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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5-08 (토)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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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66      
[서양] 유럽의 역사와 문화 1 (브리)
유럽의 역사와 문화 1 -歷史-文化 European history and culture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 돌출한 반도와 도서로 이루어진 대륙의 역사와 문화.

개관

유럽이란 기타 대륙을 지칭하는 지리적 표현보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용어이다. 어원도 불확실하고 실제로 가리키는 지역의 범위도 확실하지 않다. 유럽의 서쪽 경계는 해안선으로 뚜렷이 정해져 있지만 영국 제도의 위상은 여전히 애매하다.

제3자가 보면 영국 제도는 분명 유럽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많은 영국인과 일부 아일랜드인에게 '유럽'은 본질적으로 유럽 대륙을 의미한다. 유럽의 남쪽 경계는 지중해 북해안이지만 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지중해는 국경이 아니라 내해, 즉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이었다. 지금도 몰타 제도나 키프로스 섬이 유럽의 섬이냐 아니냐를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불확실한 것은 유럽의 동쪽 경계이다. 이곳은 천연의 경계선을 파악하기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다. 우랄 산맥이 유럽의 동쪽 경계를 나타낸다면, 우랄 산맥 남쪽에서는 어디를 유럽의 동쪽 경계로 삼으면 좋을까? 예를 들어 우랄 산맥 남쪽에 있는 아스트라한을 유럽으로 볼 수 있을까? 크림 반도나 우크라이나를 유럽으로 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한 지리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럽이 단순한 지리적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됨에 따라, 이런 질문들은 새로운 중요성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유럽 통일을 의미하며, 처음에는 서부 유럽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1990년대초부터는 중부 및 동부 유럽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유럽의 통일은 옛날부터 하나의 이상으로 존재한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 제국이 통일 유럽의 형태를 명쾌하게 예시했다. 중세에는 샤를마뉴 제국에 이어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이상을 불완전하게나마 구현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아돌프 히틀러는 정복을 통해 유럽을 통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하나 또는 몇몇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점령하는 방법 대신 평등과 평화를 바탕으로 유럽을 통일할 수 있는 방법을 유럽 정치가들이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이같은 통일정책은 하나의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유럽인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특히 오늘날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다른 대륙과 비교해볼 때, 서부 유럽은 크기가 작고 매우 다양하며 강과 산으로 나뉘어 있고 좁은 해협과 만으로 갈라져 있다. 유럽은 또한 인구밀도가 높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이 모자이크처럼 얽혀 있다. 적절한 분류는 아니지만 유럽인을 대강 나누어보면 북방형과 알프스형(또는 켈트형) 및 지중해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대부분 로망스어이거나 게르만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인의 주된 공통점은 그들의 다양성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토록 정력적이고 호전적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다양성일 것이다. 주로 동쪽에서 잇달은 침략의 물결이 밀려온 뒤 몇 세기 동안 유럽 내부와 해외에서는 경쟁과 전쟁이 벌어졌다. 20세기에 유럽은 파멸의 운명을 겪을 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800만 명이 넘는 유럽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1,800만 명이 넘는 유럽인이 전사하거나 폭격을 맞아 죽거나 나치의 조직적인 대량학살에 희생되었다. 다른 곳에서 죽은 3,000만 명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국가주의와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를 더욱 자극한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전쟁이 끝난 지 5년도 지나기 전에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은 장 모네의 건의를 받아 유럽 통합을 위한 최초의 실제적 방안을 독일에 제의했고, 서독의 총리 콘라아데나워도 여기에 동의했다.

이 첫단계에는 정치가인 알치데 데 가스페리와 폴 앙리 스파크도 관여했는데 장 모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유럽의 언어적·정치적 경계지방 출신이었다. 슈만은 로렌 지방 출신이고, 아데나워는 라인란트 지방, 데 가스페리는 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스파크는 2개 언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출신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다양성은 오히려 통일에 대한 열망을 도와준 셈이다.

선사시대

구석기시대

유럽에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아마 100만 년 전일 것이다. 연대가 밝혀진 유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석기와 동물뼈는 BC 730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후 인간이 살았던 증거는 점점 더 많아져, BC 375000년경에는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 인간이 살게 되었다 (→ 색인 : 선사시대인).

인류 화석은 드물고 대부분의 증거는 석기이다 (→ 색인 : 도구). 돌을 깨뜨려서 만든 단순한 연장은 좀더 복잡하게 만든 연장으로 바뀌었고, 인류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런 전통적 방식으로 돌도끼 등의 다양한 박편석기를 만들었다.

BC 120000년경에 홍적세의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되었고 이 지질시대의 지층에서 나온 인류화석은 네안데르탈인의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유럽 전역과 아시아 서부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는 죽은 사람을 체계적으로 매장했다는 최초의 증거가 남아 있다.

BC 35000년경부터 해부학적으로 볼 때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유럽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뒤이은 시대의 특징은 무거운 연장이 사라지고 용도에 맞추어 제작된 갖가지 연장이 훨씬 폭넓게 도입된 것이다. 유적도 훨씬 많아졌고 여기에는 화덕과 포장된 바닥 및 주거지 같은 항구적인 구조물의 증거가 남아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도 이 시대의 것이다 (→ 색인 : 선사시대 예술). 인류는 뼈와 상아를 깍아서 동물과 인간의 작은 입상을 조각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 이른바 비너스 입상이다. 불룩 튀어나온 젖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여인의 모습을 틀에 박힌 양식으로 표현한 비너스 입상들은 프랑스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유사성을 보여준다. 동굴화,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는 동굴화 중에는 커다란 동물을 묘사한 것이 가장 많고 그밖에도 수많은 기호와 상징이 담겨 있다.

중석기시대

BC 8300년경 스칸디나비아의 빙상이 물러간 뒤부터 농경이 시작된 시기(이 시기는 BC 6000년대 또는 BC 3000년대까지 다양함)까지를 중석기시대라고 부른다 (→ 색인 : 빙하작용). 빙상이 물러가면서 새로 나타난 북유럽의 방대한 땅이 인류의 점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집단 가운데 일부는 좀더 추운 환경을 찾아 북쪽으로 이동하는 순록떼를 따라갔고 다른 집단은 소·사슴·돼지 등을 사냥하기 위해 이주했다.

강변과 해안지방에서는 물고기와 조개를 잡기도 했다. 이 새로운 경제유형은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했다. 화살과 창에 쓰인 석기는 끝에 매달거나 손잡이를 달기에 적합하도록 점점 더 작고 날카로운 날 모양을 갖게 되었다. 또한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싯바늘과 그물 및 올가미도 발달했다. 인류는 유럽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집단은 기지를 정해놓고 구성원 전체가 해마다 얼마 동안 그곳에서 지내면서 특정한 자원을 개발할 때에는 현장에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은 이와 같은 주거형태를 보이고 있다. 일부 천연자원의 물물교환이 넓은 지역에 걸쳐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광범한 사회조직이 계속 존재했다.

