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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0 (화)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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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01      
[조선] 조선시대의 문학 (민족)
문학(조선시대의 문학)

세부항목

문학
문학(문학사의 시대구분)
문학(상고시대의 문학)
문학(삼국시대의 문학)
문학(고려시대의 문학)
문학(조선시대의 문학)
문학(1860년 이후의 문학)
문학(1919년 이후의 문학)
문학(1945년 이후의 문학)
문학(국문학 연구사)
문학(참고문헌)

[조선 전기의 문학]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새 왕조에서 포부를 실현하려는 쪽과 고려를 위하여 충절을 지키며 은거를 택한 쪽이 문학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사회개혁을 완수하고 지배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라고 하였으며, 새 왕조의 위업을 빛내는 노래를 지었다.

길재(吉再)는 산중에 은거하며 절의를 표방하고 심성의 도리를 찾는 것을 문학의 주제로 삼았다. 원천석(元天錫)은 세상을 등지고 깊이 숨어 지난날을 회고하며 세태를 개탄하는 연작 역사시 〈운곡시사 耘谷詩史〉에다 정열을 쏟았다. 한편, 조운흘(趙云獄)·유방선(柳方善)은 새 왕조의 문풍이 사장(詞章)을 또한 중요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을 이룩해서 국문문학이 시작될 수 있는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 훈민정음은 이름 그대로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을 가르쳐서 통치하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유학에 입각해서 교화를 베풀고 행실을 가다듬는 데 소용되는 책을 한동안 펴내고, 불경 번역도 아울러 추진하자 국문 문장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더욱 뚜렷한 성과는 〈용비어천가〉(1445)와 〈월인천강지곡〉(1448)이다. 이 두 작품은 국어사의 자료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최초의 정음 문학이고 드물게 보는 서사시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건국시조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찬양한 왕조 서사시이고, 또 하나는 부처의 일생을 다룬 불교 서사시이어서 서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다.

왕조 서사시는 여러 문신들에게 명하여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룩하였으며, 불교 서사시는 세종이 스스로 지었다. 새 왕조를 칭송하자고 지은 노래가 악장(樂章)이다.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도 그 범위 안에 든다고 할 수는 있으나, 〈문덕곡 文德曲〉과 〈무덕곡 武德曲〉으로 분류된 정도전의 작품 몇 편이 그 기본을 이룬다. 그 전통을 이은 것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에도 상진(尙震)의 〈감군은 感君恩〉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와서, 국문시가에 악장이라는 갈래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경기체가는 권근의 〈상대별곡 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 華山別曲〉에서 볼 수 있듯이 악장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다가, 개인적인 관심사를 나타내는 쪽으로 선회하고 형식이 산만해지더니 조선 전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가사는 정극인(丁克仁)이 지었다고 하는 〈상춘곡 賞春曲〉이나 조위(曺偉)의 〈만분가 萬憤歌〉 이후에 사대부문학으로 자리를 잡고 은거가사·유배가사·기행가사 등으로 다채로운 발전을 보였다. 정철(鄭澈)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시조는 고려에 대한 회고의 느낌을 노래하여 감명을 주더니,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 江湖四時歌〉에 이르러서 새 왕조다운 조화를 이루고, 연시조(連時調)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불우한 무장의 기개와 사육신의 충절을 나타낼 때는 비장한 기풍을 지녔으나, 시조의 본령은 역시 자연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흥취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풍이 이현보(李賢輔) 이래의 영남가단과 송순(宋純) 이래의 호남가단에서 확립되자 작품의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에서는 심성의 바른 도리를 추구하는 연시조를 이룩하였다.

정철은 〈훈민가 訓民歌〉 연작에서 백성에 대한 교화를 나타내고, 다른 시조에서는 다채롭고도 능란한 표현을 구사해서 시조의 판도를 더욱 넓혔다. 한편, 기녀들이 시조의 작자로 등장해서 황진이(黃眞伊)나 이매창(李梅窓)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애틋한 정감을 하소연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세종 때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한 이래 한문학이 더욱 융성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기반을 물려받은 서거정(徐居正)은 안정과 번영을 장식하는 화려한 표현으로 한 시대를 이끌며, ≪동문선≫을 편찬하고 ≪동인시화≫를 지었다.

성간(成侃)과 성현(成俔) 형제는 사장파(詞章派)의 한문학이 한층 난숙해진 시기에 특권의식을 스스로 비판하기도 하고 자랑으로 삼기도 한 점에서 서로 대조적인 기풍을 보여주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성간보다도 더 불우한 생애를 보낸 박은(朴誾)은 어디서도 보람을 찾을 수 없는 심정을 시에다 쏟아 독특한 경지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계열은 도학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문학에 더욱 힘썼기에 사림파(士林派) 또는 도학파(道學派)와 구별되었다.

