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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3 (일)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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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92      
[현대] 구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조규철)
제7장 구총독부 해체- ‘광복 50주년’의 반일 풍경 ②

'역사파괴'와 '역사직시'
50년 후의 '민족 자존심'
오욕의 역사는 보고싶지 않다
옛 총독부는 부실공사?
'역사의 청산'이란 무엇인가

수도 서울 거리의 중심은, 대통령 관저 뒤편에 우뚝 솟은 북악과 남대문을 잇는 남북의 세종로·태평로의 라인(線)과,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는 동서간의 종로 라인이 교차하는 광화문 네거리이다. 광화문은 청와대(대통령 관저)의 전면(前面)에 위치한 경복궁의 한 문으로서, 북악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고 있다. 광화문 부근에는 정부종합청사과 관련 관청이 있고, 미국대사관과 일본대사관도 있기 때문에 관청가라고 해도 좋다.

이 광화문 주위의 풍경은 최근 완전히 변해 버렸다. 광화문 안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해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에 돔을 이고 있던 근대 건축양식의 수려하고 거대한 건물이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남과 북을 잇는 선상에 큰공간이 생겼다. 남에서 북으로의 전망이 트이게 된 것이다.

지금, 남대문 혹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광화문 뒤에 바로 청와대가 있는 북악이 보인다.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정부의 중앙청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는데, 과거의 풍경에 익숙했던 감각으로서는 어딘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없어지고 나서 보니 정말 바람이 잘 통한다. 역시 그 건물은 광화문 일대의 풍경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大正 15년), 한국(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상징하기 위해 고궁 경복궁의 부지 내에 궁전의 일부를 철거하고 세워졌다. 옛 총독부청사가 해체 철거된 자리에서는 경복궁의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옛 총독부 청사는 좋든 싫든 한국(조선)에 있어 근대의 상징이었다. 건물 자체가 르네상스 양식의 근대 건축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일본 지배를 통해 한국 땅에 가져온 근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이 사라짐으로써 우선 풍경으로 볼 때, 광화문에서 근대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경복궁으로 상징되는 중세와, 다음은 현대식 빌딩이다.

한국은 지금, 중세와 현대의 틈새인 근대를 총괄하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근대를 가져다 준 일본지배는 전면 부정했지만 스스로 만들어 낸 근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국정 역사 교과서는 일본지배 이전에 스스로의 근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싹이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지배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가 저해되어 오히려 발전이 늦어졌다고 한다.

앞서 설명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지배하의 경제발전을 한국인 자신의 근대화의 노력으로서 평가하려 하는 것이다. 근대화의 계기는 일본지배가 주었지만 그것을 경제발전 등 근대화의 성과로 연결한 것은 한국인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포항종합제철소를 견학한 자리에서 제철소의 간부에게 일본으로부터의 원조 협력에 대해 질문했었다. 자금과 기술 모두 일본의 협력으로 시작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간부는 포항제철의 성공을 소개하면서 "선생도 좋았지만, 학생도 훌륭했다"고 말했다. 세계의 톱기업으로서의 여유가 가능케 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과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전면 부정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에서는 아직 대세가 되지는 못했으나,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본지배라고하는 부정해야할 과거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어 해체 철거되어 버렸다.

'역사파괴'와 '역사의 직시'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만 오십년이 되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슬로건 하에 단행된 옛 조선총독부의 해체 철거는 한국의 대일 내셔날리즘의 '현주소'를 생각하는데 있어, 귀중한 사건이었다. 그 건물은 그 시점에서 왜 폭파된 것일까.

그 전에, 필자는 한국에서 강연이나 잡지의 기고문 등에서의 발언이 '망언'이라 하여 공개적으로 비판받은 적이 몇 번인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옛 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문제에 관한 것이다. 1994년 2월, 서울시장을 맞이한 서울외신기자클럽의 회견 자리에서, 그 타당 여부를 질문했었다.

