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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2-11 (수)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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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985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1 (권인호)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1

第2次 南冥學國際學術會議 發表論文 / 南冥學派의 實學思想 硏究
97年 2月 18日․서울교육문화회관

南冥學硏究論叢

南冥學派의 實學思想 硏究

권인호(權仁浩, 大眞大 敎授, 本院 常任硏究委員)

1. 序論 / 334
2. 時代的 狀況 및 性理學과 實學의 관계 / 337
3. 南冥 曺植의 實學的 學問思想 / 340
 1) ‘賦’를 중심으로 한 民本思想 / 340
 2) ‘公車文(上疏文)’에 나타난 憂患意識의 實學思想 / 342
 3) 「學記類編」의 實學精神 / 348
4. 南冥의 弟子와 私淑人의 實學思想 및 그 淵源과 繼承 / 350
 1) 來庵 鄭仁弘의 義兵과 ‘上疏文’에서의 實學思想 / 350
 2) 東岡 金宇顒의 『續資治通鑑綱目』 編纂과 實學的 歷史意識 / 356
 3) 寒岡 鄭逑와眉叟 許穆의 學問傾向과 그 淵源 / 360
 4) 經世致用 學派와 星湖 李瀷의 實學思想的 淵源 / 365
5. 結論 / 372

南冥學派의 實學思想 硏究

權仁浩

1. 序論

‘儒學’은 ‘사람에게 필요한 學問’ [각주 ‘儒’의 뜻은 ‘柔’, ‘濡’, ‘潤’ 혹은 ‘需人’, ‘人需‘의 뜻을 가진다고 한다.]으로서 實學을 뜻하기도 한다. 학문이란 무릇 그것이 理論的인 사상체계 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인 實學일 때 意義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사상은 보다 實質日用的인 것에 중점을 두어야 된다는 意味이기도 하다.

