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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4 (월)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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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06      
[근대] 부산항의 역사 10 (부산)
부산항의 역사 10

일제감점기 2

수산업

수산물 수출입장(輸出入場) 신설과 수산단체 설립

오늘날의 중앙동의 옛 부산시청 자리에는 시청(당시는 釜山府 府廳)이 들어서기 전에 용미산(龍尾山)이란 나즈막한 산이 있었다. 그 용미산의 동쪽 기슭에는 어항(漁港)이자 수산물 수출입장이 1911년에 개장되었다.

이 자리는 부산세관이 북빈 매축지인 현재의 자리로 새 청사를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는 부산세관(당시는 부산海關이라 했음)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 용미산 동쪽에는 조그마한 선착장(船着場)인 부산잔교(釜山棧橋)가 딸려 있었다. 이 선착장을 개조해서 수산물 수출입장으로 축조했다. 수산물 양륙장(揚陸場)으로는 수면과 육지면에 간지석(間知石)을 비탈지게 깔고 양륙장 바로 곁에는 저빙고(貯氷庫)와 냉장고를 겸용할 수 있는 70평짜리 목조평옥(木造平屋)을 지었다. 10평짜리 4층 건물이 딸린 55평짜리 목조평옥(연건평 95평)의 제빙소까지 마련했다.

이 제빙소는 레밍턴 암모니아 압축기 2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설비는 하루 9톤의 제빙능력과 6톤의 수산물 냉장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인 수산물 냉장시설이 되었다. 이 냉동시설을 갖춤으로 언제나 싱싱한 생선이 곳곳으로 공급되어 나갔다.

이 수산물 수출입장에는 냉장시설 이 외에 소금창고, 수산물 염장고(鹽藏庫)·건어물(乾魚物)창고·하조장(荷造場)에다 경매장(競買場)까지 마련되어 수산물 도매장의 구실까지 하였다. 당시로서는 근대식의 어시장으로 중앙 어시장이라 불리면서 밤낮으로 붐볐다.

이 도매시장에는 경편철도궤도(輕便鐵道軌道)가 부설되어 수산물 거래와 운반을 재빨리 할 수 있도록 운송체계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 수산물 수출입장 구내에는 부산세관출장소·수산물취급사무소를 따로 마련해서 수산업자들이 수산물 수출입 거래에 편리하도록 제도적 뒷받침도 해 주었다.

이 수산물 수출입장은 1936년 부산부청(옛 시청)이 그 자리에 인접해 들어서게 되자 북빈(北濱)매축지에 부산중앙 도매시장을 개설하여 그 자리로 옮겼다. 그뒤 남항이 매축되어 남항이 어항으로 북항이 상공무역항으로 역할분담을 하게 되자 남항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수산단체로는 1917년 10월 26일 업종별 단체로 『경남해조 수산조합(慶南海藻 水産組合)』이 부산의 동광동 1가에 설립되었다. 이는 해조류 거래의 개선 발전을 꾀할 목적이었다. 21년에는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이 영도 남항동에 설립되었다. 22년 11월 11일에는 오늘날의 사하구 괴정동에 『낙동강 해태(海苔) 어업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는 『김』양식에 대한 제반 사항을 협의하고 판매의 원활을 꾀하려는 뜻이었다. 이 조합의 구역은 괴정·하단·신평·엄궁의 해태(김) 양식지역이 해당되었다.

1922년 11월 30일에는 『부산 어업조합』이 설립되었는데 그 주권은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1924년 8월에는 가덕도 천가면의 『눌차리(訥次里) 어업조합』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조합원은 140명이었다. 이 눌차리 어업조합은 1938년 5월 『가덕도 어업조합』으로 개편되었다.

1930년 4월 21일에는 『다대포 어업조합』이 설립되었다. 1931년 1월 6일에는 『경상남도 어업조합연합회』가 부산의 대교동에 섰다. 1941년에는 수산분야의 고급인력 양성을 위해 한국최초의 수산고등학교(입학자격 중학교 5년 졸업, 수업연한 3년)가 남구 용호동에 섰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의 어획고로는 1926년은 156,425천관에 53,742천원(圓)이었다. 이 무렵 부산의 어획량과 어획금액을 전국의 그것에 비하면 어획량은 0.9∼1.3%인데 어획금액은 3.3∼6.7%의 높은 비율이었다. 이는 어획물 가격조성면에서 단가가 높은 고급어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의 어획고를 한·일의 민족별로 보면 수량과 금액 모두 일본인이 훨씬 많았다. 어획물의 종류는 다양했으나 한국인은 멸치와 갈치, 조기 등을 많이 잡았고, 미역, 우뭇가사리, 먹도박, 진도박 등 해조류를 많이 채취했다.

그러나 일본인은 기선 건착망(汽船 巾着網)어업, 기선 유망어업 등 규모가 큰 어업으로 고등어를 많이 잡고 가자미, 갈치, 전갱이, 해삼 등도 잡았는데 구한말까지 잡혔던 대표적인 어획물인 청어와 대구가 일제강점 이후 부산 근해에서 자취를 감추어간 것은 큰 변화였다.

