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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2-11 (수)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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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74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3 (권인호)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3

에서 계속

3) 寒岡 鄭逑와 眉叟 許穆의 學問傾向 및 그 淵源

조선 후기 실학자의 사상적인 淵源과 嶺南學派와 近畿學派의 연결과 그 表象으로서 眉叟 許穆(1595-1682)은 寒岡의 말년제자이다. 잘알다시피 조선 후기 ‘經世致用’ 중심의 실학파인 근기학파의 開山鼻祖인 眉叟 許穆은 龍洲 趙絅(1586-1669)과 함께 처음에는 寒岡의 제자인 茅谿 文緯1554-1632)[각주 『德川師友淵源錄』; (1554-?) 자는 順甫, 호는 茅溪, 寒岡과 東岡의 제자. 『尙書』에 능통하고 壬辰倭亂 때 鄕兵을 거느리고 金沔과 함께 倭寇를 물리쳤다.]에게 師事하다가 文緯의 추천으로 寒岡에게 及門하였다.[각주 『記言』 권40, 「龍洲神道碑銘」. 『眉叟先生年譜』. 『龍洲集』권13, 「祭茅溪先生文」 참조.]

앞서 살펴본 대로 한강은 유년시절부터 天資가 豪邁하고 체질적으로 南冥과 유사하여, 南冥의 砥礪名行과 出處義理를 본받고, 학문의 태도나 수양에 있어서는 退溪를 본받았다. 학문연구의 대상이 폭넓어 性理學은 물론 歷史․文學․地理․醫學․兵法․禮學․人物․物産 등의 방면에 밝아,[각주 李佑成,『寒岡全書』解題 참조.] 이 또한 退溪보다는 南冥의 학문사상적 색채와 더욱 유사하다. 寒岡은 이러한 학문적 성격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 「檜淵及門諸賢錄」에 의하면 341인의 제자가 있다.

다시 말해서 眉叟 許穆은 남명학파의 薰習이 배인 江右지역과 인물들에게서 배우고 특히 南冥의 제자인 寒岡의 많은 제자 중에서 가장 후배였던 그가 後日 寒岡의 학통의 상속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南冥의 실학적 학풍을 京畿地方으로 가져와서 조선 후기 근기실학파를 형성시켰다. 眉叟 許穆이 위로 ‘南冥의 學風과 退溪의 學統’을 물려받은 寒岡을 직접 이어 아래로 星湖 李瀷과 茶山 丁若鏞의 經世致用적인 학문사상을 발전시키게 한 그 私淑人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조선 중기 영남의 性理學과 실학적 학문풍토에서 조선 후기 근기의 實學에 架橋者的 役割을 한 것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그리고 許穆과 趙絅는 다같이 來庵과 마찬가지로 山林(遺逸)출신으로서 政丞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許穆은 또한 고향이 近畿 지방인 京畿道 連川이지만 16세 때(광해군 2년:1610년) 부친 許喬가 고령현감으로 가자 이 때부터 경상우도의 남명학파 제현들과 배움과 교류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許穆은 23세 때 부친이 거창현감으로 갔을 때 寒岡이 죽기 3년전에 찾아가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년보에 나온다.

