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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30 (일)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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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12      
[현대] 북한-경제 (민족)
북한(경제)

세부항목

북한
북한(정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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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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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2)
북한(문화1)
북한(문화2)
북한(전망)
북한(참고문헌)

1. 시기별 변천과정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기반구축]

8·15광복과 더불어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정은 북한경제를 일본의 식민지경제로부터 사회주의경제체제로 개편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식민지경제의 일반적 취약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민주개혁’이란 이름 아래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 20여일 만에 완결지었다.

약 200만 정보에 이르는 북한 총 농경지의 52%를 무상으로 몰수했고 그 중 90%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였으며,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는 대부분 국유화하였다. 그리하여 지주제 및 소작제를 폐지하는 대신 경작권지제(耕作權地制)를 신설하여 노동농민적 토지소유제를 확립하였다.

또 그 해 8월에는 주요 공장시설을 포함하여 광산·철도·발전소·운수·체신·은행·상업 등 북한지역 산업시설의 90% 이상에 해당되는 1,034개 소를 국유화하였다. 개인이 경영하는 소규모의 공장·기업체와 상업은 생활필수품의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하여 제외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뒤 장려→이용→제한이라는 정책단계를 밟아 1958년에는 모두 국유 및 공유화하였다.

이와 같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정책의 결과, 1949년 말 국영 및 협동조합기업은 공업 총생산에서 90.2%를 차지하였고, 국민총생산에서는 1946년의 14.6%에서 1949년에 44.5%로 크게 증대되어 사회주의경제체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일련의 경제개혁을 통하여 소련형의 계획경제체제를 정비한 북한은 최초로 1947년과 1948년에 각각 1년간의 경제계획을 수립, 실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의 지배권 확립을 촉진하는 정치적 의의를 고려한 탓으로 경제계획의 골자는 개인경제를 점차 축소하고 협동·국영 부문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두어졌을 뿐 경제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48년 정권을 수립한 이후 북한은 2개년경제계획(1949∼1950)을 발표하고 일제식민지유산인 산업의 파행적 성격을 제거하고 낙후된 산업과 농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소련과 차관협정을 체결하여 본격적인 경제건설에 착수,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남침 준비를 위한 물자 동원이 주요 목표였다는 것이 6·25전쟁으로 드러났다.

6·25전쟁은 북한경제를 폐허로 만들었다. 각종 산업시설의 파괴로 인하여 공업 총생산액은 64% 감소되고, 특히 경공업 부문은 91% 감소되어 그 피해액만도 약 17억 달러에 달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그 이듬해 4월 북한은 최초의 중기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복구 3개년계획(1954∼1956)’을 수립하고 소련·중국의 경제원조에 힙입어 파괴된 산업시설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북한은 단순히 전전(戰前)의 생산수단을 회복하는 데 역점을 두지 않고, 농업경제를 중공업경제로 전환한다는 방식으로 복구사업을 펼쳤다.

즉, 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 중국으로부터 8억 원(元)을 지원받았고(예산의 23.4%), 이 경제원조를 포함한 총투자 806억 원의 73%를 생산 부문, 27%는 비생산 부문에 투자하는 등 중공업 부문을 우선적으로 삼는 기초 위에서 경제계획을 편성하였다. 그에 따라 1957년 말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공산품 생산량이 1949년 수준으로 만회되었고, 공업 총생산액도 1953년 대비 2.8배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석탄·시멘트·곡물 등은 전반적으로 계획에 미달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 협동농장(농업집단화)을 조직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했던 토지를 다시 환수하였다. 즉 농업의 협동조합화를 비롯, 개인 상공업을 포함한 모든 경제 부문의 협동화가 촉진되어, 1958년 말에는 모든 농민이 협동조합에 편입되고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생산활동이 일체 부정되는 등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형성되었다.

기업의 생산 및 유통액에서도 1953년 말 공업 96.1%, 농업 32%, 상업 67%이었으나 4년 뒤인 1957년에는 공업 98.7%, 농업 95.6%, 상업 87.9%, 그리고 1958년에는 각각 100%로 전면적인 협동화 내지 국영화가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북한경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경제관리체제에 돌입하여 자유시장이나 경쟁가격을 부인하고 생산자원의 할당제 또는 소비재의 배급제도 밑에서 모든 경제활동이 중앙으로부터 명령형태로 추진되는 지령경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경제계획의 실시]