신석기시대

농경이 시작된 뒤부터 청동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BC 2300년경까지를 신석기시대라고 부른다 (→ 색인 : 농업). 인류가 농사를 지었다는 가장 오래 된 증거는 BC 7000년 직후의 것으로 크노소스나 아그리사 같은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BC 6000년대에 농사는 유럽 남동부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작은 진흙 벽돌집으로 이루어진 항구적 주거지가 건설되었다.

같은 장소에 이런 마을을 계속 재건한 결과, 둔덕 모양의 주거지 유적층이 만들어졌다. 대부분 여자인 진흙 입상은 집에서 흔히 발견되며 특별한 목적의 제단이나 신전도 있었을지 모른다. BC 4000년대와 BC 3000년대에는 일부 주거지가 방어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BC 4000년대초부터 구리와 금에 대한 야금술이 발달했다는 증거가 있다.

체크와 슬로바키아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는 중부 유럽에서는 BC 5400년경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농경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동족이 함께 살았던 주거 형태와 ' 엘비케이 문화'(LBK Culture)라고 부르는 물질문화이다.

농경은 중부 유럽에서 시작되어 북부 및 서부 유럽으로 퍼졌지만 거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에서는 BC 4700년경에 시작된 산림개간이 농업의 시초를 나타낼지도 모른다. 독일 북부,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남부에 가축과 농작물이 도입된 것은 BC 4200년경이었다.

후기 신석기시대

BC 3000년대말부터는 농업 분야에서 수많은 발전이 눈에 띄게 이루어졌다. 가장 중요한 발전 가운데 하나는 낙농과 직물 생산을 위해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쟁기와 수레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도 생산증대에 이바지했다. BC 3000년대말부터는 중대한 사회변화도 이루어졌다. 유럽 남동부 지역에서는 BC 3200년경에 물질문화와 주거형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장식 줄무늬가 새겨진 토기는 좀더 단순한 형태로 바뀌었고, 작은 입상을 비롯해 종교의식을 보여주는 증거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주거지로 쓰였던 둔덕 모양의 유적층은 대부분 사라졌다. 새로운 주거형태는 규모가 작은 많은 집과 그보다 큰 몇 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큰 집들은 주거지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중해의 다른 지역에서는 견고하게 요새화한 주거지를 볼 수 있다. 이런 주거지에 딸려 있는 묘지에는 죽은 사람의 신분을 알려주는 물건들이 풍부하게 묻혀 있는데, 이는 좀더 조직적인 계급사회가 나타났음을 암시한다 (→ 색인 : 매장). 중부 및 북부 유럽에서는 공동묘지보다 개인묘지가 더 우세해졌으며 성인 남자의 무덤에 신분을 알려주는 껴묻거리[副葬品]를 넣는 것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인도유럽어

선사시대말에 유럽에서 쓰인 언어는 대부분 인도유럽어족에 속해 있었다. 어떤 이론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특정집단과 이 언어들을 결부지어, 이 집단이 유럽을 침략하거나 유럽으로 이주한 결과 그들의 언어도 유럽 전역에 퍼졌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기원은 흔히 흑해 및 카스피 해의 북쪽지역으로 설정된다. 인도유럽어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다른 이론은 신석기시대 초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최초의 농부들과 인도유럽어를 결부짓고 있지만 농업의 확산이 모든 곳에서 인구이동으로 이루어졌거나 똑같은 과정을 거친 것 같지는 않다.

금속시대

BC 3000년부터 3,000년 동안은 유럽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이 시대를 예로부터 금속시대라고 부르며 금속시대는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구리시대(BC 3200~2300경)와 청동기시대(BC 2300~700경) 및 철기시대(BC 700~1경)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럽 사회는 의식적으로 금속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술혁신과 더불어 주거지의 사회조직, 종교의식 및 서로 다른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의 금속시대는 현지에서 이루어진 고유한 창조이며 독자적인 문화발전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유럽은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았고 중동사람들과 접촉했으며, 일부 인구이동 특히 러시아 초원지대 사람들의 이주도 이루어졌지만, 유럽의 금속시대는 훨씬 더 지역적 특성이 강하고 독자적인 현상이었다.

금속시대의 연대

금속시대는 금속 물질의 종류와 도구의 형태 및 매장 의식의 변화에 따라 세분된다. 청동기시대는 전기·중기·후기로 세분하거나 우네티케 문화, 고분문화, 언필드(Urnfield) 문화로 세분한다. 파울 라이네케는 남부 독일에서 발견된 유물을 토대로 청동기시대를 좀더 세분해 청동기시대 A·B·C·D와 할슈타트(Ha) A·B·C·D로 나누었다.

여기서 할슈타트 C는 중부 유럽이 철기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과도기를 나타낸다. 철기시대는 범유럽적인 현상이었지만 단편적인 부족문화와 아울러 지역에 따라 변화가 많기 때문에 연대는 복잡해진다. 후기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 암염을 캔 오스트리아의 암염 산지 옆에는 인공 유물이 많이 묻혀 있는 묘지가 있는데, 이 마을 이름을 딴 할슈타트 시대는 전기(Ha A·B)와 후기(Ha C·D)로 나뉜다 (→ 색인 : 할슈타트 문화).

전기는 유럽에서 언필드 문화가 끝난 시기이고 후기 할슈타트 시대는 중부 및 남부 유럽에서는 철기시대의 초기 단계이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이다. 철기가 유럽 전역에 퍼진 철기시대의 2번째 단계는 스위스에 있는 유적의 이름을 따서 라텐 시대라고 부른다 (→ 색인 : 라텐 문화).

이 유적의 정확한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천 개의 무기와 연장이 묻혀 있었다. 라텐 양식은 BC 5~1세기의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세월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토대로 해 라텐 시대를 다시 라텐 A·B·C·D로 세분한다. 무기와 연장의 양식을 토대로 구분한 이 시대의 특징은 공통된 유산인 켈트 예술양식이다.

일반적 특징

구리시대는 제한된 수의 소형 연장과 개인 장식품에 산만하게 구리를 사용한 시기였다. 구리가 물질문화의 한 요소로 확립된 시기 이후를 구리시대로 정의한다면, 카르파티아 분지와 유럽 남동부 지역의 구리시대는 BC 320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에게 해 지방은 그보다 조금 늦게, 이베리아 반도는 그보다 더 늦게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구리를 초기에 사용한 이들 사회에서 이 새로운 물질은 생존 수단으로는 전혀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했다 (→ 색인 : 동기). 구리는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나타내는 데에나 쓰였을 뿐이다. 구리시대가 별개의 단계로 발전한 것은 일부 지역으로, 여기에는 불가리아, 보헤미아, 에게 해, 스페인 남동부지역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이 포함되었다.

