환 보고에서 전했다. 이 보고에 의해 김구는 북행을 결심하였으나, 김규식은 이것만으로 결심을 굳히기는 힘들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관심과 정당사회단체들의 성원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김규식이 정치가로서 실리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혁명가형인 김구가 자신의 행동을 쉽게 결단내릴 수 있었다면, 김규식은 학자형이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기에 힘겨웠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규식이 이처럼 북행 결단을 고심하고 있던 차에, 당시 서울에서는 문화인 108명이 연서로 남북회담 지지성명을 발표하여 양김씨의 북행을 성원하였다. 4월 14일 문화인 108명의 남북협상지지성명은 당시 새한민보 발행인이었던 설의식이 기초한 것으로 당시 3`1독립선언문에 버금가는 명문으로 지칭될 정도로 호소력이 있었던 것으로 학자형이었던 김규식의 북행 결단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인 108명 連署 남북회담 지지성명 (1948. 4. 14)

이순탁 이극로 설의식 이병기 손진태 유진오 배성룡 유재성 이준열 이홍종
정구영 윤행중 박은성 김일출 박은용 채정근 송석하 박용덕 이민희 조동필
홍기문 정인승 정희준 문동표 이관구 임학수 오기영 신영철 오승근 양윤식
김시두 김기림 유응호 김성진 김양하 정순택 박준영 김용암 정주성 허하백
홍성덕 박동길 최문환 박계주 이부현 고승제 이건우 장기원 허 규 최호진
박용구 유 열 김무삼 이달영 김성수 고경흠 염상섭 백남교 장춘화 이 하
이의식 김봉집 하윤도 이재완 정래길 김계숙 최정우 신 막 안기영 정진석
성백선 라세진 정지용 안건제 정열모 김태화 백남진 장현칠 손명현 오건일
홍승만 박 철 윤태웅 이준하 황영모 유두찬 전원배 이겸호 신의향 허 준
송지영 고병국 김석환 김분옥 박태원 김진억 이갑운 백석황 이만준 신남철
곽 경 오진섭 김병제 차마리사 김재을 최재위 강진국 양재하

4월 14일에 개최예정이었던 남북회담은 김구 김규식의 출발지연으로 4월 19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김구는 4월 18일 김규식에게 4월 19일로 출발날짜를 정했다고 통보했다. 김규식은 자신은 몸이 좋지 않아 김구가 먼저 출발하면 뒤쫓아 가겠다고 말해둔 뒤 4월 19일 민족자주연맹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김규식은 다음 5개항의 조건을 김일성이 수락하면 북행을 하겠다고 제시하였다.

金日成에게 제시한 김규식의 5개항의 조건(4. 19)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이를 배격할 것.

2.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이를 제공하지 말 것.

5. 미소 양군의 철퇴는 양군당국이 조건, 방법, 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남북지도자회의 때 북한측에서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여 무조건 북행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김규식과는 달리 김구는 어떠한 모욕 모략이 있더라도 통일과 독립의 활로를 찾기 위해 피와 피를 같이한 동족끼리 마주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러 여하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김구가 북행하기로 밝힌 4월 19일, 만류하는 군중, 청년단체, 학생단체, 기독교단체 등 때문에 어렵게 북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20일 평양에 도착하여 김두봉의 내방을 받고, 김두봉의 안내로 인민위원회사무실에서 김일성을 접견하였다.

김구, 평양행 결심표명 기자회견(1948. 4. 17)

70평생을 동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고 독립을 위하여 사는 나로서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우리 3천만 형제가 한없는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북조선에서 김구가 항복하러 온다느니 회개하였느니 여러 가지 말이 있는 듯하나 지금은 그러한 것을 탓할 때가 아니다. 이것도 외국인의 말이 아니고 피를 같이한 동족의 말이니 무슨 허물이 있는가. 나는 여하한 모욕과 모략을 무릅쓰고 오직 우리 통일과 독립과 활로를 찾기 위하여 피와 피를 같이한 동족끼리 마주 않아 최후의 결정을 보려고 決然 가련다. 민족의 精氣와 단결을 위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피와 피를 같이한 곳으로 독립과 활로를 찾으려 나는 決然 떠나려 한다.