그리고 그가 25세 때 부친이 다시 山陰(현 山淸)현감으로 나아가자 더욱 南冥學派와 가까워졌을 것이다. 또한 許穆은 丙子胡亂으로 인해 仲弟의 妻家 곳인 慶尙道 宜寧에 피난 가서(그의 나이 42세 때인 1636년 4월 12일 도착) 10년을 생활하고 연천에 돌아와서(51세 때인 1645년 9월)도 모친이 의령에 남아있어 수시로 의령을 방문하며 경상우도 전역을 遊旅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慶尙右道와 南冥學派의 관계로 인하여 후일 南冥의 神道碑도 짓는다. 그가 유일로 후에 조정에 나가 벼슬이 정승에 이르고 당시 南人의 領袖에 이르러 淸南으로서 반대당인 西人(老論)의 宋時烈의 治罪에 峻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조 당시 鄭澈 등에 대한 來庵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뿐만아니라 來庵의 고제자였던 桐溪 鄭蘊(1569-1641)의 孫子 鄭岐胤이 許穆의 막내사위가 된다.[각주 『記言』. 『眉叟先生年譜』. 李在喆, 「18世紀 慶尙右道 士林과 鄭希亮亂」, 『大丘史學』 31, 대구사학회,1986,p.41-43 참조.] 朝鮮朝에 양반계층에서 婚姻關係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한 男女의 만남이나 姻戚의 의미보다도 두 家門 전체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크다. 더구나 朝鮮 後期로 갈수록 같은 黨色이나 門閥을 가진 家門끼리 혼인할 뿐만아니라, 이들이 당시 단순한 양반가문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학자관료 집안이었다는 것을 종합해 볼 때, 비록 許穆의 黨色이 南人이었다고 하지만 그 學風과 師弟繼承 그리고 相互通交한 쪽은 경상좌도의 退溪學派보다는 오히려 南冥學派에 더 密接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眉叟의 學統은 仁祖反正 후에 기록되어 현존하는 문헌상에서 言表한 것에서만 볼 때는 일반적으로 퇴계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 후의 퇴계학파는 지역적으로 보아, 인조반정 후에 살아남은 殘餘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에 속하는 南人은 嶺南學派와 近畿學派로 나누어지거니와 許穆은 바로 근기 실학파의 성립에 기초 구실을 한 사람이다. 일찍이 正祖 때 명재상이자 茶山 丁若鏞 등 近畿南人 실학자들의 후원인이라 할 수 있는 樊巖 蔡濟恭[각주 그는 南冥의 享祀書院이고 강우학파의 淵藪인 德川書院의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이 星湖 李瀷의 墓碣銘을 지으면서, “우리의 학문은 원래 계통이 서 있다. 退溪는 우리 나라의 孔子로서 그 道를 寒岡에게 전해주었고 寒岡은 그 도를 眉叟에세 전해주었는데, 星湖는 眉叟를 私淑한 분으로, 眉叟를 통하여 退溪의 학통에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해 眉叟는 위로 退溪의 학문을 물려 받아, 아래로 星湖의 실학적 학문으로 발전적 계승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나[각주 李佑成, 「해제」『眉叟記言』,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82. pp.4-5. ], 앞서 밝혔듯이 그는 외형적인 학통은 퇴계학파에 속할지 모르나 그의 학문적 영향과 학문경향을 살펴보면 오히려 남명학파에 가까움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의 발생과 그 학문적 풍토와 실질적 내용을 보면 후기에 있어서의 閥閱政治의 출현과 商品貨幣經濟의 새로운 作用 등 정치 경제관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지만, 또한 思想史 자체의 內在的 展開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과 후기의 실학을 본래 무관계한 것으로 완전히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렇지 않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관념화, 형식화되어 스스로 현실에 대처할 능력이 없게 되자 관념세계로부터 현실세계로, 내면세계로부터 외면세계로 눈을 돌리면서 자기 극복을 통하여 발전적으로 전개된 것이 곧 조선 후기의 실학이다. 이런 점에서 眉叟의 實學史的 위치는 그 중요함을 거듭 느끼게 된다.[각주 위의 글, p.5. 참조.]

