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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5-12 (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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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과거 (한메)
과거 科擧

국가가 관리임용을 위하여 실시하던 시험.

<과거>란 과목(科目)에 따라 선비를 등용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과목이라 함은 시험과목이 아니라 시험의 종류를 의미한다. 이 제도는 원래 중국의 관리 등용을 위한 시험제도로서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에서 과거제도가 시작된 것은 788년(신라 원성왕 4)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독서3품과라고도 함)가 있는데 한국 과거제도(科擧制度)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관리임명을 골품제도에 의하지 않고 한문(漢文) 성적으로 인재등용의 원칙을 세웠지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엄격한 의미의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뒤 1895년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어 과거제도가 이 나라의 정치·문화에 끼친 영향이 자못 컸다.

[고려시대]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958년(광종 9) 당(唐)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비로소 과거의 법을 마련하였는데, 무과(武科)가 실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문좌무(右文左武)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제술과(製述科;進士科라고도 하였음)·명경과(明經科) 및 잡과(雜科;醫卜科)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술과와 명경과는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합격하면 문신이 될 수 있으므로 가장 중요시되어 보통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였다. 그 뒤 과거제도는 더욱 발전하여 1136년(인종 14) 왕명에 의하여 명산(明算)·명법(明法)·명서(明書) 등의 과목이 추가·정비되었다.

과거의 시험절차는 중앙과 지방에서 각각 제1차 시험을 보았는데, 중앙에서 합격한 자를 상공(上貢), 지방에서 합격한 자를 향공(鄕貢)이라 하였고, 중국인으로 이에 합격한 자를 빈공(賓貢)이라 했다. 이 삼공(三貢)은 개경(開京)에 있는 국립중앙대학격인 국자감(國子監)에서 다시 간단한 시험을 본 다음, 이에 합격한 자와 국자감에서 3년 이상 공부한 학생, 벼슬에 오른 지 300일 이상 되는 자를 통틀어 소정의 시험과목에 따라 최종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 최종시험을 감시(監試)라 하였으며, 합격자는 제술과에 있어서는 갑(甲)·을(乙)의 2과(科), 명경과에는 갑·을·병·정의 4과가 있었다. 합격자의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중엽 이후 대체로 33명이 되었고, 처음에는 해마다 과거를 실시하던 것을 성종 때에는 3년에 한 번의 식년시(式年試)를 실시하였고, 현종 때에는 격년(隔年)으로, 후에는 매년 또는 격년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과거는 예부(禮部)에서 관장하였고,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하였다. 제술과의 경우에 갑과의 1등 합격자를 장원(壯元), 2등을 아원(亞元) 또는 방안(榜眼), 3등을 탐화(探花)라 하였고, 빈공에서 합격한 자를 별두(別頭)라 하였다.

때로는 감시에 합격한 자들을 모아 임금이 다시 시(詩)·부(賦)·논(論)으로 친히 시험을 보았는데 이것을 복시(覆試) 또는 염전중시(簾前重試)라 하였다. 염전중시의 시험 사무를 관장하는 관리를 독권관(讀卷官)이라 불렀다. 이 복시는 성종 때에 처음 실시된 것이나 상례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최종시험에 합격한 자들에게는 홍패(紅牌), 때로는 황패(黃牌)를 주었는데, 홍패는 붉은종이에 검은 먹으로 쓴 합격증이었다.

응시자에 대한 신분제한은 매우 엄격하여 오역(五逆)·오천(五賤)·불충(不忠)·불효(不孝) 및 향(鄕)·부곡(部曲)의 악사(樂士)와 잡류(雜類;禾尺·才人 등)의 자손에게는 응시를 불허하였으며 고급관리의 등용문인 제술·명경과에는 양반의 자제들만 응시할 수 있었는데, 대체로 주·군·현의 차관(次官)인 부호장(副戶長) 이상의 자제를 기준으로 하였다.

