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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7 (토)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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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456      
[국가] 이란 (한메)
이란 Islamic Republic of Iran

중동의 이슬람공화국.

정식명칭은 이란이슬람공화국(Keshvar―e Jomhūri―ye Irān―e Islām)이다. 면적 164만 8000㎢. 인구 6230만 4000(1997). 서양에서는 그리스 이후 아케메네스왕조의 옛지역인 파르스지방에서 이름을 따 페르시스 또는 페르시아 등으로 불렸으나 1935년 1월 1일 팔레비왕조의 리자 샤가 이란을 정식 외국어 호칭으로 정하였다.

서쪽은 터키와 이라크, 남쪽은 페르시아만, 동쪽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북쪽은 카스피해와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투르크메니스탄 등과 접해 있다. 동서교통의 요충을 차지해 아케메네스왕조·사산조페르시아 등의 대제국이 일어났다.

이슬람시대로 들어와서도 세계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란문화권을 형성하였고 최근에는 산유국 가운데서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다. 79년 2월 이슬람혁명에 의하여 2500년이 넘는 왕제(王制)가 끝났다.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있으며, 초록·흰색·빨강 3색의 국기에 <신은 위대하다>라는 표어가 들어있다. 수도 테헤란.

[자연]

<지형>

북부에는 동서로 엘부르즈산맥이 뻗어 있고, 북서부에서 남동부로 자그로스산맥이 뻗어 있는데, 이 두 습곡산맥 사이에 해발고도 1000~2000m의 이란고원이 있다. 두 산맥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 속하는데 엘부르즈산맥은 신생대 플라이오세의 조산운동에 의하여, 자그로스산맥은 백악기(白堊紀) 후기, 조기(早期) 플라이오세의 조산운동 영향을 강하게 받아 후기 마이오세와 플라이오세 기간에 걸친 습곡에 의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큰 산들이 생겨났다.

국토의 대부분은 이란고원 위에 있으며 낮은 지역은 카스피해안·페르시아만 연안의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고원부는 건조하며 중앙부에는 옛날 호수의 밑바닥이었던 카비르사막과 마슈트에루트사막이 가로놓여 있고 그 두 사막의 가장자리부분에 많은 습곡산맥이 줄지어 뻗어 있다. 북서부에는 염분이 많은 우르미아호가 있으며 중앙부에는 나마크호 등 염호(鹽湖)가 많다.

계절적으로 물이 없어지는 간헐하천과 하류가 사막으로 변하는 강도 많다. 가장 큰 내륙하천은 에스파한지역을 관류(貫流)하는 자얀데루드강인데 이 강은 가브하니늪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동부에는 자그로스산맥에서 흘러 나오는 카룬강이 있으며 그 유역에 평야가 펼쳐져 있다.

[기후]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다. 고원부는 대륙성으로 건조하며 테헤란은 연강수량 약 208㎜, 7월 습도 약 25%이다. 비는 겨울에 주로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거의 내리지 않는다. 카스피해 연안지방은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는데, 카스피해를 지나오는 습기 띤 바람과 뒤쪽의 엘부르즈산맥의 영향으로 강수량도 많고 온난하다. 페르시아만 연안 저지는 강수량은 적으나 아라비아반도에서 불어오는 열풍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다. 북서부는 반건조지역에 속해 비교적 비가 많다.

[지지(地誌)]

자연조건의 차이에 따라 4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이란고원지방으로 톄헤란·시라즈·마슈하드·에스파한·케르만·예즈드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포함된다. 이 지역은 연강수량이 250㎜도 되지 않으며 습도가 낮고 건조하다. 그 때문에 가시나무 등 가뭄을 견디는 내한성(耐旱性) 식물을 제외하고는 식물이 살지 않는다.

건지농법(乾地農法)은 적용되지 않으며, 강·샘·우물과 카나트(지하 관개용 수로)에 의해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런 곳에는 오아시스취락이 생긴다. 사막에 점모양으로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도시도 물이 많이 있는 곳에 생겼다. 작물은 주로 맥류가 생산되고, 그 밖에 면화·사탕무 등의 상업작물도 재배된다.