그러나 잘알다시피 退溪學이 理氣心性之學에 매몰되고 이단배척에 앞장서서 당시 南冥으로부터 오히려 非實用的인 공리공담으로서 ‘欺世盜名’을 하는 학문 풍토에 長老로서 꾸짖지 못한다고 비판을 받았다는 점과 南冥의 학풍은 바로 근기 실학자들의 학문 연구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寒岡은 학문의 영역은 앞서 살펴본대로 대단히 넓고도 實用的이다. 그의 이러한 학풍은 許穆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思考를 더욱 현실에 밀착시키고 그 학문적 시야를 더욱 열어주었다. 許穆은 社會政策․天文․地理․動植物․山川․國學 등 여러분야에 博學하였다. 그리고 許穆은 우리나라 역사인 『東史』를 지어 당시 中國史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문 풍토에서 國史를 짓는 등 博學과 尊明事大主義에서 주체적인 사상을 重視하여 後期 실학파와 직접 접목 되는 인물이었고[각주 許穆, 『記言』.「年譜 神道碑銘幷序」, 李瀷撰. 金吉煥, 『朝鮮朝儒學思想硏究』, 일지사, 1986, p.137. 千寬宇, 『韓國史의 再發見』, 일조각, 1975, p.105. 참조.] 李瀷에게 주는 사상적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즉 우리 나라의 역사․지리․인물․경제 방면에 관한 학문적 관심을 크게 높여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許穆은 스스로 “古文과 古書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도처에 보인다. 이것은 바로 南冥이 특히 ‘古文인 左柳文에 능통하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許穆의 尙古主義와 鑑古戒今的인 역사철학은 中世에 대한 否定이며, 그것은 곧 관념화된 당시의 朱子 性理學的 精神風土의 부정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주자를 尊信하고 주자의 학풍을 답습한 퇴계학풍과 율곡학파의 후기 학풍에서 그 권위주의가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 그 권위의 構築과 그 威光으로 白湖 尹鑴나 西溪 朴世堂과 같이 주자의 경전해석과 달리한 것에 대해 ‘斯文亂賊’으로 매도하면서 정치적으로는 山林을 자처하면서도 勳戚派를 후원 합리화 한 宋時烈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한 尙古主義와 鑑戒主義의 실학사상은 바로 星湖와 安鼎福에게 이어지고 茶山의 鹿庵 權哲身의 墓碣文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음날 실학사상의 발달에 큰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典籍에서 주로 五經을 좋아하고 宋元明 시대 儒學者들이 중시해 오던 四書, 특히 程朱의 章句註釋과 『心經』과 『近思錄』 등의 성리학 서적들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그러나 五經을 좋아한다고 하여 漢代의 訓詁學나 淸代의 考證學的 학문경향에 쏠린 일을 볼 수 없었다.[각주 위의 글, p.5.] 이는 바로 그가 성리학보다는 실천과 학문의 범위가 先秦儒學과 일맥상통하는 南冥學派의 실학적 학풍, 즉 民本과 實用에 중심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眉叟 許穆은 「自序」라는 글이 있는데, 자기의 평생 중요한 경력을 적어 놓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거기에 당시 시국에 관한 자기의 정치 사회적 견해를 몇가지 열거해 두었다. 그 중에서도 衙門과 屯田의 혁파 문제, 그리고 市廛의 정리 문제는 본래 그의 上疏文을 그대로 옮기다시피 하여 그 문제의 심각성과 자기 견해의 타당성을 되풀이 해서 피력하였고, 그 밖에 體察府 문제[각주 尹鑴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윤휴가 정권의 핵심에 있을 때 그의 북벌론은 송시열 보다 구체적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병역의 의무를 평민들에게만 부과하던 신분제적 불평등에서 탈피하여 양반귀족의 자제에서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평등하게 부과할 것을 주장하였다. 兵權을 外戚이 쥐거나 일개 정파가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초의 五衛制와 體察府(군총사령부)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淸나라에서는 명나라 장수로서 청에 항복하여 강남지방의 왕으로 책봉되어 있던 吳三桂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1673년) 청나라가 전전긍긍할 때였다. 윤휴는 이 때를 북벌의 호기로 보아 대만의 정금(명나라 잔여 망명세력)과 통하고 청나라를 협공하자는 실질적인 북벌론이었다.