전기 청동기시대는 그 연대와 문화적 뿌리가 다양하지만 유럽 전역에서 연장에 구리 합금을 사용한 시기를 전기 청동기시대로 규정한다. 청동기시대에 금속세공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 색인 : 금속세공품). 녹인 금속을 거푸집에 부어 주물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좀더 정교한 물건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발명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검이었다. 유럽 역사에서 연장을 겸하지 않고 오로지 싸우는 데에만 쓰인 최초의 물건이 바로 검이었다 (→ 색인 : 무기). 후기 청동기시대로 넘어갈 무렵에는 갑옷도 만들어졌다.

중기 청동기시대와 후기 청동기시대는 철이 제한된 기능밖에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인류는 철의 독특한 기능적 특성을 이용하고, 연장과 무기를 만들 때 청동 대신 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철기시대의 시작이었다. 인류가 농업 생산에 돌과 부싯돌 및 나무(이것들은 청동기와 더불어 여전히 도구로 사용되었음) 대신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단계였다.

이런 지역적 변화와 더불어 옛날부터 있었던 교역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 교역로는 청동기시대에 확립되었고, 이 교역로를 통해 구리와 주석을 비롯한 생산품이 유럽 전역에서 이동되었다. 후기 할슈타트 시대에 남부와 중부 유럽에 풍요로운 공동체가 나타나자 북부와의 유대는 차츰 무시되었고 교역은 주로 남부 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에 의존하게 되었다.

사회와 경제의 발전

BC 4000년대 후반과 BC 3000년대 전반에 구리는 지표 광상에서 쉽게 캐낼 수 있었고, 유럽 남동부 지역과 카르파티아 분지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물건을 만드는 데 구리를 이용했다. 그러나 이 초기 단계가 지나자 금속물질은 다시 드물어져 BC 3000년대 후반에야 다시 등장했다. 이 변화의 이유는 지표 광상이 고갈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초기 단계에 더 깊은 곳에 묻혀 있는 황산동 광석을 개발해 이용할 수 있을 만큼 구리 제조기술이 발달하지는 못했다. 황산동 광석을 이용하려면 좀더 정교한 채광기술이 필요했고, 광석을 녹이기 전에 우선 배소(焙燒)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같은 무렵, 중부 및 서부 유럽에서는 더 깊은 광상을 더 널리 이용할 수 있었다. 독일·오스트리아·체크·슬로바키아 등에서는 BC 2000년대초부터 광석을 이용했다.

산발적으로 구리를 이용한 이 초기 단계는 오래 계속되다가 마침내 구리합금시대로 넘어갔다 (→ 색인 : 합금). 유럽 남동부 지역에서는 BC 2500년경에 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 처음 사용된 것은 오스트리아·체크·슬로바키아 및 독일의 야금 생산 중심지가 되살아난 BC 2000년대말경이었다. 합금 생산에 필요한 원료는 일부 지역에서만 얻을 수 있었고, 특히 주석은 제한된 지역에만 분포해 있어 포르투갈 동부, 사르데냐, 토스카나, 콘월, 실리 제도, 보헤미아의 광산에서만 발견되었다.

철은 청동을 세공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 단계에 철은 청동을 관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생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청동과는 다르다. 철은 유럽 전역에서 철광석이나 소철광의 형태로 널리 발견된다. 철은 다른 금속과 섞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고, 주로 철광석을 녹이거나 배소하는 데 필요한 연료와 노동력이 요구될 뿐이다. 특히 배소과정을 위해서는 높은 온도와 불꽃을 다루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철은 BC 1700년경 루마니아에서 발견되었고 그리스에서는 그 직후에 등장했다. 청동기시대 말기에는 철로 만든 연장과 무기가 유럽 전역에 널리 출현했다. 할슈타트 C 시대에는 철로 칼을 만들었고 그에 뒤이은 라텐 시대에는 쟁기날과 목수 연장 및 못을 비롯해 새로운 기능을 가진 물건에 쓰였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해진 것이 분명하다.

금속은 또한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금속은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명확히 나타냈고 따라서 권력을 부여하는 능력은 금속의 중요한 구실 중 하나였다 (→ 색인 : 사회적 지위). 구리시대와 전기 청동기시대의 중요한 공동체 구리광산이나 주석광산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사시대에는 금속 생산을 통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주거 형태에서 사회적·정치적으로 뚜렷한 계급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대 북부·서부·중앙 유럽에는 넓은 농장에서 요새화한 촌락에 이르는 다양한 공동체 조직이 존재했지만 계급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중요한 예외는 지중해 동부 지방이다.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계층 분화가 별로 뚜렷하지 않던 시기에 에게 해 지역에서는 최초의 유럽 문명(행정제도, 장부 정리, 문자, 도시화, 권력의 분배 등으로 규정된 문명)이 등장했다.

철기시대에는 사회의 계층화 현상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고 그 양상도 뚜렷해졌다. 이 시대의 주거지는 크기와 기능에 따라 집의 내부가 분할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며, 주민들은 재산 정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이 시대에는 또한 목초지와 농장 주위에 항구적인 울타리 및 담장을 둘렀고 원시적 도시 중심지가 등장했다.

서부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촌락이 그 보기이다. 촌락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인구밀집지역인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는 유리제조인과 가죽세공인 및 대장장이 같은 전문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런 유적지에서는 종래의 재분배 경제가 동전을 통해 서로 다른 가치의 교환을 측정하는 시장경제로 바뀌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인·로마인·이민족

그리스인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BC 2000년경 그리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BC 1200년경에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또다른 민족인 도리스족(도리아인)이 그리스를 침략했다. 이들이 그리스로 이주한 뒤, 여러 부족이 무질서하게 활동한 암흑시대가 2세기 동안 이어졌다 (→ 색인 : 암흑기).

BC 8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와 흑해 주변 및 지중해 건너편에 그리스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 색인 : 식민주의). 이리하여 그리스인들은 중동지방의 선진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천문학과 연대학 및 수학에 관해서는 이민족의 지식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업적인 유럽의 철학과 과학에 토대를 놓은 것은 스스로 타고난 능력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다.