둘째는 북서부지방으로, 고원지방보다는 자연의 혜택을 입고 있어 연강수량이 약 300∼500㎜이다. 건지농법이 가능한 데다 토지의 생산력도 좋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다. 곡류 외에 담배·과일·포도도 재배된다. 하마단·케르만샤·로레스탄지방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란의 농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이라크·터키·투르크메니스탄·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종종 이민족과 외국에 의하여 점령당했지만, 19세기 말에는 이란의 문화적·정치적 선진지역이었다.

셋째는 카스피해와 엘부르즈산맥 사이에 있는 평야지역으로 라슈트·엔젤리·고르간 등의 도시가 있다. 이곳은 이란에서 가장 연강수량이 많아서 동부의 고르간지방에서는 500㎜, 서부의 길란에서는 1000㎜ 넘게 비가 내린다. 풍부한 강수를 이용한 쌀농사가 이루어지는 한편 감귤류·차·면화 재배도 성행한다. 인구는 조밀하여 전국 평균의 약 4배에 이른다. 산은 온대활엽수림으로 뒤덮여 있어 숯을 만들기도 한다. 여름에는 피서객이 많이 모여 휴양지가 된다.

넷째는 자그로스산맥과 페르시아만 사이의 지방으로 반다르호메이니·아바만·반다르아바스 등의 도시가 포함된다. 이 지역의 자연은 이란에서 가장 혹심하다. 연강수량은 250㎜ 이하이고 습도는 연평균 60%를 넘는 혹서다습지역이다. 자연조건의 혜택이 없어 농업을 비롯한 경제활동이 대체로 저조하지만 서부의 후제스탄은 예외여서 예전에는 대농업지대로 번영했다.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황폐해졌으나 1950년 이후 개발계획이 실시되었고, 20세기에 들어 석유가 발견된 뒤 세계의 주요 산유지대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아바단에는 대규모의 정유소가 있다.

[역사]

<이슬람전(前)>

BC 1000년 무렵 아리아민족이 몇 세기 동안 이란고원에 침입하였고, 북서부이란에 정착한 메디아인은 BC 7세기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를 수도로 메디아왕국을 세웠다. BC 550년 파르스지방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왕조는 메디아를 쓰러뜨리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세계제국을 형성한 뒤 오랫동안 그리스와 전쟁을 했다. 그러나 BC 331년 알렉산드로스대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BC 323년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로는 셀레우코스왕조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250년 전후 북부이란에서 세력을 떨친 이란계 유목민인 파르티아왕조가 셀레우코스왕조를 물리쳤다. 파르티아는 500년간 이란을 다스리는 한편, 서쪽에서는 로마와 대치했으나 226년 사산조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되었다. 사산조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아케메네스왕조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란문화의 융성기를 이루었다.

<이슬람시대>

사산조페르시아는 642년 아랍군에게 멸망되었다. 옴미아드왕조·아바스왕조 밑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추진되었고 아라비아어가 공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부하라를 수도로 9세기에 번영한 사만왕조 아래에서 고대의 문예가 부흥하고 근세 페르시아문학이 생겨났다.

사만왕조를 대신해 동(東)이란을 지배한 가즈니왕조는 투르크계 왕조였지만 이 왕들도 이란문화의 보호자가 되어 궁정에 많은 학자와 문인을 불러들였다. 《왕서(王書)》를 쓴 피르다우시, 과학자 비루니는 이 시대 사람이다. 10세기 중반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한 투르크계의 셀주크족은 가즈니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의 지배자가 되었다.

투르크인의 서아시아 유입(流入)은 이때 시작되었다. 셀주크왕조의 여러 왕들도 페르시아문화를 보호해 가잘리·우마르하이얌 등 유명한 학자·문인이 배출되었다. 1258년에는 몽골인에 의해 일한국(汗國)이, 1370년에는 티무르왕조가 수립되어 이란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조 교체 때는 침략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새 왕조가 생겨난 뒤에는 국토의 부흥이 추진되어 이란 이슬람문화가 크게 일어났다.

