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2-11 (수) 12:57
분 류 사전3
ㆍ조회: 459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2 (권인호)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2

에서 계속

3)「學記類編」의 實學精神

南冥의 학문은 성리학과 외형적인 의리명분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그 폭이 매우 넓었고, 그 博學으로 인하여 현실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과 사상 또한 새로울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실질을 숭상하는 실학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中宗 8년(1513년 8월) 변방을 소란하게 하던 野人 추장 束古乃를 쳐서 붙잡으려 했으나 술수를 써서 잡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는 조광조의 지치주의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국방에 대해서 만큼은 유교 도학적인 이상정치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세력이 미약하던 建州衛 野人[각주 이들 부족이 후일 後金 곧 淸나라를 건국.]을 제압하지 못해 백년이 지나지 않아 그 세력이 강성해져 온 나라의 민중이 魚肉이 되고 국토가 초토화 되었던 사실들을 상기해 볼 때, 南冥의 국방론은 더욱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국방에 관한 정치사상은 文武가 함께 나라에 있어야 함은 南冥의 신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南冥은 「學記」에서 “임명할 官吏의 재목과 재주를 변론하는 바의 그것이 어찌 특별하게도 文(文才) 뿐이겠는가. 司馬가 敎典을 장악하는 것은, 곧 司徒가 車甲을 敎習하는 바의 것은 바로 武이다. 이것은 文武가 합해져야 하나의 道가 되는 까닭이다.”[각주 『南冥集』(甲午本), 「學記類編」 권4, <治道>.]라고 하여 延平 周氏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 文弱에 흘러있던 조선조의 실정에서 나라의 인재를 구하는 과거시험에 文武를 함께 지닌 인물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南冥은 “進士科에는 詞賦와 聲律을 공부하나 사부속에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있지 않다. 비유하자면 ‘胡人이 배를 부리고 越客이 말을 모는 것’과 같은데 그것의 잘하기를 구해도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각주 위의 책.]라고 하여 당시 조선의 과거제도가 비록 문과와 무과가 있었지만 한사람의 재주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함께 종합적으로 시험보는 것이 아니었고, 문과 마저도 生員科와 進士科로 나눠졌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 전공별 인재채용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있지만 각 부서에 임명될 때는 小科(生員ㆍ進士科)의 출신별 구분이 없었다. 더구나 생원과는 그래도 유교경전을 시험치루니 그런대로 그 속에 담긴 정치와 경륜을 가질 수 있었지만 진사과는 詩ㆍ賦ㆍ頌ㆍ策 등 문장과 시를 보고 인재를 뽑으니, 나라의 정치가 경륜이 없는 자의 손에 있게 되었음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사과 출신을 오히려 우월하게 여겼고[각주 李瀷, 『星湖僿說』 권8, 「學校不尙閥」에서 監試(國子監試;成均試)에는 生員ㆍ進士의 구별이 있는데 벼슬이 없는 선비도 生員이라 呼稱하므로, 生員科에 합격한 사람이 그 호칭이 같음을 꺼려 進士 호칭을 쓰고 있다고 하여 名實이 다르고 進士가 우대되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문과 출신이 실무행정에는 약해서 胥吏들에게 속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앙이나 지방의 수령들이 대부분 ‘武’를 몰라 외적의 침입에 속수무책인 경우는, 바로 북쪽 평야에서 말만 잘타는 북쪽 오랑캐(胡)가 배를 부리고, 남쪽 바닷가에서 배만 잘부리는 남쪽 나라(越)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아서 제대로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비유하였다. 이것은 南冥이 당시 사회정치제도와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실질적인 학문과 기술도 갖추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南冥의 학문체계가 문무겸전과 함께 下學과 上達의 단계적인 발전과 함께 상호보완적인 점을 강조하여, 이를 무시한 上達爲主의 당시 학문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儒學의 실학적 일면과 관련된 문구 가운데 하나는 ‘下學而上達’[각주『論語』,「憲問」]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性理學의 爲學體系인 ‘下學人事, 上達天理’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시 유학자들이 日用實踐의 人事에 대한 下學 공부가 미흡하면서 ‘人心道心’과 ‘性命理氣’ 그리고 ‘天理人欲’ 등의 上達 문자에 매달려 論究하는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고 비판하었다.[각주『南冥集』권2,「與退溪書」.]