잡과 즉 일종의 기술자를 채용하는 시험에는 천민(賤民)을 제외한 일반 서민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제술·명경의 대과(大科)에 비하여 일종의 소과(小科)라 할 수 있는 국자시(國子試)와 승보시(陞補試)가 있었는데, 합격자는 국자감에 들어가 공부할 자격 또는 하급관리에 등용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국자시는 덕종 때에 시작된 것으로 성균시(成均試) 또는 남성시(南省試)라고도 하였으며,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보았다. 승보시는 의종 때 제정된 것으로 시·부·경의(經義)를 과목으로 하고 이에 합격한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였다.

의종 이후 과거제도는 문란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신흥사대부 등을 대거 기용하여 반원(反元)개혁정치를 실시한 공민왕 때에 학교제도와 함께 성리학 교육 중심으로 대폭 개혁되었다. 그 뒤 신흥무인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우왕을 비롯 구귀족세력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움으로써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鄕試·會試·殿試)이 부활되고, 고시과목도 경학(經學) 중심으로 바뀌었다. 또한 1391년(공양왕 3)에 무과를 설치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실행되었다.

[조선시대]

문과(文科)·무과(武科)·잡과(雜科)로 대별되며, 잡과는 다시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로 구분되나, 당시 상문(尙文)의 경향으로 인하여 과거라 하면 문과를 가리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를 유학(幼學), 무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를 한량(閑良)이라 하여 그 자격에 제한이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① 범죄로 영구히 용서될 수 없는 자 ② 독직(瀆職) 관리의 자제 ③ 재가(再嫁)·실행부녀(失行婦女)의 자손, 서얼자손(庶蘖子孫)은 응시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보다도 신분상으로 큰 제한이 있어 생(生)·진시(進試)와 문과는 양반 이외는 원칙적으로 응시자격이 없었고, 무과는 그 제한이 상당히 완화되어 천인을 제외한 일반 서민에게도 그 자격이 주어졌다.

과거는 식년시(式年試;子·卯·午·酉年)가 원칙이었으며, 이 밖에 임시·부정기의 과시(科試)로 증광시(增廣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 외에 성균관내의 과시가 있었다. 과거에는 사마시(司馬試) 혹은 생진시(生進試;흔히 小科라 함)와 문과(大科라 함)가 있고, 생진시는 다시 초시(初試)·복시(覆試)의 2단계, 문과는 초시·복시·전시(殿試)의 3단계가 있어 이 5단계를 거쳐야만 문과급제가 되는 것이었다.

생진시의 초시는 독서하는 선비가 처음으로 응하는 국가시험으로 식년 전년(式年前年) 8월에 한성부(漢城府) 및 8도에서 지역별로 관찰사 주재하에 시행했다. 진사시 (進士試)는 부(賦) 1편과 고시(古詩)·명(銘)·잠(箴) 중의 1편을 짓게 하며, 생원시(生員試)는 오경(五經)의 의(義) 1편과 사서(四書)의 의(疑) 1편을 짓게 하여 각도의 정원수에 따라 전국에서 양 과에 각각 700명(뒤에 540명), 총 1400명(뒤에 1080명)을 선발하였다.

이 생진시의 초시에 대행하는 것으로 성균관 대사성이 사학유생(四學儒生)에게 시행하는 승보시(陞補試)·사학합제(四學合製) 등이 있고 지방에는 각도의 도사(都事)와 개성·강화 유수(留守)가 시행하는 공도회(公都會) 등이 있었다. 제2단계인 생진시의 복시는 초시의 합격자를 식년 봄에 모아 예조(禮曹)의 주재하에 시행했는데, 복시 전에 《소학(小學)》 《가례(家禮)》의 강(講)으로 녹명(錄名)한 뒤 초시와 동일한 과목을 과하여 생원·진사 각과에서 100명씩 선발했다.

이 합격자에게 백패(백색 종이에 흑서한 합격증서)를 주며 제술(製述)의 합격자를 생원(生員), 명경의 합격자를 진사(進士)라 하였다. 그들은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만이 아니라, 사류(士類)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고 하급관리가 되는 자격을 얻었다.