1501년 이란민족국가 사파비왕조가 성립, 시아파이슬람교를 국교로 했는데 이 왕조는 샤 아바스 때 전성기를 맞았다. 수도 에스파한은 인구 70만의 대도시였다. 그러나 1722년에는 아프간족의 침입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아프샤르왕조의 나디르 샤의 지배를 거쳐 잔드왕조가 수립되었는데 이 왕조는 카림칸 밑에서 번영과 평화로운 시대를 맞았다.

18세기 말 투르크계 카자르가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두 번이나 영토를 잃었을 뿐 아니라, 1828년의 조약에서는 치외법권까지도 인정해야만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원료 공급지와 공업제품의 시장이 되어 이란 경제는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또 영국·러시아에 대한 이권 공여가 이어져 이것이 반왕제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1906년에 격렬한 입헌운동으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08년 입헌제를 탄압하려 한 정부군과 입헌파가 심하게 대립한 결과 입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제1차세계대전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서부이란은 전쟁터가 되었다. 1921년 2월 코사크여단의 장군 리자 한이 수도 테헤란을 무혈점령한 뒤 25년에는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리자 샤 팔레비라 칭하면서 팔레비왕조를 세웠다.

<팔레비왕조>

리자 샤 팔레비는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갖추고 군사·사법·교육제도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그 밖에 이란 종단철도의 완성, 차도르(여성 겉옷) 폐지 등도 실행했다. 강권에 의하여 서구화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고대이란의 전통 부활을 도모하였으며 양탄자짜기 등 전통공예를 보호하였고, 이슬람력(曆) 대신에 전통적 역법을 공용력으로 채택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1941년 영국·소련 군대가 이란으로 침입하여 리자 샤는 퇴위한 뒤 모리셔스로 망명했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이란은 연합군 측에 협력해 병참공급로가 되었다. 1951년에는 총리 M.모사데크를 지도자로 하는 석유국유화운동이 일어나 석유사업에서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과의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1953년에는 자헤디장군에 의한 모사데크 타도 쿠데타가 성공했다.

그 뒤 1954년에는 미국의 석유회사를 포함한 국제석유재단이 석유사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모사데크가 실각한 뒤 귀국한 팔레비왕조 2대 국왕 모하마드 리자 샤(팔레비국왕)는 1962년부터 농지개혁, 여성참정권 부여 등 6항목으로 이루어진 내정개혁(백색혁명)을 실시해 경제도 순조롭게 발전했다. 경제성장률은 1950년대에 4.5%였으나 1960년대에는 9∼10%, 1971년에는 14.3%, 1974년에는 51%로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1967년에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했고, 1971년에는 건국 2500년 축제를 거행하여 국위를 과시하였다.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성립>

1978년 1월 이라크에 망명중인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에 대해 정부가 비판하자 시아파의 성지(聖地)인 쿰에서 항의시위가 발생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처에서 시위가 계속 일어나 정치적으로 긴박한 상황이 되었다. 9월 이후 시위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서 12월 10일 아슈라의 애도제 때는 15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반(反)팔레비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팔레비는 1979년 1월 16일 망명하였다. 2월 1일 망명해 있던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귀국했다. 2월 5일에는 M.바자르간이 호메이니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어 팔레비가 임명한 바흐티야르정권과 2중정권의 상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2월 11일, 반팔레비세력이 니야바란궁전을 공격했을 때 군대는 바흐티야르정권의 방위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리하여 바흐티야르내각은 자연히 소멸되었고 왕제는 허물어졌다.

3월 30일에 국민투표가 시행되고 4월 1일에는 호메이니에 의해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어 최고지도자에 호메이니가 취임했다. 망명중인 전 국왕이 미국으로 입국한 것을 계기로 11월 4일 호메이니 지지 학생들에 의한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이 일어났다. 점거는 1981년 1월 20일까지 444일이나 계속되었다.