수산업의 실태

일제강점기 부산의 수산업에 관해 《부산시사(釜山市史)》 제2권에서 추려보면, 1913년 말 현재의 부산의 어업자 인구는 1,283명이고 어선수는 189척이다. 어획고는 552,216관이고 매상고는 44만9천3백20원이다. 이 어획수량은 전국의 약 1.2%가 되고 금액은 전국의 약 4.3%에 해당한다. 어획물의 종류는 돔·상어류·전복·학꽁치·넙치·삼치·숭어·붕장어·조기·잡어들이다. (이 시기의 통계나 사실은 당시의 부산부(시)영역으로 오늘날의 강서구와 기장군은 이에서 벗어남)

1920년대로 나아가면서 어선은 동력선으로 바뀌어 기선(汽船)에 의한 근대적 어업이 일본인 위주로 발달하였다. 그에 따라 부산은 동력선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수산물의 집산지일 뿐 아니라 어업 근거지로서 중심적 위치를 굳히었다.

그것은 부산항이 강원도 연안에서 전라도의 남해안에 걸친 중앙에 위치했고 판매구역은 북으로는 멀리 만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일본 도쿄(東京)에 미쳤다. 어업 종사자도 부산을 근거지로 하여 각지에 출어(出漁)했다.

1921년 부산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전업자와 겸업자, 그리고 종업자를 합한 한국인 가구수는 454가구(家口)에 816명인데 일본인은 421가구에 680명이었다. 그것이 1927년에 가서는 한국인 가구수는 729가구에 2,659명으로 불어나고 일본인 가구수는 582가구에 1,888명으로 불어난다.

1932년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어업 가구는 1,012가구에 3,878명인데 일본인은 687가구에 2,198명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1921년의 전국 어업종사자 가구수가 71,333가구인데 일본인은 2,791가구에 지나지 않다. 1927년은 전국 어업종사자 가구가 81,360가구인데 일본인은 3,029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보면 전국에 비례해서 부산에서 일본인이 어업에 종사하는 자가 월등으로 많다. 이는 부산의 입지적 조건이 일본인 어업자가 어업에 종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도 영도를 비롯해서 하단과 용당에 일본인 이주어촌(移住漁村)이 형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부산의 어획량과 어획금액은 전국의 그것에 비하면 어획량은 0.9∼1.3%의 범위인데 어획금액은 3.3∼6.7%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어획물 조성면에서 단가가 높은 고급어가 많은 비율을 차지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부산의 어획고를 한·일 양쪽으로 나누어 보면 수량과 금액 모두 일본인의 것이 훨씬 많다. 1920년대에 있어 전국적으로 본 양 민족별 어획고는 비슷한 수준에 있는데 부산에서는 일본인의 어획고가 많은 것은 부산에서는 일본인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어업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업가구는 한국인이 많았는데도 일본인의 어획고와 그 금액이 많았다는 것은 한국인의 어업은 상대적으로 영세성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은 멸치를 가장 많이 잡았고 갈치·조기 등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미역, 우뭇가사리, 먹도박, 진도박 등 해조류를 많이 채취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기선건착망(汽船巾着網) 어업이나 기선유망어업 등 규모가 큰 어업으로 고등어, 가자미, 갈치, 전갱이, 정어리, 해삼 등을 많이 잡았다.

부산과 부산 인근지역의 성어기는 고등어(6∼8월), 멸치·정어리(6∼10월), 삼치(4월, 5월, 9월, 10월), 대구(12월에서 다음해 1월까지), 돔(4월, 5월, 10월), 갈치(7∼10월), 가사리(4∼6월), 새우(4∼6월, 10월), 미역(3∼5월), 김(12월에서 다음해 2월까지), 넙치(10월에서 다음해 4월까지)였다.

그런데 조선조 말까지 부산의 대표적인 어획물은 청어였는데 한일합방을 보자 청어의 내유(來遊)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내유가 끊어진 것은 냉수성 어류인 청어가 수온상승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는 1920년대에 들어 부산의 어획고에서 줄어들기 시작하여 20년대말에는 격감하고 있다. 그 격감의 원인을 해상교통의 발달에서 오는 선박의 빈번한 왕래에 기인한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도 원인의 일부일 수는 있을 것이다.

양식(養殖)수산업과 수산가공

일제 강점기 낙동강 하구(河口)에서는 김이 양식되고 굴은 가덕도에서 양식되었다. 뱀장어는 하단에 창설된 일본식산주식회사의 뱀장어 양식장에서 양식되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김양식이 시작된 것은 일본인 이학박사 오카무라(岡村金太郞)에 의함이었다. 그 岡村은 1911년 12월 낙동강 하구를 시찰하고 1913년부터 경상남도 사업으로 김양식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자 민간인이 참여하여 김양식을 하게 된 것이다.