김구에 이어 19일 민주독립당 대표 홍명희가 출발했고 20일 한독당의 조완구`엄항섭`조소앙이 출발하였다. 김규식은 4월 19일 밤 10시 평양방송을 통해 김일성에게 제시한 5개항의 선행조건이 수락된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20일 민족자주연맹 간부회의를 열고 21일 아침 북행할 것을 결정했다. 22일 오전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성, 김두봉과 접견하였다.

3)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4월 19일 회의는 이미 모란봉 극장에서 시작되었고 제 3일만인 4월 22일에야 비로소 김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등 한독당 대표와, 피로를 이유로 불참한 김규식을 제외하고 민련대표 원세훈, 최동오, 金朋濬, 신 숙, 윤기섭, 송남헌 등과 민독당의 홍명희 등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 경과

[제1일]

4월 19일 오후 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표자연석회의>가 개회되어 최고령자 金月勝의 개회로 545명 참석하에 개막, 주석단 28명 입장, 애국가제창, 대표심사위원 9명, 서기 9명, 편찬위원 7명 선임, 개회사(김일성), 김두봉 허헌 김원봉 백남운 최용건 김달현 유영준 박창린 김진국 강원식 이금순 등 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들의 단정반대 통일독립 축사와 김조규의 축시 낭독 등으로 첫날의 순서가 끝나데 됨.

[제2일]

4월 21일 오전 11시 정각 개회. 처음 이 회의를 축하하는 플랭카드를 선두로 수많은 남녀 노동자들이 박수로 대표자들을 맞이함, 축하식이 끝난 후 회의에 앞서 자격심사 위원회(주영하)로부터 심사결과보고가 있었는데, 56개정당 사회단체에서 695명(그 중 여성 57명)이 참석, 8.15이전 항일독립운동자가 249명이고 이들이 일제에 감금당한 총 년수는 879년 3개월, 그 밖에 대표자들의 직업별 연령벌 통계까지 보고됨, 그 후 북조선정치정세에 관해 김일성이 보고(2만 6천자)하고 20분 휴회후 1시부터 백남운의 남조선 정치정세보고(1 만여자)가 있고, 점심 후 3시부터 박헌영의 남조선 정치정세보고(2만자)가 있었다. 이후 토론을 계속한 후 7시 10분에 폐회함

[제3일]

4월 22일. 백남운의 사회. 청년대표의 축하. 21일에 이어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대표의 수는 22명, 그 중 한독당 대표로 趙一文이 발표함. 이날 남한의 김구, 조소앙,조완구,엄항섭(한독당), 홍명희(민독당), 원세훈, 김붕준, 최동오, 윤기섭, 신 숙, 송남헌 (민자련) 등이 입 장하였다. 김구,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등 4명을 주석단으로 보선하고, 오후에는 이들의 축사가 있었고, 이후 2시까지 토론한 후 휴회. 4시 50분 회의 재개, 이극로의 인사, 혁명가 유가족학원 학생대표의 축하가 있은 후 홍명희, 엄항섭 양인을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 하고 토론을 7시 10분까지 계속함

[제4일]

4월 23일. 김원봉의 사회로 개회. 북조선 여성대표의 축사에 이어 홍명희의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낭독이 있은 다음 만장일치로 가결하였고 본 회의의 이름으로 <전조선 동포에게 檄함>이라는 문건과 <蘇聯과 美國 兩政府에 보내는 美蘇兩軍 同時撤去 要請書>를 가결, 채택하고 회의에 참가한 16개 정당과 40개 단체 대표가 서명.함. 이날 정 오에는 남한지도자 김구, 조소앙, 홍명희 이극로의 축사와 인사가 있었음.

