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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0-18 (월)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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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850      
[음악] 서양음악사 (브리)
서양음악사 西洋音樂史 history of Western music

인도 음악, 극동음악(일본·중국·한국), 중동음악, 아프리카 음악과 더불어 세계 5대 음악문화권을 이루는 서양음악의 역사.

기원전 동지중해 유역에서 발전한 음악문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의 음악이 출발점이고 실제적인 모체는 중세 그리스도교 예배음악이다.

서양음악의 기원

모든 고대 문명은 음악문화의 번창과 더불어 역사시대에 접어든다. 음악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이 있지만 이중 원시적 형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시작되었다는 설, 집단노동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수단에서 발전했다는 설, 종교 의식에 필수불가결한 부수물로 시작되었다는 설 등이 설득력이 있다.

선사시대의 음악적 유물이 중부 유럽에서도 발견되었지만 서양음악의 요람은 지중해 동쪽 끝을 포함하는 ' 비옥한 초승달 지대'(팔레스타인에서부터 아라비아 북부를 걸쳐 페르시아 만까지)였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및 히브리(유대) 민족은 다른 민족들 중에서도 정치적·사회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 문화들은 정복국 그리스와 이후 로마의 사람들에 의해 서구에 흡수되었고, 또한 로마는 비교적 세련된 예술 형태들을 서유럽에 전수시켰다.

이 모든 초기 문화에서 음악의 사회적 기능은 음악의 본래 원시적 기능과 같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림이나 문자 기록에 묘사된 다른 음악 행사들도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작업의 노고를 잊게 해주고 혹은 극적인 상황을 고조시키거나 노래나 춤을 동반한 모임의 배경에서 흥을 돋구는 데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음악은 신체 움직임(춤·행진·놀이·노동)이나 노래에 부수되어 있었다. 이후 몇 세기가 지나서야 유쾌한 음조의 즐거움이 음악의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음악전통의 유입과 그리스·로마의 음악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에서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있는 수메리아인이나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들은 BC 3500경~500년경까지 번창했다. 이들이 남긴 그림이나 그밖의 현존하는 유물들을 보면 이들이 기본적인 유형의 여러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BC 800년경의 돌 무덤에는 해독할 수 없는 찬미가가 적혀 있는데 이것은 원시적 형태나마 음악 기보체계가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메소포타미아인보다 약 500년 늦게 역사시대에 들어선 이집트인들 역시 메소포타미아인들과 같이 모든 음악활동과 악기들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음악에 대한 기록이나 여러 유물, 그중에서도 항아리에 새긴 그림에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의 음악문화(BC 2000년경부터 기록으로 남아 있고 특히 〈구약성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음)는 그리스도교 예배의식에 차용되거나 변형되었기 때문에 서양에 좀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유대교는 우상 제작을 종교적으로 금했기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지중해 문화권 중 서유럽의 음악문화와 가장 직접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이다. 그리스 문화는 로마를 통해서 서유럽으로 전해졌는데, 로마는 그리스를 멸망시켰지만 그리스 문화를 상당 부분 변경없이 그대로 채택했다. 그리스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BC 1000년경에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이후 얼마 안 가서 이웃 국가를 지배하게 되었고 정복한 지역의 여러 초기 문화적 요소들을 흡수했다. 그리스인들에 의해 여러 지역의 문화적 요소들이 변경되고 또한 세련된 문명으로 통합되어갔다.

그리스의 2개의 기본적 종교의식인 아폴론 의식과 디오니소스 의식은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이라는 2개의 미학적 축의 원형이 되었고 이후 서양의 문화사 전기간에 걸쳐 서로 겨루는 양대 조류가 되었다. 아폴론 의식에서는 표현의 객관성·단순성·명료성이 특징이고 리르(lyre)의 한 종류인 키타라라는 악기를 즐겨 연주했다. 반면 디오니소스 의식에서는 리드 악기인 아울로스를 즐겨 연주했고 주관성, 감정적인 방종, 감각성 등이 특징이었다.

그리스의 음악은 정치·사회 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또한 에스킬루스·소포클레스·유리피데스·아리스토파네스 등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그리스의 교육제도는 무지카와 짐나스티카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무지카는 문화적·지적인 학문 과목들을 지칭하고 짐나스티카는 신체 운동을 수반하는 과목들을 지칭했다. 사회에서 음악의 기본적 역할을 지원하기 위해 조율·악기·선법·리듬을 포괄하는 음악의 복잡한 과학적 원리가 발전되었다. BC 6세기의 철학자·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진동비를 논한 최초의 인물로 서양음악에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음정 개념을 확립시켰다.

로마의 원정군대에 의해 동지중해의 음악문화가 서지중해로 전해지자 해당 지역의 전통과 특수성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고대의 동지중해 지역에서 로마로 전래된 음악문화들을 살펴보면 그 다양성과 풍요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중에는 음의 명칭·분류와 관련된 음향 이론, 음구성 개념과 그것의 산물인 선법체계, 음높이와 음길이의 표시 수단을 제공해준 기보체계, 실제 음악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는 방대한 양의 선율형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색인 : 기보법).

그리스도교의 영향과 중세음악

로마 제국이 쇠퇴하게 됨에 따라 이제 그리스도교 교회가 고대의 음악문화 전통을 이어받고 확장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할은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 서방교회의 여러 문화 중심지들은 히브리 예배의식의 전통과 그리스 문화를 공유했지만 또한 각기 나름대로 특징적인 전통들을 발전시켰다.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정형시 운율에 의한 찬미가를 기초로 성가들을 최초로 집대성하는 시도를 했으며 이후 이것은 암브로시오 성가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조금 시간이 지나서 스페인에서는 모사라베 성가, 프랑스에서는 갈리아 성가라고 하는 양식이 독특한 개성을 갖추면서 발전했다 (→ 색인 : 성악).

그러나 교회음악의 주류는 로마에서 예배음악으로 사용하던 성가였다. 전설에 따르면 6세기말 이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기존의 전통적인 선율들을 모으는 방대한 작업을 펼친 결과 이후 서양 예술음악의 발전에 토대가 될 교회 단성음악의 커다란 몸체를 형성시켰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그레고리오 성가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처음 얼마 동안 여러 전통간의 융합과정을 거친 후 9세기에 이르면서는 두 선율선 이상이 동시에 울리는 다성음악적 발전을 통해 확장되었다 (→ 색인 : 트로푸스).

전통적인 단성음악에서 극적인 발전을 이룬 이러한 다성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900년경 〈무지카 엔키리아디스 Musica enchiriadis〉에 다성음악이 기록될 무렵에는 이미 다성음악의 실제가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수들의 지침서인 이 논서는 중세시대의 주요한 음악문헌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문헌은 11세기초에 이탈리아의 수도승이자 음악이론가였던 아레초의 구이도가 쓴 〈소론 Micrologus〉이다. 이 문헌에는 다성음악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원칙들이 적혀 있는데 특히 선율의 독립성에 이어 리듬의 독립성을 이루었으며, 원래의 단성성가의 각 한 음에 대해 새로 만든 성부에서는 둘 이상의 음을 붙여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2세기초 음악활동의 중심지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이후 12~13세기에 걸쳐 이곳에서는 다성음악이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 색인 : 노트르담 악파). 새로 대두된 중요한 음악 형태는 오르가눔· 클라우술라· 콘둑투스· 모테트인데 이것들은 당시 이미 잘 알려진 세속음악에 리듬 패턴들을 결합한 양식들이다. 모테트가 부상함에 따라 콘둑투스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모테트가 이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의 양 분야에서 모두 중요한 장르로 대두했다. 프랑스의 다른 지역이나 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모테트는 특히 북부 프랑스에서 가장 발전했다.