김은 국내소비보다 일본으로의 수출이 컸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김양식에 관한 시험과 제조법에 관해 적극적이었다. 1927년부터는 김양식업을 장려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에 따라 김양식업은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낙동강 하구 김양식은 대나무를 세워 김이 착생하게 하는 일본홍(一本?) 양식법이었다. 오늘날의 사하구 하단에는 낙동강 해태조합(洛東江 海苔組合)이 있고 해태(김) 생산액은 1929년 약 6만원으로 전조선 해태어장 중 10위의 위치에 있었다.

굴양식은 가덕도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부산 영도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서 굴양식 시험을 하여 성공하게 됨으로써 굴양식이 산업화되었다. 그 시험은 1923녀부터 가덕도에서 시작되었다. 가덕도의 눌차리 어업조합(訥次里 漁業組合)도 수산시험장의 양식법을 따라 1924년부터 경영하게 되었다. 이 눌차리 어업조합의 굴양식은 해마다 질과 양이 향상되어 1930년대 초부터는 중국 본토에 수출하게 되었다. 1940년쯤에는 굴양식장이 가덕도 북쪽 해안으로 약 30만평에 이를만 했다.

수산 가공식품으로는 소건품(素乾品), 자건품(煮乾品), 염장품(鹽藏品), 통조림, 젓갈, 해조류 가공품, 비료 등이었다.

소건품에는 상어 지느러미, 가자미, 학꽁치, 돌고래 등이 있었는데 상어 지느러미가 중국 수출품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때가 있었다. 자건품은 그 주가 멸치였고 해삼도 많았다. 염장품으로는 고등어, 조기, 갈치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도 고등어가 가장 많았다. 통조림은 각종 어류, 조개류, 해조류를 원료로 하여 만들었다. 그 가운데도 고등어를 원료로 한 것이 가장 많았다.

기타 식료품으로는 일본식 가공품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도 가마보코라는 고기묵이 많았다. 젓갈 역시 성게나 오징어로 만든 일본식 가공품의 시오카라(鹽辛)가 많았다. 어유(魚油)는 주로 멸치와 정어리에서 채유했다.

비료는 물고기 창자로 만든 것이 많았다. 해조류를 원료로 한 가공품은 수종이 있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우뭇가사리 가공품이었다. 가공품 종류 가운데 한국인은 해조류 가공품을 많이 만들고 일본인은 소건품·통조림·기타 식료품을 많이 만들었다. 통조림 가공도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무역

일제초기(1910∼1919)의 무역

부산항을 통한 무역 거래액은 개항이래 해마다 늘어났다. 한일합방 당시인 1910년 부산의 수출입 무역총량은 1천5백88만6천원으로 전국의 총무역량을 부산항이 26.61%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3년 뒤인 1913년도 총무역량은 2천7백40만원으로 상승하고 전국 무역량의 26.74%를 차지했다. 그 3년 뒤인 1916년도는 3천7백90만4천원으로 전국 무역량의 28.88%를 부산항이 차지하고 1919년은 비약적으로 신장하여 총무역량은 1억5천4백3만8천원으로 전국 무역량의 30.94%를 부산항이 치루어 내었다.

그런데 이 무렵의 부산은 수입보다 수출이 향상되고 있었다. 그것은 1917년 수출이 3천3백25만원인데 수입은 2천4백52만원이고, 1918년은 수출이 6천4백62만원인데 수입은 3천6백40만원이고, 1919년은 수출이 8천9백39만원인데 수입은 6천5백44만원이었다. 이는 일본이 한국내의 자원수탈의 전초기지를 부산항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 이후에도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에 대해서는 관세가 부과되었으나 해마다 점차 정리되어 가다가 1919년에는 수출세가 전부 폐지되고 일본에서의 수입세는 한 차례 연장되었다.

1910년대의 부산무역은 일본에 대한 수출창구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 확연해졌다. 그것은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오가는 무역량이 1910년은 수출이 89.3%, 수입이 74.6%, 1913년은 수출이 89.3%, 수입이 66.4%, 1916년은 수출이 90.8%, 수입이 82.2%, 1919년은 수출이 99.1%, 수입이 78.6%인 것으로 알 수 있다.

일본 대상의 수출입을 품목별로 살펴보면 수출품으로는 곡물·종자·음식품·실(絲)·옷감(布帛)·광물·금속·약재(藥材)·염료(染料)·도료(塗料)들이었다. 이 가운데도 곡물과 종자·음식물 등이 전체의 75∼85%를 차지했다. 이 곡물 중에도 쌀은 그 양이 계속 증가하여 1910년에는 수출액이 1백48만3천원이었던 것이 1919년에는 4천6백10만4천원으로 30배가 넘게 증가했다.

1919년 일본으로의 쌀 수출은 우리나라 총생산량의 22.7%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41.9%가 부산항을 통해 나갔다. 이 당시의 주요 쌀 수출항은 군산(群山)이었는데 군산보다 부산이 약 2배 가까이 더 수출하고 있었다. 이때 쌀의 수출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갔으나 1917년까지는 부산항을 통한 쌀 수출량의 약 17% 정도는 러시아·중국·영국 등지로도 갔다.

강점 전에는 쌀보다도 콩〔大豆〕의 수출량이 많았지만 점차 콩보다는 쌀이 많아졌다.