옛 총독부 청사에 대해서는 정부방침으로 95년말까지 해체·철거가 정해져 있었지만 서울시장으로서의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마침 그 해가 서울천도 육백년으로서 각종 기념행사가 계획되고 있었다. 서울의 한 상징으로서 그 건물의 행방은 무시할 수 없다. 질문은 서울 육백년 역사 속에서, 그 건물은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하는 역사적 관점과, 서울의 거리만들기라고 하는 관점에서였다.

질문은 "서울 육백년의 역사 속에서 옛 총독부 청사가 존재한 68년은 결코 짧지 않다. 더욱이 68년 중에 49년은 대한민국의 것으로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역사의 증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해체·철거는 '역사파괴'라는 견해도 있다. 서울시장은 이 문제에 대해 정부와 따로 이야기 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개인이 이사할 때에도 버려야 할 것과 가져가야 할 것의 선택이 어려운 법이지만, 버려야할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한다. 지금이야말로 민족사의 긍지를 높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정부하고는 이전부터 이야기해온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문제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각 언론은 일제히 이 질문을 '망언'이라 비난한 것이다. 기자회견의 질문내용이 발칙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물며 외신기자 클럽에서 행한 외국인 기자의 질문을, 국내지가 일제히 비난한다는 것도 한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망언'이라는 것은 초논리적인 논리 밖의 규탄대상이니까 그 모양새가 어떻든간에 관계 없을 것이다.

이 때의 각지의 비난은, 예컨대 "한국정부가 난산 끝에 최종결정을 내린 문제를 '역사파괴' 따위로 부르는 것은 또 하나의 '망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기자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일본이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진정한 반성 없이, 아직까지 그들만의 과거의 잣대로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보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한국일보》)라는 것이다.

혹은 "이날의 기자회견은, 자신들의 과거의 영화의 상징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일본인 기자, 일본 지식인들이 느끼는 '본심'의 일단을 속속들이 보여준 장면이었다"(《문화일보》)라든가, "(질문에는) 지배자로서 군림한 시대에 대한 향수가 배경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민족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결정된 철거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은,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의 논리'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서울신문》)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신문투서에서도 '일본기자의 망언에 분노'라는 비난은 계속되었지만, 질문의 내용은 결코 향수라 부를 만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좋든 싫든 역사는 역사'로서 소중히 해야 한다고 하는, 그야말로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흔히 말하는 '역사의 직시'라고 하는 관점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해방 후의 한국현대사의 '현장'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미군정청은 그 건물에서 해방직후의 한국을 관할했으며,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선언과 제헌의회, 초대 대통령 취임식은 모두 그 건물에서 행해졌다. 1950∼53년의 한국전쟁은 그 건물의 쟁탈전이 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가 몇 번이고 올려졌다가 내려지기도 했다. 더욱이 쿠테타에서는 군이, 반정부 데모에서는 학생이, 각기 그 건물을 향했다. 정부의 중앙청으로서는 약 40년간 이어졌다.

더구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거액을 들여 내부개조를 하고 개관한 것이 1986년이므로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의 현대사를 왜 돌아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해체·철거를 서두르는가.
대체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새로운 중앙박물관이 없기 때문에 같은 부지의 한쪽 구석에 있던 별도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장품을 옮기고 임시로 중앙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총독부 청사에 의해 파괴된 고궁·경복궁을 복원한다면서 그 부지에 또 임시의 박물관을 짓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방직후부터 해체·철거론이 있었다. 그러나 쓸 수 있는 건물은 파괴하는 것보다 사용해야한다는 현실론이 우선했다. 새로운 정부청사나 중앙박물관을 짓는데 필요한 재원, 거기에 해체·철거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그대로 두고 현실적으로 이용하는 편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3년에 발족한 김영삼 정권 하에서 갑자기 해체·철거론이 갑자기 태동한다. 신정권이 자신의 존재 의의을 과시하기 위한 최우선 정책으로서 이 문제에 달려든 것이다. 재정이나 재원의 현실론에서가 아니고, '민족정기의 회복'이라고 하는 관념론에서 였다. 그러나 신정권의 존재의의 과시라고 하는 목적으로 보자면, 그것도 또한 정권에 있어서는 정치적 현실주의였지만 말이다.