그러나 보수파와 우유부단한 왕이 시간만 보내다가 6년만에 오삼계의 난이 거의 평정되자 청나라 눈치를 보며 다음해 윤휴 등 남인정권을 실각시키고 윤휴 등을 귀양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숙종6년:1680년).], 武士에 대한 萬人科 문제, 戶布 문제 등에 관해 거듭하여 자신의 소신을 말해놓았다. 이는 선조 초기에 戊辰년의 求言에 대한 南冥과 退溪의 상소문이 그 성격상 매우 달랐고,[각주 拙著, 앞의 책, pp.178-191. 참조.] 그 내용상 眉叟의 실학적 時弊匡正의 상소문은 南冥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4) 經世致用 學派와 星湖 李瀷의 實學思想的 淵源

星湖 李瀷(1682-1763)과 茶山 丁若鏞을 비롯하여 실학파들은 대개 유교경전 해석에 있어서 程朱의 해석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고 나아가 비판적이기까지 하였다.[각주 尹鑴와 朴世堂은 대표적인 인물이고 李瀷의 경전에 대한 여러『疾書』와 丁若鏞의 2백 6십여권에 달하는 儒敎 경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주석.] 바로 이러한 새로운 경전 해석이 실학사상을 배태하는 온상이었다.

星湖는 1680년 老論의 쿠테타(庚申大黜陟)로 政界에서 밀려나 유배당하는 부친 李夏鎭은 당시 함께 정계에서 밀려난 南人 巨頭인 許穆과 같은 近畿南人이다. 그런데  星湖의 학문적 연원과 그 성격이 같은 眉叟와 그 스승 寒岡의 경세치용적 학풍에 대해서는, 그것이 退溪에서 유래한다는 近畿南人들 자신의 표방 외에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각주 李佑成, 「寒岡全書解題」, 「眉叟記言解題」, 「實學硏究序說」 등 참조.] 오히려 앞서 法家와 氣質論爭을 말하면서 인용한 李植의 글에서도 寒岡은 南冥淵源이 확실함을 알 수 있다.

또한 實學의 集大成者라 할 수 있는 茶山은 16세 때 星湖의 遺稿에 접하고 평생 私淑한다. 같은 經世致用학파로서 현실정치에 있어서 법과 제도의 개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실학파의 거두인 星湖와 그 집대성자인 茶山은 바로 南冥의 經世思想에서 실학적 요소를 이어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내용상의 유사점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사회경제 문제에 있어서 貢物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南冥과 來庵의 ‘胥吏亡國論’과 星湖의 ‘贓吏論’ 그리고 茶山의 ‘鄕吏論’은 그 대표적인 例이다. 이들은 모두 法도 오래가면 弊가 생기고 폐는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본 일종의 變法思想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富國强兵策에서 井田論에서 출발한 均田的인 ‘限田論’,‘閭田論’과 國防策에 있어서 兵農一致的의 ‘府兵制’에 관심을 두고 文武를  국가에서 비중을 균등하게 두어야 한다는 주장[각주 拙著, 앞의 책, pp.167-178. 참조.]은 南冥과 來庵 및 星湖와 茶山이 일치하고 있고 그 論調도 매우 유사하다. 즉 星湖는 「論兵制」에서 국가경비와 軍役 그리고 胥吏의 농간을 지적한 다음 武科에서는 武經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武將들이 이론적인 兵法공부도 철저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각주 李瀷, 『星湖雜著』, 「論兵制」:人主之尊, 亦必有經筵講學, 武將豈獨闕焉.]

그리고 그는 “이른바 ‘武를 그치고 文을 닦아 밝힌다’[각주 『書經』,「武成」:偃武修文.]는 것은 전쟁을 치루고 난뒤 무를 조금 억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문과 무를 아울러 쓰는 것이 長久하게 하는 방법”[각주 『星湖僿說』 권7, 「文武倂用」 : 所謂偃武修文者, 當戰伐之餘, 稍加偃屈云爾. 故曰文武幷用, 長久之術.]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孔子가 文敎를 드리웠으므로 倫理綱常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太公이 병법을 전하였으므로 禍亂이 그를 얻어서 평정된다. 武略이 갖춰지지 않으면 비록 禮樂聲明의 燦然함이 있을지라도 하루아침도 존속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만일 武敎를 숭앙권장하고 일으켜 부흥시키려면 반드시 무교의 근본을 높혀야 할 것이니, 武成之廟를 어찌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성왕의 사당을 비록 여러 고을에 다 세울 수는 없을지언정, 마땅히 먼저 京師에 세우고 옛날의 名將[각주 李瀷은 中國의 人物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文廟의 형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과 우리나라의 金庾信․姜邯贊․李舜臣을 配享하고 武經博士를 두어 수시로 익히게 한다면 거의 (의도한 바를) 얻을 것이다.”[각주 위의 책, 「人事門」 권8, ‘武成王廟’ : 孔子垂文敎, 綱常以之不毁, 太公傳兵法, 禍亂得以戡定. 苟使武略無備, 雖有禮樂聲明之燦然, 恐不可一朝居也. 如欲崇獎興起必也, 先尊敎之, 所自出武成之廟, 何可不擧. 雖不能遍于諸州, 宜先立於京師, 以古名將及我國金庾信姜邯贊李舜臣配食, 置武經博士, 以時習麻幾得之.]라고 하였다.