이 같은 곡물 이외에도 조면(繰綿)·생사(生絲)등 원료 또는 반제품(半製品)이 수출되고 광물(鑛物)도 거의 대부분 원료의 형태로 수출되었다. 광물에 관해서는 1918년 12월 조선광업령(朝鮮鑛業令)을 개정하여 금·은·납(鉛)·철·사금(砂金)·사광(砂鑛) 등 광업세를 면제하여 광산물 수탈을 촉진했다.

부산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일본에서의 것이 절대적이었다. 그 가운데도 1910년 후반부터 면직물이 크게 들어왔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에서 수입되어 오던 면직물 수입의 길이 막히자 일본의 면방직공업(綿紡織工業)이 크게 발달했다. 이 일본 기계제 면직물인 광목(廣木)이 들어오자 영남지방의 토착 수공업 면직물이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부산항은 국내의 각 항구 사이의 무역인 연안무역(沿岸貿易) 또한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강점 이전까지만 해도 내륙교통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건을 운송하는데는 수운을 이용하는 연안무역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1909년의 경우는 부산항을 통한 연안무역이 8백58만2천원으로 부산항 연안 총무역의 38.9%를 차지했다.

특히, 함경도 지방과의 연안무역은 경원선(京元線)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부산을 통하지 않고는 물류(物類)유통이 어려웠다. 함경도의 물류가 서울로 가는데도 부산을 거쳐 경부선 철도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각 지방의 내륙 교통망이 확대되자 원거리 연안무역은 쇠퇴되면서 가까운 거리의 연안무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금(金)과 은(銀)의 수출입 문제인데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이래 외국과의 교역에 적극성을 띠었다. 그 외국과의 교역에는 금(金)단위 화폐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금의 생산이 많지 않는 일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과의 교역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한국과 중국에서 금을 얻고자 했다.

부산과 원산이 개항된 이후 개항장을 통해 암암리에 지금(地金)과 사금(砂金)을 밀수해 간 것도 금의 소유가 바로 국력이란 그들의 국가경영방식에서 온 것이었다. 그 당시 외국과의 교역이 없다시피한 이곳 사람은 가졌던 금붙이가 비싼값에 흥정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제강점을 보자 구한국의 화폐를 일본의 화폐로 대체시켜 양국간의 화폐를 통일시켰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한국 화폐, 그 중에서도 금화·은화를 회수하여 오오사카조폐국(大阪造弊局)에서 일본화폐로 개주(改鑄)하여 다시 한국이 수입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로 인해 1911년의 금·은 수입은 203만3천원이나 되었다. 하지만 이 해의 금·은 수출액은 565만7천원이었다. 지금(地金)과 채굴된 금(사금의 수출량은 기록되지 않고 있음)의 수출은 꾸준히 상승하여 1916년의 경우는 1천1백63만원어치나 되었다. 말하자면 부산·원산의 개항 후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게 사금(砂金)을 밀수입해 가다가 일제강점 이후는 화폐를 통일한다는 명목으로 금을 착취해 갔다.

그리고 부산항은 무역의 중간 기착지에 해당하는 통과무역지로서의 역할도 컸다. 그 통과무역은 일본과 한국 내의 다른 지역의 세관소재지(稅關所在地)간의 무역인 일선통과무역(日鮮通過貿易)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 만주 사이의 일만통과무역(日滿通過貿易)이 또 있었다. 이는 부산이 해운과 육로 교통의 두 가지가 모두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일선통과무역은 부산항이 한국의 각 지역과 외국을 연결시키는 창구가 되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전초기지가 되게 하고 일만통과무역은 부산항이 일본의 만주침략의 관문역할을 하게 했다.

당시의 부산항은 자체 무역과 통과무역이 거의 대등한 수준에 있었다.

일제중기(1920∼1930)의 무역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해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식민통치의 기반구축이 상당히 이루어진 이후 본격적으로 자원수탈이 이루어지는 1920년에서 1930년까지가 이에 속한다.

이 중기에 들어온 1920년 8월에는 관세개혁(關稅改革)이 단행되어 통일관세제도(統一關稅制度)가 실시되었다.

이 이전인 일제강점 이후의 1910년대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에도 일정한 관세가 부과되어 그것이 조선총독부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그렇게 1910년대 10년간의 관세부과 기간을 지낸 뒤 1 1920년 8월 이후에야 통일관세제도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통일관세제도는 양국 사이의 거래장벽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양 지역의 경제는 자연스럽게 통합되지만 그에는 후진적인 식민지는 희생이 따르고 본국은 이익 향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은 원료 공급지가 되는 반면 일본의 상품판매 시장으로서의 지위가 고착되어 갔다.