요즈음 한국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불안은 한 개인의 삶에서 부터 국제적인 정세와 여론에 이르기 까지 현실적인 학문사상의 경향성에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윤리도덕’과 ‘국가 사회의 정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제도 실제적이고 현실성이 없다면, 즉 그것을 연구하는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 등의 전통적인 인문과학은 사회과학이나 응용 자연과학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 위기에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것과 관련하여 얼마전에 ‘包淸天’ 이란 中國의 史劇이 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包淸天이라는 인물[각주 중국 北宋시대 仁宗 때의 사람으로 이름은 包拯, 당시 수도였던 開封府의 府尹.]이 불의에 항거하고 상층권력에도 아부나 흔들림 없이 진실과 백성을 위해서 철저하게 증거를 확보하여 공정한 재판을 하는 모습 때문이라 본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현실사회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대리충족적 심리상태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무리 기계기술과 첨단과학과 같은 응용과학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의 주체인 인간을 주제로 한 현실과 연결된 실용성 있는 인문과학, 즉 실학은 오히려 더욱 절실함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우리의 정치현실과 包淸天 붐을 보면서, 包淸天보다 조금 앞서 開封府尹을 역임했고 재상까지 되었던 范仲淹의 말이 곧 유교의 민본정치사상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무릇 관리가 된 자(황제까지 포함)는 ‘天下(萬民)의 근심을 그들(백성)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그들보다 나중에 즐겨야 한다[각주 ’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先憂後樂思想’을 말하였다. 물론 이는 孟子가 ’민중을 나라의 근본으로 하여 정치를 하여야 하고’(民本思想), ‘왕과 관리는 백성과 더불어 즐겨야 한다’(與民同樂)는 유교의 실학적 정치사상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인물 가운데 南冥 曺植(1501-1572, 이하 南冥)이 지녔던 훌륭한 儒敎의 民本政治思想과 불의에 항거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정치비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한 上疏文을 올리는 훌륭한 전통은 왜 계승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와 아울러 우리의 현실에서 비판적 학자나 지식인의 목소리보다는 정치적 奸知를 속삭이는 黨政의 참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재벌의 정치자금에 묶여있는 정치지도자는 그들 스스로의 자질과 함께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왜 시대가 발달하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民主共和國’에서 ‘淸白吏’는 고사하고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세금을 도둑질하고 이권에 개입하여 국고를 축내어 결국에는 머슴이 주인의 재산과 호주머니를 터는 이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조선왕조도 후기에 와서 老論의 一黨專制과 勢道政治로 인하여 똑같은 모습을 보이자 나라가 망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南冥이 상소문에서 당시의 정치사회 비리를 질타한 조선 중기 당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에서는 儒學思想의 근본 宗旨라고 할 수 있는 ‘修己治人’에서 그 궁극적 목적인 ‘治人’, 즉 實學思想에 중점을 두고 조선 중기 儒學者인 曺植과 그 弟子 및 私淑인들(南冥學派)의 思想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南冥의 高弟子인 來庵 鄭仁弘(1535-1623, 이하 來庵)은 스승의 出處大義를 본받아 중앙권력에 의해 벼슬에 자주 추천되었으면서도, 몇 번의 出仕말고는 끝까지 在野의 비판 세력으로 남아서 실천적이고 개혁적인 정치사상가로서 실학사상을 펼쳤다. 또한 來庵과 더불어 ‘兩岡’으로 병칭되는 南冥의 高弟인 東岡 金宇顒(1540-1603, 이하 東岡) [각주 拙文, 「東岡 金宇顒의 學問과 思想 硏究」,『南冥學硏究論叢』제2집 所收, 남명학연구원, 1992. pp.433-513. 참조]과 寒岡 鄭逑(1543-1620, 이하 寒岡) [각주 그는 13세때 曺植의 高弟子인 吳健(호는 德溪 1521-1574)에게서 배우고 明宗 20년 과거장에 나갔으나 당시 정국의 부패상에 실망하여 포기하고, 다음 해에 南冥의 門下에 들어와 그 학풍에 몰두하여 來庵과 함께 南冥 제자가 되었다. 理氣論 등 空論을 싫어하고 地方官으로서 治績을 올리고 壬辰倭亂 때 강원도에서 義兵을 일으켰다. 또한 古文에 능하여 학문 범위가 넓어 儒學 일반은 물론 禮學․風水․兵陣․醫藥․算數에 능하여 南冥 門徒의 전형적 모습으로 南冥 曺植의 제자 가운데 來庵 鄭仁弘과 쌍벽을 이룬다. 그런데 鄭逑를 退溪 門徒로만 취급하는 것은 後世 南人들의 아전인수적 태도이다.]는 仁祖反正 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弟子와 私淑同鄕人들에 의해 南冥보다는 退溪 李滉(1501-1570, 이하 退溪)의 제자임을 부각하고 來庵과의 반목질시를 왜곡날조하거나 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최근의 객관적인 연구성과로 인하여 그 실상이 밝혀졌으니, 즉 來庵과 東岡의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來庵과 寒岡의 관계 또한 光海君 年間의 이른바 ‘割恩論’과 ‘全恩論’이라는 정쟁 이전에는 兩門의 제자들이 함께 존숭하였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남명학파의 두 尊丈으로 嶺南士林의 宗長으로 존경의 표적이었음이 吳二煥 교수의 『南冥集』 板本과『孤臺日錄』에 관한 연구[각주 吳二煥,「南冥集板本考 1」,『韓國思想史學』 1, 한국사상사학회, 1987. ---,「南冥集板本考 2」, 『東洋哲學』 1 한국동양철학회, 1990. ---,「南冥學資料叢刊 解題 緖論」,『南冥學硏究論叢』1, 남명학연구원, 1988. ---,「山海師友淵源錄의 編纂」『次山安晉吾博士回甲紀念東洋學論叢』, 간행위원회, 1990. ---,「南冥集 壬戌本의 毁板」『南冥學硏究』3,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3. 참조.] 등으로 밝혀진 바 있다.