1980년 2월 4일 바니사드르가 초대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종교계 주도인 이슬람공화당(IRP)과의 사이에서 대립과 항쟁이 일어나 1981년 6월 해임되었다. IRP는 사법권·입법권뿐 아니라 행정권도 장악했다. IRP와 반IRP세력 상호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어 IRP본부와 총리부의 폭파 등 테러활동이 계속되었으며 많은 요인(要人)이 죽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반체제파에 대한 대량체포와 처형으로 대응했다. 국제사면위원회(AI)의 발표(1981년 11월)에 따르면 혁명 뒤 335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 이란혁명

[정치]

새 헌법은 1979년 12월 2일의 국민투표로 채택되었다. 이 헌법에서 나라의 최고지도권은 국민의 신망을 받는 종교법학자에게 부여되며, 모든 자유는 <이슬람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만 인정된다. 이슬람법의 원칙에 위반되는 법률은 제정할 수 없다.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성직자로 구성된 헌법옹호평의회가 설치되어 있다. 헌법에는 의회 해산 조항은 없으나 삼권분립이 규정되어 있으며 입법권은 일원제인 국민의회에 의해 행사되는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투표에 의한 입법권 행사도 인정하고 있다.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정원은 270명이다. 행정부의 장(長)인 대통령은 최고지도자 다음가는 지위에 있으며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는데, 임기는 4년이다. 또한 이란혁명과 시아파에 충실할 것이 자격으로 되어 있다. 내각의 수반은 총리이며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국무장관은 총리가 제안하고 대통령이 승인함으로써 임명되는데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사법권은 최고법원장관·검찰총장 및 3명의 이슬람재판관으로 이루어지는 최고사법평의회에 주어져 있다. 최고법원장관과 검찰총장은 반드시 이슬람법학자여야 하며 법관은 이슬람법에 바탕을 두고 판결을 내린다.

1978년에는 팔레비왕조 아래에서 비합법으로 되어 있던 반왕제(反王制)인 국민전선(國民戰線)이 부활해 혁명의 실현에 공헌함으로써 바자르간이 총리에, 산자비가 외무장관이 되는 등 혁명 뒤 한때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페다인할크·무자헤딘할크 등의 좌익정치집단도 혁명에 참가했으나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는 이슬람공화당과의 항쟁에 패배함으로써 지하활동으로 변모했고, 이슬람공화당 간부 암살 등 테러활동을 하였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이란은 최대의 정치전환기를 맞이했다. 후임의 최고 지도자는 하메네이가 취임하였으며 1993년 6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라프산자니가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외교]

팔레비왕조 아래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 1955년 이후에는 바그다드조약기구(뒤의 중앙조약기구;79년 해체)의 구성원으로 중동에서의 반공(反共)의 중추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1979년 11월에 발생한 이슬람계 학생에 의한 미국대사관 점거사건을 계기로 양국은 공공연한 적대관계가 되었다. 혁명지도자는 반공사상을 내세워 천연가스 수출을 중지하는 등 소련과도 비우호적이었다.

외교의 기본은 배외주의적(排外主義的) 비동맹 중립노선을 취했으며, 1979년 11월에는 리비아와 외교를 다시 시작했다. 한편 이라크와의 국경분쟁이 재연되어 1980년 9월에는 이란―이라크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뒤 이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다가 1990년 10월 양국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정식 합의함으로써 끝났다.

[방위]

팔레비왕조의 리자 샤가 근대적 군대를 창설함으로써 옛 왕제군(王制軍)은 총병력 43만 명을 거느려 <페르시아만의 헌병> 역할을 충실히 했다. 총병력은 52만 8000명이며 징병제로 약 2년간 복무한다(1990). 또한 정규군과는 별도로 민병부대를 일원화한 약 35만 명의 혁명수비대도 있으며, 왕제 때의 비밀경찰 사바크(SAVAK) 대신 사바마(SAVAMA)가 조직되어 있다.