북한이 중앙집권적인 경제계획기구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경제계획을 실천한 것은 1957년부터였다. 그 뒤 1993년까지 3차 7개년계획 등 5차에 걸쳐 실시하였고, 1994년부터 2∼3년간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조정기간으로 설정하여 추진하였으나 1998년 현재 이에 대한 아무런 평가가 없음은 물론, 차기 경제기획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 1960년대의 7개년계획은 3년 연장되었으며, 1970년대의 6개년계획과 1980년대의 제2차 7개년계획은 각기 2년의 완충기간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실시된 5개년계획을 통하여는 전후(戰後) 복구사업을 완결짓고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즉,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병행하여 발전시킨다는 경제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이 같은 정책기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 시기에 북한은 외국원조의 감축, 농업협동화 시행으로 인한 농민의 생산의욕 감퇴, 그리고 농업인구의 공업 부문에의 대량 이동에 따라 ‘천리마운동’·‘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 등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노동력 강화를 통한 생산증대를 도모하였다. 이 같은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은 그 뒤에도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속도전’·‘80년대속도창조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북한은 또 1959년 2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사회주의체제의 공고화를 시도하였다. 이 5개년계획은 1년 앞당겨 조기달성했다는 발표와는 달리 1960년 1년간을 완충기로 설정하여 미비한 사항을 시정, 조정할 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중공업에의 편중으로 누적된 산업부문간 불균형의 폐단을 해소시킴으로써 산업화의 실제적인 출발점으로 삼기 위하여 제1차 7개년계획(1961∼1967)을 수립, 실천하였다. 그 동안 소홀했던 경공업시설을 정비하면서 경공업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농업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기계제작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시설 확장과 기술도입 및 기술혁신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61년 7월 쿠바사태를 계기로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군사 부문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었는가 하면, 중·소의 이념분쟁 격화에 따른 대북한 경제지원의 격감까지 겹쳐 당초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이로써 북한은 처음으로 전면적인 경제침체와 후퇴현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계획기간을 3년 연장하여 1970년에 종결지었다.

연장기간 동안에는 중공업과 군수공업 발전에 주력하면서 지방공업을 중심으로 경공업 시설을 확장, 자립적 공업경제체제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1970년 시행된 6개년계획(1971∼1976)에서는 1960년대에 기계공업을 중심으로 이룩한 기술혁명을 전체 산업 부문에 적용하고, 원자재의 자급과 전력 및 광업의 개발에 역점을 두어 산업의 체질개선을 꾀하였다. 특히 모든 산업 부문에 걸쳐 원료의 국산화가 60∼70% 수준이 되도록 높은 자급도를 강조하였다. 또 소련·동구권에 치우쳤던 종래의 대외경제협력을 다변화하여 197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로부터 차관을 대거 도입, 선진기술과 장비 도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노동력의 부족과 만성적인 수송난, 석유·석탄 부족으로 인한 화학공업의 부진, 그리고 외채의 과도한 누적까지 겹친 북한은 1975년에 이 계획의 조기종료를 발표하고, 부진한 부문에 대해 2년간의 완충기를 설정함으로써 6개년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 당국이 발표한 실적에 따르면 중공업 부문은 8∼14%까지 침체하고 있으며, 기본건설사업에서는 대부분 1960년대의 7개년계획에서 이월된 대단위건설을 매듭짓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이어 북한은 1978년부터 ‘주체화·현대화·과학화’에 기초를 둔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을 실시하였다. 이 계획에서는 1977년에 비하여 국민소득 1.9배, 공업총생산 2.2배, 알곡 1000만t 생산 등을 주요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목표연도인 1984년이 지나도록 동 계획의 추진결과에 대해 일체의 발표가 없다가 1985년 2월 16일 국가계획위원회 중앙통계국이 1984년 말을 기해 동 계획이 완료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의하면, 동 계획기간의 주요 성장지수는 기준연도에 비해 공업생산액 2.2배, 전력 178%, 석탄 150%, 강철 185%, 공작기계 167%, 트랙터 150%, 자동차 120%, 채탄기 4.2배, 화학비료 156%, 화학섬유 180%, 시멘트 180%, 천 145% 등으로 생산이 증가되었다.

한편,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건설 10대 전망목표’, ‘4대 자연개조사업’ 등 별도의 목표를 정하고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2차 7개년계획 역시 당초 목표달성에는 실패하였으며 동 계획이 종료된 이후 제3차 7개년계획에 착수하기까지 2년간의 조정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제2차 7개년계획 후반기부터 북한에서도 주민들의 소비생활에 대한 욕구충족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주요한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7년부터 시행된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은 제2차 7개년계획과 마찬가지로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를 기본과업으로 제시하였으며, 국민소득 1.7배(연평균 7.9%), 공업생산 1.9배, 농업생산 1.4배, 10대 전망목표 실현 등을 계획목표로 설정하였다. 동계획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기술혁신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제기하면서 무역과 대외경제협력의 확대 발전을 크게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기술혁신을 경제발전의 관건으로 보고 기술혁신을 위해 무역과 대외경제협력에 주력해야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북한은 제3차 7개년계획 기간 중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연평균 7.9%로 설정하였으나 실적은 마이너스 1.7%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 당국도 1993년 12월 8일 당 중앙위원회 제6기 21차 전원회의를 통해 제3차 7개년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제3차 7개년계획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경제권의 붕괴로 이들 국가와 맺었던 장단기 무역협정의 이행이 중단되고, 이들 국가와의 경제협력과 무역거래가 부진함을 들었다. 따라서 앞으로 2, 3년간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조정기간으로 설정하고 ‘농업 제일주의, 경공업 제일주의, 무역 제일주의’로 나아갈 전략적 방침을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특히 수출생산기지를 정비하고 수출품 생산을 확대 강화하며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대외무역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즉 1990년 -3.7%, 1991년 -5.2%, 1992년 -7.6%, 1993년 -4.3%, 1994년 -1.7%, 1995년 -4.5%, 1996년 -3.7%, 1997년 -6.3%, 의 1998년 -1.1%, 계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인해 북한 경제력은 크게 잠식되었으며, 1999년대에 들어와 6.2%의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부(負)의 성장으로 인해 북한에는 이른바 3난(難)이라는 에너지난, 식량난, 외화난이 가중되고 있고 공장가동율도 30%이하로 떨어졌다.