그리하여 南冥은 經典과 다른 諸子百家 및 餘他 학문 즉 지식의 高明과 그 ‘敬義實踐’에 바탕을 두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내용과 그 사상적 경향이 바로 여기에 있고, 이것은 먼저 南冥의 高弟들인 德溪 吳健, 來庵, 東岡, 寒岡 등의 南冥이 준 글과 스승에 대한  尊慕의 기록[각주 『南冥集』,「行狀」鄭仁弘.   『南冥集』권2,「與吳御史書」. 『南冥集』권5,「祭文」鄭逑. 『南冥別集』권2,「言行總錄」. 참조.]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곧 그들의 학문적인 의지의 표명이고 후술하는 실학파의 계보 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眉叟 許穆의 학문계승과 함께 남명학파의 실학사상을 파악할 수 있겠다.

4. 南冥의 弟子와 私淑人의 實學思想 및 그 淵源과 繼承

1) 來庵 鄭仁弘의 義兵과 ‘上疏文’에서의 實學思想

이러한 南冥의 학문사상을 이어 받은 來庵은 儒學의 民本的 사상에 입각하여 국내정치와 경제제도 개혁 등, 구체적인 혁신정책을 주장하고 시행했다는 점, 그리고 국방 외교에까지 자주성을 강조한 것은 실학사상의 요소로서 朝鮮 後期 實學派들에  연결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來庵은 『書經』의 ‘민중이 오직 나라의 근본’ 이라는 말과 『周易』 ‘益’卦의 ‘임금을 비롯한 상층계급을 薄하게 하고 하층계급인 민중을 厚하게 해야한다’는 말 그리고 ‘孟子가 梁惠王이나 齊宣王에게 누누이 권한 것도 ‘保民制産’의 이야기다’라는 말에 이어서 그는 “『書經』에 이르기를 ‘가히 두려워할 이 민중이 아니겠는가’ 와 ‘민중이 바위와 같다’는 말을 반성하고 다스리라.”[각주 『來庵集』권5, 「辭二相箚」7월24일 條(아本 pp.257-258).]고 하면서 南冥과 마찬가지로 ‘民巖’의 중요성을 말하는 유교 민본적 정치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즉, 來庵은 앞서 잠시 거론한 ‘爲民’, ‘愛民’, ‘保民’, ‘恤民’ 등의 민본적 정치이념에서 출발한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書經』의 ‘민중이 오직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이라는 데에서 출발한 그의 정치적 사상도 임금이 민중과 그 民心을 얻은 후에야 그 정권과 지위를 지킬 수 있고 나라가 편안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민중과 나라 그리고 임금이 하나이고 별개의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는 정권이 왕의 개인적 소유물이 아닌, 즉 전제적 왕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임금인 宣祖나 光海君과 직접 대면하여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君民一體와 민중의 好惡와 憂患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保民의 심정으로 민중을 위한 정치(爲民政治)를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宋代 이후 성리학의 정치사상에 바탕을 두었다기 보다는 空論에서 벗어나서 실제적인 사회사상과 연결시켜, 先秦 유가사상의 근본적이고 민본적인 사회정치사상에 새롭게 다가가서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당시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儒敎 사회정치사상의 르네쌍스’라고 할 수 있고 실학적 정치사상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來庵은 “國家의 일이란 일개 한 家門의 私事로운 것이 아니다.”[각주 『來庵集』권4, 「請斬柳永慶封事」,(아本 상, p.191): 國事非一家之私.] 眞德秀(字는 景元.希元,南宋人,1178-1235)도 “天下之事 非一家之事”라 하였다(『宋史』권437. 王遽常 주편 『中國歷代思想家傳記匯詮』(南宋-近代分冊), 上海 复旦大學出版社,1989, p.99).]라고 하여 국가와 왕위계승 그리고 그 통치행위의 公共性을 강조하며 勳舊外戚의 跋扈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내암보다 75년 후에 태어난 중국의  黃宗羲(1610-1695)가 『明夷待訪錄』의 「原君」(君主論)편에 나오는 ‘감히 스스로 사사롭게 못하는(不敢自私)’것과 ‘천하의 큰 공공성(天下之大公)’등의 용어를 연상하게 한다. 즉 그것은 철저한 민본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권력의 소재와 행사가 일 개인이나 일 가문에 있는 것이 이니라 다수 민중으로 부터 나왔기 때문에 공공성을 가진다[각주 拙稿, 「『明夷待訪錄』을 통해 본 儒敎政治思想硏究」-西歐 民主思想과 現實을 比較하며-,『東洋哲學硏究』 第8輯,東洋哲學硏究會,1987. 참조]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다.