[경제·산업]

1925년에 팔레비왕조를 세운 리자샤가 근대산업을 일으켜 시멘트공장과 섬유공장 등이 만들어졌으며 제철소 건설도 계획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뒤에는 1949∼78년까지 5차에 걸쳐 개발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이 개발계획에서는 주로 석유이윤과 미국의 경제원조를 재원으로 경제 각 분야의 근대화가 실시되었다. 특히 1963년부터는 <백색혁명>의 실시와 병행하여 석유이윤도 크게 늘어나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란혁명으로 인한 혼란과 이란―이라크전쟁 등으로 인하여 경제활동은 정체되었다.

<자원·광공업>

최대의 광물자원은 석유이다. 1901년 영국인 W.K.다르시가 남부이란의 석유개발 이권을 취득, 1908년 마스제드솔레이만에서 시굴(試掘)에 성공했다. 1909년에 이권이 앵글로페르시아(뒤에 앵글로이라니안이라 개칭)석유회사에 양도된 뒤 석유의 개발·정제·판매를 담당했다. 1914년 영국정부는 해군의 연료공급을 위하여 이 회사 주식의 50%를 취득했다. 아바단에는 1일 생산량 50만 배럴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정유소가 있다.

1949년 이권료개정(利權料改定)을 둘러싸고 석유국유화운동이 일어나 1951년 3월에 국유화법이 제정됨으로써 모사데크정권 아래에서 이 회사의 시설 인수 등이 단행되었다. 영국과의 사이에 분쟁이 이어졌으나, 1953년 모사데크정권이 붕괴된 뒤 1954년에 국제협정이 이루어져 국유화가 인정되었다. 그 뒤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8대 석유회사로 이루어진 국제석유재단(컨소시엄)에 의하여 석유사업이 실행되게 되었다.

그러나 1973년 이란은 석유에 대한 주권을 확립, 이란국영석유회사(NIOC)의 지시에 의하여 옛 재단 가맹회사가 개발·생산·수송 등을 하고 내수용 이외의 원유는 이들 회사에 수출용으로 할당했다. 혁명 뒤에는 옛 재단에 대한 판매계약은 파기되었으며 모두 NIOC가 판매하게 되었다. 석유의 확인매장량은 1980년 1월 현재 580억 배럴(약80억 t)로, 이것은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9%에 해당한다.

1990년 3월 당시 1일 석유생산량은 330만 배럴이었으며 1992년에는 450만 배럴로 생산을 늘렸다. 석유 이외의 광물자원으로는 석탄·철·구리·납·암염·니켈·터키석 등이 있다. 1962년 이후 공업화가 추진되어, 1971년에 제철소가 완성된 것 외에도 외국자본에 의해 자동차·타이어·전자제품·비료 등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있다.

1973년에는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공업부문의 비율이 23%까지 올라갔고 19%의 실질경제성장률을 나타냈다. 같은 해에는 중동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석유화학콤비나트사업이 외국과의 합작으로 시작되었으나 이란혁명과 이란―이라크전쟁으로 인하여 공사가 크게 지연되었다.

<농림·수산업>

1980년 농업용지는 5995만ha로, 이는 국토 총면적의 36.4%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경작지는 1533만ha이고 나머지는 수원지(樹園地)·목초지·목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쌀 등이며 그 밖에 사탕무·면화·차·야채류, 각종 과일이 재배된다. 카나트(지하 관개용 수로)와 우물·샘·댐·강 등에 의해 관개되고 있는데 지표수는 여름에는 수량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대부분의 고원지방에서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만 농사가 이루어지며 경작지의 규모는 용수의 양에 좌우된다.

1962년 이후 농지개혁이 실시되어, 오랫동안 실시되었던 대토지소유제는 없어졌다. 축산은 주로 유목민들이 하고 있다. 어업은 성행하지는 않지만 카스피해의 용철갑상어알(캐비아)은 유명해서 연간 약 200t씩 생산된다.