14세기초에는 작곡가 필리프 드 비트리가 〈아르스 노바 Ars Nova〉라는 논서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르스 노바란 '신 예술'이라는 뜻으로, 14세기초 사람들은 이 논서의 이름을 따서 당시의 음악을 아르스 노바라 불렀고 13세기의 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구예술')라 했다. 필리프 드 비트리는 당대의 여러 혁신들, 특히 박자와 화성에서의 혁신들을 이 논서에 적어놓았다.

13세기 음악이 세속음악에서 유래한 리듬 유형으로 구성되고 화성 어휘도 '완전' 협화음(1·4·5·8도)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던 반면, 14세기의 새로운 음악은 리듬의 3분할뿐만 아니라 2분할도 허용했고 3도 및 6도 음정도 '불완전' 협화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14세기 음악의 중심지 피렌체에서는 맹인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프란치스코 란디니와 그의 선대 및 후대 작곡가들이 마드리갈·발레토·카치아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음악 형식의 선두주자로 손꼽힌다 (→ 색인 : 이탈리아).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적인 증거에 비추어볼 때 세속음악은 중세 초기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가 시작할 무렵 고도로 발전한 세속음악의 전통이 프랑스에 나타났음을 생각할 때 이미 그 이전부터 세속음악이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음을 짐작케 한다. 프랑스 남부 귀족들 사이에서 십자군전쟁으로 촉발된 기사도 문화에 영향을 받아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생활양식이 퍼졌다.

이들은 자신을 트루바두르라 불렀고 여러 성들을 돌아다니면서 지방어로 된 시에 음악을 붙여 직접 노래도 불렀다. 트루바두르의 문화는 12~13세기에 번성했고, 독일에서는 1150년경부터 이와 비슷한 미네징거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여 트루바두르 문화가 시들게 된 다음에도 1세기 정도나 계속되었다. 13세기말 독일의 신흥 중산계급들은 귀족에 의한 미네징거 문화를 모방하여 자신을 마이스터징거라 불렀다.

이들은 일종의 길드를 조직하여 시·음악·연주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따르면서 이후 500년 이상 융성했다. 이밖에 이탈리아·스페인·영국 등지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지긴 했지만 비슷한 세속음악 문화가 발달했다. 한편 이러한 귀족적(또는 半귀족적)인 오락 문화와 밀접히 연관된 농민 출신의 직업적인 음악집단들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종글뢰르와 메네스트렐이라 불렀고, 독일에서는 가우클레르, 영국에서는 스콥스와 글리멘이라 불렀다.

르네상스

일반적인 구분을 따르자면 15세기초는 보통 르네상스 음악의 시작으로 분류된다. 당시에는 문화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로 르네상스의 조짐이 나타났다. 고대 문학작품과 공예품에 대한 보존의 열기가 고조되었는가 하면,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이 기울었으며, 인본주의가 새롭게 부상했다. 도시와 대학이 발달했고, 서유럽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부상했다. 교회 성직자나 정치귀족들은 우아한 삶에 대한 상징으로 음악가들을 다투어 상주시켜 예배당과 사교장에서 일하게 했다. 15세기 전반에 부르고뉴와 그 수도인 디종은 경제적인 이점에 힘입어 북유럽의 지적·예술적 활동뿐 아니라 음악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작곡가들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미사곡·모테트·샹송(프랑스 세속 성악곡)을 주로 작곡했고, 특히 세속음악이 융성했다 (→ 색인 : 샹송).

부르고뉴 음악의 가장 커다란 양식적 특성은 최상성부에 선율과 리듬적 관심이 집중된 3성부 짜임새였다. 이러한 짜임새는 당시 세속노래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루었으며, 미사곡·모테트·샹송 어느 것이건 간에 세속노래의 이름을 따서 '발라드 양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연주형태를 알 수 있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모든 성부를 노래로 부르고 그중 일부는 악기로 중복해서 연주하든지, 아니면 하나의 노래 성부를 악기 반주로 보충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15세기 중엽은 서양음악사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백년전쟁이 종식됨에 따라 동방으로부터의 교역이 증대되었고 서유럽의 부가 증대되었다.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저지대 국가 음악가들의 다국적 활동인데 이들이 주도한 15세기 후반 음악문화는 플랑드르 악파라고 불렸다 (→ 색인 : 플랑드르 악파). 이들은 전유럽을 여행하거나 궁정 등 일정한 곳에서 거주하면서 높은 보수와 수준높은 생활을 영위했다. 당시 지식의 보급은 그밖에도 인쇄술의 고안과 발달로 더욱 촉진되었다.

부르고뉴 음악이 대부분 3성부 음악이었던 반면,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4성부 음악이 성악 다성음악의 표준이 되었다. 테너 성부 아래 새로 4번째 성부가 추가됨으로써 전체 음역이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보다 풍부한 음향이 만들어졌다. 또한 4성부 음악은 위의 2성부를 노래로 부르고 아래 2성부를 악기로 연주한 '듀엣 양식'(duet style)이나 모든 성부를 수직화음적으로 동시에 움직이게 한 '쉬운 양식'(familiar style)에서와 같이 짜임새의 대비 효과를 이루었다. 14~15세기초에 발전한 다양한 리듬 기법들은 종교음악의 고요함에서부터 세속음악의 생생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 영역을 가능하게 했다.

전(前) 시대와 마찬가지로 미사·모테트·샹송이 15세기 성악의 주요형태였지만, 여기에 더불어 스페인의 비얀시코(세속시에 붙인 성악 및 류트를 위한 3·4성부 세속음악), 이탈리아의 프로톨라(이탈리아어 가사에 붙인 단순한 수직화음 양식의 3·4성부 세속음악) 등 민족 양식이 발달했다. 이탈리아 북부 프로톨라의 발전에 이어 르네상스 마드리갈이 꽃피게 되었고, 이것은 전유럽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성악음악과 더불어 독립적인 기악 어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기악은 물론 중세 이후 줄곧 사용되었지만 대개 성악 다성음악의 성악 성부를 중복하거나 대체한 것이거나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더라도 대부분 춤의 반주에 국한된 것이었던 반면, 독립된 기악음악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은 15세기 특히 최초의 독일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가 경과하면서 기악음악은 강한 강세에 의한 규칙 리듬, 음과 음형의 빠른 반복 기법, 선율적 장식 등 다양한 기악 어법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 색인 : 음악형식). 프렐류드가 계속해서 오르간 음악의 주된 형태로 사용되었고, 이와 더불어 판타지아· 인토나치오네· 토카타 등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오르간 음악의 이 형태들은 구성과 음악 내용이 일관되지 않고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자유 형식'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모방기법이 악곡을 통일시키는 구조적 원리로서 점차 사용됨에 따라 리체르카레와 칸초네라는 형태가 새로 나타나게 되었다. 16세기의 고전 리체르카레는 느린 템포에 의한 종교음악풍의 기악곡으로, 여러 악장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악장마다 모방기법을 사용했다. 성악곡인 샹송에 대응되는 기악곡인 칸초네는 샹송과 마찬가지로 활달한 성격을 지녔고, 각 악장이 대조적인 템포와 박자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밖에 대중적인 기악음악으로는 예배 가사(통상 미사의 식문)의 선율을 성가대와 오르간 연주가 번갈아서 연주하는 오르간 미사곡이 있다.

당시 기악음악의 매체(악기)는 류트, 오르간, 현을 사용한 건반악기, 기악합주 등 크게 4가지 형태가 주로 사용되었다 (→ 색인 : 관현악단). 그중에서도 류트는 긴 지속음을 제외한 기악음악의 중요한 음을 낼 수 있어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현을 사용한 건반악기는 크게 하프시코드(버지널·스피넷·클라브생·클라비쳄발로)와 클라비코드로 나뉘는데, 하프시코드는 현을 뜯어서 소리를 냈던 반면, 클라비코드는 현을 격철로 쳐서 소리를 냈다 (→ 색인 : 현악기). 건반악기는 특히 영국에서 16세기 후반부터 융성했다.