2. 시대적 상황 및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

高麗末에 性理學이 元나라로 부터 전래 되면서 이전의 佛敎와 道敎를 ‘虛學’이라 하고 性理學을 ‘實學’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 元나라의 官學이었다는 점이 조선초기의 개혁적 정치 분위기에서의 역할과 중기 이후의 守舊反動的 분위기에서 그 역할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한편 鄭道傳의 경세적인 학문내용과 權近의 철학적 학문내용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그들의 제자후예들이 世宗과 더불어 集賢殿을 통해 국가의 기틀과 민생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실학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한편 世祖에서 成宗 시기에 이르는 왕위찬탈과 변방의 반란 그리고 왕권강화는 그 과정에서 공신의 남발로 인하여 보수적인 勳舊派를 양산하기에 이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과 그것을 가지고 향유하는 세력이 끝없이 긴장하면서 역사적 발전을 담보해 내는 법은 없었다.[각주 특히 世祖의 쿠테타 이후 成宗시대 까지 잦은 政變으로 인하여 ‘功臣田’이 남발되어 많은 일반 公田이 회수되어 ‘世襲田’으로 되면서 良人은 佃戶化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世祖의 治世를 改革政治로 평가하는 것은 민중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虛構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훈구세력은 이제 왕권도 넘볼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는 것은 민본적인 유학사상에서 볼 때 부정적인 집단임에 틀림이 없다. 成宗은 그 治績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위한 士林派의 등용이다. 그렇지만 燕山君에서 中宗反正을 거쳐 宣祖 초기 까지의 역사적 추이는 反正과 士禍라는 비정상적인 것이 었다.

中宗反正은 勳舊外戚 세력의 궁중 쿠데타로서, 仁祖反正이 西人이라는 勳舊外戚과 보수적 색채를 지닌 역사반동적 쿠데타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며 성리학적 사회정치 질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반역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련의 士禍(史禍)라는 것도 유교의 민본사상과 성리학의 이상정치에 근본을 둔 사림파의 정치 개혁적에 庸君과 보수적 勳舊派들이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느끼자 정치적 野合으로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들이다.

한편 明宗 말기 母后인 文定王后가 죽고 난후 명종 말년과 宣祖 초년의 李浚慶과 權轍 등 비교적 사림파에 옹호적인 宰相들에 의한 정치 개혁적 분위기 조성으로로 인하여, 사림파가 정치전반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다. 이러한 士林派가 정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士林政治는 中宗때 趙光祖에 의해 시도된 至治主義 또는 道學政治로 일컬어진다. 이 사림파의 정치사상은 『大學』의 三綱領과 八條目의 정신에 토대를 둔, 다시 말해서 ‘修己治人’의 유학 정치사상에 철저하고자 하였다.[각주 拙著,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pp.37-71. 참조.] 바로 이러한 사상적 맥락이 실학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조 實學과 그 思想에 대한 연구가 한국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각주 千寬宇,「韓國史의 再發見」,ꡔ歷史學報ꡕ2.3호,1952년. 韓㳓劤,「李朝後期의 社會와 思想」,ꡔ震檀學報ꡕ19호,1958 참조.] 물론 조선시대 후기실학 연구는 19C-20C 초에 鄭寅普에 의해 茶山 丁若鏞 연구가 있었고[각주 鄭寅普,ꡔ薝園國學散藁ꡕ,문교사,1955.], 文一平과 申采浩 등이 國學운동 차원에서 다룬 적이 있었다.