척박하고 섬이 많은 그리스 본토의 지형은 강한 개인주의를 촉진했고 이 개인주의는 자체의 복잡한 사회구조와 경제 체제를 가지고 자치를 누리는 정치적·종교적 공동체인 도시국가를 낳았다 (→ 색인 : 폴리스). 권력의 융합은 도시 사이의 동맹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동맹의 효율성은 주로 맹주 역할을 맡은 도시의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자립의 욕망은 결코 끊이지 않았고 동맹은 되풀이해 깨지곤 했다. 내분이 계속되었음에도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침입(BC 490, BC 480~79)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주요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 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스인들은 BC 4세기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스는 아카이아 동맹을 결성해 독립을 회복하고자 했지만 이 동맹은 BC 146년에 로마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뉜 뒤,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비잔틴 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아나톨리아의 잠재적 침략자들에게 맞서 유럽을 지켰다.

로마인

인도유럽어족의 이탈리아어파에 딸린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BC 1000년경부터 이탈리아에 들어와 원시 지중해 인종과 섞였다. 그후 일리리아인과 그리스인 및 켈트족이 밀물처럼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다른 이탈리아 부족들과 동족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은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로마의 세력과 영향력을 확대했다 (→ 색인 : 로마사).

BC 3세기에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는 로마 식민지들이 점점 들어섰고, 이 식민지의 문화는 철저히 로마화했다. 로마의 가장 큰 업적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2세기에 로마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와 아시아 서부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지중해의 모든 나라와 스페인·갈리아 및 브리튼 섬 남부를 포함했고, 아시아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에 접경해 있었다.

로마 제국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자유무역 지대를 형성했고 이 지역은 팍스 로마나('로마 지배에 의한 평화') 덕분에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 색인 : 국제무역). 로마화를 촉진한 것은 주로 군대였지만 로마의 행정과 사회질서 및 경제적 요인도 그 일익을 담당했다. 로마화를 위한 가장 결정적 조치는 도시 제도를 속주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각 지방과 부족의 고유한 제도는 '키비타스'라는 통치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선거를 통해 시민들이 구성한 시 정부가 그 도시를 둘러싼 지방 행정에 참여하는 통치 형태였다. 로마 시민의 지위를 얻는 사람도 훨씬 많아져 212년에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모든 백성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로마 시민들이 누리던 평등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로마 시민은 국가만이 시행할 수 있는 강제 조치를 통해 세습 계급으로 나뉘었다. 지방 정부는 중앙 권력의 압력 때문에 점점 효율성을 잃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문화적 업적은 내전이나 침략자들(주로 게르만족)과의 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로마 문화의 특징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몇몇 특징은 제국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관습 속에 남아있다. 세속문화가 쇠퇴하던 시기에 국교로 인정된 그리스도교는 고대 세계의 문명을 흡수해 그것을 중세에 전달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력을 불러일으켰다.

이민족의 이동과 침략

게르만족은 BC 1800년경에 중부 독일에 살던 줄무늬토기 문화권(Corded Ware Culture)의 전부(戰斧)민족이 북해 동해안으로 이주해 그곳에 살고 있던 거석문화권의 주민과 합치면서 생겨났다. 청동기시대에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로 퍼졌고 독일 내륙으로 더 깊이 침투했다.

게르만족이 호박(琥珀) 교역을 통해 지중해와 접촉한 것은 순수한 농경문화권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발전을 촉진했지만, 철기시대에는 켈트족과 일리리아인 때문에 지중해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문화는 쇠퇴했고 기후 조건의 악화와 인구 증가 때문에 새로운 땅을 찾아 좀더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색인 : 인구이동).

그리하여 중부 유럽의 켈트족과 일리리아인은 갈수록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게르만족 선발대는 BC 200년 이전에 이미 도나우 강 하류에 도착했지만 마케도니아 왕국 때문에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BC 2세기말에 도나우 강이 범람했다.

유틀란트 반도에서 내려온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 및 암브로네스족은 점점 불어나는 홍수에 쫓겨 켈트족과 일리리아인이 사는 지역으로 뚫고 들어가 로마 세력권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그들은 BC 113년 카린티아(지금의 오스트리아 케른텐)에 처음 나타났고, 이어서 프랑스 남부에 나타났으며, 마침내 이탈리아 북부에 진출했다.

BC 102년 로마인들은 튜튼족을 완전히 무찔렀고 이듬해에는 킴브리족의 군대를 섬멸했다. 그러나 슈바벤 부족은 독일 중부와 남부를 가로질러 꾸준히 이동했으며, 켈트족은 갈리아 지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만족이 라인 강 상류를 건너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순트가우에서 승리를 거두어(BC 58) 그들의 진출을 막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유역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 두 강의 건너편에 있던 게르만족은 70년경부터 게르만-라이티아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지역으로 밀려났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떠난 게르만 부족들(고트족·반달족·부르군트족 등)이 150년부터 비수아 강 하류와 오데르 강에서 밀려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소동은 다른 게르만 부족들한테도 퍼졌으며 그 결과 로마와 마르코만니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166~180)은 이탈리아 자체를 위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성공적인 원정으로 로마는 마르코만니아와 사마르티아를 속주로 얻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이 속주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알레마니족이 마인 강을 거슬러 올라와 게르만 성벽에 이르렀다.

고트족은 200년경 동쪽으로 흑해에 이르렀다. 해마다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들은 도나우 강 하류를 건너거나 바다를 건너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침략했고 키프로스 섬까지 원정해 약탈을 자행했다. 로마는 나이수스(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니슈)에서 거둔 승리(269)로 마침내 그들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258년에 알레마니족과 프랑크족은 국경 방어선을 돌파해 라인 강 오른쪽 연안에 정착한 뒤, 갈리아와 이탈리아 쪽으로 끊임없이 침투했다. 로마는 제국 전역에 있는 도시를 요새화했다. 프랑크족과 작센(색슨)족은 갈리아 북해안과 브리튼 섬 해안을 약탈했으며 그후 3세기 동안 게르만족의 침입은 서로마 제국의 재난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게르만족의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르만족은 로마 군대에 들어가 제국 영토의 이주민으로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공적을 세움으로써 로마 군대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375년에 중앙 아시아의 훈족이 동고트족을 공격했다. 이 사건은 동게르만족에게 심각한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물러가지 않고 계속 배후에 남아서 많은 게르만족과 그밖의 부족들을 차츰 정복했다.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은 겁에 질린 나머지 도나우 강의 국경을 뚫고 로마 제국 안으로 몰려 들어왔고, 발칸 반도는 또다시 게르만 군대의 전쟁터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에서 참패한 뒤(378), 모든 적을 제국의 영토에서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인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 색인 : 아드리아노플 전투). 로마는 추방할 수 없게 된 부족들을 ' 동맹자'로 제국 안에 정착시켰다. 게르만족은 보조금을 받았고 그 대가로 군대에 병력을 공급했다.