북한 경제의 개발전략은 한마디로 자기완결적 자립경제(autarky)를 지향하고 있으나 1984년 대외개방에 필요한 〈조선합작경영법〉을 제정, 대외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면서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의 설치 등 개방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외개방의 조건이 미비하고 내수시장과의 연계성도 부족하며 경제개혁의 동시적 추진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대외개방정책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현황 및 경제관리]

1947년 제1차 1개년경제계획이 실시된 이래 북한경제는 규모의 확대와 더불어 파생된 많은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0년 120달러에서 1965년에는 162달러로 남한의 105달러를 앞섰다.

그러나 1990년에는 1,064달러로 남한의 5,883달러의 5분의 1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다. 1990년 이래 계속해서 마이너스 성장에 시달리며 1995년대는 957달러로, 그리고 1996년에는 910달러로 다소 떨어지고 있으나 1997년에 811달러, 1998년에는 573달러까지 떨어졌으나 1999년에는 다소 증가 714달러로 1970년대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

1999년 현재 북한의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국민총생산은 158억 달러, 1인당 국민총생산은 714달러이고, 무역총액은 14.8억 달러로 1990년 47.2억 달러를 정점으로 계속 떨어지고 있으며 1995년 20.5억 달러보다 더 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과의 경제총량 규모를 대비해서 보면, GNP 면에서 25.5 대 1이라는 남고북저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국민총생산 규모에 비하여 과중하게 책정된 군사비가 경제개발 재원을 잠식하여 이 때문에 계획경제의 효율을 증대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 폐쇄경제체제로 말미암아 선진공업국과의 자본 및 기술협력을 어렵게 하여 개발재원의 조달과 기술혁신의 차질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부족한 자원과 협소한 시장을 무시한 채 중공업 우선정책을 계속 추진해 옴에 따라 산업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2000년 중국 방문에 이어 2001년 고위층을 인솔하여 다시 상하이 푸딩지구를 사찰, 중국의 개방정책을 거울 삼아 조심스러운 개방을 시도하고 있다. 더구나 2001년대에 들어와 ‘신사고(新思考)’가 강조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식’이 신사고라고 하고 있어 중국식의 대담한 개방이 아닌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의 경제관리는 정경불가분(政經不可分)의 원칙하에 당의 전반적인 지도와 통제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관리조직은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고 경제부서의 기능과 임무는 폭넓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0년 현재 경제·산업 분야의 부서가 23개나 되며, 각 도(직할시)에는 지방인민위원회가 지방경제실무를 총괄하고 있다.

경영관리체계는 농업관리체계와 공업관리체계로 대별된다. 농업관리체계는 ‘청산리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군 협동농장위원회를 농촌경제의 말단 단위로 삼아 중앙에서 군까지 획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청산리방법’은 모든 영농활동에서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농민을 혁명과업 수행의 차원으로 조직, 동원하는 것을 말한다.

공업관리체계는 ‘대안의 사업체계’를 기본으로 하되 독립채산제 또는 반(半)독립채산제 실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안의 사업체계’란 공장·기업을 당위원회를 중심으로 관리, 운영하여 당의 역할을 강화하고 노동자에 대한 정치사업을 우선하는 관리체계를 가리킨다. 현재 북한의 통용화폐로는 1전권·5전권·10전권·50전권·1원권 주화가 있으며, 지폐로는 1원권·5원권·10원권·50원권·100원권이 있다.

2. 산업부문별 변천과정

[산업구조의 변화]

8·15광복 당시 우리 나라는 남북한이 다같이 농업국이었다. 상대적으로 북한이 더 많은 공장시설과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당시 북한사회 역시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다. 그러나 1947년 경제계획의 실시 이후 전체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이 저하됨에 따라 공업생산 중심의 산업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46년 59.1%에서 1960년 28.9%, 1970년 21.5%로 점차 감소한 반면에, 공업은 1946년 23.1%에서 41.3%, 57.3%로 점차 증가하였다. 취업인구구성비를 보더라도 1946년 취업인구의 12.5%였던 노동자비율이 1972년 45.9%로 늘어났다. 그러나 공업생산 가운데에서도 중공업 부문의 확대, 기술장비 강화 등 주로 중공업 건설에 치중하고 군수관련 공업에 투자가 집중되어 경공업 분야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왔다.