실학은 ‘實事求是’를 줄여서 쓰는 명칭이다. 그 용어가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은 ꡔ漢書ꡕ에 “修學好古 實事求是” 라는 말이 나온다.[각주 BC.155년 西漢 景帝의 아들 河間獻王 劉德이 학문을 좋아하고 옛 서적을 수집하여 藏書하고 학자를 招聘하여 儒學을 장려하였다. 이 때 虛無한 黃老之學과 신비한 圖讖思想을 배척하고 유학의 修身齊家治國의 道와 禮樂刑政의 法을 숭상하여 위의 명칭을 들었다.] 당시에는 하나의 학풍적 대명사는 아니었으며, 중국에서는 17C 후반에서 18C 상반의 기간에 考證學的 學風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實學’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는 시기는, 16C 중엽 이후에는 주자학 자체가 현실문제를 외면하고 오히려 觀念化․內省化․虛學化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이후부터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社會․政治․軍士․經濟․土地․租稅 등 時務策의 學問體系로서 유학의 經世思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 實學派의 淵源에 대해서는 그동안 대체적으로 退溪, 栗谷, 李晬光, 眉叟 許穆, 星湖 李瀷 등 많은 연구가 있어왔으나, 최근 여기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며 남명과 그 제자사숙인이 실학의 실질적인 학맥과 학문경향성을 가진다고 문제제기 하였다.[각주 趙平來,「南冥思想의 實學的 性格」, 경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8. pp.3-12. 拙著, 앞의 책, 한길사, 1995, pp.265-277. 참조.]

先行하는 기존의 연구자들이 다룬 인물들 가운데 退溪와 栗谷은 실학자라기 보다는 성리학자임에 틀림이 없고, 그 학문사상에서 초기 실학적 학풍이 분명한 南冥, 來庵, 寒岡, 文緯, 趙絅, 許穆 등 南冥과 그 弟子私淑人을 물론 柳馨遠, 尹鑴, 李瀷, 安鼎福, 權哲身, 魏伯珪, 洪大容, 崔漢綺 등에 이르기 가지 이들의 학문경향이 성리학과 經․史․子․集 뿐만 아니라 天文․地理․兵陣․曆法․算術․律呂․陰陽․醫藥․卜筮 등을 異端學問이나 邪說亂言으로 비판하지 않고 적극수용하여 博學鴻儒로서 특히 모두가 科擧(文科:大科) 출신자가 아니고 在野 출신으로 出處에 嚴正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朴世堂, 朴趾遠, 丁若鏞 등도 비록 과거출신이지만 그들이 각각 肅宗, 正祖, 純祖 때에 조정에서 밀려나 재야나 귀양 중에 있을 때 실학적 학문사상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점은 南冥學派의 실학사상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연구에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조선조 실학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3. 남명 조식의 실학적 학문사상

1) ‘부(賦)’를 중심으로 한 민본사상

南冥의 학문사상에서는 經世思想과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요소가 당시 어떠한 학자보다도 많이 내포되어 있으나 현재 학계의 실학연구에서 거론이 미진한 실정이다. 남명학파의 經世思想은 현실개혁을 통해 자신들이 利權을 쟁탈유지하고자 하는 意圖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당시 양반 사대부 세력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보다 儒敎 政治思想의 원칙론에 入脚하여 민중을 위한 ‘民本’을 立論의 토대로 한 것이기에 비교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出處에 嚴正하여 在野에서 중앙권력의 疎外와 탄압을 받았지만 그것이 바로 역사 발전의 推動力이 되었다는 데에 意義가 있는 것이다.

유교의 민본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동사상(大同思想)[각주 비록 그 사상의 출처가 유교경전인 『禮記』「禮運」편이므로 유교사상의 연원으로 보고 있지만, 대동사상의 적극적이고 혹은 이상주의적 경향성 때문에 墨家나 道家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예기』의 형성 시기가 전국시대 말과 한 대까지 내려오므로 그 대는 이미 春秋戰國 시대의 諸子百家 사상이 종합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이론이다.]은 구체적인 역사 현실로 볼 때는 이상적인 논의에 불과하고 구두선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조선조는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입국의 정치이념을 표방하고 왕조 초기의 중앙집권국가 형성과정에서 법치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권력과 경제력(土地)을 독점한 勳戚派들과 사림파 사이에 이해관계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유교정치사상의 특색인 현실에 대한 憂患意識에서 관념적인 理氣心性論으로 도피하는 보수적 사림파가 등장한다. 이 때에 南冥은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사상적 혼란시기에 사회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궁극적 정치소재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였다.