르네상스의 기악 합주는 완전히 표준화되지는 않았으나 비올과 같은 현악기, 리코더나 숌(오보에의 전신으로 소리가 큼)과 같은 목관악기, 코넷·색버트(트롬본의 초기 형태)와 같은 금관악기 등 각 악기들을 동일한 족(族)으로 묶어서 무리를 이룬 콘소트(여기서는 완전 콘소트를 뜻함)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족의 악기들을 섞어서 연주하는 불완전 콘소트가 더 자주 쓰였고, 이때 어느 족 악기를 사용하는가는 연주자가 어떤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16세기초 성악 양식은 15세기 후반에 걸친 플랑드르 악파의 영향으로 대체로 단일한 성격을 띠었다. 이 단일성은 르네상스 후반까지 계속되다가 민족적 차이가 부각되어 새로운 형식이 생기고, 16세기 후반 음악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이탈리아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에는 음악적 기법과 음 재료가 빠르게 축적됨에 따라 예술적 표현어휘가 풍부하게 되었고, 악보 인쇄술이 고안되어 새로운 기법들을 빨리 전파할 수 있었다. 음악을 교양인의 필수 덕목으로 여겼던 당시 작곡가들은 세속음악을 더욱 많이 작곡하게 되었고, 이 영역에서는 종교음악에 비해 기술적 제한이 거의 없었으므로 실험적이고 새로운 양식을 지향했다.

예배음악에서는 계속 미사곡과 모테트가 종교 성악곡의 주요형식으로 남아 있었다. 세속음악에 비해 예배음악은 양식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새로운 세속적 기법이 어느 정도 자연히 스며들게 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반(反)종교개혁적인 성격을 띤 음악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6세기초 이탈리아의 음악활동은 전(前) 세기의 상대적 침체 후에 쇄신되었다. 프로톨라는 16세기의 첫 30여 년 동안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세속음악 형태로 계속 사용되었고, 이보다 더 세련된 표현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적 시인들의 노력이 이룬 결실이 곧 마드리갈이었다. 1530년경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르네상스 마드리갈은 조용하고 억제된 표현이 특징이었다.

보통 3~4성부로 씌어졌고 대체로 화성적 양식이었으나 이따금 모방적 짜임새가 섞이기도 했다. 1560년경 성부의 숫자가 5~6개로 늘어나게 되었고 다성적인 짜임새(→ 다성음악)가 좀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노랫말에 대해 좀더 표현적인 음악을 붙이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세기의 마지막 20년부터 다음 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마드리갈 양식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는데, 특히 후기 마드리갈은 극적인 성격이 강하고 생생한 음화기법(音華技法)과 반음계주의를 포괄적으로 사용했다.

한편 16세기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마드리갈의 세련성·복잡성·정교함에 대한 반동으로 빌라넬라·칸초네타· 발레토 등보다 단순한 형태의 세속노래가 나타났다. 특히 발레토는 '파라라'와 같은 뜻없는 음절을 후렴구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었다. 16세기 후반 대부분의 이탈리아 노래 형식들은 엘리자베스가 통치하는 영국에 소개되어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대부분의 주도적인 영국 작곡가들은 영국 세속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11세기 후반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 에어'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이 꽃피웠는데, 이것은 독창 곡을 류트나 다른 악기들의 콘서트 반주에 맞추어 부르기 좋게 간단한 수직화음적 짜임새로 만든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영국 마드리갈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세속 노래 형식은 다성 샹송이었다. 이것은 중세 및 르네상스초 프랑스 세속 노래의 주요형태였으며 여러 독특한 특색이 개발되었다. 그중 하나는 불규칙적인 박자의 사용인데 불규칙적 박절 구조는 프랑스 음악에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사에 대한 중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 색인 : 정량음악). 독일의 주된 세속노래는 15세기와 마찬가지로 리트였다. 그러나 이 형태는 마드리갈이나 샹송 등 다른 나라의 세속노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했으며 르네상스 전기간에 걸쳐 전통적인 원리를 고수해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인 형태였다.

바로크

17세기가 시작되면서 음악사에서 아주 극적인 전환점이 이루어진다. 바로크 시대는 대략 1600~1750년경을 풍미하던 웅장하고 극적이며 활력 있는 예술정신으로 대표된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광범위한 음악 어휘를 요구했고 새로운 기법들이 특히 성악음악의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색인 : 스틸레 안티코, 스틸레 모데르노).

음악 어휘의 확장으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성악어법과 기악어법 사이의 구별이 명료해졌고, 각 나라들의 민족적 차이도 뚜렷해졌다. 17세기에 걸쳐 이전까지 선율 및 화성의 기초로 작용해온 중세 선법이 점차 장조·단조 조성음악 체계로 대체되었고, 음의 이러한 조성 원리는 장차 1900년경까지 계속 서양음악의 중심 원리로 작용했다. 새로 대두된 조성음악 체계는 장조·단조 음계로부터 유도되는 서로 관계되는 일련의 음·화음과 대조되는 조성에 기초했다.

이 시대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크게 2개의 새로운 혁신에 따라 이전 르네상스의 음악과 구별됨을 알 수 있다. 그중 하나인 콘체르타토 양식는 성악·기악의 대조, 결합, 교대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인 계속저음(basso continuo)은 첼로나 바순과 같은 베이스 악기와 건반악기 혹은 류트에 의해 처리되었다(→ 색인 : 콘체르타토 양식, 계속저음).

이 시대에 새로 대두된 가장 전형적인 것은 그리스 비극의 음악적 이상과 실제를 재창조하고 모방하려는 뜻에서 피렌체의 귀족 문예집단인 카메라타가 고안한 오페라였는데 이들을 지배한 철학은 음악보다 가사를 우위에 놓는 것이었다. 이들은 음악의 기능이 가사의 극적인 의미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고, 그결과 모노디 양식이 탄생했다.

모노디는 원래 말의 리듬을 반영한 독창인 레치타티보와 그에 비해 선율적 성격이 강한 아리오소, 그리고 장식적인 노래인 아리아를 탄생시켰고 계속저음으로 반주되었다. 카메라타에서 고안된 모노디 양식 및 기법은 이탈리아 전역에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이어 전유럽에 퍼졌다.

1620~30년대에 오페라 활동의 중심지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졌는데, 로마 오페라는 합창과 극적인 볼거리 춤이 여기저기 포함되었으며 칸초나 양식에 의한 서곡을 사용한 점 등이 특징이었다. 10년 정도 지나자 베네치아가 오페라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1637년 이곳에 최초의 대중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베네치아 오페라는 대중 취향의 영향을 받아 대중적인 노래와 극적인 볼거리, 팡파르와 같은 짧은 서곡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혁신들을 새로 도입했다. 또한 청중이 감동적인 선율을 원했기 때문에 아리아와 레치타티보가 명확히 구별되었다. 바로크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오페라 문화가 꽃핀 곳은 1670년대 나폴리였다.

나폴리의 오페라 세리아는 고대 역사나 신화에서 인물을 가져온 진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며 100여 년에 걸쳐 유럽 오페라를 휩쓸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반복으로 이루어졌고 가수의 화려한 기교를 요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밖에 첫째 클라비어·오르간·류트로 간단히 반주되는 레치타티보 세코와 관현악단 전체로 반주되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가 구별되었다는 점과 둘째 이탈리아 서곡의 확립을 들 수 있다. 신포니아라 불리는 당시의 서곡은 3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8세기에 교향곡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나폴리 오페라 작곡가는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이다.