북한의 연평균투자액 가운데 광공업 부문이 차지하는 투자비중은 1954∼1956년에는 49.6%, 1957∼1960년에는 51.3%, 1961∼1970년에는 60%에 달하였고, 이 같은 광공업투자액의 구성에서는 중공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총공업투자액 중 중공업과 경공업의 상대적 비율을 보면 1960년대 이전에는 중공업이 81∼85%였고, 1960년대에는 64∼74%로 나타났다가 1970년대 이후부터 88.8%가 중공업 부문 확대에 투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농업]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전체 산업구조에서 농업의 위치는 계속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왔다. 1961년 7개년경제계획이 실시된 이래 1975년까지 15년간 국민총생산액은 연평균 7.6% 성장하였고, 공업이 14.7%인 데 비해 농업은 연평균 5.7% 정도 성장했을 뿐이다. 또 전체생산 중에서 농업생산물이 차지하는 몫은 1956년 66%였으나 1970년에는 26%로 감소하였다.

그 동안 북한의 농업은 영농체계의 집단화, 관리조직의 관료화로 노동생산성과 노동의욕이 저하되고 중공업 우선정책 때문에 농업 부문에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1971∼1976년 기간 ‘기본건설투자’ 중 평균 25.3%만을 농업에 투자했을 뿐이다. 거기에다 노동력 부족현상까지 겹쳐 농업성장이 크게 둔화되어 왔다.

우선 북한의 농업인구는 1965년 499만9000명(농가인구비율 40.8%), 1970년 567만1000명(40.5%)으로 늘어났고, 1980년대는 694만1000명(38.2%), 1990년대는 821만 명(37.8%), 그리고 1994년에는 842만 명(36.7%)으로 농가인구는 늘어났으나 농가인구비율은 줄어들었다. 농가호수는 1965년 109만6000호에서 1990년에는 124만6000호, 1980년에는 153만9000호, 1990년에는 185만4000호, 그리고 1994년에는 191만4000호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경지면적은 1970∼1980년대에 비하여 오히려 감소추세에 있다. 1965년에 199만3000㏊, 1970년에 203만7000㏊, 1980년에 210만4000㏊, 1990년에 214만1000㏊, 그리고 1994년에는 199만2000㏊, 1996년에는 199만2000㏊로 1965년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

북한은 그 동안 새땅찾기, 간척사업 등으로 농경지가 늘어났으나 산업화 입지, 도로 등으로 농경지가 감소한 것이다. 따라서 농가당 경지면적도 1965년 1.18㏊이던 것이 1980년에는 1.16㏊로, 그리고 1990년에는 1.17㏊에서 1994년에는 1.16㏊로 1980년대 이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농업생산 증대를 위하여 1970년대 중반에 ‘자연개조 5대방침’·‘4대 자연개조사업’ 등을 제시하고, 밭 관개시설 건설, 다락밭 조성, 간석지 개간 등 경지확장을 비롯하여 품종개량, 기계화, 비료사용 등 농업 생산기술의 향상을 꾀하는 한편, ‘분조관리제’ 등을 통해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자 힘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산업에서 농업의 위치는 계속 저하되고 농공(農工)간의 격차도 점점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1996년 현재 북한의 경지면적은 199만2000㏊이고 재배면적은 146만6000㏊이다. 남한의 경지면적 194만5000㏊와 재배면적 134만2000㏊에 비해 북한이 다소 높은 편이다. 북한의 1996년도 경지면적 구성을 보면 논이 58만5000㏊, 밭은 140만7000㏊로 구성비에 있어서 밭이 70.6%로 논 29.4%의 두 배 이상이 된다. 따라서 북한의 주식은 옥수수를 주종으로 하는 밭농사 위주의 농작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곡종별 생산량을 보면 1996년 현재 쌀 134만M/T(36.3%), 옥수수 197만6000M/T(53.6%), 기타가 37만4000M/T(10.1%)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은 1995년 큰물피해와 1996년 큰 가뭄 등 자연재해로 식량생산이 여의치 않아 1995년 이후 현재까지 외국의 식량지원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으며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식량문제는 아프리카에 못지 않다.

한국농촌진흥청이 평가한 1998년도 북한의 곡물생산 실적은 388.6만톤(정곡 기준)이며, 그 중 쌀 생산량은 146.1만톤으로 추정되었다. 북한은 매년 200만t 정도의 식량부족 현상을 빚고 있는데, 이는 자연재해보다 농업정책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농업생산성 저하의 근본적인 요인은 첫째 중공업 우선정책으로 인한 농업의 소외, 둘째 협동농장의 집단영농방식의 한계(주인의식 결여, 생산의욕 감퇴 등) 등을 들 수 있다. 현실적 요인으로서는 첫째 외화난으로 인한 식량도입 곤란, 둘째 영농기술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증가, 셋째 자연재해에 대한 무방비, 넷째 농기계·영농자재·비료·농약공급의 부족, 자력갱생 원칙에 따른 자급자족 정착 등을 들 수 있다.

[축산업]

북한에서는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상을 메우기 위해 축산물의 공급이 일찍부터 장려되어 왔다. 축산업은 1960년대에 국영축산과 협동농장축산, 개인부업축산의 형태로 실시되면서 대규모 축산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하고 외화사정으로 가축사료 수입이 어려움에 따라 사료문제가 심각하여 현재 침체상태에 있다.

