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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10 (토) 09:56
분 류 사전3
ㆍ조회: 1737      
[현대] 전국체육대회 (브리)
전국체육대회 全國體育大會

매년 실시되는 한국의 체육잔치.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설된 뒤 그해 11월 배재고등보통학교(지금의 배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실시된 제1회 조선야구대회가 그 기원이다. 참가 팀은 학생단 5개 팀과 실업단 5개 팀으로 모두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팀뿐이어서 오늘날과 같은 종합대회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종목별 경기대회였다.

그후 1925년 경성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이 건립됨에 따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신궁(朝鮮神宮) 경기대회가 개최되어 종합경기로서의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체육계에서는 1934년 제15회 대회인 전(全)조선종합경기대회를 한국 체육대회의 효시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1925년 제6회 대회는 경기 자체가 일본인에 의하여 조직·운영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신전(神殿)인 '조선신궁'을 떠받드는 체육행사였기 때문이다. 제15회 대회에서 채택된 경기종목은 축구·야구·정구·육상·농구 5개 종목이었으며 경기장은 경성운동장·옥천운동장(지금의 선린상업고등학교 자리)·배재고보·철도운동장(지금의 육군구장)을 사용하여 종합체육대회를 치렀으나 경기 진행에 있어 판정 불복, 폭행 등의 불상사가 발생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1935년 제16회 대회에서는 종전의 경기종목에 유도·씨름·역도·검도 등 4개 종목이 추가되어 10개의 경기종목이 치러지게 되면서 전국체전의 틀을 다지게 되었다. 1936년 제17회 대회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면서 열기가 고조되었으며 총 12개 종목으로 권투와 탁구가 추가되었다.

1937년 제18회 대회는 청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조선체육회가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강제통합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는데 이로 인해 전조선종합대회도 1938년부터 중지되었으며, 다만 축구선수권대회라는 이름으로 제19회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후 1941년 제22회 대회가 11월 26일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명치신궁대회(明治神宮大會) 때 응원단 소란의 책임을 들먹여 중지시켜 결국 이를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전국체전대회 개최 횟수를 이어주는 대회는 끝났다. 이렇게 조선체육회의 명맥이 끊긴 뒤 7년 동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시기였으므로 체육발전도 암흑기였다.

1945년 8·15해방과 함께 부활한 전국체육대회는 제26회 대회가 축제의 성격을 띠면서 서울에서 열려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경기종목은 10개 종목으로 이듬해 1월에는 빙상대회까지 진행했다. 이 대회를 제26회로 결정한 것은, 그 전의 대회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개최하지 못할 때에는 연도를 통산한다는 명문규정에 따른 것이다.

제28회 대회부터 전국체육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해는 서윤복이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해 마라톤 한국이라는 이름을 세계 만방에 떨친 해였으며 스키 대회가 처음으로 추가되었다.

제29회 대회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해로 조선이라는 칭호가 모두 대한이라는 칭호로 바뀌면서 도(道)대항대회로 바뀌게 되었다. 제31회 대회는 6·25전쟁으로 중지되었으나 전쟁중임에도 제32회 대회가 광주에서, 제33회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제34회 대회는 휴전하던 해에 거행되었는데 20개의 경기종목을 실시했으며 재일동포 선수단이 처음으로 참가했다. 한편 사회법인체가 된 대한체육회가 대회헌장과 심판규정을 제정했다.

1957년 제38회 대회는 처음으로 지방에서 개최되었다. 1963년 제44회 대회는 전주에서 거행되었는데 대회 사상 처음으로 대폭적인 민박을 실시했다. 이 대회 때부터 대통령배가 새로 제정되어 우승을 겨냥한 다툼이 더욱 치열해졌다.

제45회 대회는 1964년 인천에서 거행되었는데, 그해 6월 9일 제정된 대회규정과 경기심판규정 및 채점규정이 적용되었다. 제46회 대회는 광주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무등산에 자리잡고 있는 주경기장과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을 마련하여 지방에서 전국대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시설투자를 한 첫 경기라 할 수 있다. 이 대회의 특징은 세계 주니어 신기록 수립인데 역도선수 원신희가 라이트급 추상(推上)과 총계에서 신기록을 수립하는 쾌거를 보였다.

1966년 제47회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제48회 대회는 개·폐회식 때 처음으로 카드섹션이 등장했다. 제49회 대회는 처음으로 입장식상이 실시되었으며 국력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입장행진과 매스 게임 및 카드섹션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치달리던 제3공화국의 시정노선을 부각시켰다.

제53회 대회는 서울에서 거행되었는데 국민학교부와 중학교부가 전국 스포츠 소년대회로 분리되었다. 특히 재미동포 선수단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1973년 제54회 대회는 부산에서 거행되었는데 이전의 서울대회에 비해 준비가 매우 철저했던 대회로 평가되었다.

제59회 대회는 정부수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로 1978년 인천에서 거행되었는데 개항 95주년을 맞은 항도 인천의 대회에는 사우디아라비아·서독·캐나다·미국·일본에서 해외동포가 대거 참가한다. 제61회 대회는 1980년 전주에서 거행되었는데 대회 사상 처음으로 지방에 분산 개최하는 경기운영을 보여 지방도시의 균형 있는 체육시설 확충에 기여한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제62회 대회는 한국에서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이후의 경기로 서울에서 거행되어 매우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제63회 대회는 경상남도에서 거행되었는데 특징적인 행사로 내륙의 모든 시·도를 연결, 성화를 봉송으로 연결하여 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붐을 조성하고 기조를 다졌다.

제67회 대회는 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의 운영을 대비한 대회라 할 수 있으며 '전국체전 서울답게, 86·88 주인답게'라는 기치 아래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제69회 대회는 1988년 전국에서 분산하여 거행되었는데, 서울 올림픽 대회 때문에 개회식 및 폐회식은 열리지 않았으며 서울 올림픽 대회를 위한 시설 및 운영점검을 위한 예비대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뒤 서울 올림픽 대회를 성공리에 마친 체육계는 1989년 제70회 대회를 경기도에서 개최했으며, 이후 충청북도, 전주, 대구, 광주를 거쳐 1994년 대전에서 제75회 대회를 맞게 되기까지 체력이 국력이라는 기치와 함께 전국민의 한마당 체육잔치가 이어져오고 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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