이것은 즉, 武學에 있어서도 당시 儒學의 大學(成均館)과 마찬가지 형식을 갖추고, 즉 武廟[각주 李瀷의 문장에서 볼 때는 文廟에 대비되는 武廟의 뜻이 아니라 ‘武成王(姜太公)의 祠堂’의 뜻으로 보아야 겠으나 李瀷의 주장한 바 意圖는 前者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겠다.]를 건립하고 武學을 창설하자는 것[각주 崔漢綺(惠崗,1803-1879), 『明南樓全書』, 「人政」 권17, ‘選人門’. 李圭景(五洲,1788-?), 『五洲衍文長箋散稿』권5, 「武學辨」 등 朝鮮後期 많은 實學者들이 ‘武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은 요즈음의 士官學校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文武兼全을 통한 국방책은 앞서 살핀 南冥의 견해와 일치한다. 南冥은 이러한 학문적 견해와 상소문에서만 문무겸전과 실질적 국방책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 왜란을 예측하고 제자들에게 그 대책을 강구하는 시험문제도 제출하였다.[각주 『南冥集』 권2, 「擬策問題諸生」. 참조.] 이렇게 광범위한 조식의 학문적 견해에서 비롯된 兵陣공부 대책을 시험보는 것은 그 후 임진왜란 때 57명의 제자들이 義兵將으로 활약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南冥의 弟子門徒로서 義兵將이 된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의병장들과는 달리 전법에 능하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위세가 당당하였고 관군보다 더 용감하게 투쟁하여 거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결과는 남명학파의 국방외교론이 사회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그의 학문이 실천적이며, 즉 실학의 면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 모습이 栗谷 李珥의 ‘十萬養兵說’이라는 논의보다 더 의의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栗谷의 주장은 과연 그가 말한 것인지도 의문[각주 이 건의는 壬辰倭亂이 끝난 후에 弟子들에 의해 편집된 「栗谷行狀」에만 보이며, 栗谷은 당시의 임금 宣祖와의 이야기와 講義 내용을 「經筵日記」로 남겼는데 이곳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이고, 또한 후세에 실학자 李瀷은 『星湖僿說』, 「預養兵」에서 十萬의 軍士를 양병하게 되었을 때 국가재정과 국방비 부담과 軍役 때문에 오는 민중의 고통을 말하고 그 현실성을 의문시하면서, 꼭 십만이 있어야 外敵을 방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면에 南冥은 ‘井田’과 ‘軍賦’를 말하면서 현실성 있는 均田制와 府兵制的인 富國强兵策을 논하고 있다.[각주 『南冥集』(甲午本), 「學記類編」 권4, <治道> 참조.]