사육하고 있는 가축은 1970년대부터 소·돼지 등의 큰 가축보다는 개·면양·산양 등의 사육에 치중하고 있다. 연간 80∼90만t의 육류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1986년 생산량은 55만t으로 발표되었다.

[임업]

북한은 1950년대 후반부터 집단적으로 조림 및 보호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임산물 생산의 집단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데 주력한 데 이어 1963년부터 순환식 벌채방법에 의한 원목생산 증대를 시도해 왔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 2회 식수조림기간을 설정하여 각 생활단위별로 조림구역제를 실시, 산림보호와 조림산업을 육성시켰다.

임야면적은 총 920만 정보로 전체면적의 약 74%이며, 모두가 국·공유화되어 있고 개인소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특히 주요 원목생산지인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 백두산지역에는 침엽수·활엽수가 고루 분포되어 있다. 원목생산지에는 60여개 소의 임산사업소·갱목생산사업소를 설치하고, 기타 지역에는 임산협동조합을 두고 있다.

북한은 제3차 7개년계획 기간 중 150만 정보의 조림사업 목표를 세워놓고 경제림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20만 정보의 새땅찾기운동, 전국토 다락밭 만들기 운동, 각종 건설자재용, 심지어 땔감의 부족에 따른 남벌 등으로 산림의 훼손이 심하고, 1995년 큰 물피해도 산림 훼손이 큰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연간 목재생산량은 약 300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부족한 임산자원 확보를 위해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 원목 벌채를 위한 노동자를 파견하고 그 대가로 일부 목재를 들여오고 있다.

북한은 1999년 3월 산림조성과 수종교체를 주내용으로 하는 산림조성 10개년 계획을 밝힌 데 이어 1999년 중·대도시 경영성과 국토환경보호성이 주관하여 15만5400여㏊의 산림조성계획을 추진하는 등 최근 들어 산림자원의 복구와 녹화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수산업]

수산업은 6·25전쟁 기간중 대부분의 어로시설·어로장비가 파괴되고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원시적인 어로방법에 의존하는 등 영세성과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가 1970년대 이후 어선확보 및 어선의 동력화에 주력하면서 원양어업에도 나서고 있다. 북한의 유용 수산자원은 약 300여 종이나 되며, 이 중 120여 종이 생산되고 있다.

주요 수산자원은 어류로서 명태·조기·멸치·꽁치·임연수어·갈치·민어·청어·오징어·가자미·대구 등 연근해 어족과, 담수어로 잉어·붕어·열목어·산천어·누치 등 다양하다. 그리고 김·미역·다시마 등 해조류와 조개·소라 등 패류, 게 등 갑각류도 생산되고 있다.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수산물 생산에 노력하고 있는데, 제3차 7개년계획기간 중 수산물 생산목표는 1100만t이 제시되었다.

수산업은 국영수산사업소와 수산협동조합을 기본 생산단위로 하고 있다. 어선 보유량은 원양어업을 위한 3750t급 선미트롤선과 연근해 어업을 위한 450t급 어선을 비롯하여 총 2만여 척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서해안 간척사업의 추진에 따른 양식장 및 어장의 감소 추세와 명태·오징어·정어리 등 주요 어족자원의 감소로 말미암아 수산업이 위축되고 있으며, 특히 어선 노후, 어로장비 및 기술의 낙후, 선박용 유류 부족으로 조업률이 크게 떨어져 어획량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

수산물 실적을 보면 1980년 170만t, 1990년 145만t, 1995년 106만t, 1997년 65만t, 1998년에는 63만t으로 생산량이 떨어져, 1960년대 후반기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수산물 생산량이 떨어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양어사업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내수면 양식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리고 있다. 이와 아울러 관련법규도 정비하고 있는데, 〈수산자원 조성과 보호 및 단속에 관한 규정〉(1997.7.), 〈물자원법〉(1997.8.), 〈바다오염 방지법〉(1997.12.) 등을 들 수 있다.

[광업]

우리 나라의 지하자원 부존분포로 보면 70% 이상의 광물자원이 북한지역에 편재되어 있고, 석탄과 철광의 경우에는 90% 이상 북한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은 일찍부터 광업개발에 주력하였는데, 6·25전쟁 이후에는 공업원료의 자체 수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의 주요 원천으로도 삼고 있다.

그러나 무연탄의 경우, 갱도가 심부화(深部化)되고 채굴시설이 노후화되는 등 채탄조건이 악화되고, 1974년 이래 계속되어 온 경제침체로 투자가 한계를 드러내어 전력·공업원료의 수요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1996년 말 석탄의 매장량은 약 147억4000만t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무연탄이 65%를 차지하고 있다. 연간 생산량은 1998년의 경우 1860만t이다. 석탄은 대부분 에너지원으로 공급되며, 북한의 전체 에너지소비비 중에서 66.3%를 차지하고 있다. 제철·제강용 원료탄인 역청탄은 거의 생산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철광석은 매장량이 30억t이고 무산광산을 비롯하여 은율·재령·태탄·천동 등 22개 광산에서 채광된다. 이 가운데 무산광산은 매장량에서 10억t이 넘는 대광상(大鑛床)이며, 북한에서의 연간 생산량(1200만t)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98년도 철광석 생산량은 289만톤으로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철강공업원료의 대부분을 자체 생산으로 충당하고 있고, 일부가 해외로 수출되어 외화가득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 밖에 동(銅)·연·아연·알루미늄 등 비금속부문 광업도 군수산업과 관련하여 활발한 편이다.