물론 光海君의 등극 초기에 있었던 왕위에 대한 도전에서 보다 왕권강화적 측면에 내암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구체적으로 外戚과 밀착된 小北일파와 보수적인 서인 훈구세력이 계속하여 왕권에 도전해 왔으므로 政權保衛적인 성격이 강한 일면을 갖는다. 실제로 軍權을 장악했으면서도 정치권력[각주 당시 政治權力의 장악은 言論과 臺諫을 주도하는 일파로 생각했다. 즉 三司(弘文館, 司憲府, 司諫院)를 장악하는 것을 말한다.]에서 일시적으로 소외된 보수적 사림파 세력에 의해 군사쿠데타가 주도되어 개혁적으로 정치를 이끌던 광해군이 물러나고 來庵도 斬刑을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來庵의 왕권강화 이론은 다른 각도에서 즉, 민중을 위하여 보수반동세력으로 부터 왕권을 보위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의 사회정치사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외적인 정치불안 요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왕권강화 주장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보수세력이 그들의 利權의 永續化를 위해 그 세력의 가장 우두머리격인 왕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과는 분리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 正祖의 왕권강화와 실학파인 茶山의 역할을 참고로 할 수 있다.

또한 來庵의 왕권강화 사상은 보수적 사림파의 朱子學的인 ‘天理’에 근거한 君臣관계의 절대성이나, 그리고 仁祖反正 이후 守舊的 정치지배 체제가 계속되면서 예학적 질서와 주자학의 이데올로기화에서 나타난 임금과 양반귀족 지배체제의 보편타당성과 정당성을 강변하고자 한 보수적 사회정치사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이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정치사상과 진보적 사림파와 실학자들의 학문사상이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南冥의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과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열망은, 성격에 있어서도 그와 비슷하고 실천을 중시한 來庵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리하여 來庵은 「辭義將封事」에서 “오늘날 형세는 사람이 重病에 걸린 것과 같다. 臣이 듣기로 앞선 유학자인 眞德秀[각주 眞德秀(1178-1235) 南宋 建州人, 호는 西山.]가 말한대로 ‘안으로 벼슬아치들의 도적질(衣冠之盜)이 있은 연후에, 바깥으로 무기를 든 外敵의 侵寇(干戈之寇)가 있다’고 했다. 안에 私事로운 악한 盜賊이 있기 때문에 밖으로는 인접한 외적에 대한 근심으로 협공하니 국가를 보전할 수 없는 위태로움이 있다”[각주 『來庵集』 권2, 「辭義將封事」(아本 상권,pp.68-69):今日之勢, 如人病重. 臣聞先儒眞德秀之言曰, 內有衣冠之盜, 然後外有干戈之寇. 內有私邪之寇, 外有隣敵之虞, 夾攻而不置, 則國家危矣.]라고 하여 먼저 당시의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른 것은 무엇보다도 나라안이 부패하여 밖으로의 외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데 있다고 보았다.

