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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16 (토)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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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16      
[일본] 일본 고대사
일본의 역사 1

관련 문서

1. 원시ㆍ고대
2. 중세
3. 근세
4. 근대
5. 현대

일본 개관

우리 나라의 이름은 과거 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등으로 바뀌어 왔다. 대한민국, 한국이라는 국명이 쓰인 것은 19세기 말에 와서의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고대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는 '오야시마(大八洲)' '아키쓰시마(秋津島)' '도요아시하라노미즈호노쿠니(豊葦原瑞穗國)' '아시하라나카쓰쿠니(葦原中國)' '야마토(大和)' 등이 있다. 신화와 전설 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중에서도 야마토는 지금도 일본의 어떤 정신적인 면을 강조할 때 쓰이곤 한다. 이와 달리 중국과 한국에서는 예부터 일본을 '왜(倭)'라고 불렀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이 극심했던 이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왜는 작다는 의미의 왜(矮)로 비하되기도 했으나 원래 왜(倭)는 그저 일본을 가리키는 한자다.

일본의 기록에 일본이라는 한자가 등장한 것은 다이호 율령이 처음이다. 일본이라는 국명이 통일적으로 사용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다. 이때도 한자로는 일본이라고 쓰고 '야마토'나 '히노모토'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본을 지금처럼 '니혼' 또는 '닛뽄'이라고 읽은 것은 11세기 이후다.

일본의 기록에 일본이라는 한자가 등장한 것은 다이호(大寶) 율령이 처음이다. 다이호 율령은 일본 최고의 완성된 법령집으로 701년 완성됐다. 701년이면 일본에 국가 체제가 완성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이므로 일본이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쓰였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천황의 직접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봉건 영주 시대를 거치는 동안 일본이라는 국명보다는 각 한(蕃)의 이름이 더 친숙했다. 일본이라는 국명이 통일적으로 사용된 것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다.

이때로 한자로는 일본이라고 쓰고 '야마토'나 '히노모토'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야마토란 과거 일본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저 발음을 차용한 것이며 히노모토는 '태양의 근본'이라는 일본을 그 뜻으로 풀어 읽은 것이다.

8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 한자 지식이 널리 퍼지며 한자를 훈독(訓讀), 즉 그 뜻으로 풀어 읽는 것은 조금 교양 없는 사람들의 일로  한자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음독(音讀), 즉 한자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식의 풍조가 생기면서는 일본을 '니호무'라고 읽었다.

일본을 지금처럼 '니혼' 또는 '닛뽄'이라고 읽은 것은 11세기 이후다. '니혼'이라면 조금 부드럽게 들리고 '닛뽄'이라면 어딘지 억세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한창 기세를 떨치던 1934년 일본 문부성 임시국어조사회는  일본을 '닛뽄'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강제했다. 즉 일본도(日本刀)는 닛뽄도, 일본군(日本軍)은 닛뽄군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도쿄에 있는 유서 깊은 다리인 일본교(日本橋)와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일본서기(日本書記)만은 니혼바시, 니혼쇼키라고 읽어도 된다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니 그나마 약간의 양심은 있었던 셈이다. 결국 '니혼'이 복권된 것은 2차대전에서 패한 후이다. 지금은 대부분 니혼으로 읽는 것이 보통이지만 닛뽄이 틀린 발음은 아니다. 다만 일부 우익인사들은 억지로 닛뽄을 강조하기도 하며 일본도는 닛뽄도라고 해야 어딘가 맛이 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편 일본의 영어 표기인 '재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코리아가 고려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알려진 것이지만 저팬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의 동쪽 바다 건너에는 지팡그라는 황금의 나라가 있다'고 소개한 데서 유래한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에서도 유수한 금 생산국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금을 가지고 중국에 건너가 중국의 각종 산물을 사들였다. 이 때문에 중국에는 일본이 황금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원나라에 온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이 이야기를 듣고 후에 <동방견문록>을 구술하며 일본을 '집 지붕이 모두 황금으로 덮인 나라'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결국 니혼이 지팡그로 변한 후 다시 재팬으로 변한 것이다.