구체적으로 南冥은 그 당시의 정치와 왕실에 대하여 「民巖賦」에서 민중을 물속의 바위(암초)에 비유해서 읊었다. 그는 “‘염여퇴(灩澦堆)’[각주 中國 揚子江 구당협(瞿唐峽) 입구에 있는 돌 무더기로 물밖으로 數十丈 솟아있는데 지나가는 배들이 자주 여기에 부딫혀 좌초한다고 한다.]에 배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또한 이곳에서 전복되기도 한다”고 하여 민중에 의해 권력자체가 바뀔 수 있음 주장하고 있다. 또한 南冥은 “민중이 물과 같다 함은 옛날부터 있는 말이다.[각주 『荀子』, 「王制」: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민중은 임금을 모시지만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각주 『南冥集』권1, 「民巖賦」:民猶水也, 古有說也. 民則戴君, 民則覆國.]라 주장하였다.

즉, 당시 사회도 정치권력이 民衆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물이 있어야 배가 떠서 다닐 수 있다. 민중이 있어야 임금이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이 배를 뒤집을 수 있듯이, 민중을 위한 정치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南冥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속에서 유교의 혁명적인 정치적 사상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는 “桀紂는 湯武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나라의 민중을 얻지 못한데에서 망했다.”[각주 『南冥集』권1, 「民巖賦」:桀紂非亡於湯武, 乃於不得丘民.]라 하여 『孟子』의 「離婁章」[각주 桀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과 「盡心章」[각주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故得乎丘民而爲天下.]의 두 문장을 합해서 그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즉 폭군인 桀王과 紂王이 단순히 혁명을 이끈 湯王과 武王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失天下는 失其民 때문이고 그것은 곧 失其心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시 南冥은 보다 후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다. “漢나라 劉季[각주 漢나라 高祖 劉邦. 季는 그의 字.]는 小民이었고 秦나라 二世[각주 秦나라 二代황제 胡亥.]는 大君이었다. 匹夫가 萬乘(天子)으로 바뀌었으니 大權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직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각주 『南冥集』권1, 「民巖賦」:漢劉季爲小民, 秦二世爲大君, 以匹夫以易萬乘, 是大權之何在. 只在乎吾民之手兮.]라고 하여 분명히 정치권력인 大權이 민중의 손에 달렸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의 정치사상에는 민본을 바탕으로한 소박한 민주적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이는 물론 당시 대비 윤씨와 그 오래비 尹元衡 일당의 외척정치가 극도로 부패문란하여 당시 민중의 생활이 피폐된 시대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그 구체적 예로서 조식은 「民巖賦」에서도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읊고 있다. 그는 “宮室을 廣大하게 하는 것은 巖을 운반해 오는 수레이고 女謁[각주 왕의 寵愛를 입은 宮女가 그 權勢를 이용하여 請託하는 행위.]이 성행하는 것은 암의 계단이고, 稅를 거두는데 기준이 없음은 암을 쌓는 것이고, 사치함이 헤아릴 수 없음은 암초가 크게 서있는 것이며,  이 암초가 비록 민중에게 연유하고 있으나 임금의 德에서 연유함이 아닐 수 없다”[각주 『南冥集』권1, 「民巖賦」;宮室廣大, 巖之輿也. 女謁盛行, 巖之階也. 稅斂無藝, 巖之積也. 奢侈無度, 巖之立也. 巖之在民, 何莫由於君德.]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물과 같은 백성이 배인 임금을 받들어 모시지만 물 속에 암초인 바위가 있으면 배는 좌초해서 전복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당시 현실이 온통 바위를 물속에 운반하여 크게 쌓고 있는 것과 같아, 잘못하면 왕 자신도 무너지게 된다는 경고였다.