官軍이 연전연패하던 시점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58세의 나이에 분연히 義兵을 일으켜 약 3,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倭寇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빼앗긴 城과 주둔지를 습격하여 탈환하는 교란작전을 펴고 연전연승하고 있던 때라, 그의 상소문에 나온 조정에 대한 질타와 是正을 위한 비판은 말만이 아닌 절실하고 실천성과 重義가 있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來庵은 이어서 당시 朝廷大臣들의 정치적 모습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비판한다. 그는 “偏黨을 좋아하고 정직을 미워하며 淸節을 천하게 여기고 권세와 이익에 따르고, 名義를 가볍게 여기고 관작과 녹봉만을 중시하여 어떻게 하면 내 집과 내 몸이 利로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朝廷에 있는 자는 良身에만 능하고, 나라를 이롭게하는 방안에는 어두우며 擧錯할 때도 오직 들리는 소문의 遊順함 만을 듣고 그 재능의 당부는 묻지 않으며, 단지 한결같이 자신의 好惡에만 따르고 公論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는 살피지도 않는다. 臺諫은 사사로운 감정을 풀기에는 급급하고 公義가 있는 줄을 모르며, 將帥가 된 자는 백성에 대한 刑罰과 殺害에는 용감하면서, 敵에 대한 義憤도 없고 겁부터 집어먹고, 守令이 된 자는 오직 권력자에게 아부할 줄만 알면서 민중의 일은 버려두고 도외시해 버리고 있다. 官의 倉庫가 개인의 창고가 되어 土田을 모으고 贓獲을 사들이는 것을 기탄없이 하며, 백성의 굶주림은 보살피지 않고 사사롭게 개인만 살찌우면서도, 누구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서, 먹고 마심이 날로 심하여 음식을 낭비하고 절약할 줄 모르며, 邊將의 貪饕함은 나날이 더하여 軍卒을 괴롭힘이 극에 달하여 魚肉과 같이 여긴다.”[각주 『위의 책』 권2, (아本 상권, pp.70-71):臣窺見好偏黨而惡正直, 賤淸節而趨勢利, 輕名義而重爵祿, 何以利吾家, 何以利吾身. 故處廊廟者長於良身而短於謀國, 擧錯之際, 唯視聲勢之逆順, 而不問人器之當否, 只徇一己之好惡, 而不顧公論之所在, 文尙浮藻而蔑實用, 武取控絃而棄膽勇. 爲臺諫則急於私憾而不有公義, 爲將帥則勇於刑殺而怯於敵愾, 爲守令則唯使客之稱愜, 而置民事於度外. 認倉庫爲私藏, 置土田買臧獲而無忌憚, 不恤民飢, 豢養私人, 而誰敢我何, 使星之餔啜日甚, 飮食若流而不知節, 邊將之貪饕轉劇, 唊噬軍卒而視爲魚肉.]라고 하면서 바로 이어, 무릇 이러한 무리들이 나라 안에 가득차서 서로 충돌하니 그 병이 心腹중에 있어서 하루하루가 더하게 큰 나무의 뿌리가 벌레먹은 것과 같이 되어 쓰러질 날이 가까이 온 것같이 되었다고 격렬하게 당시의 사회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개탄한다.

특히 ‘良身’, 즉 修己에만 치중해서 언어로만 이기심성과 인의도덕을 일컫던 무리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능력이 없는 자가 그 백성이 낸 세금으로 치부하면서 나라의 관직을 더럽힌다는 것은 反유교정치적 행위이며, 바로 이들 조정의 관리나 지방의 관리나 장수가 바로 의관을 갖추어 입은 도적이고 사사롭고 악한 오랑캐와 다름아닌 것으로 보았다. 당시 민중의 참상은 대개 난을 피해 산골짜기에 몰려 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가까스로 겨우 농사를 지었다 하더라도 전쟁에 쑥밭이 된 형편이었다.또 그 보다 더 억울한 것은 당시 민중을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將帥와 지방 수령이 오히려 가렴주구하고 심지어 왜놈보다 더 악독하게 자기나라 민중을 무참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왔다는 명나라 군사가 한술 더 떴다.