동시대에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는 오페라가 주로 궁정에 소개되었다. 1647년 루이지 로시의 〈오르페오 Orfeo〉가 파리에서 공연된 이후부터 이탈리아 오페라는 점차 프랑스의 중요한 극 형식인 발레와 섞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후 프랑스 오페라에서 춤이 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 오페라의 또다른 특징은 느린 악장과 빠른 악장으로 이루어졌고 종종 처음 느린 악장이 반복되는 프랑스 서곡이다. 이탈리아 서곡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서곡은 이후 오페라에서 독립되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대가는 장 바티스트 륄리와 그의 후임인 장 필리프 라모였다.

독일은 30년전쟁의 사회적·정치적 격동으로 프랑스에 비해 오페라 활동이 미온적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이탈리아 양식에 거의 전적으로 지배되었으며 함부르크·뮌헨·드레스덴·빈 등이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였다. 영국에서는 음악극 형태인 가면극이 성행했는데 이 가면극은 점차 이탈리아 오페라와 섞이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상황과 비슷했다. 18세기에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가 영국을 휩쓸기 전에 활동한 주요작곡가로는 헨리 퍼셀과 존 블로를 들 수 있다.

나폴리 오페라의 주도적인 작곡가들은 그밖에도 칸타타라는 양식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창과 기악반주에 의한 세속 성악곡에서 시작한 칸타타는 세속음악과 종교음악 사이의 양식적 차이가 줄어들자 빠른 속도로 교회음악용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루터 교회의 예배음악으로 쓰인 독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의 형식과 악기는 전시대와 거의 동일했지만 새로운 악기가 부상함에 따라 이전 악기가 덜 쓰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예로 극음악의 저음반주를 위해 계속 쓰이던 류트는 급속도로 하프시코드로 대체되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악기인 오르간은 옛 형태를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기악음악의 새로운 주요형태는 소나타와 협주곡이었는데 소나타라는 말은 원래 칸초나에서 유래된 기악합주곡을 지칭하는 말로, 이후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까지 기악음악을 대변하는 악곡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건반 소나타는 소규모 합주용으로 2성부 구조를 이루었고, 독립된 일련의 악장들(흔히 느림-빠름-느림-빠름의 순서)로 발전하게 되었다(→ 색인 : 실내 소나타, 교회 소나타).

이중 가장 중요한 형태는 트리오 소나타인데 2대의 바이올린(혹은 플루트나 오보에), 첼로, 계속저음을 담당하는 악기로 구성되었다 (→ 색인 : 트리오 소나타). 악기구성은 소나타와 같고 규모가 큰 경우에는 명칭을 달리했는데, 관현악 전체로 연주할 경우에는 신포니아(혹은 콘체르토), 소편성 독주악기들과 관현악이 교대로 연주할 경우에는 합주협주곡, 독주악기와 관현악이 교대로 연주할 경우에는 독주 협주곡(솔로 콘체르토)이라 불렀다 (→ 색인 : 합주협주곡). 협주곡의 기본 원리는 기악 편성 그룹들간의 대조와 짜임새의 대조였다. 바로크 시대를 통틀어서 건반악기 음악이 융성했다.

기악합주 음악은 실내악과 관현악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장 융성했고, 특히 볼로냐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 기악합주 음악은 당시 다른 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시대의 절정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의 작품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두 작곡가는 모두 독일의 비슷한 지역에서 태어나 루터 교회의 전통에서 자라났으며 또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 둘은 여러 가지로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각기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헨델은 주로 극음악 작곡가로 명성을 날려, 특히 영국 활동 시기 이후에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세속 칸타타를 많이 작곡했다. 반면 바흐는 평생 고용 음악가로 활동하던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교육자로 헌신한 것에도 영향을 받아, 수난곡과 교회 예배용 칸타타, 예배용 오르간곡, 연습용 하프시코드곡 등을 다수 작곡했다.

헨델과 바흐의 작품은 기법으로 볼 때 모두 조성체계 확립의 절정을 이루었다. 한 조성에서 다른 조성으로 조바꿈이 가능해졌고, 특히 이것이 형식 구성의 원리로 사용되었다. 풍부한 반음계적 화성 어휘가 이러한 변화의 근거이자 또한 그결과였다.

고전주의

기본적으로 낭만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바로크 시대가 서서히 고전주의 시대로 바뀌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옛 바로크 양식과 새로운 고전양식 사이에 중첩 현상이 나타났다. 18세기 후반의 사회적·정치적 배경은 어느 모로 보나 균형감 있고 고요한 '고전' 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당시 팽배해 있던 혁명정신과 제국주의적 식민정책과 새로운 예술사조는 좀처럼 서로 화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혁명의 움직임은 음악에 직접 영향을 끼쳤는데, 이것은 '대중을 위한 음악'이 새로운 이상이 된 데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교양을 쌓지 않은 일반 대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궁정의 여흥 예술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었지만 이제 음악가들은 이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게 되었다. 바흐가 여전히 복잡하고 현학적인 다성음악을 작곡하고 있던 즈음, 그의 아들들은 이러한 새로운 이상을 음악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그의 생활양식은 할아버지보다 훨씬 덜 형식적이었음)의 궁정에서 배양된 로코코 양식은 우아함·사소함·아기자기함을 표현의 이상으로 삼았다. 예술작품은 이제 미묘하고 장난스러우며 즐거움을 주는, 그래서 즉각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적인 것이라면 독일의 새로운 예술양식은 감정과다 양식(empfindsamer Stil)이었다. 이 새로운 독일 양식은 로코코 양식에 대한 독일적인 반향으로 1750~60년대에 융성했고, 주도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였다. 그는 한동안 프리드리히 대제가 있는 베를린 궁정에서 지냈다. 연주자와 가능하다면 감상자까지 음악 자체의 감정적인 깊이를 심오하게 느끼는 것이 감정과다 양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프랑스인들이 가벼움·우아함·장식성에 매료되어 있었다면 독일인들은 감상성으로 대처했고, 이것은 흔히 웃음보다는 눈물로 조율되었다. 감정과다 양식보다 약간 늦게 나타난 다소 절제된 표현양식을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이라 한다. 이 운동은 1770, 1780년대에 나타난 독일의 예술운동으로, 좀더 강렬한 개인 표현 의지를 표방했는데 이것은 다가오는 낭만주의 시대를 예고하는 특성이었다.

음악에서 고전주의를 바로크와 구별짓는 근본적인 변화들은 처음에는 로코코 이상으로 고무되다가 이내 고전주의자들에 의해 안정되었다. 음악사에서 처음으로 기악음악이 성악음악보다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관현악과 현악 4중주, 현악 3중주, 현악 5중주, 피아노 3중주 등 실내악들이 표준화되어 이전에 유행하던 종류가 다른 여러 악기들에 의한 트리오 소나타와 바로크 기악합주를 대체했다.

리듬 유형은 좀더 규칙적이고 단순해졌으며, 선율은 좀더 동기의 단위로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노래선율과 같은 가락의 형태를 갖추었고 또한 풍자적인 성격을 띠어 바로크 시대의 선율에서 볼 수 있던 길게 확장되는 음형양식과 대조되었다. 화성은 선율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일정한 화성 패턴이 으레 명확하게 조성 중심을 확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고전 양식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형식구조가 단순성과 명확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제 재료, 조성, 짜임새의 대조와 반복에 의해 악곡이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변주 원리와 발전 원리(주제를 세분하고 확장·변경하는 기법)가 표준화 되었다. 음악 악구(프레이즈)는 갈수록 짧아졌고, 균형감을 갖추었으며 규칙적으로 되었다. 셈여림의 대조라는 새로운 개념이 형식의 명확성에 기여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커다란 소리에서 나직한 소리로 또는 그 반대로 점차 변해가는 이른바 셈여림의 점진적 변화 개념은 표현적인 클라이맥스를 향해 악곡을 건축해나가는 데 극적인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셈여림의 변화와 관련된 또다른 발전이 관현악법과 악기 편성법에서 이루어졌다. 기악합주가 전보다 더 표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현악 음악은 훨씬 더 색채감의 대비와 다양한 색채를 이룰 수 있었다.