김구, 남북협상회의 개막식 축하연설(1948. 4. 23)

現下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單選單政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면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單選單政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 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하여야할 것이니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범은 이 축하연설에서 남쪽의 단선단정뿐아니라 북쪽이 준비하고 있는 단선단정에 대하여도 미리 경계하는 발언을 하였다. 즉 그는 現下의 남쪽의 단선단정뿐만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또 다른 명분을 걸고 나타날지도 모르는 분단단독정부를 수립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은 주복할 만한 발언이며, 이는 당시 이미 거의 완료상태에 있던 북쪽의 단독정부 수립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같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1948. 4. 23)

「全朝鮮同胞에게 檄함」(1948. 4. 23)

※4월 25일 오전 11시. 김일성광장에서 34만여명의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축하시민대회, 오후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김일성의 초대연이 있었음

[제5일]

4월 26일. 미 소 양군의 즉시 철병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허 헌의 남조선대책보고연설이 있은 후 단선단정반대 전국투쟁위원회를 결성 결의하고 폐회함.

남한의 정당 대표들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19일 회의를 개최하고, 처음 남측에서 '준비해 놓은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재현되어 북측이 준비한 데로 일방적인 회의 진행이 이루어진 것들로 북한이 이 회의를 개최하게된 저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정권과 당이 북한의 전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으나, 신탁통치 문제로 북한내 민족주의 세력이 대거 월남하여 통일전선 전략이 퇴색되어 있었고, 그들의 극렬한 폭력전술로 대중과 괴리되어 있던 상황에서 반공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알려진 남한의 정상급 정치지도자들의 회의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평소 주장하던 한반도 전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북한 정권의 합법성 구축에 활용하고자 이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4) 남북요인회담

대표자 연석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4월 26일부터 4월 30일까지 김구 김규식 등의 요구로 남북인사 15인을 중심으로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남북요인회담이다. 김구 김규식은 '거수로서 의사를 결정하는 연석회의'가 자신들의 주장이 반영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남북요인회담'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남북지도자협의회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의 '4김회담'의 진행과 함께 이루어졌다. 최종적으로 합의된 15인 인사로는, 남쪽에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이극로 김붕준 조완구 엄항섭(이상 우익)과 허헌 박헌영 백남운(이상 좌익)이 참석하였고, 북쪽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 등이 참석하여, 주로 김규식이 북행전 김일성에게 제시한 5개항 원칙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시켰고, 이에 따른 코뮤니케를 발표하기로 합의하였다.

회담 방식은 연석회의 같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고 5원칙에 대한 상호간 합의와 타협점을 발견하고 그 합의된 내용을 공동성명서로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측은 회담의 원칙이나 목표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회담의 목표를 김일성이 주로 단선반대에 초점을 두려고 한 데 대해 김규식이 단선반대와 함께 '통일조선을 창조하는 미래의 초석이 될 남북연합기구 창설'에까지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코뮤니케 초안작성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지도자협의회는 양측의 최대공약수를 집약하여 '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에 드러내기로 하고 주영하가 초안한 북측 초안을 기초로 충분히 토론하여 많은 수정을 거쳐 완성하여 중요 정당 사회단체 공동명의로 발표하기로 했다. 성명서는 먼저 4김회담에서 승인하였고 곧 바로 열린 15일 지도자협의회에서 통과시킨 다음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서명하였다.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회담은 4월 26일과 30일 두차례 있었는데 거기서 논의된 내용은 공동성명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내용 외에 별다른 정치적 결정은 얻지 못한 것 같다. 1948년 5월 1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명의로 발표한 '공동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 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 조성된 현 졍세하에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 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2.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는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거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인민의 지망(志望)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3. 외국 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하기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당과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의 일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천만여명 이상을 망라한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만큼 유권자수의 절대수가 반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가 될 뿐이다.