제국은 차츰 게르만화했으며 군대의 게르만화는 거의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발칸 반도를 통해 들어온 게르만 부족들 가운데 그곳에 정착한 부족은 하나도 없었다. 395년에 제국이 동서로 나뉜 뒤,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게르만족을 서로마 제국 쪽으로 쫓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5세기초부터 서로마 제국은 수많은 이주의 무대가 되었다. 서고트족은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로 밀고 들어와 410년에는 로마를 잠시 점령하기까지 했다. 406~407년에 슐레지엔 지방 및 그보다 훨씬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과 그밖의 부족들(반달족·알라니족·수에비족·부르군트족)은 훈족을 피해 라인 강을 건너 스페인까지 침투했다.

반달족은 그후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에 독립국가를 세웠다. 이것은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 세운 최초의 독립국가였다.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일부 게르만족과 합세해 서쪽으로 진격하자, 로마군 사령관 아이티우스는 카탈루냐(지금의 프랑스 샬롱쉬르마른) 평원 전투(451)에서 게르만족의 지원을 얻어 아틸라를 무찔렀다 (→ 색인 : 카탈루냐 평원 전투).

발칸 반도는 3번째로 동게르만족에게 끔찍한 침략을 당했고 유틀란트 반도의 주트족과 앵글족 및 색슨족은 브리튼 섬으로 건너갔다.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은 마침내 라인 강 건너편에 정착했으며, 부르군트족은 론 강 유역을 따라 세력을 확장했고, 서고트족은 스페인을 거의 다 차지했다.

476년에 게르만 용병들은 이민족으로 로마 장군이 된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 왕으로 선언했고,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 색인 : 로마사).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함락될 때까지 수많은 포위 공격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5세기말경에는 서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한 이민족들은 대부분 로마의 관습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색인 : 문화접변). 이민족 지도자들은 로마의 명문집안과 혼인을 맺고 황제 칭호를 채택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유럽에 그들 부족의 고유한 제도와 민족적 관습, 고도로 발달한 서사시를 비롯한 구전과 예술적 전통을 들여왔다. 그들의 영향력은 로마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강했고, 로마 문화가 확립되어 있던 북부(브리튼 섬)와 서부(갈리아) 지역에서는 게르만족의 영향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가장 많이 로마화한 남부 지역에서는 가장 약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중부 유럽 지역에서는 고대 고지 독일어가 발달했고, 브리튼 섬에서는 앵글로색슨어가 발달한 반면, 남부지방에서는 공통된 라틴어의 유산을 토대로 한 중세 로망스어가 발달했다.

6세기부터 새로 나타난 게르만족 세력은 그들 고유의 이교문화를 고수하면서 동화에 저항했다. 작센족은 북부 유럽 라인 강 동쪽에 정착했다. 아바르족과 그들의 동맹 세력인 슬라브족은 비수아 강과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꾸준히 서쪽으로 이동해 도나우 강에서 동로마 제국의 허약한 수비를 무너뜨린 뒤, 남쪽의 발칸 반도와 서쪽의 중부 유럽으로 밀고 들어왔다.

567년경에 아바르족은 이미 헝가리 평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했고 796년 샤를마뉴 대제에게 패배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동슬라브족은 580년대에 시르미움과 싱기두눔(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을 공격해 성공한 뒤 발칸 반도로 침투했고, 다른 부족들은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해 결국 엘베 강 연안의 작센족 가까이에 정착했다.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합세해 626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이로써 이들 이교도의 세력 팽창은 막을 내렸다. 슬라브족은 2세기가 넘도록 발칸 반도를 점령했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동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중세

중세 초기

중세 초기인 5~8세기에 유럽에서는 제정이 무너진 대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게르만족의 독립적인 국가들이 들어섰다. 이 변화와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급속히 퍼졌고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체의 문화와 언어를 통일했다. 고대에 이교도의 수도였던 로마도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번째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 로마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권력을 잃어버린 처지에서 다른 그리스도교 왕국에 정기적으로 보호를 요청하곤 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이 호소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고립되었다.

비(非)로마 세력이 로마 제국을 사실상 차지한 5세기말에 이미 몇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교 권력기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시의 성직자 위계제도는 대도시나 그 주변에 확립되었고 지리적 교구의 중요성에 따라 그 교구를 맡은 주교의 지위가 정해졌다. 수도원은 정신적 완성을 위해 헌신했고, 종교 단체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덕이 높고 믿음이 깊은 사람들도 있었다.

동고트족의 성직자들이 일부 이탈리아 도시에 그리스도교의 한 갈래인 아리우스파 신앙을 강요하기는 했지만 고도로 발달한 이탈리아 도시들을 근거지로 한 주교제도가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 같다. 고립된 섬과 이탈리아 해안에 세워진 수도원들은 '사막의 교부들'의 금욕적 전통을 대표했다. 갈리아에서는 성 마르티누스가 수도원의 금욕 훈련과 주교 행정직을 결합시켰다.

이교신앙은 그리스도교 팽창에 저항한 여러 적대 세력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단자들은 나라의 공인을 받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에 맹렬히 반대했고, 이단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였다. 전적으로 비그리스도교권이었던 유럽에서 6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서유럽의 수도원제도가 확립된 것과 아리우스파 및 이교도가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서유럽에서는 6세기 이전에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지만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480경~547경)가 세운 수도원은 종교 공동체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법을 확립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규율을 켈트 교회보다는 유럽의 수도원들이 실제적인 지침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의 수도원들이 켈트 교회의 전통보다 더 세속적이고 덜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2가지 접근 방식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금욕 실천의 필요성을 그만큼 강하게 느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이 아닌 다른 민족 지도자들의 개종은 유력한 사회 구성원들의 이교신앙을 근절하는 데 중요했다. 랭스의 레미기우스 주교는 481년부터 프랑크족 지도자가 된 젊은 클로비스 왕을 설득하기 위해 만약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면 교회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때 클로비스의 아내 클로틸다가 레미기우스를 도와주었는데 그녀는 부르군트 출신의 정통 그리스도교도였다.

프랑크족의 경쟁자인 알레마니족에게 중요한 승리를 거둔 뒤 클로비스는 마침내 개종하기로 동의하고 5세기에서 6세기로 넘어갈 무렵 세례를 받았다. 후계자인 그의 아들과 3,000여 명의 프랑크 군인도 대규모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클로비스는 개종한 덕분에 주교들만이 아니라 갈리아-로마 가문들의 지지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툴루즈 주변에 정착해 있던 아리우스파 서고트족을 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507년에 벌어진 부예 전투에서 클로비스는 서고트족을 무찔렀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과 그리스도교는 훨씬 남쪽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이듬해 클로비스는 동로마 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한테서 명예로운 콘술(집정관)칭호를 받고 투르에 입성했다.