그리고 조선시대 貢物[각주 ‘貢’은 ‘土産物을 바친다. 아래서 위로 바친다’는 뜻이 있다.] 제도는 민중이 그 지방의 산물을 중앙의 조정에 상납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중기 이후로 이 공물 상납이 민중에게 가장 폐해로 나타났다. 이 공물을 바치지 못하여 流氓이 되면 그 친척이나 이웃이 부담하는 ‘族徵’,‘隣徵’까지 등장하는 것을 ‘有戶則有貢物’과 같이 생각해 보면 일종의 호구세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각 왕조가 멸망하는 직접 원인은 말기에 가면서 왕실과 귀족의 부패타락과 사치향략 그리고 혹은 전쟁으로 인하여 재정이 파탄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과다하게 민중에게서 착취하자 民心과 民意의 이탈[각주 『大學』 10장 : 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과 봉기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남명학파의 經世思想에서 공물 폐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公利的 사상에 바탕을 두었기에 더욱 절실하였고 후세 실학자들의 時宜求弊적 인 경세사상 즉 실학사상과 그대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明宗 시대의 암흑기에 退溪는 官學派였고 南冥은 在野學派였다. 李瀷은 당시 조정의 관리가 아니라 과거를 포기한 在野人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학파의 그 사상적 淵源을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이 退溪와 栗谷에만 매달린 것을 다시 되돌아 보고 南冥學派도 함께 거론되어야 진정한 실학파의 학문연원과 그 경향을 옳게 논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조선조 후기 실학의 계보에 있어서 泰斗로 여겨지는 經世致用 학파의 星湖 李瀷이 肅宗 시대 17세기 말 近畿南人의 일파였으므로, 남인에 착안하여 그를 퇴계학풍의 연원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星湖는 「贓吏論」에서 “白晝에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强盜라 한다. 지금 민중을 다스리는 자는 공공연하게 민중의 재물을 약탈함이 강도보다 더 심하다.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각주 李瀷, 『星湖塞說』, 「人事門」.]라고 하였다.

그리고 茶山도 「監司論」에서 진정한 도둑을 감사로 보고 있다. 또한 그도 “아아, 옛날 胥吏의 직책에 있으면서 옛날 大夫의 권한을 잡고 있는 자가 鄕吏이다. 그리하여  魯나라의 三桓[각주 孟孫氏, 叔孫氏, 季孫氏. 모두 桓公의 자손.]과 晉나라의 六卿[각주 智․范․中行․韓․魏․趙氏.]과 鄭나라의 七穆[각주 子展․子西․子産․伯有․子太叔․子石․伯石.] 같은 자는 그 나라가 폐허가 되기 전에는 그 악함을 그치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 대대로 세습되는 鄕吏도 또한 이와 같이 그만두지 않는다”[각주 『與猶堂全書』, 「鄕吏論一」.]라고 하여 그는 향리의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고 下降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이어서 그는 “守令이란 자는 胥吏와 더불어 장사아치처럼 그 利를 분배하고,서리와 더불어 도둑처럼 그 贓物을 나눈다. 아전과 더불어 민중을 짓밟아 魚肉이 되고 흩어지는 데도 그들에게 威勢를 부린다. 먼저 그 綱領이나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 事情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각주 『與猶堂全書』, 「鄕吏論二」.]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南冥과 來庵이 胥吏의 악폐에 통렬하게 비판한 모습과 내용에서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李瀷은 그의「退溪南冥」論에서 “黃錦溪(俊良)가 退溪에세 上書하여, 南冥이 의리에 통달하지 못한 점이 어디에 있느냐고 논하자, 퇴계는 답하기를 ‘이 사람들은 흔히 老莊에 병들어 우리 유학에 대해서는 깊지 못한데, 어찌 그 통달하지 못함을 괴이히 여기겠는가? 요는 그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당시 부제학 開岩 金宇宏이 이 서한을 얻어 보고 크게 놀라서 마침내 退溪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南冥 선생은 右道에서, 선생은 左道에서, 해와 달같은 존재로 다 斯文을 興起시키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고 계시니, 선비의 기습이 일변하여 道에 이를 수 있음이 마치 河에서 물 마시고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 비록 硜硜한 소인일지라도 말이 미덥고 행실이 과감하다. 南冥 선생으로 말하면 더욱이 아래에서부터 배워 올라가는 것을 주로 삼아서, 항상 말씀하기를 “學이라 하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데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를 힘쓰지 않는다면 바로 人事上에서 天理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 끝내 소득이 없을 것이다” 하여 한 마디 말도 虛無에 가까운 점이 없었는데 지금 말씀하기를 “老莊이 병이 되어 학문이 깊지 못하다” 하시니, 문하의 小子는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학문이란 人倫의 일용행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마음을 보존하여 살피고 또 살펴서 그 일에 익숙한 뒤라야 실지 소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감히 여쭈노니 우리의 학문이 이밖에 어디 있는가? 지금 선생께서 거리낌 없이 詆斥하시어, 심지어는 異端에 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시니, 아마도 선생의 크신 도량에 손상될 듯하다. 원컨대 開諭를 주시어 심한 의혹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자, 退溪는 답하기를. ‘나는 某를 너무도 仰慕하는 처지인데 어찌 감히 기탄없이 비난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입에 넘치는 예찬을 잘 못하는 까닭으로 下惟의 評과 未醇의 논이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寒岡은 말하기를 ‘南冥이 어찌 동방에 재생할 人傑이겠는가?’ 하였고, 栗谷은 말하기를 ‘世道를 만회한 공은 아마도 東方 諸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였거니와, 그 천 길의 壁이 우뚝이 서 있는 기상 같은 것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