고전주의 시대에 대부분 기악음악의 기초로 사용된 악곡 형태는 소나타였다. 여러 악장으로 된 대규모 악곡인 소나타는 바로크 시대에 여러 선조 형태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중 특히 이탈리아 서곡과 합주 협주곡이 소나타를 낳는 데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소나타는 연주 매체에 따라 교향곡, 협주곡, 현악 4·6·3중주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때로는 독주곡 또는 하프시코드나 피아노로 반주되는 단일 악기를 위한 곡(실제로는 2중주)을 나타내는 말로만 쓰이기도 했다.

소나타는 처음 3악장이었지만, 미뉴에트 악장이 중간에 삽입되어 같은 4악장 형식으로 표준화되었다.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소나타 형태는 교향곡이었다. 원래 17세기에 신포니아라는 용어는 다양한 종류의 기악음악을 가리켰고, '소나타'라는 용어 역시 일정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말에 이르러 신포니아라는 용어는 3악장 형식으로 된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을 나타내는 데만 사용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오페라 서곡이 연주회장에서 독립적으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두 악장 사이에 미뉴에트 악장을 새로 끼워넣음으로써 고전 교향곡의 전형이 만들어졌다.

바로크 시대가 끝나면서 갓 꽃피우기 시작한 로코코 양식과 감정과다 양식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정력적인 주창자들이 밀라노·빈·만하임 등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730년대에 밀라노에서는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가 25편 가량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빈의 젊은 작곡가들은 이 새로운 장르(교향곡)를 가지고 여러 실험을 함으로써 이후 빈의 거장(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을 비롯해 빈에서 활동한 일련의 고전주의·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토대를 제공했다.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던 그룹은 팔츠 지방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운영한 만하임 궁정 관현악단이었다. 이 관현악단은 1740년대 요한 슈타미츠가 감독으로 처음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실험을 꾀한 다양한 셈여림기법(크레셴도[점점 크게],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 스포르찬도[갑자기 세게] 등), 동성음악적 짜임새에 의한 제1바이올린의 기교적 악구, 트레몰로 등의 극적 효과 등은 만하임 악파의 중요한 특성으로 당대 유럽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아들인 카를 슈타미츠와 빈의 후대 작곡가들에게 원형이 되었다.

이 시대에 확립된 관현악 편성은 바이올린 그룹, 비올라 그룹, 첼로 그룹, 더블 베이스 그룹, 2개의 플루트, 2개의 오보에, 2개의 바순, 2개의 프렌치 호른, 2개의 팀파니(축제 행사에는 트럼펫)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현악 편성은 우여곡절을 거친 점차적인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특정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악기를 음악에 넣었고,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 악기를 뺐다. 또한 후원자의 유무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거의 200년에 걸쳐서 소규모 기악합주 음악이 융성했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른바 실내악이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실내악은 연주자 한 사람이 한 성부씩을 맡아서 연주하는 소규모 기악 편성을 말한다. 바로크 시대의 트리오 소나타를 대신해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고전 합주는 4개의 현악기(바이올린 2개, 비올라 1개, 첼로 1개)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을 위해 씌어진 소나타곡을 현악 4중주라 불렀다. 그밖에 인기있던 실내 합주는 현악 3중주(바이올린·비올라·첼로 또는 바이올린 2개와 첼로 1개), 피아노 3중주(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 대두된 건반 독주 소나타는 부분적으로 당시 새롭게 출현한 부유한 중산층인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증가에 힘입은 결과이다 (→ 색인 : 건반악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들, 도메니토 파라디시,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소나타는 2부분 형식의 바로크 시대 단악장 소나타로부터 새로 표준화된 고전 3악장 소나타로의 변천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베토벤 시대까지는 4악장 형식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모차르트와 동시대 작곡가인 무치오 클레멘티는 피아노 독주를 위한 소나타를 60곡 이상 작곡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또는 피아노와 플루트를 위한 소나타를 30여 곡 작곡하여 피아노곡 작곡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소나타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기악음악 형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밖에도 여러 다른 유형들이 발전했다. 디베르티멘토· 세레나데· 케세이션· 노투르노라고 불린 모음곡 형식의 작품들은 관현악이나 실내 합주를 위해 씌어진 것으로, 교향곡·협주곡·소나타 등과 같이 주의깊은 감상을 요하는 진지한 작품들과는 달리 가벼운 오락거리로 인기가 높았다.

이들은 대체로 합주 악기들의 종류가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명시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악장의 수·유형·배열 역시 융통성을 보여 3~10악장까지 다양했고, 춤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소나타에 적합한 형식으로 되어 있기도 했다. 소나타는 아니지만 독주악기(특히 건반악기)를 위한 곡들에도 이 명칭들을 사용했는데, 가장 대중적인 소규모 독주 형식은 변주곡·춤곡·행진곡·환상곡 등 소품들이었으며 이들은 소나타의 한 악장에 포함되는 경우도 많았다. 오르간 작품은 1750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죽음 이후로 갑자기 그 수가 줄어들었다.

바로크 오페라와 고전 오페라의 차이는 바로크 기악음악과 고전 기악음악의 차이보다는 뚜렷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페라의 경우 음악적 관심이 집중된 독창이 이미 고전주의 이전부터 선율 위주에 의한 화성적 짜임새로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에 오페라 양식이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나폴리의 오페라 세리아가 계속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륄리 라모의 전통이 지배적이던 파리에서조차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의 인기는 높았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쇠퇴하고 있던 나폴리 오페라는 희가극에서의 민족주의적 반발에 부딪혀 자체적인 개혁의 기운이 일고 있었으나 나폴리의 오페라 세리아 전통은 계속되었고, 그결과 18세기말은 어느 때보다도 오페라 작곡이 활기를 띤 시기였다.

나폴리 오페라 세리아의 주요특성들을 살펴보면 왜 이것이 오늘날 거의 감상되지 않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들이 아주 정형화된 형식과 인위적이고 지나치게 복잡한 줄거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6명의 주인공들이 나오는데, 이중 반은 남성, 반은 여성이었다. 남성 역이건 여성 역이건 간에 이중 몇 명은 카스트라토(거세한 남성 소프라노 또는 콘트라 알토)가 맡았다. 각 인물들에게는 표준화된 일련의 아리아들이 할당되었다.

자연히 행동(극의 움직임)이 아리아에 의해 끊겨 극 전체의 연속성을 해치게 되고, 음악적 고려 때문에 극이 손상되었다. 가수와 아리아가 오페라 전체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파를란도(말의 리듬을 사용하는 가창법) 레치타티보는 음악적으로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합창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관현악 역시 부수적인 반주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지 못했다.

1720년대부터 이러한 나폴리 오페라 세리아 양식의 부자연스러움과 쇠락성에 대해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지만 상당 기간 동안 실제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오페라 개혁운동의 절정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였는데 그는 1740년대 당시 새롭게 인기를 누리게 된 고전음악 양식으로 2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오페라 안에 있는 극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를 모두 강화시켜, 과도한 성악적 기교의 과시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감정적 또는 극적 상황에 맞는 음악을 만들었다.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으로 오페라는 고전주의의 단순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고, 이 단순성은 그와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기존의 나폴리 오페라를 위협한 또다른 도전은 가볍고 감상적이며 종종 풍자적·시사적 주제를 많이 사용하여, 당시 사회 변화를 그리거나 오페라 세리아를 풍자한 희가극의 출현이었다. 희가극의 음악은 연주하기 쉽고 감상하기 쉽도록 흥겹고 편한 가락으로 17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18세기 전반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에 이르러서야 그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오페라 부파는 동시대인 1750년대초에 발전한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와 한데 맞붙어 유명한 '부퐁 논쟁'을 일으키게 했다. 부퐁 논쟁은 오페라 부파를 공연하는 이탈리아의 순회 오페라 극장이 파리에서 영웅을 소재로 한 프랑스 작곡가 라모의 오페라보다 더 큰 인기를 얻는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두 오페라의 가치를 놓고 당대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문필가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영국에서는 발라드 오페라가 발전했는데, 이것은 1728년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로 시작해서 오페라 코미크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독일의 징슈필은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를 번역·모방하던 관습에서 출발한 독일의 희가극으로 빈의 징슈필은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Entführung aus dem Serail〉·〈마적 Die Zauber-Flöte〉에서 정점에 달했다. 모차르트는 이밖에도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여자란 다 그런 것 Così fan tutte〉·〈돈 조반니 Don Giovanni〉 등을 통해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에서도 새로운 기원을 이룩했다.