1920년대의 부산의 무역동향을 보면 무역량은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향상되어 전국최대 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보호무역주의와 구미 선진제국의 시장 참여 등으로 일본은 자국의 국내시장이 협소해졌다. 그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제조상품을 부산을 통해 대한(對韓) 수출을 증대시켜 갔다. 그것은 1927년까지만 해도 부산항은 수입액보다 수출액이 많았는데 1928년부터는 수입액이 많아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때 부산항의 수출이 저조하고 수입이 많았던 것은 쌀의 대일(對日) 수출이 군산·인천·진남포·목포 등 쌀의 집산지에서 직접 이루어진 까닭도 있었다. 거기다가 부산항 제2기 축항공사(築港工事) 및 제1기 부산시구 개정공사(釜山市區 改正工事) 등 대공사에 따르는 건축자재 수입과 조선방직(朝鮮紡織), 일본경질도기(日本硬質陶器) 같은 대기업의 원자재 수입에도 원인이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1920년 전국의 수출은 1억9천7백만원인데 비해 수입은 2억4천9백58만원으로 수입이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같은 해의 부산의 수출은 7천5백2만원인데 비해 수입은 5천4백67만원으로 전국과는 달리 이때의 부산은 수출이 월등이 많았다.

1925년만 해도 전국의 수출은 3억4천1백63만원인데 비해 수입은 3억4천만원으로 수출과 수입이 거 의 같았다. 그러나 같은 해의 부산은 수출은 1억2천4백4만원인데 비해 수입은 1억3백57만원으로 수출량이 많았다.

그러다가 1928년에는 전국의 수출은 3억6천5백97만원, 수입은 4억1천3백99만원으로 수입이 급격히 많아졌다. 그에 따라 같은 해의 부산도 수출이 1억1천9백94만원, 수입이 1억2천5백4만원으로 수입이 많아졌다.

1930년의 전국수출은 2억6천6백54만원, 수입은 3억6천7백14만원으로 수입이 월등이 많아지면서 부산 또한 수출이 8천2백25만원으로 줄어들고 수입도 1억8백44만원으로 줄어들지만 수입액수가 월등하게 많았다. 그러나 부산항은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화가 있었다 해도 한국 최대의 대일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1929년의 부산의 일본에 대한 무역량은 전국 수출량의 34.8%, 수입량은 38.4%를 차지했다.

20년대의 부산항의 수출입은 이상과 같이 일본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 편중도는 수출 98%이상에 수입 75∼95%로 극심했으나 중국·미국·러시아·영령 해협식민지(英領 海峽植民地) 등지에의 수출과 중국·프랑스령 인도·영국령 인도·네덜란드령 인도·미국 등지에서의 수입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부산항 다음으로 무역실적이 높은 무역항이 인천이었다. 인천 다음으로 진남포·군산·신의주·목포·원산의 순인데 인천항과 부산항의 실적을 비교하면 1910년은 부산항의 총무역액이 1천5백88만6천만원인데 인천항은 얼마간 높은 1천6백72만1천원이었다. 그러나 1916년에 가서는 부산항이 3천2백25만4천만원인데 인천항은 2천96만원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1920년은 부산항이 1억2천9백56만원인데 인천항은 7천5백82만원, 1925년에는 부산항이 2억2천7백61만원인데 인천항은 1억3천만원, 1930년은 부산항이 1억9천69만원인데 인천항은 1억1천29만원이다.

일본의 전시경제체제(1931∼1944) 아래에서의 무역

전시체제 아래에서의 무역은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전시물자 수급계획(戰時物資 需給計劃)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기술이 뒤떨어져 전시물자는 대외무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전세계는 세계대공황(世界大恐慌)의 영향으로 자국산업을 보호하면서 대외무역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해외물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은 타격이 컸다. 그래서 그 동안 원료공급 시장이자 상품판매 시장의 역할속에 있었던 한국과의 무역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나라 무역은 그동안 일본 중심이 되어 역내무역(域內貿易)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역내무역으로서는 외화(外貨)를 획득할 수 없었다. 외화를 획득해야만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37년 9월 한국내에서도 『수출입품 등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시행되어 불요불급(不要不急)의 물자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의 적극화를 통하여 외화를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 그 외화확보의 길은 제3국에의 수출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어 1941년 7월 일본의 재외자산(在外資産)이 동결되고 통상조약이 폐기됨으로써 제3국과의 무역이 두절되었다.

일제 말기에 있어서는 다시 역내무역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데 전시체제 당시의 부산의 무역은 그 신장세가 현저했다. 그렇게 신장세가 현저한 것은 통제경제시대의 무역이 부산항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입면은 1928년에서 연이어 계속 신장세를 보였다. 1941년과 1942년 같은 해는 수입이 수출의 2배나 되었다. 이 부산항의 수입초과 규모는 전국의 수입초과 규모보다 훨씬 그 정도를 더했다. 이 시기의 무역량을 보면 1932년의 전국수출은 3억1천1백35만원인데 전국 수입은 3억2천35만원이다. 같은 해의 부산은 수출이 8천2백89만원인데 수입은 1억2백16만원이다.