혹자는 退溪의 평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르기를 ‘儒家의 流가 아니요 바로 處士 중에 俠氣가 있는 자이다’ 하였으니, 역시 가소로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니 그 雷龍[각주 南冥의 書室인 雷龍亭 이름. 『老子』의 ‘尸居龍見, 淵黙雷聲’에서 취한 말로서 남명은 그 옆에 ‘雷則晦冥, 龍則淵晦’라고 추기 하였다. ․鷄伏 南冥의 精舍인 鷄伏堂. 자신의 수양함이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뜻.] 등의 문자를 살펴보면 그 공력을 들임이 刻厲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찍이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다만 그 昏睡를 깨우치는 데 있을 따름이니 이미 눈을 떴을 경우에는 저절로 天地와 日月을 보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 한 마디 말은 初學의 頂針이 될 만하다”[각주 『星湖僿說』권9,「人事門」<退溪南冥>]고 한 것을 볼 때 星湖의 남명학파에 대한 실학적 경향과 그 훈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李瀷은「河松亭」에서도 “松亭 河受一의 字는 太易이니, 覺齋 沆의 조카이다. 각재란 이는 南冥의 문인인데 송정이 그에게 受學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謙齋 河弘度가 또 송정에게 배우게 되어 일찍이 水谷精舍에서 모시고 자는데, 닭이 울자 송정은 諸子를 깨워 일으키며 말하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善을 하는 자는 舜 임금의 무리라 하였는데, 옛날에 南冥 선생이 깊이 그 意旨를 체득하였고, 우리 覺齋는 南冥에게 親炙하여 그 道를 들었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을 적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알고서는 일찍이 利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중략) 나 같은 不肖가 그 학에 濡染하고 私淑하여 종신토록 잊지 못하는데, 너희들은 내 門에서 나왔으니 비록 중대한 책임은 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또한 깊이 如登의 힘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不義에 빠져서 네 所生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각주 『星湖僿說』권9,「人事門」(河松亭>] 하였다.

南冥學派의 역사인식에 투철한 학문경향은 바로 星湖에 의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星湖가 私淑한 첩의 소생인 晩湖 愼懋(1625-1699)의 傳記를 쓴 데는, 당시의 慣例에서는 이미 벗어나 신분계층의 문제를 타파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保民編』에 맺힌 國事의 是正에서 民生의 苦를 건지자는 愼懋의 經國濟民의 이념을 欽慕한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朝鮮朝에서 역사적 현실을 비판하는 태도는 곧 柳馨遠에서 이어받은 것으로서 그의 『磻溪隨錄序』,『磻溪柳先生遺著序』,『磻溪柳先生傳』등 삼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柳馨遠은 李元鎭의 사위로서 驪州 李氏家의 실학적 學風을 계승하여, 그의 經世論은 다시 星湖를 통하여 李氏 門中으로 이어지게 되었음은 柳馨遠의 著作 중『東史條例』가 있었다. 또한 그의 『磻溪隨錄』이 朝鮮의 일체의 제도를 改革하고자 논하는데서 역사적인 인식에 치중하였으며, 星湖의 學問이 역사적 인식 그것도 당시 조선의 현실사회의 비판에 직결된다고 본다.