사림파의 지도자인 김종직(金宗直)은 문장을 앞세워 평가를 얻었으며, 자기 고장인 영남의 정서와 피폐상을 나타내는 작품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을 위시한 많은 제자가 뒤를 이었으나, 거듭되는 사화로 수난을 당해서 작품이 명성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경덕(徐敬德)·이황의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의 원리를 철저하게 탐구하면서 문학의 원리를 캐고 실제 창작에서도 사상적인 깊이를 전례 없이 갖추게 되었다.

선조 때 마침내 정권을 잡은 사림파는 박순(朴淳)·이산해(李山海)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도학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문학의 품격을 높이는 데서도 널리 평가될 수 있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미천한 처지를 타고났거나 반항적인 기질을 지녀 지배체제에 불만을 품고 이단적인 정신세계를 찾는 방외인(方外人)의 한문학은 다른 길을 택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이 우선 그러한 인물이어서,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농민의 참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소설을 창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노비 출신인 어무적(魚無迹)은 하층민의 처지를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내었다. 임제(林悌)는 불우한 처지가 아니었어도 어디에 매이기 싫어하는 기질 탓에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을 편력하면서 기행시를 짓고 울분을 달래었다.

모계가 천하다 하여서 배척받은 이달(李達)은 생활 감정을 절실하게 표현하는 시풍을 정착시켜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일컬어졌다. 여류시인으로는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시조와 함께 한시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기녀들도 있었다.

불경이 번역되고 불교를 대중화하고 생활화하는 데 기여하는 경전이 특히 여러 번 간행되었지만, 불교문학은 고려 때의 수준을 이을 수 없었다. 척불정책으로 타격을 입은 데다가 스스로의 생기마저 잃었다. 기화(己和)는 척불론에 맞서서 불교와 유학이 다를 바 없다고 하고, 보우(普雨)는 유·불·도 3교의 이치를 아우르겠다고 하였으나, 그러한 문장이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웠다.

보우는 〈왕랑반혼전 王郎返魂傳〉을 짓고 국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로 이름이 난 승려도 나오지 않아 한동안 적막하더니,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선 휴정(休靜)은 선시와 ≪선가귀감 禪家龜鑑≫으로 불교문학을 중흥시키는 데도 상당한 구실을 하였다. 한문학은 시와 문이 그 두 영역인데, 그 중에서 문에서는 새로운 갈래가 생겨날 수 있었다.

고려에서 물려받은 가전은 사물이 아닌 심성을 의인화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도학을 흥미롭게 표현하는 한편, 갈등과 번민을 나타내는 데도 쓰였다. 김우옹(金宇裵)의 〈천군전 天君傳〉과 임제의 〈수성지 愁城誌〉가 그 두 계열 작품의 좋은 예이다.

몽유록(夢遊錄)은 심의(沈義)의 〈대관재몽유록 大觀齋夢遊錄〉으로 처음 나타나서, 꿈에서 겪은 일을 서술한다면서 어떤 주장을 사건화하여 보였다. 이 작품은 가상의 문장왕국을 다루었는데 비하여 임제가 작자로 밝혀진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에서는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울분을 함께 토로한 내용이니, 몽유록은 소재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하겠다. 명분과 위엄을 중요시하는 사대부가 비속한 설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나 성현의 ≪용재총화 弁齋叢話≫ 같은 잡록도 설화를 적지 않게 수록하였지만,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에서 시작해서 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 村談解蓬≫,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 禦眠楯≫으로 이어지는 골계전류에서는 음담패설을 한문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소설로까지 발전한 설화는 이러한 것들이 아니고, 죽은 여자와 인연을 맺었다는 명혼설화(冥婚說話), 꿈속에서 뜻을 이루었다는 몽유설화(夢遊說話)이다. 김시습은 이 두 유형을 고독한 주인공이 사랑과 포부를 역설적으로 실현하는 구조로 바꾸어놓아 ≪금오신화 金鰲新話≫에 수록된 소설 다섯 편을 처음으로 이룩하였다.

조선왕조는 고려 때의 전통을 이어서 경축할 일이 있으면 산대희(山臺戱)를 공연하고 그믐날이면 나례(儺禮)를 거행하였는데, 그러할 때마다 노래와 춤, 각종 곡예, 그리고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하는 광대, 재인의 무리를 동원하였다.