50년 후의 '민족 자존심'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출범으로부터 반년이 지난 1993년 8월 8일의 국무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광복절을 앞두고 그리고 민주공화정의 법통을 최초로 수립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유골봉안에 즈음하여, 고뇌 속에서 심사숙고해 왔지만,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회복을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건물을 될 수 있는 한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선조의 빛나는 유산이자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총독부의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건물 해체와 함께 통일 한민족시대에 대비하여, 오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부합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서 건설하는 문제를 하루속히 검토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들 모두는 민족사의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서 나아가야 한다"

이 발표에서 '광복절'이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기념일인 8월 15일이며, 그 후에 나오는 '임시정부요인들의 유골봉안'이라는 것은, 일본통치시대에 상해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통칭 상해임시정부라 불리우며 1919년에 성립)의 망명정치가들의 유골을 상해로부터 한국에 이전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60년대 이래, 30년 이상에 걸쳐 계속되어 온 군인출신 대통령을 대체하는 오랜만의 문민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신정권을 '문민정권'이라 칭했다. 그리고 문민지배의 한국정치의 전통을 계승한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라며 스스로를 자랑하고, 그 권위 부여를 위해 민족주의를 한껏 이용했다.

그 때, 우선 떠올린 것이 옛날 상해임시정부 관계자들의 유골을 상해의 묘지로부터 한국의 국립묘지로 이전하는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정부행사로서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문민정권의 정통성을 보다 높이기 위해 '독립정신의 계승·발전'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뒤이어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를 구상했다.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해체·철거는 1995년부터 96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것도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지 만 오십년을 기념하는 '광복 오십주년'을 기회로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우선 이 해의 '3.1절'에 해체·철거를 천지의 신에 고하는, 말하자면 지진제(地鎭祭)와 같은 '고유제(告由祭)'라는 전통제례가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3.1절'은 일본통치시대인 1919년, 일본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대규모 항일독립운동 기념일이다. 그 후, 실제의 해체·철거는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 기념일인 8월 15일 '광복절'에 착수되었다.

이 날은 광화문 앞에 대규모 계단식 좌석이 마련되어, 김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요인과 시민 등 약 5만명이 참가하여, 각종 퍼레이드와 가무, 전통악곡을 곁들인 화려한 축하행사로서 행해졌다. 그리고 김대통령 등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석조 오층 청사의 중앙부분에 치솟은 돔의 첨탑 부분이 해체·철거 개시의 상징으로 대형 크레인에 의해 떨어져 나왔다. 작업에는 색색의 연막까지 사용되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 날, 행사를 주관한 문화체육부 장관 주돈식 장관은 다음과 같은 '고유문(告由文)'을 낭독했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민족의 생존마저도 박탈한 식민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正宮)·복원 작업과 새로운 문화거리의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한다."

전술한 김영삼 대통령의 담화도 그렇고, 문화체육부 장관의 '고유문'도 그렇고,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 이래 오십년이나 지난 시점에서의 발언치고는 이상하리 만큼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마치 어제까지 조선총독부가 존재하고 있었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이 해체·철거는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 직후의 환희 속에서 민족감정의 폭발이라는 격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반세기나 더 후에 계획적인 행사로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방 후, 건국선언과 헌법발포의 무대가 되었고, 오랜 기간 정부의 중앙청사로서 국정의 중심무대가 되었고, 더욱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서 국민들에게 친숙해진 지금에 와서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 해체·철거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나 전쟁에 의한 이민족 지배의 결과로 남은 건물이 그 지배가 끝난 후, 오십년이나 지난 후에 [민족의 자존심]을 이유로 정책적으로 파괴된 예는 세계사적으로 극히 드물다. 한국 내셔날리즘의 특이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체·철거되기까지의 50년간의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는 어찌된 것인가. 또는 그 건물의 파괴로서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는 회복된 것인가.

오욕의 역사는 보고싶지 않다

김영삼 정권에 의한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에는 찬반 양론이 있었다. 이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어온 점도 있어서 박물관 이전의 문제까지 얽혀 의견은 복잡해져 갔다. 해체·철거가 결정되고 해체작업이 착수된 후에도 논의는 꼬리를 이었다.