공동성명서의 요지는 ① 한반도에서 외국군대의 철퇴, ② 외국군대 철퇴 후 북한의 남침에 대한 우려 불식, ③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④ 남한의 단독선거에 대한 반대라 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노란된 부분은 ① ② 항이었다고 한다. ① 항에서는 미국에 대한 칭호에서 '제국주의'가 빠졌다는 점에 유의할 것이다. ②항의 미소양군 철퇴 후 내전에 우려에 대한 약속은 당시 관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던 '남침설'과 '우익 인사 숙청설'에 대한 응답적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동족상잔에 대한 예방적인 성격을 갖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요인 회담의 결과에 다소 만족하며 5월 4일 평양을 출발해 5월 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이들은 북행 결과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金九, 金奎植의 남북협상에 관한 공동성명(1948. 5. 6)

5)제 2차 남북협상제의

이렇게 김구 김규식 양거두는 남북협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위와 같은 다소 낙관적인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남북협상의 결과에 상관없이 미군정은 5월 10일로 예정된 단독선거를 진행시켰다. 900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해 열띤 선거전을 벌이고 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성명은 국민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남한만의 총선거로 5월 14일 이에 대한 북의 보복조치가 나타났다.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 성과로 내세운 송전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5 10 선거 이후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정치의 주도세력이 된 이후에도 김구 김규식은 6월 7일 남북협상세력을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성회를 조직해서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세를 북쪽에서도 감지하였는지 6월 초순 김일성 김두봉은 김구 김규식에게 "해주에서 급속한 회담을 갖고자 하니 해주까지 월북할 것을 요망한다"는 서신을 전해 왔다. 김구 김규식은 현상황이 4월 입북 때와는 사뭇 달라 입북이 불가능함으로 체북중인 홍명희를 남으로 보내 그 편에 의견을 전달시키기를 희망한다고 회신하였다. 그러나 홍명희는 남하하지 않았고, 서신으로 북에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겠으므로 김구 김규식도 여기에 호응해 주기를 요망한다는 회답이 왔다.

이에 김구 김규식은 "국토양분과 민족분열을 방지하려고 4월 평양회담을 가졌고 앞으로도 계속 통일을 모색하자 굳은 언약을 하였는데 남한에서 단정이 수립되었다 하니 대항으로 북한에도 단정을 수립하겠다는 것은 민족분열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회답을 보냄으로써 남북 대화는 단절되고 말았다.

Ⅳ.남북협상에 대한 평가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 사회는 35년간 일제식민지배하에서 억압당했던 민족적 수난을 벗어나 독립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독립국가의 수립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해방이라는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통치를 종식시켜야 되는 것이었으나 해방정국은 이러한 염원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2차세계대전 후 국제상황 전개는 미 소 두 강대국이 주도적 위치로 부상하여 식민지에 대한 통치문제를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재편성하는 과정으로, 일본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한국 또한 이들의 이권 다툼으로 인해 심각한 난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군정 소군정이 남북한에 각기 수립됨으로 분단의 단초가 형성되었으며, 신탁통치안을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 양상, 47년에 이르러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서 서로 합의점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단정론이 우세하게 되었다. 이같이 남북분단이 可視化되자 자주적이면서도 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요망했던 세력들은 상황타개를 위한 대안이 필요했고 이에 제기된 것이 바로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전개 된 '남북협상'이었다.

이는 민족 분단을 확실히 예고하는 5 10총선거 앞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남북 총단결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미군정에 대해 타협적이거나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우익이나 중도계열이 단독선거를 계기로 미군정에 맞서 투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북연석회의의 필요를 제기하는 중요한 요인을 마련하였다.

즉 남북 연석회의는 지금까지 이념 차이로 하나로 결합되지 못했던 우익 및 중도파에게 단독선거 저지 및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제시함으로써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점은 북과의 연합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북측이 '남북협상'에 대해 진정 통일민족국가수립을 원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합법성을 인정받는 데 이용하고자 하는 측면이 더 강했고, 남북협상 자체에서도 주도권을 잡아 남한의 우파민족주의자들은 소극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었지만 연석회의 결과 '남북 지도자 공동성명서'를 이끌어내는 등 '주의와 당파를 초월한 민족의 단결'을 모색했다. 즉 역사상 최초로 남북의 민중이 통일조국 건설에 관한 원칙적 합의점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점은 남북협상의 커다란 의의라 할 수 있다.