1937년은 전국 수출이 6억8천5백54만원인데 전국수입은 8억6천3백55만원이다. 같은 해의 부산은 수출이 1억5천6백39만원인데 수입은 2억5천18만원으로 높다. 1942년은 전국수출이 9억4천4백72만원인데 수입은 14억9천88만원이나 된다. 같은 해의 부산의 수출은 2억8천7백37만원인데 수입은 5억5천8백21만원이나 된다. 부산에서 생산된 수출품으로는 경질도기(硬質陶器), 법랑철기(琺瑯鐵器), 전구(電球) 등이 이 시기에 제3국으로 상당량 수출되었다.

그리고 광산물인 금광석(金鑛石), 중석(重石), 철(鐵), 함금은조동(含金銀粗銅) 등의 수출이 현저히 증가했다. 함금은조동은 1939년 수출품 중 가장 많이 수출된 품목이다. 이들 광산물 수출이 격증한 것은 이들은 거의 일본에 수출되어 전비조달(戰費調達)과 군수산업확충(軍輸産業擴充)에 충당되었다.

1939년에는 공산물이 농산물 수출보다 많아졌는데 이것은 군수산업과 더불어 어느 정도 공업화가 전진되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수입품으로는 섬유·직물류가 줄어드는 대신 의류·금속제품·기계·기구류가 증가했다.

우리나라 전국의 무역에 대해 부산항의 비중은 1910년은 26.6%였는데 1915년은 29.6%, 1920년은 30.0%, 1925년 33.3%, 1930년 30.0%, 1935년 26.8%, 1939년 30.5%였다.

일제강점기의 부산상업회의소

일제강점 이전의 개항기에는 부산에 상업회의소가 따로따로의 두 단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한국인들의 상업회의소이고 또 하나는 일본인들의 상업회의소였다. 그 가운데의 한국인 상업회의소는 1895년 『부산상무소(釜山商務所)』로 조직되어 1908년 『동래상업회의소(東萊商業會議所)』가 되고 그 뒤 『조선인 상업회의소』로 이름이 바뀐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일본인 상업회의소는 1879년 부산에서 조직된 『일본인 부산상법회의소(日本人 釜山商法會議所)』였다. 부산에서 일본인의 상법회의소가 조직될 때는 일본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 두 곳만이 상업회의소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니 일본인이 부산 상법회의소를 일본 자체로써 세 번째로 조직하였다는 것은 부산을 일본이 경제침략의 거점도시로 삼으려 한 것이 개항과 동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상법회의소 조직이 우리나라 사람의 상무소 조직보다 먼저였다. 그렇게 일찍부터 상인을 규합한 그들은 일개 민간단체에 지나지 않음에도 상법회의소란 이름으로 제 나라의 행정기관과 정부기관에 협조를 구하고 한국의 관청 또는 정부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상권을 확대해 갔다. 이 일본의 부산 상법회의소는 1893년에는 『부산항 일본상업회의소(釜山港 日本商業會議所)』로 이름을 고치고 1908년에는 다시 『부산 상업회의소』로 이름을 고쳤다.

일제강점 후로는 한국인 중심의 미약한 『조선인 상업회의소』마저 해체를 꾀하여 1915년 7월 『상업회의소령(商業會議所令)』을 공포하여 1지구(地區) 1회의소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부산 상업회의소』가 흡수·통합하였다. 형식적으로는 두 회의소를 해체하고 새로운 부산 상업회의소를 발족한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로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흡수 통합되는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가입회원 자격 보유자의 수가 일본인이 512명인데 한국인은 27명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30년 11월에는 조선 상공회의소령의 시행으로 『부산상공회의소(釜山 商工會議所)』로 이름이 바뀌면서 공업 제조업 계열이 무게 있게 가담하면서 그 조직이 확대되어 갔다.

한·일 부두노동자 쟁의

일본 도항(渡航)을 위한 노동자들

일본은 강점 이전인 1905년의 소위 『을사조약』체결과 함께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하여 『토지가옥 증명규칙(土地家屋 證明規則)』『토지가옥 저당규칙(土地家屋 抵當規則)』을 발표하여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확인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인 1912년에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부동산 등기령(不動産 登記令)』『부동산 증명령(不動産 證明令)』을 발표하고 어려운 절차를 설정하여 종전의 한국인 경작의 토지를 법적 절차의 불이행 또는 하자(瑕疵)를 들어 일본의 조선총독부 소유나 관유지로 환수 또는 일본인 회사인 『동양척식회사』 소유토지로 매수케 했다.

그 토지조사 사업이 1918년 11월에 끝남에 따라 실질적으로 내 땅이라 생각하고 경작하던 사람 가운데 어려운 절차과정을 밟지 않은 잘못으로 토지점유권을 잃거나 자작농(自作農)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거기다 인구는 해마다 늘어나서 곤궁에 허덕이는 가구(家口) 또는 인구가 많아졌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이 날품팔이로 전락되어 갔다. 그 날품팔이 노동의 장(場)은 국내보다 일본이 나았다. 국내 노동의 장은 국내 노동자를 모두 수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니 노동자 수용이 용이한 일본으로 날품팔이 노동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후의 세계적 공황(恐慌)은 일본에도 닥쳐 일본도 불경기를 가져오면서 우리나라 노동자의 일본 도항(渡航)을 제한하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부터 4년동안 도항 증명서가 있어야 일본으로 도항할 수 있었다.