Ⅰ. 원시·고대

1. 고대국가의 기원

(1) 문화의 시작

일본열도는 남북 3000km로 온대기후지역에 해당하며 아한대 부터아열대림까지 분포하고 있다. 홍적세의 일본열도는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10만년전경의 화석인골이 출토되고, 타제석기가 나오고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열도가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된 것은 1만년전의 충적세의 시대부터다. 이때부터 일본열도에 거주한 인류는 일본전국에 패총과 수혈주거를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활과 화살·마제석기·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새끼줄무늬(繩文)가 새겨져 있어 죠몬(繩文)토기라 불리우며, 따라서 일본의 신석기시대는 죠몬(繩文)시대라 불리운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 것은 아니어서, 2-3호(1호당 10명이내)가 하나의 집락을 이루어 수렵·어로·채집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장방법은 굴장(屈葬)으로 토우(土偶)를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인골에는 발치(拔齒)의 흔적이 보인다.

(2) 농경의 시작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로, 수도(水稻)농업이 북부큐슈(九州)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1세기경에는 동북지방까지 보급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이 시기에 청동기·철기 등의 금속기와 야요이(彌生)토기가  일본열도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이를 야요이토기가 가장 먼저 발견된 토쿄(東京) 야요이쵸(彌生町)의 지명을 본따 야요이(彌生)문화라 한다.

이 새로운 문화는 외부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한국남부인들의 이동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야요이시대인의 신장이 한반도남부인과 같이 커진 점, 지석묘와 마제석촉·청동제 무기 등에 한반도남부와 같은 것이 나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 시대의 묘제로는 지석묘·상식석관 등과 부장(副葬)용이었던 옹관묘 등이 있었고  방형주구묘도 보인다. 기원후 1세기이후의 야요이시대후기에 낫·도끼·괭이등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빈부의 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높은 지대에 해자를 둘러친 집락지가 발견되는데, 이는 전쟁이 발생하였음을 말해준다.

관개사업과 공동체 제사 및 방위를 지도하는 수장(首長)이 출현하면서 소국(小國)이 형성되었음은 {한서}·{후한서}·{삼국지} 등의 중국사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3) 야마토(大和)정권과 고분문화

3세기말부터 4세기초에 걸쳐 일본열도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발생한다. 이는 야마토정권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야마토정권이란 야마토(현재의 나라지방)에 있었던 유력 호족들의 연합정권으로, 유력 호족들이 각각의 직책을 세습하면서 오오미(大臣)나 오오무라지(大連)로서 대왕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토모노 미야츠코(伴造)로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야마토정권은 지방의 유력 호족들을 쿠니노미야츠코(國造)나 아가타누시(縣主)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4세기후반부터 5세기경에 걸쳐 서부일본을 통일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보이는 [왜(倭)]와 {宋書}에 보이는 [왜왕(倭王)]은, 야마토정권과 관련이 있다.

일본고대국가의 발전에는  외부로부터의 들어온 사람에 의한 문화의 전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존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통해 4세기후반에 백제가 왜국과 교섭을 개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니혼쇼키(日本書紀)}에 의하면 한자·유교·불교, 의·역(易)·역(曆)학 등이 백제로 부터 전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토조정에서는 철기생산·양잠·토기제조·토목분야에 한국남부출신의 기술자집단이 활약하였다.

5세기 이후 철제농기구사용으로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고분문화는 변질하게 된다. 즉 군집분(群集墳)이 생겨나고 추장(追葬)을 할 수 있는 횡혈식석실이 백제로부터 전래되고, 회색의 경질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만들어진다. 지방마다 종교적 장소인 사(社)가 만들졌으며, 농사의 풍작을 위해 기년제(祈年祭)·신상제(新嘗祭)등의 종교의례가 만들어졌다.