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체 조달하고 있으며, 연·아연은 대일 주요 수출품목이 되고 있다. 마그네사이트는 연간 150만t을 생산하여 세계 최대의 생산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단천광산의 매장량은 36억t이며, 마그네사이트는 마그네샤크링커로 만들어져 중국·소련·일본·유럽공동체(EC) 제국으로 수출되고, 나머지는 내화성 산업(耐火性産業)에 사용되고 있다. 광물 수출은 수출산업의 25.5%, 1차산업 분야의 70% 이상을 차지하여 북한의 대외 수출품목 가운데 주종을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한반도 총 전력생산의 92%를 차지하는 전력시설을 기반으로 금속·화학·기계공업 등 중화학공업시설이 79% 편재해 있었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일본이 남기고 간 주요 산업시설이 국유화되거나 소련군에 수탈당했으며, 관리인·기술자 부족으로 산업시설을 가동하는 데 많은 애로를 겪었다. 특히 6·25전쟁을 겪으면서 공업 총생산액의 64%가 감소되고 중공업 부문이 42%, 경공업 부문이 91% 감소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소련·중국·동유럽 제국 등의 경제·기술원조에 힘입고 ‘천리마운동’ 등 노동생산성 향상운동을 활용하여 기계공업·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예컨대 제조업 부문에 약 399억 원을 투자했고, 그 중 81%가 중공업 건설에 투자되었다. 노동력도 공업개발을 위해 재배치했는데, 1946∼1956년 총인구 중 비농업 부문의 조직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의 비중은 18.7%에서 40.9%로 크게 증대되었다.

중공업을 강조하는 1950년대의 투자양상은 196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국민총생산액에 대한 연간 고정투자비율이 1960년대 동안 약 17%에서 26%로 증대되었고, 고정투자 배분에 있어서도 57% 이상 제조업 부분에 배분되고, 제조업 총투자의 80% 이상이 중공업 부문에 투자되었다. 그 결과 중공업과 경공업 간의 산업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북한은 1960년대 초 중공업 편중으로 야기된 부문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한편, 생활필수품의 공급부족으로 인한 노동의욕과 노동생산성의 저하를 막고자 경공업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4대 군사노선’ 제시에 따른 군사력 강화 우선정책에 따라 철강업·동력공업·화학 및 건재공업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었고, 중공업 및 군수관련산업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 외국의 원조가 감소되고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하게 된 북한은 1970년대 초 대내 지향적 공업전략에 수정을 가하여 대서방 무역확대정책을 추진했으나 대외 지불문제에 걸려 침체된 국면을 면하지 못하였다. 즉, 경제성장목표를 1960년대의 7개년계획(1961∼1967) 목표성장률 15.2%에 비해 하향조정(10.3%)하는 한편, 자본·시설재 및 기술도입을 위해 대외경제협력을 대폭 확대하였다.

아울러 수입확대에 따른 소요외화의 공급원을 개발하기 위해 수출산업에도 눈을 돌리는 등 자력갱생원칙에 따른 폐쇄경제정책을 다소 완화하였다. 그러나 그 뒤 몇 년 동안 외채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여 경제상태는 악화되었고 중화학공업의 가속적인 촉진에 의해 소비재공업의 발전은 낙후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공업생산은 심각한 침체국면에 접어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소비재 생산을 무시하고 중공업을 먼저 개발한 결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의 불비와 경공업의 부진을 초래하여 산업구조의 불균형과 나아가 전체적인 경제개발에도 비능률을 가져왔다는 점에 북한공업화의 특징이 있다. 오늘날 제조업 생산의 구성을 보면 중소규모의 여러 지방 중공업이 평행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중공업 생산이 제조업 부문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 중공업에 있어서도 공작기계와 동력기계 부문이 중점적으로 육성되어 왔다. 1996년 현재 주요 부문별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공업화의 원동력인 에너지산업에 있어서 발전시설용량은 738만7000㎾, 이 중 수력은 443만7000㎾, 화력은 295만㎾이다. 특히 북한지역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저열탄을 쓸 수 있는 화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열(廢熱)과 여열(餘熱)을 생산공장이나 주택난방용으로 사용할 계획에서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서두르고 있다.

정유시설은 소련·중국의 원조로 건설된 승리화학공장(勝利化學工場)과 봉화화학공장(烽火化學工場)의 2개 정유공장이 있으며, 여기에서 일산(日産) 6만9000배럴의 정유를 생산하는 한편, 러시아·중국·이란 등으로부터 약 699만 배럴을 수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북한은 에너지 다소비형(多消費型)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국민총생산(GNP) 대비 에너지비율은 대한민국에 비해 대단히 높다. 에너지 공급구조에서는 석탄이 전체의 66.3%를 차지하고 있다. 식량난·에너지난·외화난이라는 이른바 3난으로 인한 북한의 외화부족은 원유수입을 어렵게 만들어 공장가동율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금속공업에 있어서 철강생산능력은 594만t, 철강생산능력은 제선이 541만3000M/T, 제강 498만M/T, 압연강제가 404만M/T으로 1990년 이후 현상유지선에 머물고 있다. 비철금속 생산능력에서는 1996년 연 8만7500M/T, 아연 2만9500M/T, 그리고 동 9만4000천M/T, 알루미늄은 2만M/T의 수준이다. 아연을 제외하고는 생산능력이 모두 1990년 수준이다.