2) ‘公車文(上疏文)’에 나타난 憂患意識의 實學思想

조선 초기의 과전법이 실제에 있어서 폐지된 결과, 실권을 가진 훈구외척 세력들의 土地兼倂이 일어나고 대토지를 소유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 당연히 귀족 관료층은 과소비와 아울러 사치스러워지고 상대적으로 이를 충당해야 하는 하층민은 貢物 등 세금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가난해져 流民化되며, 나중에는 도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民은 정치적인 주체가 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귀족층의 권력과 富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바로 茶山이 말한대로 ‘관리가 민중을 그들의 논밭으로 하여 사사로운 私益을 秋收’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유교 정치사상에서 民心의 向背는 天心을 움직이는, 즉 ‘民心이 곧 天心’으로서 국가의 존망과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南冥은 上疏文에서 당시 民衆이 魚肉이 된 현실을 직절(直截)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당시 중종 때부터 다시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발호하고 남쪽 바닷가에서는 乙卯倭變 등으로 倭寇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은 때였다. 그런즉 미구에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예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논지가 內治의 문란, 즉 국가 안의 부패가 나라의 힘을 약화시켜 밖으로 부터의 화를 자초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 당시 內治의 부패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南冥은 “지금의 형세가 이미 극도로 부패해져 둘러보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고 어찌할 줄을 모른다. 小官들은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酒色이나 즐기고 大官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재물과 뇌물을 모으기만 한다. (중략) 外臣은 민중의 껍질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 날뛰듯 하는데,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臣은 이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하며 계속 탄식하여 낮에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고 허희(噓唏)하며 탄식하여 밤에는 눈물을 가리는 것이 오래 되었다. 慈殿은 소식이 막혀 있는 깊은 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가 어리어 中宗의 孤嗣일 뿐이니, 百千가지 天災와 억만갈래로 흩어진 人心을 무엇으로 수습할 것인가?”[각주 『南冥集』 券2, 「乙卯辭職疏」]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민중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환의식에서 탄식과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조정에 있었던 王과 실권을 행사한 大妃와 內外의 大小 臣僚들에 대하여 준열하게 비판하였다.

조선 중기 당시의 국제정세는 조선 초의 四郡․六鎭개척과 對馬島 征伐로 보인 적극적 대처로써 얼마 동안의 평화를 가져왔으나 중종 시대 이후로 부터 끊임없는 변방의 소요가 있었다. 또한 南冥은 상소문에서 외교와 국방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당시 상황과 그 이유 그리고 대처방안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세종 원년(1419년)에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 10년(1479년)에 북방 野人(여진족)들을 치게 하여 변방을 튼튼히 한 사실을 들고, 당시(명종 시대)의 국방문제는 국가의 규율이 무너지고 남쪽에는 三浦倭變이 일어나 민중이 魚肉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점검 진단하였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 이유를 南冥은 “평소의 朝廷에서 財物로 사람을 쓰니[각주 文定王后 등 外戚이 政權에 개입하면서 賣官賣職이 盛했다.] 재물은 모이겠지만 백성은 흩어져서 필경에는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 없고 城에는 군졸이 없다. 적이 침입하여도 無人之境이 되었으니 어찌 이것이 괴이한 일이겠는가. 이것은 역시 대마도의 왜구가 몰래 결탁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하는 바가 국가의 무궁한 치욕이 되어 王靈이 떨치지 못하니 마치 국가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듯 한 것이다. 이것은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은 周나라 예법보다 엄하면서 원수 같은 仇賊를 대우하는 것은 망한 宋나라 보다 더한 셈[각주 宋나라가 文弱하여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게 歲幣를 바치고 和議하고 지냈으나 끝내 금나라에게 北宋이 멸망당하였음을 말함.]이다.”[각주 『南冥集』 권2, 「乙卯辭職疏」]라고 말하면서 당시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구의 국경침입과 변란이 심상하지 않음을 경고하였다.