2. 율령국가와 대륙문화의 섭취

(1) 스이코(推古)조와 아스카(飛鳥)문화

6세기에는 야마토정권의 유력호족들 사이에 항쟁이 일어나, 주도권은 오오토모(大伴)씨에서 모노노베(物部)씨, 다시 소가(蘇我)씨로 옮겨가게 되었다.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에 소가씨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를 여제 스이코(推古) 천황의 섭정으로 삼아,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하고 관위12계제· 역사 편찬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의 기술원조로 아스카(飛鳥)지방에 사원건축이 유행하면서 불교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소가씨의 아스카데라(飛鳥寺)와 쇼토쿠태자의 호류지(法隆寺) 등이 건립되고, 호류지(法隆寺)의 금동석가삼존상과 목조백제관음상, 코류지(廣隆寺)의 반가사유상 등이 만들어졌고, 삼경의소(三經義疏)와 같은 불경주석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고구려의 담징(曇徵)에 의해 종이·먹·그림도구의 제조법이 전해졌으며, 백제의 관륵(觀勒)은 역(曆)법을 전해 역사서와 기록의 발달을 도왔다. 이와 같이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의 백제의 영향이 강한, 불교중심의 문화를 아스카(飛鳥)문화라 한다.

(2) 율령국가의 형성과 하쿠호(白鳳)문화

640년대에 한반도에서는 권력집중이 일어났으며, 일본에서는 소가씨가 독재권을 확립하고 있었다. 야마토조정에 당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에 의해 수·당의 율령국가체제가 알려지면서, 소아씨독재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45년, 코교쿠(皇極)천황의 장자 나카노오오에(中大兄)황자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蘇我)씨정권을 타도하고, 황태자로서 국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신정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목표로 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는데, 이를 타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 부른다.

660년 한반도에서는 당과 협력한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호족들은 당과 신라에 저항하면서, 일본에 도움을 청하였다. 일본은 이에 응해 원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싸움에서 대패한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76년에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한반도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백촌강의 패전후 나카노오오에황자는 요지에 조선식 산성을 축성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고, 668년에는 천황(天智)으로 즉위하여, 영(近江令)과 호적을 만들어 율령국가 체제를 마련하였다. 그후, 임신(壬申)의 난을 통해 즉위한 텐무(天武)천황은, 천황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들고, 영(飛鳥淨御原令)을 제정하고 국사편찬을 개시하였다. 701년 몸무(文武)천황때에 일본실정에 맞게 영을 수정한 타이호(大寶)율령이 완성되어 율령정치의 틀이 정비된다.

일본 율령국가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관료제와 중앙집권적인 행정기구를 가진  천황제 국가였다. 중앙에는 천황 밑에 2관(太政官· 神祇官)과 8성을 두었다. 지방은 전국을 기내(畿內)와 7도의 행정구로 나누고 그 밑에 코쿠(國)·군(郡)·리(里)를 두고 코쿠시(國司)·군시(郡司) 등을 임명하였다. 관리는 관위에 따라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관위 5위이상은 귀족으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특권이 있었다.

율령국가는 양천제적 신분사회로, 양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6년마다 6세이상의 남녀 모두가 구분전(口分田)을 지급받는 대신 조세를 부담하였다. 특히 17세에서 65세까지의 남자농민은 조세이외에도 요역에 종사하거나, 병사로 징발되었다.

7세기 후반-8세기 초 율령국가 형성기에, 백제·고구려의 멸망후 일본에 도래한 유민들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였다. 텐무천황 이후 국가불교의 발달과 함께 불교예술이 발달하여, 코후쿠지(興福寺)불두나 야쿠시지(藥師寺)금당약사여래상·호류지금당벽화 등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는 타카마츠츠카(高松塚)고분벽화 등이 만들어졌으며, 한시의 영향을 받아 5음7음을 기본으로 하는 와카(和歌)의 정형이 만들어진다. 이 시기의 문화를 하쿠호(白鳳)문화라고 한다.