북한은 일찍부터 기계공업을 핵심산업으로 육성시켜 왔으며, 다른 산업 부문에 비해 가장 앞서 있다. 기계공업을 “생산도구·기술수단을 생산 보장함으로써 중공업과 경공업, 농촌정리, 기술건설과 운수 등 인민경제 모든 부문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기술장비를 강화할 수 있게 하는 중공업의 핵심 부분이며 기술적 진보의 기초”라고 보고 있다.

주요 공장으로서는 용성기계연합총국·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북중기계연합기업소·낙원기계연합기업소를 비롯하여 희천공작기계종합공장·승리자동차종합공장·금성트랙터종합공장·김종태전기기관차종합기업소·남포조선연합기업소·함북조선연합기업소 등이 있다. 1996년 현재 주요 기계공업 생산능력을 보면, 자동차 3만3000대, 농기계 3만2000대, 공작기계 3만5000대, 조선능력 21만4000G/T 등이며, 전자공업 분야는 TV수상기 26만 대, 냉장고 생산능력 5만 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학공업도 북한에서는 상당히 치중한 산업 분야였으나 현대화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북한은 3차 7개년계획 이후 주민생활의 향상을 위한 경공업발전과 함께 의·식·주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이 부문의 낙후성은 심각하다. 화학공업 분야의 생산능력과 시설을 보면 1996년 현재 화학비료 생산능력은 351만4000M/T이나 원자재, 에너지 사정으로 공장가동율이 27% 수준에 머물고 있다.

주요 화학비료공장은 흥남비료연합기업소·남흥청년화학기업소 등이 있다. 시설의 낙후로 복합비료 생산이 불가능하다. 북한은 매년 비료가 부족 1997년 봄에는 한국 정부에 대해 비료자원을 요청한 바 있고, 이를 위한 남북한 당국 차관급회담이 열렸으나 북한측의 무성의로 회담이 결렬된 바 있다.

섬유공업은 화학섬유공장으로 함흥의 2.8비날론연합기업소·신의주화학섬유연합기업소·청진화학섬유연합기업소 등이 있다. 주요 합성수지 생산능력은 1996년 현재 15만M/T이다. 석유화학공업은 봉화화학공장(피현군)과 승리화학공장(선봉군)이 있으며, 이 두 정유공장에서는 각각 150만t, 200만t의 정유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나프사 등 섬유 원료도 생산하고 있다.

건재공업 분야를 보면 순천시멘트연합기업소 300만t, 상원시멘트연합기업소 200만t, 2.8시멘트연합기업소 160만t 등 대·소규모 공장에서 1202만M/T을 생산할 수 있다. 판유리는 남포유리연합회사 등에서 250만 상자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다. 경공업과 관련하여서는 직물 및 섬유 생산능력은 1996년 현재 17만7000M/T과 67만M/T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신발 생산능력은 7040만t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대부분의 설비가 광복 이전에 건설된 설비이고, 이에 대한 부분적인 보수와 개축만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기계공업은 북한이 일찍부터 역점을 두어 개발한 부문이며, 그 중에서 군수산업 관련산업인 공작기계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회간접자본]

북한의 산업구조에서 에너지 부문을 제외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1970년대까지 매우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1970년 총 투자율은 30%였으나 사회간접자본에의 투자비율은 27.7%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GNP에 대한 사회간접자본의 비율은 8.3%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송 부문에서 투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나 전반적인 경제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철도를 제외한 나머지 도로·해운·항공 부문에서는 발전이 더욱 지연되고 있다.

전력공업은 일제 때 건설된 수풍·장진강·부전강·허천강·회령·금강산발전소 등 수력발전소 중심의 발전시설 구조를 갖고 있다. 발전량은 1998년 현재 70만㎾의 발전시설용량을 가진 수풍발전소 등 수력이 102억㎾, 화력은 160만㎾ 발전시설용량을 가진 북창화력발전소를 비롯 평양화력발전소·웅기화력발전소 등 68억㎾이며, 원자력 발전은 없다.

북한의 발전시설용량은 738만7000㎾(이 중 수력이 443.9만㎾, 화력 295.0만㎾)로 나타나고 있다. 1994년 미·북 제네바합의에 따라 기존의 핵시설을 포기한 대신에 신포에 100만㎾짜리 크기 총 200만㎾의 경수로 발전소를 한국의 주도하에 한·미·일 컨소시엄을 형성, 공사하고 있다.