더구나 그가 처가인 남해안의 김해에서 18년간 거주하면서 왜구의 노략질과 민중의 참상을 목격하고서 올린 상소문이기에 그 내용은 더욱 절실한 감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때 이미 심상치 않은 변방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南冥은 高弟인 德溪 吳建(1521-1574)이 御史兼災傷敬差官으로 湖南의 逋租[각주 民戶가 流亡하여 미납한 租稅.]와 逋卒[각주 軍丁이 流離하여 병역을 기피하는 것. 또는 그 軍布를 내지 않는 것.] 등의 弊害를 建白한 사실을 朝報를 통해 보고, 그에게 편지에 써서 말하기를 “나라의 큰 일은 군사와 식량에 더한 것이 없는데, 逋租와 逋卒에 대한 백년동안 막혔던 적폐를 이제 통하게 하였으니, 公과 같은 사람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단지 한스러운 것은 廟堂에서 계획되지 않고 六品의 言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각주 『南冥集』 권2, (아本 p.34) 「與子强子精書」.]라고 하여 南冥은 당시 나라의 상황이 防納의 폐해와 軍役의 紊亂으로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南冥이 나라의 존망에 관련된 것인데도 중앙의 고위 정책심의 기구인 廟堂이나 비변사 등에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고 오히려 미관말직이 지적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의 장래를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이러한 그의 우려는 바로 을묘왜변이나 임진․정유년간의 왜란과 정묘․병자호란에 그대로 나타나 민중이 어육이 되고 국가가 존폐의 위기로 나타났다.

그리고 南冥은 ‘胥吏亡國論’과 ‘貢物弊害論’을 주장하였다. 먼저 ‘胥吏’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전’ 또는 ‘구실아치’로 사용되고 있다. 『周禮』에서도 ‘胥’는 하급관리로 설명하고 ‘吏’ 또한 『韓非子』에서 「州部之吏, 操官兵, 推公法」하는 行政實務者를 指稱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官’은 ‘벼슬아치’로 구분되어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문무관료와는 그 출신이 다른 관리층으로서 ‘吏’가 존재하였다. 고려시대 초기, 지방의 실질적 지배세력이었던 鄕吏계층은 사회경제적인 변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가 있어서 고려말에는 그 권력지향적 성향과 맞물려 신흥 중앙관료층으로 진출하였다. 吏族이 士族化의 길을 걷다가 조선초 이후 이러한 중앙관료층에로의 진출은 이미 사족화된 계층 관료 사대부층들에 의해 봉쇄되자 그들 스스로의 利權을 위해 폐단이 속출되었다.