星湖는『星湖僿說』에 산재한 여러 가지 박학한 논의와 이것의 체계적 抽象化로써의 『藿憂錄』의 형성하는 것을 보면, 星湖는 정신적으로는『磻溪隨錄』보다 더욱 집약화된 논의가 제시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星湖 스스로 그 門下弟子인 『安鼎福』에게 『東史綱目』의 撰述을 委囑하는 것[각주 洪以燮, 『韓國史의 理解』,「實學에 있어 南人學派의 思想的 系譜」, 탐구당, 1979, pp. 92-93. ]과, 朴殷植과 신채호 한테로 이어지는 새로운 학문경향, 즉 實學과 陽明學의 수용도 남명학파의 그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南冥과 그 弟子私淑人들이 학문사상이 비록 한계는 있고 일정한 부분이지만 實學的인 학문내용과 사상적 경향을 가지는 것은 앞서 실핀대로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性理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實學者인 李瀷과 丁若鏞도 마찬가지로 儒學 내에서의 진정한 성리학은 正學으로 볼려고 한다.

다만 조선 후기의 性理學이 이미 南冥의 지적대로 儒學의 근본 宗旨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본연의 자세로 儒學의 르네상스적 尙古返本에 근거하고 日用行事의 經世論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4. 結論

일찍이 星湖는 “經書를 窮究함은 장차 致用하기 위함이다. 經典을 解釋하면서 天下萬事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갖 책을 읽는데 능할 뿐이다”[각주『星湖僿說』권20,「經史文」,<誦詩>]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退溪의 글은 본래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政事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에 法令이 해이해지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기회였다. 理氣心性의 이론 다음에 時務의 큰 것을 대략 말하여 5년이나 7년 후의 효과를 기대하여야 바야흐로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각주 成樂薰, 『韓國思想論稿』, 동화출판공사, 1979, p.51 재인용.]라고 하였다. 또한 北宋의 王安石의 ‘道在政事’나 淸의 章學誠의 ‘六經皆史’의 談論을 새롭게 여길 때 실학사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참고할 때 南冥學派와 조선 후기 經世致用學派의 실학적 학문사상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또한 南冥學派의 實學思想에서 우리는 儒學에서 民本을 바탕으로 한 社會政治思想은 오늘의 혼란된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더욱 반성적인 고찰과 실천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즉 그것은 현재 한국에서 ‘民主主義’라는 정치구호만 남발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를 실천하지 않는 정치가들과 서구의 민주주의만 정치이론으로 유일하게 알고있는 ‘부분적인 지식인들(지식 수입상들)’에게 새로운 과제와 질문 그리고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유교의 근본사상은 ‘修己 이후에 治人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下學이 上達’인 것으로 상호보완의 성격이다. 『大學』‘格致誠正’과 ‘修濟治平’을 말하고 있으니,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국가사회와 통치자와 백성 등 상하계층이 더불어 잘 살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聖人이다, 賢人이다” 하는 것도 바로 민중과 연관된 구체적 정치현실을 개선하고 이상사회를 실현한 사람 또는 실현하려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도 완성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과 그 소속학파가 하는 이론이나 학문 만이 中道요 진리이고 나머지 다른 사람이나 자신과는 다른 이론을 하는 사람은 치우친 것이거나 異端으로 몰아 부친다면, 바로 그 자신의 이론이란 학문의 영역을 떠나 허위의식화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의 실학사상이란 바로 그러한 학문적 경향을 비판하고 이미 敎條思辨化한 性理學을 반성하고 일용학문과 이를 위한 博學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본 南冥과 그 학파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왜곡된 사회정치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실학적 학문경향과 사상적 내용 그리고 투철한 역사인식은, 退溪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陽明學의 下學而上達的인 知行合一의 사상에서 보이는 실천중시 사상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출전 : 남명학연구논총 제5집 19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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