소학지희는 자못 연극적인 내용을 갖춘 재담인데, 산대희나 나례와 별도로 공연되면서 관원들의 좋지 못한 풍습을 풍자한 내용을 갖추기도 하여서 주목된다. 명종 때의 이름난 광대 귀석(貴石)이 그러한 놀음을 잘하였다고 한다. 한편, 탈춤은 민간에서 전승된 듯한데, 박광대·중광대·양반광대·초란이광대 등의 배역을 갖춘 것이 보인다.

[조선 후기의 문학]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거듭된 전란은 문학에도 깊은 충격을 주어서 현실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전란의 참상을 증언하고 나라를 위해서 고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데 각계각층 유명·무명인이 분발하였던 것도 주목할 만한 전환이었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 亂中日記≫와 시조, 박인로(朴仁老)의 〈선상탄 船上嘆〉같은 가사는 참전한 장군의 증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 懲毖錄≫은 뒷수습을 맡은 재상의 기록이고, 강항(姜沆)의 ≪간양록 看羊錄≫은 포로로 잡혀간 선비의 수기여서 임진왜란 때의 수난과 분발을 여러모로 나타내 준다.

병자호란을 겪고 이룩한 작품도 다양하여, 무명 궁녀의 ≪산성일기 山城日記≫(1636)가 있다. 또한 김상헌(金尙憲)과 삼학사가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지은 시조가 전해져 더욱 이채롭다.
한편, 〈달천몽유록 達川夢遊錄〉·〈피생명몽록 皮生冥夢錄〉·〈강도몽유록 江都夢遊錄〉 같은 몽유록에서도 전란에서 겪은 참상과 그 후유증을 다루었으며, 수많은 설화가 생겨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소설로 수용되었다.

한문학은 복고와 혁신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권필(權億)과 허균(許筠)이 규범과 격식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정통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서 나타났다.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장유(張維)는 4대가로 일컬어지면서 복고적인 고문을 온전하게 하는 데 보조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을 위시한 실학파는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려 갈등을 생동하게 표현하는 문체를 창안해서 이와는 다른 길을 열었다. 정약용(丁若鏞)이 농민의 참상을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자 한시에서도 변모가 일어났다. 신위(申緯) 같은 시인은 개성 있는 표현을 통해서 한시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였다.

그 무렵 한시의 소재를 조국의 역사와 당대의 풍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확대되어 〈해동악부 海東樂府〉라고 하는 작품이 계속 나타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한문학이 민족문학으로서의 사명을 깊이 자각하는 데 이르렀다.

과거를 보아 영달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중인·서리·시정인 등이 불리한 위치를 분발의 발판으로 삼아 한시를 짓는 데 대거 열의를 보이자 문학의 판도가 달라졌다. 이들을 위항인(委巷人)이라고 한다.

정내교(鄭來僑)·장혼(張混)·조수삼(趙秀三)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위항인문학은 사대부문학과 같은 기준에서 경쟁하려는 것만이 아니었고 독자적인 방향을 찾았다. 서로 어울려 시사(詩社)를 결성하며 결속을 다짐하였다.

자기네의 한시는 풍요(風謠)라 하고서, 풍요는 지위나 학식에 구애되지 않는 천기(天機)가 저절로 드러난 것이라고 하였으며, 세태를 묘사하는 것을 실제 창작에서 장기로 삼았다. 창작의 성과를 스스로 정리해서 널리 알리기 위하여 ≪소대풍요 昭代風謠≫(1737)·≪풍요속선 風謠續選≫(1797)·≪풍요삼선 風謠三選≫(1857)을 편찬하였다.

문학의 본질과 사명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나타나면서 문학사상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허균은 문학이 도학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이치 이전의 자연스러운 정(情)을 긍정하여야 한다 하며, 험난한 경험이 창작의 바람직한 원천이라고 하였다. 장유는 문학이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은 모방에 급급한 한시문보다 무식한 사람들의 민요가 더욱 진실된 문학이라는 파격적인 논의를 폈고, 홍만종(洪萬宗)은 역대의 시화를 정리해서 ≪시화총림 詩話叢林≫을 편찬하는 한편, 국문시가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였다.