南冥은 선조가 즉위하여 求言하였을 때 올린 「戊辰封事」에서 “옛날부터 權臣이나 戚里, 그리고 婦寺(王后이하 왕 주위의 여자들과 宦官)가 나라를 專橫한 것은 혹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胥吏가 나라를 전횡한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정치권력이 大夫에게 있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서리의 손에서 인가? 당당한 千乘의 나라[각주 ‘乘’이란 말이 끄는 수레로 戰車를 말한다. 전차 천대를 지닐 수 있는 諸侯國을 말하고, ‘萬乘天子’라 하여 황제국은 만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로 곧잘 묘사된다.]로서 祖宗 200년의 遺業을 기록하면서도, 많은 公卿大夫가 앞뒤 서로 모두 정치를 하인(서리)에게 맡길 수가 있는가? 이런 일은 차마 소 귀에도 들려줄 수가 없다. 비록 莽卓[각주 中國 前漢末의 王莽과 後漢末의 董卓을 말함. 이들은 外戚 세력과 결탁하여 專橫을 일삼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의 간교함에도 이런 일은 없었으며 망한 나라의 세상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다.”[각주 『南冥集』 권2, 「戊辰封事」.]라고 하여 南冥은 조선중기의 나라의 정치가 바로 이 조세정책의 잘못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공물의 방납과 이를 관장하는 서리의 작폐 때문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宣祖의 求言에 의해 같은 시기에 올린 退溪의 상소문[각주 『退溪全書』 권2, 「戊辰六條疏」.]은 時弊의 진단과 비판 그리고 匡正과 개선책을 볼 수 없고 오히려 變通과 改革이 禍를 불러 올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다. 또한 그는 性理學의 人心道心과 仁孝 등 윤리에 대한 이야기와 왕의 마음가짐 그리고 異端 배척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勳舊大臣에 대해서도 至治와 中興에 방해가 되지만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新進士類에 대해서는 이들의 등용이 혼란의 빌미가 된다고 강한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일찍이 孟子도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각주 『孟子』, 「梁惠王」上.]고 하였고, 孔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先富後敎)’ [각주 『論語』, 「子路」.]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나라의 기틀인 민중이 공물과 서리의 가렴주구에 생존마저 위태로워 살아나려고 流民化하고 도적이 되어 도덕을 버릴 수 밖에 없는 마당에, 이기심성과 윤리도덕 그리고 이단 배척을 임금의 구언에 답한다는 것은 오히려 孔孟의 정치사상을 버리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南冥은 이어서 “胥吏들이 도적이 되어 모든 관청에 무리를 이루어 들어가 웅거하여 요직을 차지하고서 나라의 國脈을 결단낼 뿐만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犧牲까지 도적질하여도 법관이 감히 묻지를 못하고 司寇(형조:법관)도 이를 따지지 않는다. 혹 일개 司員(하급의 젊은 관리)을 조금 규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있고 관리들의 무리들은 손을 묶어놓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근근히 녹봉이나 받아먹으면서 아첨하며 따르는 지경이니 이것이 어찌 믿는 바가 없고서야 그렇게 되겠는가.” 『南冥集』 권2, 「戊辰封事」.]라고 하여 그는 서리가 도적이 되어 무리를 이루어 나라를 결단내고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단호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또한 더나아가 그보다도 이들 서리들을 규찰하고 심문하여 죄를 논하고 그 예방을 해야할 사헌부나 형조 등 조정의 대신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가렴주구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南冥은 다시 “만약 言官이 이것을 논박하지 않는다고 그대로 따른다면 善惡의 소재와 시비의 분별하는 바를 알지 못해 임금의 도리를 잃게 된다. 어찌 임금이 그 도리를 잃고서 능히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각주 위의 글.]라고 하여 그는 선악과 시비가 현실을 떠나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임금의 정치라는 것도 민중이 도탄에 빠졌는데 이에 대한 실정도 모르면서 ‘倫理道德, 上下綱常, 天理人心을 운운’하는 것은 바로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한 호도책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조식은 임금이 현실분별 속에서 선악시비를 가리고 그에 의해서 정치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사회 정치관에서 정곡을 찌른 南冥의 상소문에 대해 微言이 많았다. 退溪는 南冥의 「乙卯辭職疏」(일명 丹城疏)가 王家에 공손하지 못한 言辭를 사용하여 임금이 크게 노한 사실을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南冥이 비록 理學으로서 자부하지만 그러나 그는 바로 奇士라서 논의와 識見이 매양 새롭고 기이하다. 高尙하고 세상이 놀랠 일을 하는 것은 어찌 道理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각주 『退溪先生言行錄』 권5, 「論人物」.]라 하였다.

그리고 또한 “무릇 章疏는 진실로 솔직히 말하여 현실문제를 피하지 않는 데에서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모름지기 요컨대 완곡하여 뜻은 곧되 말은 부드럽고 과격하지 않아 恭遜하지 못한 병이 없어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禮를 잃지 않고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게 할 수 있다. 南冥의 상소는 진실로 今世에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言語가 합당한 것을 지나쳐 비방에 가까웠으므로 임금이 怒한 것은 당연하다.”[각주 위의 글. 한편, 南冥의 이 상소문에 관련하여 명종이 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잠시 거론한대로 당시에 좌의정 尙震이 李濟臣을 시켜 중국 송나라 역사책인 『宋史』의 「英宗本紀」에서 歐陽修가 말한 것과 같은 南冥의 ‘母后는 깊은 궁궐의 일개 과부에 불과하고, 展下는 幼冲하여 단지 先王의 유업을 이은 한 孤兒일 뿐’이라는 말을 빼내어 놓고 변명하기를, “南冥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를 지극하게 말한 것이지 거만한 일이 아닙니다”하였다. 이에 明宗도 南冥을 ‘遺逸의 선비’로 대우하여 마침내 죄주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에 계속

출전 : 남명학연구논총 제5집 19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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