이러한 때도 王室ㆍ勳舊派와 戚臣 그리고 보수적 사림파의 일부는 의병에는 관심도 없었고, 관직을 가진 자는 오히려 지방의 벼슬을 자원하여 민중을 탐학하고도 뒤에 살아남아 仁祖反正(궁정 쿠데타)를 주도하고 그리하여 정권을 잡자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를 날조왜곡하고 견강부회하여[각주 인조 21년(1643년) 李植(호는 澤堂,본관은 德水, 中宗 때 대표적인 훈구파이며 좌의정을 지낸 李荇의 玄孫, 李珥. 李舜臣의 일족, 1584-1647)이 주도하여 『宣祖實錄』을 자기파에 유리한 시각으로 수정삭제, 날조왜곡 등 역사를 자의적으로 고치는 폭거를 저질렀다. 특히 본 논문에 직접 다룬 曺植과 鄭仁弘의 관련기사는 더욱 심하고 임진왜란 부분도 후세에 대개 상식으로 통하는 부분이 『宣祖修正實錄』에 의거해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작업은 조선조에 3번(『顯宗改修實錄』,『景宗修正實錄』) 이뤄지는데 모두 보수적 사림파와 훈척의 색채가 농후한 西人-老論이 주도하였다.] 지금도 국난극복의 뛰어난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그와 반대의 위치에 우뚝 선 來庵 같은 인물은 오히려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南冥學派의 殘餘勢力들은 學派淵源을 바꾸고 來庵의 관련기사나 이름을 문집들에서 삭제하기에 바빴다. 또한 그들은 일찍부터 來庵과 絶交하였다고 혐의부인에 급급했던 사실과 아직도 이러한 풍조가 남아, 文字를 안다는 學者마저도 학문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있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來庵의 올바르며 진정한 학문사상과 실학정신을 파악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2) 東岡 金宇顒의 『續資治通鑑綱目』 編纂과 實學的 歷史意識

東岡은 忘憂堂 郭再祐와 함께 南冥의 外孫婿로서 『續資治通鑑綱目』[각주 이 책의 역사적 내용과 기간은 宋太祖 建隆 원년(高麗 光宗 11년 峻豊[재각주 이 해 3월에 百官의 公服을 정하고 開京을 皇都라 하고 稱帝建元하여 명실상부한 황제의 나라 고려를 이룩하였다. 역대 왕조 가운데 고구려에 이어 고려가 중국에 자주성을 보인 시기라 생각된다.] 원년; A.D.960년)에서 明太祖 洪武 원년(고려 공민왕 17년 戊申; A.D.1368년)까지 408년간의 중국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것이다.]을 撰修를 시작하여 6년만인 그의 56세 때 그 해 3월 말에 끝마쳤다. 이는 司馬光의 『資治通鑑』[각주 戰國初期인 周 威烈王 23년(B.C.403)에서부터 五代末期인 後周 世宗 顯德 6년(A.D.959)까지 16왕조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 司馬光이 19년에 걸쳐 편찬한 294권의 방대한 저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通鑑』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져 있다.]에 이은 그 시대를 편년체 역사서로서 역사를 중시한 東岡의 실학적인 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조에서 儒敎經典과 性理學에 대한 강조와 연구는 과거와 관련되어서 매우 성한 반면 역사서와 역사의식에 대한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특히 조선초기의 비록 대개 官主導이긴 하지만 의욕적인 역사서적 편찬이 있었는 데 비하여[각주 예외적으로 權近의 『東國史略』과 徐居正의 『東國通鑑』은 개인편찬 역사서다. 중국의 경우는 私撰의 史書(『春秋』와 『史記』 등)가 먼저 나왔고, 그 틀에 의해서 官撰의 사서가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官撰史書 후에 私撰史書가 이루어졌다.] 중기에 올수록 士林派가 성리학을 내세우면서 이러한 현상은 심화되었다. 역사는 ‘거울(鑑)’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정치에 있어서 어떤 기준과 비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즉 과거 역사의 거울에 현재의 事件(實)을 비추어 경계하고 참고한다는 ‘鑑古戒今’의 鑑戒主義가 儒敎 歷史哲學이다.