투르 민중은 그를 황제의 콘술로 열렬히 환영했다. 생애의 마지막 해(511)에 클로비스는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을 오를레앙으로 소집해 종교회의를 주재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갈리아-로마의 교회 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들에게서 고전 학문과 법률에 관한 전문 지식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들에게 유산을 분할 상속하는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클로비스의 세 아들은 아버지의 왕국을 분할했고 각자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로 싸웠다.

6세기말에 또다른 중대한 개종이 이루어졌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90~605 재위)는 북부 앵글로색슨족의 이교사상에 대한 보고를 받고, 로마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를 보내 켄트 왕국의 애설버트 왕을 개종시키게 했다. 캔터베리(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음)·로체스터·런던·요크에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수도원과 학교가 세워졌다. 이들은 앵글로색슨족이 로마 교회에 특별한 충성을 바치는 토대가 되었다.

클로비스가 세운 프랑크 왕국에서는 그의 자손들이 여전히 반목한 채 현지의 경쟁자들과도 싸움을 계속했다. 프랑크 왕국의 북부에 있던 네우스트리아 지역과 아우스트라시아 지역 및 멀리 남쪽에 있는 아키텐 지역은 메로빙거 왕조(5세기의 지도자 메로베치의 이름을 딴 것)의 사람들이 각각 독립해 다스리는 별개의 왕국이 되었다.

다고베르트 1세(629~639 재위)처럼 1명의 통치자가 이들 지역을 통일해 직접 다스리고 외부의 공격에서 나라를 방어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같은 혼란 속에서 권력은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린 유력자들이 차지했고 이들은 이름뿐인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이런 유력한 가문들 가운데 하나인 아르눌프 가문에서 훨씬 더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곤 했다.

이 과정은 다고베르트가 죽은 뒤 3대에 걸쳐 되풀이되었고 그러는 동안 아르눌프 가문은 궁재 자리를 독점함으로써 아우스트라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687년에 피핀 2세는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무찌르고 북부지역에서 권력을 확립하는 한편, 부르군트족과 프랑겐족 및 프리슬란트(프리지아)인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계속 나라를 다스렸지만 점점 무력해졌다. 이런 실권의 불균형은 나중에 피핀 2세의 손자가 자신도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왕의 칭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스페인에 강력한 왕국을 세운 서고트족은 이와는 약간 다른 상태의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는 달리 중앙집권화한 왕국을 유지했다. 톨레도에 수도를 둔 이 왕국은 효율적인 행정을 시행했고 이 점에서는 예외적으로 강력한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한편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북부 왕국들은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의 갈등으로 약해졌다.

644년 휫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는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 색인 : 휫비 교회회의).켈트파는 논쟁에서 패배했고 노섬브리아의 오스위 왕은 로마 교회의 방침을 채택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럽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에서 점점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7세기에서 8세기로 넘어갈 무렵 유럽은 이슬람교의 침입에 직면했다. 이슬람교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신봉자들이 남쪽에서 가져온 새로운 일신교 신앙이었다. 서고트 왕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북서부 모퉁이에 있는 갈리시아에서만 독립교회가 살아남았다. 아랍 침략자들을 천연 국경인 피레네 산맥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아키텐과 아우스트라시아의 통치자들이 이례적으로 협력한 덕분이었다.

궁재 피핀 2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궁재가 된 카를 마르텔은 연합군을 이끌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랍인을 무찔렀다. 이 전투가 벌어진 해는 732년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궁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칭호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사실상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었고,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자인 테오도리히(테우데리히) 4세가 737년에 죽은 뒤에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카를 마르텔은 영토를 두 아들 카를만( 카를로만)과 피핀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이들은 서로 합의한 끝에 수도원에 들어가 있던 힐데리히 3세를 데려와 왕위에 앉혔다. 카를만이 747년에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그의 동생 피핀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741~752 재위)의 승인을 얻어 마침내 힐데리히와 그의 아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귀족들은 피핀을 왕으로 선출했고 주교들은 피핀에게 성유식(聖油式)을 거행하여 왕으로 성별했다. 피핀은 이런 과정을 거쳐 751년에 왕위에 올라 피핀 3세가 되었다. 카롤링거(카를의 라틴어 이름인 카롤루스에서 유래) 왕조가 마침내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한 것이다.

피핀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로마 교황의 구원 요청을 받았다. 같은 해에 라벤나가 롬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2~757 재위)는 피핀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왔고 754년 피핀과 협정을 맺었다.

중세 초기에 교황이 세속 영토를 지키기 위해 내린 이 마지막 결단은 755, 756년에 이루어진 피핀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피핀의 군대는 아이스툴프를 무찌르고 몇 세기만에 처음으로 로마를 롬바르드의 압력에서 해방시켰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의 우정은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

768년에 피핀이 죽자, 그의 두 아들 카를과 카를만이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차지한 몫은 동등하지 않았다. 나중에 샤를마뉴 대제로 알려진 카를은 771년에 카를만이 죽은 틈을 이용해 카롤링거 왕조의 영토를 통일했고 많은 지역을 정복해 영토를 넓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지역은 작센과 아키텐 및 셉티마니아였다. 그는 다시 로마를 위해 원정해 이탈리아 중부의 영토를 로마 교황령인 성 베드로 관구에 돌려주었다.

샤를마뉴는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그동안 서유럽의 중심부는 처음으로 1명의 통치자를 갖게 되었다. 이는 로마 황제들이 주장했던 세계 지배를 이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밖에도 동시대인들이 그를 로마 통치자들과 비교하게 만든 요인은 많았다.

행정과 사법 및 교육에 관한 관심, 아헨에 수도를 건설한 것, 예술을 후원한 것 등도 그런 요인의 일부였다. 영국의 신학자 앨퀸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 칭호 때문에 유럽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중세 사회

통치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직계로서 서유럽의 마지막 황제는 476년에 폐위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였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의 주재로 대관식을 올렸고 이로써 새로운 제국의 막이 올랐다 (→ 색인 : 신성 로마 제국). 샤를마뉴는 그리스도교 세계인 서유럽에서는 가장 강력한 왕이었지만 그런 샤를마뉴조차도 공식적으로는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권세를 누리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800년에 로마에서 대관식을 갖기 전에도 그랬고, 황제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라는 칭호는 그의 가문(카롤링거 왕가)에 세습되었지만 영토는 왕가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경우가 많았다.

동프랑크 왕국은 오토 1세가 962년에 대관식을 올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됨으로써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토는 샤를마뉴에 못지않은 정치적 권력을 누렸지만 서프랑크 왕국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권리는 전혀 갖지 못했다. 그의 시대부터 황제라는 칭호는 독일 왕들의 특권이 되었지만 이 특권도 교황의 지지를 받아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었다.