찬성론은 물론 김영삼정권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핵심은 민족주의감정이다. 그러나 같은 민족주의의 관점에서의 반대론도 상당히 강력했다. 그 논점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본지배의 상징이고, 후세에 역사적 교훈, 민족적 교훈으로서 보존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반대론에는 "영화의 역사도 오욕의 역사도 역사는 역사이고, 함께 역사로 남아야 한다" 혹은 "오욕의 역사야말로 배워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반대론은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대세는 "오욕의 역사는 보고싶지 않다", "파괴해 없애버려라"는 요지였다. 반대론자들 사이에서는 고궁(경복궁)복원론을 수용하면서, 철거는 하되 박물관은 이전보존하자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역시 소수론으로 끝났다. 한편, 건축사적인 관점에서 반대론도 있었지만 민족주의감정 앞에서는 결코 저항할 수 없었다.

이 밖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서 대체할 건물을 준비하지 않은 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해체·철거하는 것은 박물관 운용면에서 불합리한 점을 이유로 조기해체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강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박물관 논쟁에 가까운 것으로 그 건물이 식민지시대의 옛 조선총독부 청사이기 때문에 발생된 민족주의 문제와는 논점을 약간 달리한다.

단지 이런 주장은, 민족주의를 간판으로 정권 이미지와 정권의 업적 만들기를 위해 국민정서를 동원하여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를 서둘렀다는 김영삼 정권의 정권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일본에 얽힌 내셔날리즘, 즉 반일감정이 일단 동원되면 달리기 시작한 자동차=여론을 막을 도리는 없다고 하는 것을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어떤 반대론도 해체·철거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서 '역사의 교훈'으로서 보존을 주장한 해체·철거 반대파에 대한 찬성파로부터의 최대의 반론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옛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부지 내에 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 '민족자존심', '민족정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왕궁의 일부를 헐어내 그 부지에 총독부 청사를 세운 일본 지배의 '우격다짐'에 대해, 한국인의 내셔날리즘은 몹시 상처받아,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는 것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대만이나 옛 만주를 비롯, 세계의 옛 식민지 국가에서는, 총독부 청사를 비롯 구지배자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경우처럼 파괴한 예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와 다르게 그 장소가 왕궁 안이었기 때문에 반발은 지금도 계속되어, 해체·철거론의 유력한 근거가 되어온 것이다.

총독부 청사를 지은 장소에 대해서는 당초는 다른 장소도 후보에 올라 있었지만, 테라우치 마사카타(寺內正毅) 초대 총독의 의견으로 경복궁 안으로 정해 졌다고 한다.

총독부 청사는 테라우치 총독시대인 1916년에 착공되어, 3대인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시대인 1926년에 완성했다. 총독부 청사의 완성이 가까워 지면서 전면(前面)에 있던 광화문이 헐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조선문화에 이해가 깊었던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건축물을 위해〉라고 하는 문장으로 그 그릇됨을 호소하고 있다(잡지《개조》 1922년 9월호).

그 문장의 서두에서 야나기는 "만약 지금 조선이 부흥하고 일본이 쇠퇴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되어 궁성이 폐허가 되고, 대신 그 자리에 방대한 서양식 일본총독부 건축이 세워져, 성벽 주위의 연못 너머로 훨씬 추앙받은 하얀 벽의 에도성이 헐리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라고 적고 있는데, 일본인 중에도 그 건축장소에 대해 강한 위화감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문제의 광화문은 결국 파괴를 면하여 경복궁의 별도의 장소로 이전하여 보존되었다. 그러나 해방후의 한국전쟁(1950∼53년) 때에 시가전에서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9년에 복원된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총독부 청사를 세운 일본당국은, 그 땅에 대한 새로운 지배자로서 옛 지배자인 조선 조정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과시하는 의미에서 그 장소를 택했을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민족적 자존심에 거슬리는 굴욕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 논리로서는, 그 민족적 자존심을 부수어 일본지배에 복종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장소를 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조선)으로서 그 고통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었겠지만, 조선식민지 통치는 일본에게 그 정도로 단호한 결의를 요하는 것이었을 게다. 광화문의 문화적 가치를 평가하여(한국국민의 민족적 심정을 고려하여) 고궁의 일부를 부지로 하는 총독부건설계획을 변경할만한 정치적, 문화적 여유는 당시의 일본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정당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그것도 또한 혹독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었다는 것이다.

