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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4 (수) 10:58
분 류 사전1
ㆍ조회: 1016      
[근대] 인도제국 (브리)
영국의 지배와 인도사회(1858~1920)

폭동과 반란(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 색인:인도반란).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평소 민족적 자존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인과 충돌이 잦았었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델리에서 독립의 횃불이 솟아오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우드의 러크나우와 칸푸르가 그 중심지였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반란은 북부·중부 인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비화되어, 영국의 인도 지배는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란군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상실했고, 시대착오적인 왕정복고를 꿈꾼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할 민족주의적 반항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인도사' 항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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