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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7 (토)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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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714      
[근대] 수에즈운하 (두산)
수에즈운하 Suez Canal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잇는 운하.

I. 개관

길이 162.5km.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수에즈 지협에 굴착된 세계 최대의 해양 운하이다.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파서 항행할 수 있게 되면 지중해와 홍해의 교통운수 발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착상은 고대부터 있었으며, BC 1380년경에는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가 개착(開鑿)되었다. 그 후 이 운하는 천재(天災)와 전재(戰災)로 메워졌으나 여러 차례에 걸친 개수(改修)로 로마 시대와 아랍 지배하에서 중요한 수로로서 존속하였다.

16세기에는 베네치아의 상인이 수에즈 지협에 해양 운하를 개착하여 포르투갈·에스파냐의 해운 무역에 대항하려고 했고, 17∼18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여 영국·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모두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실현하지 못하였다.

또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영국의 인도무역에 타격을 주기 위해 비슷한 계획으로 조사하였으나 지중해와 홍해의 수위차가 10m나 된다는 결과를 보고 단념하였다. 또 이집트 태수(太守)는 운하를 개착하면 이집트의 독립유지가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프랑스인 푸르네의 신청(1834)과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의 출원(1838, 1841)을 각하하였다. 1846년에는 생시몽주의자(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 등의 지식인의 협력을 얻어 수에즈 운하 연구협회를 설립하고, 국제 기업에 의한 운하 개착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였으나 영국의 자본가와 정계는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경히 반대하였다.

1854년 이집트의 태수가 된 마호메트 사이드 파샤가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게 운하 개착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租借權)을 주었고, 1856년에는 이집트의 종주국(宗主國)이던 터키도 이를 승인하였다. 레셉스는 1858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를 이집트 법인(法人)으로서 설립하였으며, 2억 프랑(800만 파운드)의 자본금에 주식(株式)을 국제적으로 공개하였다. 주식은 1주 500프랑이었으며, 프랑스인이 20만 7000주를 소화하고, 이집트 태수가 17만 7000주를 인수하였다.

이리하여 공사는 1859년 4월부터 시작되었으나, 고대의 운하를 개수(改修)하여 음료수의 공급과 수송로가 확보된 단계에서 영국이 수만 명의 이집트인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는 점과 6만 ha에 이르는 농경지 조차를 이유로 들어 이집트 정부에 항의했기 때문에 운하의 개착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그 후 이집트 태수 사이드 파샤가 사망하고, 1863년 1월 이스마일 파샤가 즉위하자 그의 열렬한 희망에 따라 영국과 터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재개되었으며, 드디어 1869년 11월 17일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개통으로 런던∼싱가포르 항로는 케이프타운 경유로 2만 4500km인 것이 1만 5027km로 줄어들고, 런던∼봄베이는 2만 1400km인 것이 1만 1472km로 단축되었다.

개착공사에는 35hp의 증기기관을 가진 버킷 준설기(浚渫機) 60대를 비롯하여 새로운 토목용 기계가 1863년부터 투입되었으며 그 후 세계 각지의 하천 공사나 운하 개착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운하의 단면은 수심 7.9m, 저부(底部)의 폭원(幅員) 22m, 수면의 폭원 60∼100m의 얕은 대형(臺形)이었다. 1964년의 확장 공사 착수(미완성) 때까지에 수심 14.5m, 저부의 폭원 90m, 수면폭 160∼200m로 이미 확장되어 있었으며, 운하의 남북 3개소에 바이패스가 만들어져 5만 5000t급 선박이 지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선단(船團)이 운하를 통과하는 평균 시간은 약 15시간이었다.

II. 정치사

수에즈 운하의 개착에 반대한 영국은 막상 운하가 개통되자 태도를 바꾸었으며, 1875년에는 이집트 정부의 소유주를 매입하여, 운하의 경영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영국은 국제적인 요구였던 운하의 중립성 보장과 이를 위한 국제관리안에 반대하였으며, 러시아와 터키가 전쟁 중인 1878년 5월에는 운하 보호를 이유로 포트사이드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이 해에 국제법학회가 전시에도 교전국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국제 관리를 결의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1882년 6월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반란이 일어나자 그 진압을 구실삼아 운하지대를 영국의 군사기지로 만들고, 며칠 동안 운하 통과를 중지시켰다.