홍대용(洪大容)은 일원론적 주기론(一元論的主氣論)을 배경으로 해서 문학이 천기의 발현이어야 하므로 선악이나 교졸을 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이론을 심화하였다. 박지원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문학론을 통해서도 찾았으며, 정약용은 ‘조선시(朝鮮詩)’를 이룩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대부 시조는 윤선도(尹善道)에게서 언어 구사의 세련됨이 최고 수준에 이른 반면에 현실 감각은 오히려 고갈되었다. 그 뒤에, 이정보(李鼎輔)가 많은 작품을 내놓았고, 이세보(李世輔)는 가장 많은 수에 이르는 자기 작품으로 개인 시조집을 엮었다. 그는 위항인 시조의 작풍을 적지 않게 받아들인 탓에 창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위항인은 한시에 힘쓰는 것과 병행하여서 시조에서도 사대부와 경쟁하였다. 위항인 출신의 가객들은 가단(歌壇)을 이루어 시조창과 창작을 수련하고 시조집을 편찬하였다. 평시조는 온통 바꾸어놓기 어려웠으나, 평시조의 품격과 형식을 파괴하고 비속한 경험을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사설시조를 만들어낸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1728)에서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1763년),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1876)로 이어지는 시조집은 시조의 위치를 더욱 높이는 데 기여하였으며, 자료수집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경기체가가 자취를 감춘 대신에 가사는 더욱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길이가 길어지고 형식이 산만해지는 한편, 일상 생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소재가 확대된 것이 두드러진 변화이다. 기행가사로는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견문한 바를 다룬 것들이 나타났다.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는 1763년(영조 39) 일본으로,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 燕行歌〉는 1866년(고종 3)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의 일원으로 참가한 다음 두 나라의 사정과 풍속을 각기 자세하게 묘사한 장편이다. 풍속가사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일년 동안의 농사일을 달거리로 서술한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 서울의 풍물을 소개하면서 도시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낸 〈한양가 漢陽歌〉가 있어서 높이 평가된다. 〈우부가 愚夫歌〉 같은 것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파괴되는 양상을 흥미롭게 나타내었다.

천주교에서 교리를 풀이하고 퍼뜨리자고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辭)도 적지 않은 수에 이르렀다. 가창가사(歌唱歌辭)가 성행하는 한편, 규방가사(閨房歌辭)가 나타났다. 지금 구전되고 있는 설화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도 있었을 터이나, 그때 생겨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숙종대왕미행담〉·〈어사 박문수이야기〉 같은 것들은 해당 인물보다 앞서서 생기지 않았으며, 전에 볼 수 없었던 민중의 기대와 각성을 나타낸다. 김선달·정만서 같은 주인공을 설정해서 세태를 풍자하는 설화는 더욱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고 널리 퍼졌다.

역사적인 내용을 지닌 인물전설은 야담이라고 하여 사대부 사이에서도 관심을 끌었으며,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 於于野譚≫에서 시작해서,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 靑丘野談≫, 이희준(李羲準)의 ≪계서야담 溪西野談≫, 이원명(李源命)의 ≪동야휘집 東野彙輯≫(1869)으로 이어지는 역대 야담집에서 거듭 정리되었다.

그 가운데는 소설로 볼 수 있는 것들도 수록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시작된 한문소설은 허균의 〈남궁선생전 南宮先生傳〉·〈장생전 蔣生傳〉 등에 이르러서 활력을 다시 얻어 그 범위와 특성이 다소 유동적인 채, 국문소설에 비해서 주제의식이 한층 뚜렷해졌다.

이항복(李恒福)의 〈유연전 柳淵傳〉이나 권필의 〈주생전 周生傳〉 같은 것들은 실화를 다루었다고 한다. 정태제(鄭泰齊)의 〈천군연의 天君演義〉같은, 심성을 의인화한 가전류가 한문소설로 취급되기도 한다. 〈창선감의록 彰善感義錄〉·〈구운몽〉·〈옥루몽 玉樓夢〉 등은 국문본과 한문본이 함께 유통되면서 광범위한 인기를 모았다.

한문단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야담과 소설 양쪽에 걸쳐 있다고 하겠으나, 박지원의 〈허생전 〉·〈양반전〉 같은 작품은 치밀한 구성과 깊이 있는 주제를 갖추고 사회비판을 전개하였기에 특히 높이 평가된다. 그 뒤를 이어서 이옥(李鈺)·김려(金捏) 등이 이에 못지 않은 경지를 계속 보여주자 한문소설의 의의가 더욱 확대되었다.

안민학(安敏學)이라는 사람이 자기 부인의 관에다 넣은 애도문(哀悼文, 1576)이 발견되기는 하였어도 조선 전기에는 국문이 산문의 영역에서 넓게 이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우선 사대부 부녀들 사이에서 내간·제문·일기·실기 등을 국문으로 짓는 풍속이 정착되고, 궁중에서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산성일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궁중 실기류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1805)은 비극적인 체험을 우아한 문체로 나타내어서 더욱 감동을 준다 하겠다. 소설이라고도 하는 〈인현왕후전 仁顯王后傳〉은 덕행을 강조하고자 지은 것이나 흥미 또한 적지 않다.