구총독부는 날림공사?

지금은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그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서울에서(한국에서) 가장 수려한 근대건축이었다. 완성으로부터 7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있어서도 그 위용은 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건축사가들 사이에서조차 보존론이 나올 정도였다. 그 때문일까, 한국의 매스콤은 해체·철거과정에서 그 구조가 완전한 석조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콘크리트 위에 대리석이나 화강암 판을 붙인 합성한 벽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오히려 '날림공사'로 각인시키려 했다. 건축사적인 가치를 끌어내리려고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역시 해체·철거작업의 과정에서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청사의 중앙계단의 지하근처에 비밀 지하실 네 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각각의 크기가 서로 다른 작은 방으로 합계 27평 정도의 것이었는데, 한국의 매스컴은 박물관 당국자와 국수주의 단체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하고문실 발견!"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방 가장자리의 바닥은 도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으로 흘린 피를 씻어 흘려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자료적으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었는데, 추정만으로 정부관계자, 매스컴은 그렇게 전했다.

무엇을 위해 사용된 방일까 실제로는 알 수 없다. 상식적으로는 경찰서라면 몰라도, 총독부 청사의 그것도 중앙 홀 아래의 지하실에 범죄 용의자(?)를 가둔 감방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각각의 작은 방에는 열쇠가 잠겨져 있고, 이중창으로 들여다 보이는 형태의 작은 창 외에, 문은 그 두께가 14센치의 철문이었다. 철문의 내부에는 모래가 체워져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매스컴은 이 문의 구조를 가리켜, 고문의 비명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한 방음장치라는 상상을 입을모아 하고 있다.

진상은 모른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일본과의 과거에 대해서는 '총독부-악의 소굴-독립운동탄압-고문지배'라고 하는 도식으로 밖에 상상하지 못한다. 그 결과가 '총독부 지하에 고문실'이라고 하는 추정보도가 되었다. 일본인으로서 굳이 다른 상상을 해보면, 지하실의 위치, 방의 형태, 그리고 문의 구조 등으로부터, 그것은 방화장치를 갖춘 서류창고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것은 일단 제쳐두고,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에 완성했는데, 그 수려함과 위용은 당시의 한국민에게 있어 간담을 서늘케 했을 것이다. 특히 그 뒤에 위치한 경복궁의 전통적인 목조 궁전들과는, 어쩔 수 없이 비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 국민에게 강렬한 위압이 되고, 민족적인 몰락감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지배상황을 통감시켰음에 틀림없다. 이민족 지배라고 하는 것은 실로 그런 것이었다.

건설공사에 착수한 후 3년 후인 1919년에는, 35년간의 일본통치하에서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난다(한국의 국정역사교과서에는 그 희생자로 사망자가 7509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때는 공사는 아직 기초단계였을 것이다. 완성한 1926년 당시는, 그때까지의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총독(1919년 8월 부임)시절이었다.

그 후, 한국인들의 민족적 저항은 해외에서 격렬한 테러 등 부분적인 항일투쟁을 제외하면, 국내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항일테러로서는 1932년(소화 7년) 1월, 동경·사쿠라다몬(櫻田門) 근처에서 소화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천황암살을 시도한 사건이 있다. 범인은 상해 임시정부계의 항일활동가 이봉창이었으며, 같은 해 4월, 역시 상해임시정부계의 활동가 윤봉길에 의한 상해에서의 천장절(天長節) 축하행사에 대한 폭탄테러사건이 있다.

이 테러에서는 상해파견군 사령관인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사망하고, 시게미쓰 아오이(重光葵) 공사가 부상 당했다. 1945년, 동경만에서 미함 미쥬리호에서의 항복문서조인식 때에 시게미쓰는 한쪽 다리를 끌고 지팡이를 짚은 모습으로 역사적인 사진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 다리의 부상은 상해시대의 테러에 의한 것이었다.