9세기초부터 12세기말까지 황제들은 상당한 권세를 누렸고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 및 이탈리아 중부에서는 훨씬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1152~90 재위)는 1176년에 레냐노에서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에게 참패를 당했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신과 후계자들이 직접 다스릴 독립국가를 세우기로 결심했으며, 그결과 프리드리히 2세(1220~50 재위)와 교황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황제가 누리던 권세는 차츰 줄어들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왕을 겸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알프스 산맥 양쪽에서는 오랫동안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은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에서 중앙 권력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800~1500년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의 여러 왕국들 가운데 대체로 명성만 가장 높았을 뿐 힘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로마 제국을 직접 계승한 것은 수많은 불안정한 왕국들이었다. 3세기부터 아시아인들이 서쪽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을 위협한 것이 이 왕국들의 기원이었다. 410년에 서고트족은 로마를 약탈했고 그후 스페인에 왕국을 세웠다. 6세기말에 세워진 롬바르드 왕국은 그 마지막 왕이 774년에 샤를마뉴 대제에게 패할 때까지 느슨하게 결합된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후 롬바르드 왕국은 프랑크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독특한 성격을 대부분 유지했다. 앵글로색슨족은 7세기초까지 작은 왕국들을 세웠고 이 왕국들은 서로 패권을 다투다 9세기에 데인족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웨식스 왕국 하나만이 앨프레드 왕(871~899 재위)의 지휘로 데인족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데인족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 잉글랜드 통일왕국을 세웠는데 이 과정은 954년에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왕국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는 프랑크족의 왕국이었다.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프랑크족은 초기 영토를 버리지 않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 계속 세력을 확장했으며, 때로는 아리우스파 이단과도 관계를 맺었지만 깊이 빠지지 않고 이내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왔다. 10세기에 프랑크 제국의 동부와 서부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911년에 루트비히 4세가 죽음으로써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렸다. 하인리히 1세(919~936 재위)를 시조로 하는 작센 왕가는 동프랑크에서 왕권을 회복하고, 로타링기아(로렌)의 '중부 왕국'을 병합했으며, 마자르족의 마지막 대공세를 955년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격퇴하고 영토를 엘베 강 동쪽까지 넓혔으며, 951년부터는 롬바르디아에서도 권력을 장악했다.

서부에서는 987년에 루이 5세가 죽을 때까지 카롤링거 왕조가 근근히 대를 이었다. 루이 5세를 계승한 사람은 그의 신하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위그 카페였다. 위그 카페를 시조로 하는 왕조는 1328년까지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후 몇 세기 동안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토는 계속 넓어졌다.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된 스페인 땅을 되찾는 일은 1492년에 완전히 끝났고 그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나바라·레온·카스티야·아라곤·포르투갈 등의 왕국이 융성했다. 북유럽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라는 3개의 별개 왕국이 세워졌고 이 왕국들은 11세기 중엽까지는 상당한 내적 통합과 외적 독립성을 획득했다.

당시 이 3개국의 통치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그리스도교도였다. 동유럽에서는 폴란드(1076)·헝가리(999)·보헤미아(1085)가 독립왕국으로 황제들과 로마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중세 왕들은 대부분 권력의 근원을 밝히는 의례적 결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12세기말에 장자 상속의 원칙이 우세해질 때까지는 의회가 마지막 통치자의 친척들 중에서 왕을 '선택'했다.

단신왕 피핀 3세가 성유식을 거친 뒤 왕으로 성별된 뒤로는 구약성서를 신중하게 본뜬 예식을 통해 왕이 신성한 존재로 성별되고 명예의 표장(예를 들면 왕관)을 받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이 의식을 거행하기 전이나 거행한 뒤에 왕국의 주요인물들은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되었다. 왕을 임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는 왕의 의무를 규정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종교회의는 군대와 왕의 관계보다 백성에 대한 왕의 의무를 더욱 강조했다. 친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경우에도 백성이 왕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고 명백한 왕위 요구자가 없는 경우에는 선출이 실제로 유효한 원칙이 되었다.

13세기의 큰 왕국들 가운데 선출에 의해 통치자가 결정되는 국가는 독일뿐이었다. 덴마크·스웨덴·폴란드에서도 형식적으로 왕을 선출했고 실제로도 왕을 선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프랑스·잉글랜드·스페인에서는 상속권이 절대적인 권리가 되었다.

8세기까지는 교황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동로마 제국 총대주교들의 존재 때문에 교황이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기가 어려웠다 (→ 색인 : 교황제). 그러나 700년에 이르자 동로마 제국의 총대주교들은 대부분 이슬람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이 너무 약해졌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 1세 같은 교황들은 로마에 대한 세속적 책임을 대부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교황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제국의 권위는 떨어졌다.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교리논쟁(725~843)은 동방의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의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반목을 촉진시켰으며 이 반목은 갈수록 더욱 깊어져 거의 영원한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색인 : 서방교회 분열, 성상파괴논쟁).

그리하여 로마는 서유럽에서 유일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회에 대한 세속 군주들의 권한을 줄이려고 애썼으며(이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 및 하인리히 5세와 교황들 사이에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벌어졌음) (→ 색인 : 서임권 논쟁), 성문 교회법을 바탕으로 로마가 직접 다스리는 교회 정부를 세워 세속의 권력을 대신하고자 했다.

귀족계급

1100년 무렵에는 로마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의 거의 전역에 이미 대귀족계급이 등장해 있었다. 이 귀족계급은 3가지 요소를 겸비한 것이 특징이었다. 첫째, 귀족들은 장원을 소유한 영주로서 대개 신서(臣誓)와 충성의 서약으로 맺어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대신, 그들 자신도 왕이나 고위 성직자나 교황에게 충성 서약으로 묶여 있었고 행동으로 경의를 표했다 (→ 색인 : 봉건제).

귀족은 왕이나 성직자에게 신하의 의무를 다했고 귀족의 아랫사람들은 귀족에게 의무를 다했다. 이런 상호 의무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병역의 의무였다. 둘째, 귀족계급은 아랫사람들에 대해 광범위한 사법적·경제적·행정적 권한을 행사했다. 셋째, 이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땅(봉토)으로 보수를 주는 지주계급이었다.

영주들은 왕에게서 받은 땅이나 하사금으로 재산을 늘렸고, 자신이 직접 보유하고 있는 땅(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대가족을 부양했다. 이 대귀족계급의 기원과 그들이 누린 특권은 다양했다. 혈통은 아마 처음부터 왕의 총애를 받을 기회와 높은 지위를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9~12세기에는 부계와 맏아들의 신분을 훨씬 더 강조하게 되었고 광범위한 친족 집단은 지배 가문이 되었다. 공직이 세습 재산으로 상속된 것, 군사적 문제에 대한 고려가 점점 더 중요해진 것, 그리고 분할할 수 없는 몇몇 성(城)에 부와 영향력이 집중된 것 등은 모두 이런 결과를 낳는 데 이바지했다.