수송 분야를 보면, 북한지역은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철도가 중심이 되고 도로는 보조수단화하고 있다. 1999년 현재, 철도 총연장은 5,214㎞(이 중 98%가 단선)이고, 전철화는 남한보다 훨씬 앞선 부분으로 전철 총연장은 4,030㎞이며 전철화율은 78.8%나 차지하고 있어 한국의 8.8%에 비해 훨씬 높은 전철화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도로는 고속화율도 낮고 국도 자체도 비포장율이 높은 편이다. 북한의 도로 총연장은 1999년 말 현재 3,407㎞이고, 이 중 고속도로 길이는 682㎞이다. 지하철은 평양에 있으며 총34.0㎞(남한 250.9㎞)이다.

1998년 말 현재 항만능력은 연 3,501만t으로 추정되고 있다. 철도차량 보유대수는 기관차 1,153량, 객차 1,045량, 화차 2만1271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 보유대수는 26만9100대, 민용항공기 보유대수는 총 21대에 불과하고 소형이며 낡은 기종이다. 선박보유톤수는 92만톤으로 남한의 8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통신분야도 시설이 빈약한 편이다.

3차 7개년계획기간중 전화 200만 회선 증설을 목표로 설정하였으나 이에 대한 성과 보고는 없었고, 그 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대도시간의 현대적인 통신망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통신 분야에서 진일보한 것은 1990년 8월 정지위성과 궤도위성으로부터 기상자료를 수신할 수 있는 기상수문국과 기상위성수신소를 준공함으로써 중장기 기상예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통신망은 평양과 주요 도시간의 전화만 자동화되었을 뿐 대부분의 지방은 아직도 수동식 교환기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무역]

1950년대의 북한에서는 대외무역이 다만 자립적 민족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보조적 수단으로 이해되어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6개년계획 추진과 사회주의국가의 원조가 차관으로 바뀌게 되자 외채난에 봉착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70년대 말부터 수출 증대와 외화수입 증대를 위한 대외무역정책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대외무역 전담회사인 대성무역상사와 봉화무역상사를 설립하고 대외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대성은행과 금강은행 등을 설립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제6차 당대회(1980), 최고인민회의 제7기 3차회의(1984) 등에서 자본주의국가 또는 제3세계국가와의 교역 증대를 위한 여러 가지 방침들을 제시하면서 대외무역 및 경제협력 강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에서 무역 강화가 제시되었고, 계획이 실패한 다음 완충기(1994∼1996) 과업의 하나로 설정된 무역제일주의 방침은 북한의 외화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기구의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1992년 기존의 정무원 무역부와 대외경제사업부를 통합하여 대외경제위원회를 흡수하였다. 1992년 12월경 남북교역의 관련업무를 전담할 목적으로 발족된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는 1995년에 해체, 조선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합영사업(合營事業)을 보면, 북한은 1984년 9월 중국의 〈중외합자법〉을 본따 전문 5장 26개 조의 〈조선합작경영법〉을 제정하여 서방 자본주의국가를 포함한 세계 각국 회사·기업소가 북한 역내에서 합영기업을 설립, 운영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 후 합영법 시행을 위한 후속조치로 〈합영법시행세칙〉(1985) 등 각종 법규를 제정, 보완해 오고 있다.

그리고 1991년 12월에는 나진·선봉지역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설정한 데 이어 신의주 등 국경도시의 개방도 검토하고 있다. 그 동안 나진·선봉지역 개발실적은 49건, 계약금액 3억5000만 달러, 실제이용액은 22개 투자사업에 3400만 달러로 발표되었다.

북한의 무역총액은 1990년 이후 소련·동구권의 붕괴로 크게 위축되고 있다. 1990년 47억2000만 달러에서 1991년 27억2000만 달러로, 1994년 21억1000만 달러, 그리고 1998년에는 14억4000만 달러로 점차 감소추세에 있다. 무역수지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 1990년에 8억 달러의 적자가 1991년 7억 달러로, 1995년 5억7000만 달러, 1996년에는 5억2000만 달러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외화난으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역의존도는 1990년 20.4%(수출 8.5%, 수입 11.9%)에서 1996년에는 9.3%로 크게 줄어들었고, 수출의존도는 3.4%, 수입의존도는 5.9%에 머물고 있다. 외채도 증가하여 1980년 22억3000만 달러에서 1990년에는 78억6000만 달러, 1995년에는 118억3000만 달러, 그리고 1996년에는 120억 달러로 나타나고 있는데, 모두 순외채이다.

1989년 남북한 교류·협력사업이 추진된 이후, 남북교역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남북간 반출입 총액을 보면, 1989년 첫해 1872만4000달러이던 것이 1990년 1346만5000달러, 그리고 1998년에는 3억4천만 달러, 2000년에는 4억2515만 달러이며, 2000년 12월까지 교역실적은 25억834천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위탁가공 교역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현재 남북교역의 품목수는 589품목이며 2000년대 참여한 교역업체는 652개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그 동안 대외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으나 대외개방 조건의 미비, 내수시장과의 연계성 부족, 경제개혁 추진 미비 등으로 한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북한경제의 난국 극복방안이 과감한 개혁·개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우리식 사회주의’ 고수를 위해 자본주의사상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개방은 물론 북한 경제의 회생까지도 어렵게 하고 있다.

<정석홍>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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