여담을 하자면, 이 사건의 현장은 상해의 虹口 공원(현재의 魯迅공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3월의 중국방문 시, 이곳에 사건(한국에서는 '의거'로 되어 있다)을 기념하는 정자를 세워, 대통령 스스로 이 현장을 방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임기 중, '민족정기의 회복'과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칭해, 과거의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 빈번히 몸을 의지했다.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그 의미에서 김영삼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지향적 정권이었다. 반일의 역사에 기대어 자신을 내셔날리스트로서 인상지우고, 정권의 존재의식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에게 있어 내셔날리즘은, 국민(여론)으로부터 정치적평가를 받는 데에 있어 가장 큰 테마이다. 그리고 그 내셔날리즘을 만족시키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소재가 '반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진심으로 반일 민족주의자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코 비범하지 않았던 정치지도자로서 '반일'의 매력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의 청산'이란 무엇인가?

고궁·경복궁의 한 켠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감춤으로써 광화문 일대의 서울의 중심 부분은 통풍과 전망이 좋아졌다. 총독부 청사 자리를 포함한 경복궁의 복원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윽고 조선왕조의 고궁이 북악을 배경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름답게 완전 복원될 것이다.

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작업 과정에서, 그 콘크리트 조각과 돌조각 등 잔해를 기념품으로서 활용하자는 안이 매스컴 등에서 나온 적이 있다. 역사의 교훈으로서 하다못해 그 부서진 조각만이라도 이용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말하자면 '베를린 장벽'의 한국판과 같은 발상이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산산조각 내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이른바 '일제(일본제국주의)'의 흔적을 전부 없애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름답게 고궁을 복원하는 것이 '역사의 청산'이고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것이다. 그 결과,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는 회복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역사관은 흥미롭다. 역사는 아름답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고궁 한 켠에 한국인으로서는 고궁을 위압하는 듯 추악하게 치솟은 옛 총독부 청사의 존재는, 확실히 민족의 자존심에 거슬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단지, 그런 형태로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민족, 곧 내셔날리즘은 자극된 것은 아닐까. 총독부의 위용과 그에 짓눌린 듯한 고궁의 대조 속에야 말로, 역사의 진실이 있고, 거기서부터 민족의 자존심으로서 저항, 반성의 기운도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존보다는 파괴를 택했다. 역사적 건물을 없애는 것으로 역사 그 자체도 지워질 것 같은 논리이다. 그것이 한국적인 역사인식이고 한국적 민족주의이리라.

시각적으로 그 존재가 눈에서 보이지 않음으로써 내셔날리즘이 만족된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일본상품에 대한 한국인의 심리와 닮은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전술한 바와 같이, 서울은 세계의 수도 중에서 일본 상품의 간판이 가장 없는 도시로서 특이하다. 혹은 일본 자동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상품은 한국사회에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고, 한국인의 일본상품에 대한 호감도 높다. 일본 자동차도 또한 완성차는 눈에 띄지 않지만, 한국의 국산차에는 일본제 부품이나 기술이 대량으로 들어가 있다. 외양으로 보이지 않으면 안심이고, 민족적 자존심도 유지된다고 하는 셈이다.

옛 총독부 청사의 해체·철거에 대해, 당시의 주한 일본대사를 비롯 한국에 관계하는 많은 일본인은 찬성했고,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국민 자신의 선택이었고, 일본인이 참견할 입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한국사회에서 해방이래 일본의 지배라는 과거의 상징으로서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온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것은 일본인으로서는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확실히 그 건물은 보는 사람,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추악했다. 특히 '정궁'이라 칭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궁 경복궁 부지의 내부라고는 장소를 생각할 때, 한국인들은 그 추악함을 한층 더 느껴 왔다. 그러나, 일본인인 필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추악함을 포함, 역시 역사는 역사이다. 파괴해 없애 버리는 것으로 '역사의 진실'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유감이다. 그 시점의 해체·철거가 좋았는가 어땠는가 하는 평가는 후세의 한국인들이 내리게 될 것이다.

출전 : 한국외국어대 조규철교수 홈페이지-강의노트-일본역사와 지리-한국인의 역사관-광복 50주년의 반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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