귀족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면 자유민으로 태어난 가신(家臣)들을 많이 거느리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영지가 가치 있게 여겨진 것은 거기에서 재화가 나오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영지에 딸려 있는 사람들의 봉사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신들의 수는 자기 땅을 영주에게 바치고 조건부 하사로 그 땅을 돌려받아야 할 필요성에 쫓긴 자유민들 때문에 계속 늘어났다. 이들은 땅을 바친 대가로 영주의 보호를 받았다.

전투가 점점 전문화함에 따라 자유민이라는 태생보다는 기마전 솜씨가 귀족을 섬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기사들은 영주의 집에서 가신으로 살 수도 있었고 영주에게 받은 땅(기사의 봉토)을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기사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광범위한 통치권을 발휘했으며 소귀족계급을 형성해 무기를 지니고 다니거나 자신의 문장을 사용하고 요새화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유럽 전역의 대귀족계급에는 수많은 성직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교 관구와 많은 수도원은 넓은 땅을 하사받았고 성직자들은 이 땅에서 소작인의 지주이자 궁중 관리로서 세속 귀족들보다 더욱 광범위한 권리를 행사했다. 교회의 고위직은 거의 전적으로 귀족의 특권이었고 나중에는 기사계급의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는 왕이나 교황에게 봉사하고 신학 이론과 교회법에 정통하면 귀족이나 기사가 아닌 사람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교회 조직의 핵심은 원래 주교관구였다. 늦어도 8세기말부터는 여러 개의 주교관구가 모여 대주교나 수도 대주교가 관할하는 관구를 이루게 되었다. 군주들은 지위가 높은 세속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와 동맹을 맺고 주교를 일종의 평형추로 삼아 의지했다.

대주교들은 차츰 강력한 지주인 동시에 왕을 대신해 광범위한 왕권을 행사하는 영주가 되었다. 실제로 주교들은 이웃의 탐욕스러운 세속인들한테서 자신을 지키고 교회의 율법을 집행하기 위해 왕권에 의존했다. 그리고 중세 후기에는 교육받은 일부 세속인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는 반교권주의와 교황의 경제적 요구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왕권에 의존하게 되었다.

원래의 주교구 조직은 주교와 주교좌 교회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소수의 성직자들에게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교구 내부에 부차적인 중심지들이 생겨났고 이런 소교구들은 대부분 1명의 성직자가 봉사하는 작은 교회 하나만 관할했다.

서유럽에서는 13세기 중엽까지 이런 소교구 조직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갖추어졌다. 주교가 정식 사법권을 갖게 되자 법률과 재정 문제를 담당하는 수많은 대리인이 등장했다. 이들의 지위는 막강한 힘을 가진 주교좌 성당의 부제에서 미천한 소환 담당인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지만 이들의 임무는 결국 범법자를 교회 법정에 출두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로마의 교회 정부가 차츰 중앙집권화하자 다른 관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감독하는 로마의 감독관, 교황에게 바칠 세금을 거두는 징세관, 그리고 나중에는 교황의 면죄부와 진위가 의심스러운 성유물을 팔러 다니는 뜨내기 행상(면죄부 판매인)처럼 평판이 나쁜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관리들이 나타났다. 이런 직위 이외에 정규 성직자와 성직록을 받는 유급 성직자 및 수많은 교회 서기도 존재 했다.

로마의 세속 교육이 붕괴한 뒤 유럽에서는 성직에 몸을 담지 않고는 교육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었지만 13세기에 유럽에는 교육받은 속인이 나타났다 (→ 색인 : 평신도). 왕을 섬기는 법률가와 행정관은 완전한 세속 경력을 가질 수 있었고 상인은 대부분 필요에 따라 글을 배웠다. 이들은 종래 성직자만이 맡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교회 정부의 자치권을 위협했다.

그밖의 사회집단

서로마 제국의 도시 사회는 마지막 황제가 물러난 5세기 훨씬 이전부터 해체되기 시작했지만 11세기말까지는 대체로 회복되었다. 장거리 교역을 하는 상인들이 도시의 귀족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차츰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바다를 통해 지중해와 에게 해 동쪽 해안의 지방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자 상업 공동체의 규모와 영향력도 급속히 커졌다.

이런 공동체에는 직물 제조로 유명한 플랑드르 지방의 공업도시와 금속 세공으로 유명한 밀라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12세기말에 8만 명의 인구를 거느렸던 것으로 추산되는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학 도시였다.

로마 시대에는 주로 사유지의 노예나 비교적 자유로운 경작자들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정부는 납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경작자들을 강제로 땅에 묶어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처럼 의무적으로 땅을 경작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의 중대한 법적 무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하지는 않았다. 침략기의 게르만 사회에서 농업 인구는 흔히 3부류로 구분되었다.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유농민은 무기를 지닐 수 있었고 공공집회에 참여했다. 자유민은 해방된 노예일 수도 있고, 그전에 정복당한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일 수도 있었으며, 제한된 권리를 누렸지만 대개 법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 색인 : 해방노예).

그리고 3번째 부류는 노예였다. 이들은 전쟁 포로로 붙잡혔거나 법률적 판결에 따라 노예 신분이 되었거나 가난 때문에 노예로 몰락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노예들 가운데는 자기 소유의 오두막과 땅을 갖고 가정을 꾸며 최소한의 독립생활을 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3부류의 농민은 서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고 그리하여 1000년경에는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에 독특한 부락민(예농)이 나타났다 (→ 색인 : 예농제).

이들은 마을 들판에 상당한 땅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영주의 장원에서도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했고, 이전의 땅 없는 노예들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영주의 뜻에 복종해야 했다. 게다가 마을 공동체에는 대개 옛날과 같은 의미의 노예들도 몇 명 있었고 더 작은 땅을 가진 사람들(농장 노동자)도 있었다. 작은 땅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력과 현물로 내는 소작료는 다른 소작농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이들의 경제 상황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이 경작자들은 모두 농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 색인 : 농노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자유농민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4세기에는 경제 상황의 변화로 영주의 장원에서 의무적으로 일하는 대신 정해진 소작료를 돈으로 바치는 예농의 수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자유농민의 지위도 서서히 높아졌다.

12세기와 13세기에 상당한 토지 보유의 자유를 인정하겠다는 제의에 따라 계획된 개간지로 이주해 땅을 소유한 이주민들은 다른 수단으로 똑같은 목적을 달성했다. 사회적 저울의 반대쪽에는 이제 땅 없는 임금 노동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계속)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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