낭만주의

19세기초의 음악양식 및 미학적 조류는 낭만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낭만주의라는 말은 18세기말 독일문학에서 비롯되었으며, 1813년 스위스 태생인 프랑스의 작가 스탈 부인은 이 새로운 운동을 "토양, 종교, 지배적 사회집단들에서 유래하는 독창적·민족적·근대적·대중적인 운동"으로 정의했다.

음악에서 낭만주의는 감정의 과잉성, 주관성, 개인민족주의, 특정한 주제에 대한 선호 등을 특징으로 한다. 감정의 과잉성은 극도로 개인적인 느낌을 드러내는 센티멘털리즘을 반영하는데 이러한 경향이 19세기 음악의 주된 특징이었다. 또한 고전주의 시대의 형식성 대신 주관성이 중요시됨에 따라 충동과 영감이 작곡가나 연주자가 음악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청자의 반응 역시 지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것이었다.

주관성에 밀접하게 관련된 개인주의는 이 시대 작곡가의 자기 중심적 표현과 작곡가의 가장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이 예술의 궁극적 메시지라는 확신을 반영한다. 또한 18세기를 주도한 보편적인 음악양식과는 대조적으로 19세기 음악에서는 민족적 기원이 중시되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독특한 특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특성들을 드러내고 강조하여 꽃을 피우고자 한 민족주의가 낭만주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적·정치적 발전의 한 결과이기도 했다.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이러한 생각과 그 성향들은 가사로 주제를 명료히 전달할 수 있는 성악음악에서 가장 명료하게 나타났지만 기악음악에도 충분히 표현되어 있어서, 민족의식과 기이한 것, 중세 이야기나 전설 등의 환상에 대한 낭만적 매료를 쉽게 감지할 수 있다.

19세기 동안 음악 기법과 재료들은 감정적이고 극적인 표현의 이상을 지향하는 새로운 원천들에 의해 급속도로 풍부해졌다. 이 시대에 인기있던 음악 장르는 관현악, 피아노, 피아노 반주가 곁들여진 독창 노래, 오페라 등을 들 수 있고, 반면 실내음악과 합창음악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했다. 이따금 박자의 불규칙성을 실험했고, 리듬을 음악의 표현성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했다. 강한 리듬 에너지와 템포의 가속화로 음악은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느린 템포로 움직이는 흐느적거리는 듯한 리듬 패턴으로 명상적이고 우수에 찬 분위기를 나타냈다.

성악의 경우 길고 서정적인 가락이 이상적인 선율형이 되었고, 기악에서는 악기들의 새로운 관용어법이 계속해서 개발되었는데, 이 두 경우를 모두 지배하는 원리는 작곡가 혹은 연주가의 주관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표현성에 있었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반음계주의와 비화성음의 사용이 점차 증가함으로써 화성 어휘가 확대되고, 조성 설계에 많은 융통성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발전부에서 대위법이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음악적 관심이 주로 선율과 화성에 모아졌기 때문에 짜임새도 자연히 동성음악적 짜임새가 주를 이루었다. 과거에 대한 탐구적 태도와 색다른 음악적 효과에 대한 관심으로 푸가와 그밖에 다른 모방 기법들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작곡가들은 좀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을 추구했기 때문에 고유한 전통과 관습이 내재한 전통적인 다성음악 형식들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종종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형식성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혐오를 지나치게 과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이나 론도 형식과 같은 확립된 형식들은 여러 가지로 변형·확대되었지만 음악적 일관성은 통일성과 다양성의 신중한 균형을 요구했으므로 19세기에 작곡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전 시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어느 정도 명확한 악장 구분, 변주, 발전 등의 형식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강조점과 규모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었는데, 예를 들어 과거 고전주의 시대의 교향곡이 20~30분 정도의 길이였는데 반해 이제 새로운 교향곡들은 거의 1시간에 가까운 긴 길이로 작곡되었다. 표현성의 또다른 양상은 기악의 색채감과 다양성인데 관현악단의 규모가 확대되고 새로운 음향을 추구하는 당시의 경향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중간에 걸쳐 있는 야누스 같은 인물은 베토벤이다. 그는 자신의 인격과 성품이 자신이 작곡한 음악 유형과 양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최초의 작곡가였으며 당시 우세하던 혁명적 힘에 감화되어, 자신을 자유로운 예술의 집행자로 선언함으로써 어떤 후원자에게도 충성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주문 생산되던 18세기 음악의 관행대로 재정적 보상을 위해 작곡되었지만, 대략 1820년경 이후에 작곡된 후기 작품들은 개인적인 독립을 선언하고 상상력과 영감에 의해서만 작곡된 작품들이다. 이로써 베토벤은 바로 그를 이어 활동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개성·주관성·감정 표현이라는 규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19세기적이라기보다는 아직 18세기적인 취향이었다.

무엇보다도 낭만주의자들이 앞으로 적극 개발하게 될 극적·서정적 형식들보다는 기악음악의 절대 형식들에 그가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교향곡, 실내악(특히 현악 4중주), 피아노곡(소나타 32곡 포함)을 많이 작곡했고, 이에 비해 오페라·오라토리오·미사곡은 각기 1곡씩밖에 작곡하지 않았으며, 그밖에 가곡이나 동성음악 합창곡도 그다지 많이 작곡하지 않았다. 극적 성격의 성악곡에 무관심한 그의 성향은 역시 고전적인 그의 일면을 반영한다(물론 그의 기악곡들에 명백히 나타나 있는 표현 변화들은 낭만주의의 선두주자로서 베토벤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도 함).

오페라는 19세기 동안 줄곧 발전을 거듭했고, 19세기 초반 이탈리아 오페라가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은 물론 아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원래 이탈리아 오페라가 갖고 있던 고유한 특성들은 유지되었고, 따라서 다른 나라의 오페라 양식들과 계속 구별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탈리아 오페라를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은 사람은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인데 그의 오페라들은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연주된다. 19세기말 사실적이고 시사적인 내용의 이른바 '베리스모'오페라가 루제로 레온카발로, 피에트로 마스카니, 자코모 푸치니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 색인 : 베리스모).

한편 독일 오페라는 1821년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 공연을 시작으로 전형적인 낭만적 주제와 표현성을 개발했다. 튜튼족 신화와 중세 전설에 기초한 이 작품은 자연의 신비성을 부각시켰는데, 이것은 이후 독일 오페라의 중요한 특성으로 남게 되었으며 좀더 현실적인 소재에 의한 이탈리아 오페라와 쉽게 구별되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이상을 악극의 형태로 완성시킨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그의 음악극에는 연극, 음악, 무대 디자인, 연기 등 무대 위의 모든 양상들이 하나의 순수예술적 표현물 속에 혼합되었는데,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이중 어떤 한 요소도 다른 요소들보다 더 우세하지 않았다(이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노래가 다른 요소들보다 우세한 현상과 대조됨).