사실상 미 소라는 강대국이 분단을 조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역량은 이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현실적으로 볼 때 남북협상은 사실상 처음부터 실패가 예상되는 것이었다. 남북협상에 비판을 가하는 세력들이 남북협상에 대해 비현실적 이상주의적 발상으로 추진한 무의미한 협상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당시 남북협상이 현실적으로 성공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협상 세력이 볼 때, 조국 분단의 위기 상황은 실현가능성을 따지면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현실의 성패를 떠나 민족의 막다른 길에서 민족통일독립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곧 남북협상은 민족자주통일독립을 위해 선택되어진 민족주의 발로의 당위론적인 거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김구가 단선에서 패배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고 정치현실의 리얼리티를 강조하거나,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평가하여 비현실적인 정치협상이라고 보기보다는 현실 정치를 뛰어넘는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연장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즉 반탁→단정반대→남북협상으로 이어지는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운동, 이에 대한 평가는 현실적인 정치적 정략, 역량, 정책의 적실성이란 차원으로 보아서는 적합하지 못하다. 남북협상에 대해 "냉전상황을 배제하고 민족자결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려고 한 것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한 투쟁노선이 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은 해방후의 국내정치를 미 소의 힘에 의해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중시한 평가이다.

누구보다도 김구는 현실에 얽매이는 지도자가 아니라 이념과 신념에 의해 행동하는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의 이념 및 신념을 통해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당위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부족, 또는 정치적 오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념의 실천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최고가치를 부여하였고 정치이데올로기는 이차적인 문제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승산없는 남북협상에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정치이데올로기를 선호한 지도자들이 냉전체제에 영합함으로써 최선책이 될 수 있었던 남북협상은 실패하고 말았으나 평가는 자주독립, 통일의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외교의 힘을 빌어 독립을 달성하려했던 이승만을 정치가라 평가하면서 자기 이념을 끝까지 지키면서 독립노선을 고수한 김구를 혁명가지만 정치인이 못된다고 평가하기도 하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이승만이, 작게는 5 10선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언제나 독선과 독재를 일삼고 현실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김구는 정직하고 겸손하게,《나의 소원》에서 말하듯 "남의 절제도 아니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목표로 여기에 충실하게 정치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반탁운동을 한 것,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고집한 것은 김구가 이같은 자기의 평소 이념과 언행에 충실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협상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 협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김구에게 협상은 굴욕적인 것으로, 김구가 당내 비밀자료로 정리한 《한독당 북한 방문보고서》에는 김일성의 북조선노동당과 한독당은 절대 공존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없다고까지 쓴 것으로 볼 때, 협상을 전개시키던 당시에는 노정치가인 김구가 현 정세를 잘못 인식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여 정치가로서 체면까지 완전히 깎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또 5 10총선거에 현실 타당한 행동을 취하는 대신 관념적인 명분론을 내세워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도 한다. 이 역시 현실적 정치이론의 잣대로 본 평가이다. 5 10 총선거는 단순한 양심과 지조 또는 명분과 위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중대한 현실정치적 문제였고, 현실정치적 의미에서 5 10선거가 불가피하게 된 이상 협상파 정치인들은 대담하게 노선전환을 감행하고 적극적 계획에 의해 이 선거에 참가해서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국회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면 민족의 정치적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 듯, 김구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에게는 외세의존적인 현실 순응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외세에 의존해 가면서까지 현실적이기보다는 민족의 통일과 독립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비록 그들이 현실적 정세 파악을 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고 '남북협상'에 대해 비판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사건사건이 축적되고 그로부터 쌓인 교훈을 통해 더 발전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때, 비록 남북협상이 당시에 실패하였다고 해서 성패 자체로 섣불리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특히 약소국이나 제 3세계의 민족운동은 좌절과 실패를 통해 발전하는 것이므로, 남북협상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과정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외세에 굴복, 영합하지 않고 자주적인 독립, 통일에의 의지로 추진된 '남북협상'은 오늘날 남북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실질적으로 추진되는 것으로 볼 때 분단의 위기상황 속에서 이념과 실리를 떠나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절실하게 추진된 선견지명이 있는 민족애의 발로라 할 것이다.

그리고 김구에 의한 남북협상은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그가 이룩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김규식 김두봉과는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을 같이하였고 김일성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무장독립운동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투쟁과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남북간의 민족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했다는 점을 역사적 의의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논문자료실-이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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