제3단계인 문과 초시는 식년(式年) 전해 가을에 한성부와 8도에서 지역별로 관찰사 주재하에 시행되는데 응시자격은 생진시의 합격자인 생원과 진사이다. 처음에 제술·명경으로 나누고 다시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누었으며, 제술시는 초장에서 오경사서(五經四書)의 의(疑)·의(義) 또는 논(論) 중에서 2편, 중장에서 부(賦)·송(頌)·명(銘)·잠(箴)·기(記) 중에서 1편과 표(表)·전(箋) 중에서 1편, 종장에서 대책(對策) 1편으로 시취(試取)하였다.

명경시(明經試)는 뒤에 없어졌지만 오경사서에서 시취하였다. 이리하여 선발된 340명(뒤에 223명)이 복시에 응할 수 있게 된다. 문과 복시는 식년 봄에 한성부에서 예조의 주관하에 시행되었는데, 복시전에 《경국대전》 《가례》로써 녹명한 뒤 초장에는 사서삼경의 강서(講書), 중장에는 부 1편과 표·전 중 1편의 제술(製述), 종장은 대책 1편의 제술로 33명을 선발하였다.

문과 전시는 국왕 친림하에 시행하는 것으로, 33명을 그대로 급제케 하되 대책·표·전·잠·송·제(制)·조(詔) 중에서 1편의 제술로써 갑과(甲科)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의 등급을 정한다. 이들에게는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를 하사하고 영전을 축하하는 갖가지 행사가 있었다. 이들 급제자 중에 갑과의 제1인은 장원(壯元)이라 하여 종6품, 제2등은 방안(榜眼), 제3등은 탐화(探花)라 하여 각각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정9품의 품계를 주어 승문원(承文院)·성균관·교서관(校書館)의 권지(權知;임시직)로 하였으며 기성 관료는 갑과 제1인은 4품계를 올려주고, 제2·3등은 3품계, 을과는 2품계, 병과는 1품계를 각각 올려 주었다.

이외에 1401년(태종 1) 증광시라 하여 임시로 과거를 보인 이래, 1429년(세종 11) 알성시(謁聖試), 1457년(세조 3) 별시(別試) 등을 비롯하여 외방별시(外方別試)·종친과(宗親科)·현량과(賢良科)·도기시(到記試)·황감시(黃柑試)·춘당대시(春塘臺試)·기로과(耆老科) 등 수시로 과거를 보는 풍조가 생겼고, 앞에 말한 태종의 중시(重試)에서 시작하여 1429년(세종 11) 발영시(拔英試)·등준시(登俊試), 1458년(세조 4) 전문시(箋文試), 1482년(성종 13) 진현시(進賢試), 1538년(중종 33) 탁영시(擢英試) 등의 중시가 있어 이미 등용된 문신들에게 임금이 친히 시험을 보게 하여 합격자들을 더욱 중용(重用)하였다. 무과는 궁술(弓術)·총술(銃術)·강서를 시험과목으로 하고 역시 초시·복시·전시의 절차를 밟았으나 조선시대에는 문(文)을 숭상하여 무과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잡과인 역(譯)·의(醫)·음양(陰陽)·율과(律科)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부문에 따라 세분되는데,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관상감(觀象監)·형조(刑曹) 등에 근무하는 중인(中人;하급관리)의 자제로 그 분야에 소양이 있는 자들을 모아 각각 당해 관서에서 초시·복시의 절차로 시험을 보았다.

잡과에는 지원자가 적어서 식년시(式年試) 외에는 없었다. 후일에 오면서 과거를 너무 자주 본 결과 합격하여도 등용되지 못하여 등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정실(情實)과 부정합격으로 인한 폐해가 많아지자 1818년(순조 18) 과장구폐절목(科場救弊節目)이 나오게 되었다.

<이기동>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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