東岡의 이 저술이 활자화 된 것은 英祖 47년(辛卯;1771년)에 東宮(正祖)의 命으로 奎章閣에서 인쇄하게 되었다. 그 연유는 당시 동궁이 明나라 儒者인 商輅가 찬한 바 있는 成化本 『續資治通鑑綱目』[각주 明皇帝 憲宗(연호가 成化,治世는 1465-11487)의 칙령을 받들어 商輅 등이 편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것은 肅宗末期이니 東岡이 이를 입수하여 보고 『續綱目』을 편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을 일찌기 신료와 함께 그 ‘權衡之不稱處’를 강론하는 석상에서 함께 입시한 順庵 安鼎福(1712-1791)[각주 順庵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그가 찬한 『東史綱目』은 丹齋 申采浩가 극찬한 우리나라 편년체 역사서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미루어 볼 때 東岡의 『續綱目』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이 이뢰기를 “일찌기 先正臣 金宇顒이 撰한 『續綱目』의 草藁가 臣이 지금 말한 바의 적당한 것이 있다”고 하니, 東宮이 즉시 명령하기를 드려와 열람하도록 하니, 크게 褒獎되고 이어 동궁과 그 신료들이 이를 교정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書筵에서 進講하게 되었다.[각주 『東岡集』 附錄 권4(민본 p.510 下)]

또한 그 후 士林들이 창의를 시작하여 晴川書院에서 純祖 8년(戊辰;1808년) 8월로 이 때 36권 20책으로 간행[각주 1995년 청천서원에서 『東岡先生全書』를 영인편찬하여 총10권 가운데 4권(7-10권)이 이 내용이다. 宋贊植이 「解題」를 썼다.]하였다.

星湖는 역사를 비판과 고증적인 입장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작자(作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했다. 이와 같은 歷史觀은 유형원에서도 일맥 통하는 것이었고, 茶山의 현실비판과 周禮的 인식(정치제도와 개혁)에서도 그 일단을 찾아볼 수 있다. 星湖의 이러한 史觀은 安鼎福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었다. 물론 이 밖에도 당시의 실학자 가운데는 역사에 대한 의식과 그 비판적인 입장이 없던 것은 아니다.

安鼎福은 經學과 詩文에 결코 소홀한 것이 아니었지만, 역사 서술을 통해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유교의 경전은 모두 역사일 따름이다(六經皆史也)”라고 갈파한 淸나라 章學誠의 주장과도 같이 經學을 바탕으로 하면서 역사의식이 전진되어 自國의 역사를 재편성해 본 것이다. 서술의 對法은 비록 朱熹의 綱目史觀에 의한 명분에 두었던 것이었으니, 바로 東岡에서 安鼎福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安鼎福이 역사 찬술의 기준을 주자의 사관에 근거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젊어서 주자학에 심취되어 있었음은 전술한 바이지만, 당시의 우리 학계가 온통 주자학적 세계이었고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春秋的 大義名分論이 강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東岡과 安鼎福도 그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東岡의 이러한 근본주의적이고 尙古主義적인 역사의식은 太祖 李成桂의 繼妃인 神德王后 康氏의 祔廟문제에 그대로 나타난다. 당시 조정 신하들의 衆論은 부묘를 찬성하며 神德王后가 薨하였을 때 明나라 天子가 賜弔하였으니 왕후로 성립하는 것이니 不祔하는 것은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東岡은 신덕은 태조의 次妃로서 ‘無二嫡之義’라는 『春秋』의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천자가 인정 안한다고 해서 諸候의 정식부인으로 인정 안된다는 것은 『春秋』에서 惠公과 仲子의 고사를 상고해 볼 때 그렇지만도 아닌란 것을 내세우며 끝까지 주장하고 이것이 가납되지 않자 遞職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각주 『東岡集』 附錄 권1, 「行狀」 pp.45-48(민본 pp.449 上-450下); 附錄 권4 「年譜」, pp.20-21(민본 pp.503 下- 504 上); 권3 「論神德王后祔疏」ㆍ「自劾疏」(민본 pp. 223 下 - 225 下) 참조.]