작자가 남성이라고 밝혀진 국문본 실기로는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1678)가 있어서 세태 묘사를 하였고, 유의양(柳義養)의 〈북관노정기 北關路程記〉(1773) 같은 기행문도 보인다.

국문이 이처럼 널리 이용되자 국문소설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국문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도술을 부리는 주인공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을 삼았다.

〈전우치전 田禹治傳〉도 그러한 예일 뿐만 아니라, 〈임진록 壬辰錄〉·〈박씨전〉·〈임장군전 林將軍傳〉에서 역사적인 시련을 이겨내는 영웅의 투쟁을 그릴 때에 사용된 수법이라는 점에서 또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조웅전 趙雄傳〉·〈유충렬전〉 등에서는 중국을 무대로 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영웅의 투쟁이 전개되고, 〈숙향전〉 같은 것은 시련을 극복하는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였다.

김만중의 〈구운몽〉·〈사씨남정기〉는 이러한 전통과 연결되면서 한층 더 세련된 표현을 갖추었다. 이러한 성과가 장편을 이루어 남영로(南永魯)의 〈옥련몽 玉蓮夢〉같은 것이 나타났으며, 사대부의 이상을 뒤집어놓은 작품으로는 〈천수석 泉水石〉이 있다. 〈명주보월빙 明珠寶月聘〉 연작, 〈완월회맹연 玩月會盟宴〉 등의 대장편도 생겨나서 소설의 인기를 알 수 있게 한다.

전기수(傳奇馬)가 낭독을 하고, 방각본(坊刻本)으로 출판이 되어 세책가(貰冊家)에서 빌려주면서, 국문소설은 작품이 계속 늘어나고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작자를 알 수 없는 대부분의 작품은, 소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수입이나 노리고 창작한 탓이다.

판소리는 서사무가를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서사시로 바꾸어놓는 데서 시작되었고, 직업적인 광대가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발전시켰다. 광대가 하층민이기에 겪는 고난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상하층의 관심을 한데 아우르고자 하였기에 판소리는 특이한 구조와 주제를 갖추었다.

1754년(영조 30)에 이루어진 만화본(晩華本) 〈춘향가〉가 있는 것을 보면 판소리가 성립된 시기는 숙종말∼영조초가 아닌가 한다.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여섯 마당만 사설이 전한다.

〈춘향가〉·〈흥부가〉·〈심청가〉·〈수궁가〉는 관습적인 도덕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당시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주제를 생동하는 문체로 나타내었기에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소설로도 널리 읽혔다. 〈가루지기타령〉은 남녀관계를 음란하게 다루며 유랑민의 처지를 문제로 삼았다.

신재효(申在孝)가 〈적벽가 赤壁歌〉까지 포함한 여섯 마당을 다듬으며 판소리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결과 판소리가 상승을 하면서 민중의식은 도리어 약화되었으리라고 본다.

민속극은 무당굿놀이·〈꼭두각시놀음〉·탈춤의 세 가지로 전승되면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 동안의 성장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탈춤을 선두로 주목할 만한 변모를 보였다. 농촌마을에서 양반의 묵인하에 공연되던 농촌탈춤이 상업도시의 발달과 함께 도시탈춤으로 바뀐 것이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18세기 이후 서울 근처의 산대놀이, 황해도 지방의 해서탈춤, 경상도 낙동강유역과 동해안의 오광대(五廣大)와 야류(野遊)가 나타났으며, 그 모두가 종래의 제약을 벗어나서 비판적인 희극으로서의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가지게 되었다.

취발이와 말뚝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노장과 양반이 보여주는 종교적인 관념과 신분적인 특권의식을 비판하는 한편, 영감과 할미가 다투는 과장에서는 남성의 횡포까지 문제삼는 것이 공통적인 주제이다. 이와 함께 〈꼭두각시놀음〉은 모든 권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으며, 무당굿놀이는 흥미 본위의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민요에서도 적지 않은 변모가 일어났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는 바이나,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민요와 가사의 중간 형태쯤 되는 것들이 〈기음노래〉·〈합강정가 合江亭歌〉·〈거창가 居昌歌〉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거기 나타난 항거와 고발을 알아볼 수 있다. 후대에 수집된 민요 중에도 그러한 내용을 갖춘 것이 적지 않아 서로 대응된다.

한편, 〈아리랑〉 같은 것은 19세기쯤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 비판을 하는 것으로 특징을 삼는다. 무가에서 〈노랫가락〉이 파생되어 나온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조동일>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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