이탈리아에서는 베르디 이후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들이 대두한 반면, 독일에서는 바그너 이후 그를 계승하거나 대신할 만한 다른 오페라 작곡가가 부상하지 못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개혁은 연극 요소에 비해 음악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된 기존 오페라에서 벗어나 연극과 음악 간의 새로운 균형을 꾀한 시도로,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부터 현재까지 독일 오페라의 일관된 특성이 되었다.

18세기말 이후 19세기까지 오페라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프랑스의 본토 작곡가들은 글루크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이룬 혁신과 독일 오페라의 새로운 발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829년 로시니의 〈기욤 텔 Guillaume Tell〉에서 시작한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는 1830~40년대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오페라에서 발전의 정점에 도달함으로써, 19세기 전반부에 만들어진 음악극 중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오페라 코미크와 그랑 오페라의 특성이 결합되어 오페라 리리크를 만들어냈다. 오페라 코미크는 오페레타라고 하는 또다른 장르를 낳아 20세기의 뮤지컬(뮤지컬 코미디)로까지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민족주의적 열성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보헤미아·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도 고유한 민족양식의 오페라들이 발전했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에서 발전의 정점과 전환점을 동시에 이룬 관현악 음악은 이후 19세기에 두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하나는 고전 형식을 고수한 보수적 기질의 작곡가들이 이룩한 절대음악적 발전이었고, 또 하나는 극적 내용, 색채, 표현성의 새 영역을 추구한 혁신적인 작곡가들이 만든 표제음악적 발전이었다. 보수 성향의 작곡가들조차도 형식과 관현악 편성을 크게 확대시켰지만, 관현악곡 중 교향곡은 고전주의 시대에 비해 훨씬 덜 작곡되었다.

진보적인 작곡가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취향과 이상을 대변하는 새로운 음악 유형으로 새롭게 연주회용 서곡, 교향시, 교향적 모음곡, 교향적 변주곡 등을 발전시켰다. 연주회용 서곡은 대개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으로 되어 있고, 회화적인 주제로 인물이나 장소, 극적 상황 등을 암시하도록 했다(종종 표제가 이러한 암시작용을 도움).

멘델스존의 〈헤브리디스 Hebrides〉서곡과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Tragic Overture〉(1880 완성)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한편 일찍이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1830 완성)에서 그 조짐을 보인 교향시는 19세기 중엽 프란츠 리스트에 이르러 대개 1악장으로 되어 있고, 시나 이야기 줄거리 등과 같이 음악 외적 내용에 기초한 관현악 작품의 형식이 비롯되었다.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순수음악적 수단으로 외부의 사건과 태도, 현상을 기술하려는 여러 시도가 이루어짐으로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이후 20세기초에는 연주회용 서곡과 교향시의 형식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교향적 모음곡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뚜렷한 유형으로 나뉘었다.

18세기 무용 모음곡, 디베르티멘토, 세레나데 등의 발전 형태, 서로 관련된 표제로 묶이는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시가 확장된 형태, 발레 같은 무대물에서 사용된 부수음악의 발췌 형태 등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 Scheherazade〉는 이중 2번째 유형에 속하고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Nutcracker Suite〉은 3번째 유형에 속한다.

18세기 중엽 이후 교향시나 협주곡의 한 악장으로 계속 사용된 변주곡은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에는 세자르 프랑크의 〈변주 교향곡 Variations symphoniques〉(1885)처럼 독립된 관현악곡으로 작곡되었다. 이 시대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같이 대중적인 관현악곡이 발전하기도 했다.

물론 낭만주의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관현악곡에서 가장 명백하게 고전주의 형식과 모델을 고수한 작곡가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 등이었고, 그 반면 극단적이고 혁신적인 낭만주의 음악을 실천한 작곡가는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란츠 리스트,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었다.

제3의 낭만주의 음악집단은 민족음악 작곡가들인데 이들은 기악음악에 대한 독일의 지배 현상에 반발했고, 또한 그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발전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들은 보수 진영의 특성과 진보 진영의 특성을 모두 수용하고 여기에 민족적 특성을 가미했다. 민족주의 음악운동은 헝가리·폴란드·스페인·영국 등지에서도 결실을 보았지만, 가장 민족적 성향이 강한 곳은 러시아·보헤미아·스칸디나비아였다.

러시아의 '러시아 5인조'는 세자르 큐이, 밀리 발라키레프, 알렉산드르 보로딘,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로 구성되었다. 보헤미아에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활동했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에드바르드 그리그, 카를 닐센, 얀 시벨리우스가 활동했다. 카미유 생 상스, 세자르 프랑크, 뱅상 댕디 등을 비롯한 프랑스 작곡가들도 독일 음악에서 독립하려 했다는 점에서 앞선 나라의 작곡가들과 같은 동기를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뚜렷한 민속음악적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이전부터 줄곧 서양음악의 본류에 속해왔다는 점에서 러시아나 동유럽의 경우와 다소 성격이 다르다.

낭만주의 시대에 피아노 음악은 이 악기의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큰 인기를 누렸다. 피아노가 이처럼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새롭게 부를 누리게 된 중산층이 여흥과 오락거리가 필요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당시 사람들의 취향에 부합하여 표현적인 '성격'을 가진 작은 '소품'(→ 성격 소품)들을 많이 작곡했는데 이 작품들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독립된 곡 또는 연작 등의 형태로 작곡되었다.

양식화된 춤곡도 계속 인기를 누렸지만, 이전 시대의 미뉴에트 대신 폴로네즈나 마주르카, 왈츠를 비롯한 민족적 유형이 많이 만들어졌다. 소나타는 여전히 진지한 작곡가들의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있었고, 또한 변주곡 모음도 계속 꽃을 피웠다. 베토벤 이후 피아노 음악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로는 쇼팽·슈만·리스트·브람스 등을 들 수 있지만, 사실 당시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거의 대부분 피아노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피아노 악기에 의한 성격소품에 해당하는 성악곡은 피아노 반주가 붙은 독창이었다. 19세기초 괴테·실러·하이네 등을 비롯한 독일 낭만파 시인들의 시가 부상함에 따라 특히 독일에서 리트가 꽃을 피웠다. 1850년 이후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 작곡가들 역시 널리 인기를 누린 성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리트 영역의 개척자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작곡한 사람은 슈베르트인데, 그는 짧은 생애 동안 무려 600여 곡을 작곡했다. 슈베르트를 이은 리트 작곡가들을 연대순으로 나열하자면 카를 뢰베,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후고 볼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다.

빈의 위대한 실내악 전통은 베토벤의 작품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실내악은 고전주의 음악의 이상이던 간결성·통일성·균형 등의 특성에 가장 잘 부합되는 장르였지만 낭만주의의 본질에는 그만큼 멀리 있었다. 낭만주의 작곡가들 중 낭만적 성향이 특히 강했던 사람들은 기악곡을 쓸 때 관현악의 색채 효과와 표현 가능성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실내악은 이러한 관심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낭만주의 시대에도 실내악이 작곡·연주되었지만, 18세기에 누렸던 인기는 결코 얻지 못했다. 실내악에 비교적 관심을 많이 쏟았던 작곡가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멘델스존·슈만·브람스 등과 같이 보수적 성향의 작곡가들이었다.

극음악이 대두된 이래로 오페라 하우스와 교회에서는 어느 정도 동일한 음악 어휘 및 양식을 사용했지만, 19세기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느냐 연주회장 같은 세속 장소에서 사용하느냐 하는 사회적 기능에 따라 음악어법도 구별되었다. 교회에서 사용한 음악은 대체로 보수적이었던 반면(이러한 성향은 특히 팔레스트리나를 재발견하고 체계적 연구를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를 재해석하면서 더욱 두드러짐), 수많은 아마추어 합창단체들을 위해 작곡된 칸타타와 대중적 세속 합창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오라토리오와 같이 연주회장이나 교회 등지에서 연주한 종교 가사에 의한 음악에서는 이 두 양식이 융합되기도 했다. 진혼 미사는 생생한 극적 내용을 갖추고 있었고 그만큼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매력이 되었는데, 특히 베를리오즈와 베르디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당시 오페라들과 함께 강렬한 감정적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 색인 : 진혼곡).