(3) 나라시대의 문화

710년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죠쿄(平城京)가 나라(奈良)에 완성되어 천도한 후, 784년 쿄토(京都)의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길 때까지 80여년간을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율령정부는 일본열도의 동북과 남서로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쓰시마(對馬)·무츠(陸奧)에서 황금광산이, 무사시(武藏)에서 동광산이 개발되었다. 양잠·직물기술자를 지방에 파견하여 기술보급에 힘쓴 결과, 지방의 특산품으로서 조정에 헌상되었다. 당을 모방하여 화폐를 만들어 유통을 장려하였으나, 도읍과 기내(畿內)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벼나  포가 계속 사용되었다.

8세기에는 15년 내지 20년에 한번씩 견당사가 파견되어,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이 당의 문물수입에 큰 공헌을 하였다. 통일신라와는 서로 경계하면서도 빈번히 교류하여, 신라와 관계가 재개된 668년부터 양국의 공식관계가 끝난 779년까지 신라는 46회, 일본은 26회 사신을 파견하였다. 8세기후반 이후 양국관계가 무역 중심으로 변하여, 9세기에는 사무역이 중심이 된다. 727년 발해의 사신파견으로 시작된 양국관계도 활발하여 8세기에 발해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사신이 파견되었다.

율령정부는 722년 100만정보 개간계획을 세우고, 723년에는 개간지의 3대사유법을, 743년에는 영구사유법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토지 사유가 가능해져, 장원(莊園)발생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8세기중반 이후 잦은 정쟁으로 여러 귀족들이 몰락하였으나, 타이타개신의 공신 카마타리(鎌足)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不比等)의 두 딸이 몸무천황과 쇼무(聖武)천황의 비가 된 이후, 계속 천황가의 인척으로서 황족에 준하는 지위를 확립하였다. 황족과 귀족의 부유한 생활을 바탕으로 나라중심의 귀족문화가 꽃피었는데, 이 문화를 쇼무(聖武)천황때의 연호를 따서 텐표(天平)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진호국가불교가 발달하여 각 지방마다 코쿠분지(國分寺)를 설립하고, 나라의 토다이지(東大寺)에는 대불을 조영하였다. 나라의 주요 사찰(南都六宗)에서는 불교의 여러 종파의 강의가 있었다. 유교중심의 귀족교육기관(大學)과, 지방호족 교육기관(國學)이 있었고, 역사서({古事記}{日本書紀})·시가집({万葉集})·지지(地誌)({風土記})등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토다이지법화당과 토쇼다이지(唐招提寺)금당과 같은 당풍(唐風)건축과 소상(塑像)·건칠상(乾漆像)조각이 유행하였다.

(4) 헤이안(平安)전기의 그 문화

8세기 후반부터 중세부담을 피하기 위한 농민의 유랑이 증가하였다. 칸무(桓武)천황은 794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고, 율령제 재건을 위해 12년마다 반전(班田)을 시행하고, 잡요를 경감하였다. 또한 농민병사를 폐지하는 대신 호족 자제들로 군대를 편성하고, 동북지방을 점령하였다.

헤이안(平安)천도부터 9세기말까지, 헤이안 전기에는 대학 기숙학교들과, 서민교육기관이 만들어졌으며, 한시문집과 관찬역사서가 계속 편찬되었다. 불교계에도 새로운 풍조가 일어 사이쵸(最澄)가 천태종(天台宗)을, 쿠카이(空海)가 진언종(眞言宗)을 열었으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진행되어 신사의 경내에 신궁사(神宮寺)가 만들어졌다. 천태종과 진언종의 영향으로 산악가람이 늘어났으며, 나무하나로 만드는 불상조각이 유행하였고, 부처의 세계를 특이한 구도로 그린 만다라(曼茶羅)가 유행하였다.