1923년 9월부터 1924년 5월까지는 일본의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의 여파로 도항이 저지되었다. 1925년 10월 이후에는 도항증 도항제도가 부활되었는데 그 정도는 지난날보다 더 강화된 상태였다.

이렇게 도항을 제한한 것은 도항 희망자가 제한을 해도 줄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국 국내의 경제가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었음을 말했다. 그 도항 희망자는 부관연락선을 타기 위해 부산으로 몰렸다. 부산으로 몰려드는 노동자로 말미암아 부산은 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케 했다. 그러한 일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24년 5월 중순이었다.

그 때는 관동대지진으로 한국인 노동자의 도일은 공식적으로는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공식적으로 재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4천명이나 되었다. 그렇게 모여든 데는 일본은 관동대지진 뒤가 되어 그곳으로 가면 수복의 일로 일거리가 많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루에 도항할 수 있는 사람은 70∼8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모여든 노동자는 부산 수상(水上)경찰서로 가면 여권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와서는 부산수상경찰서에서 도항증을 받기 전에 관권(官權)과 결탁하고 있는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또는 상애회(相愛會)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도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항을 위해 노동공제회 또는 상애회에 입회하여 수수료를 내고 그 회의 간부에도 금전 또는 뇌물을 제공한 뒤에라야 도항을 할 수 있는 길이 트이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상애회에 들려면 입회금이 50전, 잡비가 70전, 상애회 표값 80전으로 2원 가량이 들었다. 관의 비호를 받고 있는 상애회였다. 그러니 세론이 좋을 리가 없었다. 1만 수천원의 입회금 부정사건이 탄로되어 부산검찰국의 취조를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진퇴가 곤란하게 된 4천여 노동자의 문제가 큰 사회문제였다. 부산 유지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부산시민대회를 발기하여 1924녀 5월 17일 오후 3시 부산청년회관에서 부산청년대회를 개최하여 결의문을 채택하고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회장 안팎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 결의사항은 여덟가지나 되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현재 부산에 집합해 있는 노동자의 조치방법을 당국에 문의할 일이었다. 그리고 단체와 개인을 막론하고 도항 주선을 구실로 노동자에게 부정한 이익을 취하는 자의 엄중 취체를 당국에 교섭하고 이같은 부정행위를 전 시민이 감시 또는 박멸하는데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도항을 개방할 것을 당국에 교섭하고 인신시장(人身市場)을 철폐하고 부산에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직업 없는 자의 구제방안을 당국에 요구하는 일들이었다.

그날에 채택된 결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인도·정의와 공존공영의 목적으로 조선노동자의 일본 도항을 개방하고 현재 부산에 집합되어 있는 노동자 4천명을 모두 도항케 하기를 총독부 당국에 요구함'이었다.

그 집행위원은 安熙濟·金孝錫·金局泰·尹相殷·金在洙·尹炳浩·李有石·金孝喆·黃紀秀·金在俊·朴龍洙·沈斗變·吳瀯植·金思訓·韓顧杓였다. 이 집행위원 15명은 시민대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5월 19일 부산 수상 경찰서에 가서 교섭하였다. 그 결과 수상경찰서는 부산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에 한하여 3·4일 내로 도항케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도항수속에 필요한 비용은 그 모두를 부산청년회에서 부담하고 도항증에 대해서는 집행위원 중의 대표 李有石이 연명날인(連名捺印)하여 신원 일체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신원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부산청년회에서 충분히 조사한 후 책임을 지고 도항시키도록 했다.

집행위원들은 그때 도항증명을 얻기 위해 수상경찰서 앞에 모인 5백여명의 노동자에게 그 동안의 결정사항을 설명하고 부산경찰서장, 부산 부윤(府尹 :지금의 市長 ;만나지는 못했음)들을 방문한 후 백산상회(白山商會)에 다시 모여 大阪商船회사의 선박을 교섭하고 수속에 필요한 인쇄물을 준비하여 부산청년회관에서 사무를 보기로 했다. 일본 내무성과 조선총독부에 교섭할 위원들의 비용 조달문제를 논의하자 金孝錫, 安熙濟, 秋文宇 등은 즉석에서 각기 10원, 50원, 20원을 기부했다.