1885년의 7개국 파리회담을 거쳐 영국 등 9개국이 1888년 10월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수에즈 운하의 중립화와 국제화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 조약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운하지대의 군사 점령을 계속하였으며, 1904년의 영국 ·프랑스 협정에서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과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교환 조건이 있은 다음에야 1888년 조약을 비준하였고, 이에 그 조약은 정식으로 발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은 자국의 판단으로 운하를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터키와 독일이 운하 점령을 기도하자, 영국은 1915년에 일시적으로 폐쇄 조치를 취하였다.

그 후 영국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따라 1888년 조약 중의 터키의 권한까지를 계승하였으며, 1922년 이집트가 독립을 이룩한 뒤에도 여전히 수에즈 운하에 대한 군사 지배를 계속하면서 운하보호자라고 자칭하였다. 1930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새 조약을 체결할 준비를 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이 시작되자 이를 배경으로 1936년에 서둘러 영국 ·이집트 동맹조약을 맺고, 영국군의 운하 주둔과 이집트군의 운하 공동 보호를 결정하였다.

아프리카 작전 때문에 운하 사용도가 격증한 이탈리아는 운하의 실질적 국제 관리안을 제창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으로써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독일이 운하회사 파리 이사회를 점령하고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운하의 군사 점령을 계획하자, 영국은 1888년 조약과 1936년 조약을 정지시키고 영국군의 운하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의 반영(反英)운동은 가열되었으며, 1945년에 이집트 정부는 1936년 조약의 개정을 영국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집트는 주식 입수를 통한 점진적 운하회사 국유화를 꾀하였고, 1947년의 새 회사법을 적용하여 1949년에 운하회사와 새 협정을 체결하였다. 1949년의 팔레스타인 휴전 후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행 특정 물자를 운송하는 외국 선박의 운하 통과를 거부하였으며, 운하회사도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이집트인의 운동이 격렬해지고, 운하지대에서는 이집트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빈발하였다.

그러다가 1951년, 이란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 국유화는 이집트의 운하 국유화 운동을 자극하였으며, 1952년에는 나세르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1954년 10월에 나세르 대통령은 영국과 조약을 맺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군은 1956년 6월에 철수하고, 그 해 7월 26일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 해 10월 31일에 이스라엘을 선두로 운하 탈환을 꿈꾸는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 점령을 목적으로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고, 운하는 1957년 3월까지 통항이 불가능해졌다.

수에즈 전쟁은 국제 여론을 움직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UN의 결의에 따라 철수하였다. 그 후 수에즈 운하는 제3차 중동전쟁이 터진 1967년 6월부터 다시 폐쇄되었다가, 1974년의 이스라엘군 철수로 1975년 6월에 재개되었다. 현재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수에즈운하회사가 관리, 운영하고 있다.

III. 경제적 의의

수에즈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로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세계 경제의 동향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고, 국제 경제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운하가 개통되던 때는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국주의(帝國主義) 단계에 접어들 무렵이었으며, 또 아시아의 무역량이 팽창하기 시작하고 선박이 범선에서 기선으로 바뀌고 있던 시대였다. 개통 이듬해인 1870년에는 평균 t수 900t 미만의 선박 486척이 통과한 데 비해서, 1880년에는 평균 t수 2,140t 남짓의 선박 2,026척이 통과함으로써 10년간 약 10배의 통과 선박 총 t수를 기록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 중 석유 및 석유 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아라비아만(灣) 연안의 유전이 개발됨에 따라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약적으로 커져 그리하여 1950년대에는 통과 화물 총 t수의 60%를, 1960년대에는 70%를 차지하였다. 이 운하가 유럽 자본주의 국가 경제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수에즈 전쟁으로 운하가 1956년 11월부터 약 5개월간 폐쇄되었을 때의 타격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까지는 통과 선박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영국 선박이 1977년에는 고작 8.9% 밖에 되지 않은 정도로, 이처럼 100년 동안에 이 운하를 이용하는 해운국의 변화가 대단히 컸다.

또 1967년 6월~1975년 6월까지 중동전쟁 때문에 운하가 폐쇄된 동안에 석유 탱커를 비롯한 화물선이 비약적으로 대형화하여 이 운하를 이용할 수 없게 된 것도 1966∼77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의 큰 원인으로 꼽힌다. 즉 이 운하를 통과한 석유는 1966년에는 1억 5409만t이었으나, 1977년에는 2395만t으로 격감되었는데, 이는 대형 석유탱커의 격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이집트는 1980년 말까지 수심을 14.5m에서 19.5m로, 너비를 99m에서 160m로 하는 공사를 완공함으로써 30만t급 탱커의 통항을 가능하게 하였다. 수에즈운하회사 국유화 이후, 운하통과료는 이집트의 커다란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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