3. 귀족정치와 문화의 국풍화

(1) 셋칸(攝關)정치

천황가의 인척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의 네 아들별로 일가를 이루어, 4가가 있었다. 858년이후 북가(北家)가 미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셋쇼(攝政)와 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칸빠쿠(關白)를 독점하였는데, 이와 같이 셋쇼와 칸빠쿠에 의한 정치를 셋칸정치라 한다.

이 정치는 11세기초에 극성기를 맞이하나 11세기말 인세이(院政)가 시작되면서 약화되었다. 이 시대에는 지방에서 반전수수법이 시행되지 못하여, 개간지와 구분전을 사유화한 지방호족과 유력농민은 후지와라씨나 유력한 사원·신사의 보호를 받았다. 지방정치가 문란해지자 호족들은 자체방위를 위해 일족을 조직하여 무사단을 만든다. 이 무사단들은 다시 유력자(棟梁)를 중심으로 결합하게 되는데, 황족의 후예인 미나모토(源)씨와 타이라(平)씨가 가장 유력하였다.

(2) 국풍(國風)문화

894년에 견당사가 폐지된 후, 일본은 송·고려와 공적인 국제관계를 갖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일본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는데 이 헤이안 중기 문화를 코쿠후(國風)문화라 한다.

가나(假名)의 발달로 일본국문학이 발달하여, 와카(和歌)가 공식장소에서 유행하였으며, 일기나 수필({枕草子}), 이야기({源氏物語})들이 가나로 씌어졌다. 불교의 천태종과 진언종이 귀족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본에 와서  천황가의 조상신(天照大神)이 되었다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말법사상이 유행하면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정토교(淨土敎)도 귀족과 서민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건축에서는 신덴즈쿠리(寢殿造)라는 일본적인 건축양식이 생겨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린 야마토에(大和繪)가 등장하게 되었다. 정토교의 유행으로 지방에 사원이 건립되고, 불상도 대량생산되었고, 왕생하려는 사람을 부처가 맞으러 오는 그림이 유행하였다.

당시의 귀족의 복장도 일본색이 풍부하였다. 식생활은 비교적 간소하여, 식사는 1일 2회로,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고 조리에 식용유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헤이안쿄의 귀족들의 결혼생활은 처가거주형으로, 아이도 처가에서 양육하였다. 다다미를 깔고 앉아서 생활하였으며, 연중행사가 발달하였고, 미신과 원령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3) 인세이(院政)와 타이라(平)씨의 전성

11세기후반 후지와라((藤原)씨 소생이 아닌 고산죠(後三條)천황이 친정을 실시하면서 셋칸정치는 끝났다. 시라가와(白河)·토바(鳥羽)·고시라가와(後白河)천황등은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인(院)에서 정치를 하였는데, 이를 인세이(院政)라 한다. 인세이는 100여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 불사에 의한 낭비와 관직·관위의 매매 및 승병의 시위 등으로 율령정치는 더욱 붕괴되고, 장원은 확대되었다.

인세이기 말기에는 1156년 천황과 상황의 대립을 계기로, 무사단이 중앙에서 활약하게 되어, 1159년 미나모토(源)씨를 누르고 정권을 장악한 타이라(平)씨는 천황의 인척으로 약 20여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인세이기의 문화의 특징은 문화의 지방화·서민화가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정토교사상의 보급으로 지방에도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졌으며, 유행가요와 덴가쿠(田樂)와 같은 서민예능이 발달하였다. 설화집({今昔物語集})과 무사들의 활약담({陸奧話記}), 일본어 문체의 역사서({榮華物語}·{大鏡}) 등이 만들어졌으며, 야마토에(大和繪)에 이야기를 넣은 에마키모노(繪卷物)도 유행하였다.

출전 : 안도사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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