이와 같이 옳다고 여기면 衆論에 영합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조정에 있으면 經筵을 통해 직접 왕에게 극진히 諫諍하였으며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위란시에 많은 위문ㆍ접반사로 활약하고 수많은 국가의 詔書가 동강의 지은 바 되는 등, 이러한 여러가지로 미루어 唐代의 陸贄 (754-805)[字는 敬輿, 시호는 宣公, 唐의 德宗 때에 활약한 名臣으로 嘉興사람이다. 성품이 매우 忠盡하고 儒學을 좋아하였다. 18세에 進士에 登第하고 翰林學士에 덕종의 부름을 받아 황제가 매우 신임하였고, 문집으로 『陸宣公翰苑集』이 있는 데 특히 그의 上奏文과 議論은 매우 著名하다. (『唐書』 권157, 『舊唐書』 권139 참조)]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동강의 역사의식은 바로 실학자들의 역사철학에 계승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許穆의 『東史』『居憂錄』등은 李瀷의『星湖僿說』과『藿憂錄』을 이어 安鼎福의 『東史綱目』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東岡의 歷史意識과 아울러 民本的인 經世論으로서의 정치사상은 실학사상과 통하며 정치권력에 대한 역사철학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뢰기를, 皇天이 민중을 위하여 임금을 세운 것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사람이 천하를 다스린 데 있을 따름입니다. 人君이 이 뜻을 모르고 임금의 자리에 앉아 열락을 도모하여 게으르고 삶에만 골몰한다면 위험하고 망하는 화가 이를 따름입니다” [각주 『東岡集』 附錄, 권1 (민본 p.435 下) ; 啓曰 皇天爲民立君, 非以天下奉一人, 惟以一人天下耳, 人君不知此義, 而以位爲樂, 則逸豫之念生, 而危亡之禍至矣.]라고 하면서 옛날의 帝王들의 兢業戒懼하는 것과 폭군들인 桀ㆍ紂ㆍ幽ㆍ厲王이 이 뜻을 모르고 행한 여러 악행들을 열거하여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유교의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자주 강조되는 부분이다. 君王에게 이러한 경고는 원칙론으로서 당연한 주장이고 진정한 간언이다. 하지만 盡忠한 諫言이란 자칫하면 그것을 아뢰는 사람이 미움을 사게되고 죽음에도 노출될 수 있는 것으로 미묘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사상과 그 실천적 태도는 바로 남명학파 인물의 특징이고 실학정신과 바로 통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實學派들은 현실적인 經世致用에 몰두했다. 經學을 중심으로 하되 그 경학이 시사하는 그 세계를 위해서 많은 改革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새혁론에는 합리적ㆍ실증적인 배경이 필수로 되었다. 현실적인 문제를 역사적인 현실로 포착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실학파 중에서도 近畿學派에 의해서 주로 주창되었다. 李瀷을 중심으로 한 그계열의 학파의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역사의식은 이 학파에서는 중요한 입장이 되기도 했다. 중래와 같은 역사의 학습ㆍ이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체계 있게 재편성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治史와 纂史의 史觀이 나왔고 이에 의거해서 韓國史의 새 모습을 찾고자 했다. 黃元九, 「韓國의 歷史思想 槪說」,『韓國의 歷史思想』所收, 삼성출판사, 1984, p.11.

조선후기의 실학파 학자들은 역사의식이 뚜렷했다. 柳馨遠ㆍ李瀷ㆍ丁若鏞을 계보로 하는 실학자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주변의 일련의 실학자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당시의 학문적 성향이 經學을 중추로 한 백과전서식인 考究에 있었다는 것에서도 그 일단을 찾아볼 수 있지만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匡救하기 위한 전제에서 오는 자기 역사의 이해와 그 정리에서 더욱 찾아볼 수 있다.

에 계속

출전 : 남명학연구논총 제5집 1997.4
   
윗글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3 (권인호)
아래글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1 (권인호)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48 사전3 [서학] 마테오 리치 (브리) 이창호 2002-12-27 789
47 사전3 [서학] 마테오 리치 (한메) 이창호 2002-12-27 696
46 사전3 [서학] 마테오 리치 (두산) 이창호 2002-12-27 741
45 사전3 [조선] 천주실의 (브리) 이창호 2002-12-26 856
44 사전3 [조선] 천주실의 (한메) 이창호 2002-12-26 788
43 사전3 [조선] 천주실의 (두산) 이창호 2002-12-23 717
42 사전3 [조선] 천주실의 (민족) 이창호 2002-12-23 1050
41 사전3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3 (권인호) 이창호 2002-12-11 573
40 사전3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2 (권인호) 이창호 2002-12-11 459
39 사전3 [조선]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1 (권인호) 이창호 2002-12-11 984
1,,,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