20세기

1900년경 음악양식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는 일찍이 14세기초와 17세기초에 일어났던 극적인 변화를 능가할 서양 음악사의 대전환점이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이처럼 변화가 빠른 속도로 전개된 적은 없었고, 또한 음악양식들이 이처럼 다양하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19세기말이 가까워지자 낭만주의 음악의 해체 현상이 거의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인상주의 음악을 만든 프랑스의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을 비롯한 민족주의 작곡가들에게 뚜렷이 나타났다.

당시 회화와 문학에서 새롭게 유행하던 심미적 운동의 음악적 표현인 인상주의 음악은 무정형적인 리듬형, 자유분방한 인접 화성간의 관계, 변화무쌍한 짜임새 등이 특성이었다. 인상주의로 대변될 낭만주의 음악의 이러한 해체현상은 결국 1910년경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실험적 작품들로 이어졌다.

이들의 실험 음악들은 한 마디로 음악에 신기원을 열었다. 쇤베르크는 표현주의(이것 역시 인상주의와 마찬가지로 다른 예술 장르들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사조임)를 채택하고, 협화음과 불협화음에 대한 전통적인 화성개념을 버리고 무조성과 12음음악 기법으로 나가게 되었다. 한편 스트라빈스키의 혁신적 양식은 불협화음의 타악기적 처리와 박절의 비대칭성 등이 그 특성인데 사회적·정치적 격변의 시대였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0여 년에 걸쳐 극단적인 실험주의를 꾀했다.

1920년경에 들어서면서 대두된 신고전주의는 1910년대의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작업과는 대조적으로, 18세기말경의 미적 관념으로 돌아가려했다. 스트라빈스키, 파울 힌데미트, 벨라 바르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고전주의는 감정의 절제된 표현과 재료·구성·짜임새의 단순한 처리, 장인정신에 대한 관심의 고조, 화성적 색채보다 선적인 대위법에 대한 중시 등이 특징이었다.

신고전주의의 출현으로, 이제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적 특성과 고전주의 시대의 형식미가 20세기의 새로운 선율과 화성, 리듬, 조성, 관현악 어법 속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재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쇤베르크의 어법을 추구한 표현주의자들도 알반 베르크 등을 중심으로 음렬기법에 계속 심취했다.

1920년경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신고전주의가 줄곧 지배적인 사조로 계속되는 동안 한편으로 1920년대에 소개된 혁신적인 여러 가지 실험적 기법들도 점차 다듬어지고 수정됨으로써 일반적인 음악 어휘로 동화되었고,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시대의 이상과 양식을 반영한 보수주의와 함께 실험정신이 계속되었다. 민족주의 또한 계속 융성해서 몇몇 나라에서는 19세기보다 더 활발한 정도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두 지배적 경향이던 표현주의와 신고전주의가 한데 어우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안톤 폰 베베른의 추종자들은 음렬기법을 극단적인 엄격성으로까지 몰고가서 장인정신과 지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표현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신)고전주의에 더 가까운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이로써 이 시대 이래 나타난 전위음악들은 전자악기의 기술적 발전으로 가능하게 된 기법들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초 무렵 쾰른과 파리에서 각기 전자음악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중 파리 그룹에 의해 이루어진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에서는 녹음을 통해 얻은 기존의 '구체적'인 소리들을 완성된 작품의 모든 음향의 기초로 사용했다. 구체음악에서는 음악적·자연적·기계적인 소리 등 모든 원천에서 가져온 소리를 전자적으로 수정해서 적당한 조합과 연쇄로 배열하여 작곡가의 음 재료로 사용되었다.

한편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중심으로 한 독일 그룹은 전자장치의 외부로부터 소리 원천을 녹음하지 않고 최초로 소리를 전자적으로 발생시켜 얻었고, 그런 점에서 보다 순수한 형태의 전자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 두 그룹이 과거의 음악에서 모든 소리는 음높이·음세기·음길이·음질을 갖는다는 점만을 받아들였고, 이외에 음을 구성하는 모든 개념(예를 들어 음체계)들을 다 버렸다.

전자음악은 테이프나 음반에 담을 수도 있지만 스피커로 들을 수도 있다. 이로써 시작된 음악의 비인간화는 전자적이건 전통적인 악기를 통한 것이건 간에, 소리 재료의 성격과 그 구성을 결정하는 데 수학을 사용하고 나아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등 이후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전자음악의 발전이 낳은 또다른 결과는 20세기 동안 대중음악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이제 소리는 복제 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이 라디오, 축음기, 테이프 레코더, 텔레비전 등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게다가 대중음악에서 사용한 악기들 중 어떤 것들은 소리의 생산뿐 아니라 증폭까지 이루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오락과 친목을 위해 춤과 음악을 사용해왔지만 그 대부분은 민속음악이거나 구전에 의해 전파되었을 뿐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대중음악이 처음 나타난 것은 발라드 오페라에서 발라드의 인기가 고조되고 춤곡이 널리 유포되던 18세기말엽이었고 19, 20세기에 미국 남부지방의 흑인들에 의해 재즈가 출현함으로써 좀더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이 마련되었다.

최초의 래그타임 시대가 지난 뒤 본격 재즈와 스윙, 비밥, 록, 그리고 펑크나 뉴웨이브 등과 같은 록의 수많은 변형들이 출현했다. 20세기초에 재즈에 사용한 리듬의 신선함과 현악기보다는 금관·목관·타악기 음향을 강조한 점 등에 이끌린 몇몇 진지한 고전음악 작곡가들은 작품 속에 재즈의 요소를 섞어넣기도 했다. 이처럼 고전음악에 대중음악적 요소가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1930년경 이후에 이르면 고전음악에서 사용하던 기법이 대중음악에 점차 채택되기 시작했다.

대중음악과 고전음악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대중음악의 부상은 20세기에 이룬 커다란 음악 발전의 하나였고, 이것은 특히 고전음악 작곡가와 잠재적 청중 사이에 점차 벽이 두꺼워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발전과정에 있는 혁신적 동향을 완전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한번도 20세기 음악처럼 무정부 상태를 이룬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20세기 전반기 음악현상의 경우 너무나 많은 다양한 양식들 때문에 일정한 명칭이 부여되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에 '현대'나 '동시대'라는 일반 명칭 외에 어떤 새로운 명칭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현대 또는 동시대라는 명칭은 이제 이어지는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실험을 주도한 작곡가들과 달리 대부분의 주도적 작곡가들은 대체로 1920, 1930년대에 마련된 온건한 노선을 따랐다. 역사의 교훈을 따르자면 음악의 본류는 앞으로도 단순히 새롭고 감각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고 표현성과 의미전달에 기여할 진정 가치있는 새로운 요소들을 흡수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해서 음악사는 혁명과정보다는 진화과정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R.T. Daniel 글 | 김학민(金學玟) 참조집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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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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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9 사전1 [근대] 수에즈운하 (브리) 이창호 2004-11-27 5210
2998 사전1 [근대] 수에즈운하 (한메) 이창호 2004-11-27 4288
2997 사전1 [근대] 수에즈운하 (두산) 이창호 2004-11-27 4326
2996 사전1 [근대] 무하마드 알리 (브리) 이창호 2004-11-27 3827
2995 사전1 [근대] 무하마드 알리=메메트 알리 (한메) 이창호 2004-11-27 3395
2994 사전1 [근대] 무하마드 알리 (두산) 이창호 2004-11-27 3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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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