집행위원 중 안희제·윤병호·이유석·황재수 등 4명은 5월 24일 총독부 관계자를 방문하여 도항제한을 철폐해 줄 것과 상애회 등의 부정행위를 철저히 단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요구에 대해 丸山경무국장은 자기는 자유도항에 노력해 왔지만 일본의 내무성이 듣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대표들은 다시 신문기자들과의 회견형식으로 도항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일본 내무성에 직접 가서라도 투쟁할 것이니 여론을 환기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서울에서 그 같은 활동을 하는 한편 부산에서는 집행위원들이 부산청년회관에서 수속사무를 취급하여 20일, 21일 양일간에 1천여명을 취급했고 수상경찰서에서도 1천5백여명을 취급했다. 그렇게 친절히 일을 보아준다는 소문에 부산청년회관 앞에는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노동자에 대한 부산에서의 일이 京城에 알려지자 조선노동 총동맹(朝鮮勞動 總同盟)에서는 조선노동자의 중대문제를 부산시민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중앙에서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결정하고 강연회를 열어 여론을 환기하기로 했다. 그 강연은 『모순(矛盾)의 폭로』를 김찬(金燦), 『부산부두에 박두한 노동자의 상황』을 강택진(姜宅鎭), 『생활의 부르짖음』을 권오설(權五卨)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연회는 6월 3일 오후 8시 천도교당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이렇다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두 단체의 일부 간부를 구금하고 강연회 중지령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京城의 31개 사회단체 및 언론기관은 당국의 처사를 언론탄압으로 규정짓고 언론집회 압박탄핵회(言論集會 壓迫彈劾會)를 개최하여 항의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따라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 노동자가 도항해도 일본 노동자가 위협받을 염려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 6월 1일부로 도항저지조치가 해제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부산 유지들이 부산 시민대회를 열고 활약한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도항저지 조치의 해제는 그리 오래가지 않고 1925년 8월 일본 내무대신이 조선총독에게 취직처가 확실치 않는 자와 일본어가 통하지 않는 자, 준비금 1백원 미만인 자는 도항을 저지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1925년 10월부터 다시 도항증제도가 살아나게 되었다.

부산에서 노동자의 도항자와 귀환자의 출입상황을 부산부가 발행한 《부산》 3권에 의해 추려보면, 1917년 도항이 1만4천12명에 귀환이 3천9백27명이고, 1920년의 도항자는 2만7천4백97명인데 귀환자는 비교적 많은 2만9백47명이고, 1922년은 도항자 수가 부쩍 불어나서 7만4백62명인데 귀환자가 4만6천3백26명이고, 1925년 도항자는 한층 더 불어나서 13만1천2백73명인데 귀환자도 불어나서 12만2천4백71명이고, 1927년은 도항자가 아주 더 불어서 18만3천16명인데 귀환자는 9만3천9백91명으로 되어 있다.

부산부두노동자의 노동쟁의

부산의 부두노동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터를 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부두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부두노동자는 지원자가 많은 반면 일당인 품삯이 약했다. 거기에다 일본 운송업체들의 단합으로 인권이 손상됨도 컸다.

그런 가운데의 1921년 9월의 부산 부두노동자 대파업은 한국노동운동사상(史上) 최초의 대규모 파업쟁의였다. 이 파업이 일어날 때의 부산의 부두노동자는 약 4천명에 이르렀다. 이 무렵의 노임은 아주 낮아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부두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노동쟁의를 벌였다. 그 쟁의는 임금 4할(割) 인상을 9월 12일에 요구하면서 15일까지 회답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15일이 되어도 이렇다는 회답이 없었다. 16일과 17일 이틀동안 파업을 단행했다. 사용자측이 당황했다. 25일까지만 기다리면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제의가 있어 노동자측은 18일 취업을 했다.

한데 그렇게 처음 쟁의를 벌인 노동자는 석탄 양륙(揚陸)작업을 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있었는데 그 이외의 부두노동자 2천여명도 이에 호응하여 역시 9월 25일까지 기한을 제시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함으로써 전체 부두노동자 쟁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부두노동자는 작업이 매일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선이 들어 올 때만 일이 있기 때문에 월 평균 작업일수는 최고 15일에서 10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월평균 수입은 15원에서 10원 내외로 최저생활비도 안되는 형편이었다.

노동자 측에서 제시한 9월 25일이 되었는데도 회사측에서는 하등의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26일 다시 총파업에 들어갔다. 약 4천명의 부두노동자가 일제히 파업을 하다보니 시내의 분위기는 긴장되었다. 경찰당국은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노동자가 움직이지 아니하니 부산항으로 들어온 선박들은 짐을 풀지 못하고 각지에서는 물품의 독촉이 심했다. 회사측은 시골 또는 근방에서 채소장사·나무장사를 하는 사람을 모아 높은 임금으로 일을 시켰으나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이 부두노동자 파업은 대규모의 것으로 경성(京城 :현 서울)의 조선노동 공제회에서 신흥우(申興雨)가 내려왔다. 29일 밤 각 회사측 대표 7명과 노동자 대표 13명은 택산형제상회(澤山兄弟商會)에 모여 협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부산상업회의소 서기장 花環이 한국인 11명을 초청하여 30일 중재(仲裁)를 하게 되었다. 노동자측은 당장 밥먹기마저 어려운데다 경찰의 탄압이 가중되어 절충안을 수락하고 10월 1일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파업쟁의 시작과 함께 선언문 작성 등으로 지도적 역할을 한 김경직(金璟直) 등 4명은 주동자로 경찰에 구속되었는데 경찰은 노동자 전원이 취업하면 그 4명을 석방할 것이라 했는데도 석방을 않고 출판법 위반으로 형(刑)을 받아야 했다.

(계속)

출전 : 부산라이프 부산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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