<무역>

최대의 수출품은 석유이다. 그 이외에는 융단·면화·건조과일·피혁류가 주된 수출품이고,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섬유제품·자동차·화학제품 등 공업제품 수출도 늘어나고 있다. 석유 이외 제품의 가장 큰 수출 대상국은 구소련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독일·일본의 순서이다. 수입은 공업제품이 가장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일반기계의 수입이 늘고 있다. 이어서 강철 등 원재료와 반제품·식료품이 그 뒤를 따른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독일·일본·미국이다.

<교통>

1938년에 페르시아만의 반다르호메이니와 카스피해의 반다르토르케만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된 뒤 테헤란-졸파, 테헤란-마슈하드, 콤-케르만선이 완성되었다. 도로망 정비도 진척되어 간선도로가 포장되었으며 고속도로도 몇 군데 건설되었다. 가장 중요한 항만은 페르시아만의 호람샤르이고 그 밖에 반다르호메이니·부시르·반다르아바스가 있다. 테헤란과 아바단은 국제항공의 요지이다. 1966∼76년 사이에 통신망도 정비되었다.

[사회]

<주민>

주민의 대다수는 아리아계의 이란인이며 그 밖에 7세기 이후 이란에 정착한 아랍인, 11세기 말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은 투르크인,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유대인·아시리아인이 살고 있다. 아랍인은 주로 이라크와 인접한 지역인 후제스탄지방, 투르크인은 투르크메니스탄과 접하는 고르간지방 및 터키와 인접하는 아제르바이잔지방에 많다. 이란계·투르크계·아랍계로 부속조직을 가지고 있는 주민도 있다.

이란계의 부족으로는 쿠르드·루르·바흐티야리·발루치의 여러 부족이 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이란·터키·이라크의 3개국에 걸치며, 이란에서는 북서부인 코르데스탄·서(西)아제르바이잔·케르만샤한주에서 사는데 인구는 약 350만 명으로 짐작된다. 그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 유목을 그만두고 정착했다. 루르족은 이란 서부의 로레스탄에서 살며, 바흐티야리족은 파르스·에스파한·후제스탄의 자그로스산지에서 산다.

루르와 바흐티야리를 합친 인구는 약 250만 명이다. 발루치족은 남동부의 발루치스탄에서 산다. 파키스탄령에도 많은 발루치족이 사는데 이란 쪽의 인구는 약 60만 명이다. 투르크계의 부족으로는 북동부의 고르간과 호라산에서 사는 투르크멘족이 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옛 소련에도 있는데, 총인구가 약 100만 명은 될 것으로 짐작되며 이란령에 속한 인구는 약 10만 명이다. 그 밖에 카슈카이·아프샤르·샤사반 등의 부족이 있다.

<언어>

국어는 인도유럽어족의 페르시아어이며 문자로는 셈어계의 아라비아문자를 쓰고 있다. 이 밖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쿠르드어·발루치어가 사용되며, 투르크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투르크멘어·알제리어 등 투르크어의 방언이 쓰이고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아라비아어가 쓰이고 있다.

<교육>

팔레비왕조 성립 전까지는 교육은 주로 이슬람교 성직자의 손에 의하여 마크타브(초등학교)·마도레세라고 일컬어지는 종교학교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리자 샤 시대에 세속화가 추진되어, 1943년에는 의무교육법이 시행되었다. 지금은 5·3·3·4제의 학제가 실시되고 있다. 식자율(識字率)은 1956년에 15%에 불과했던 것이 66년에는 38%, 1986년에는 61.8%가 되었다.

1935년에 테헤란대학이 이란에서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된 뒤 꾸준히 발전하여 대학은 20개를 헤아린다. 유학생도 많아서 미국과 영국 등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공용력(公用曆;이란력)은 춘분인 날을 새해 첫날로 정하고, 예언자 마호메트가 박해를 피하여 메카에서 메디나로 성천(聖遷;헤지라)한 해, 즉 서기 622년을 기원으로 하는 태양력이다. 학기(學期)는 이란력 6월 1일에서 시작되나 회계연도 등은 모두 춘분일로부터 시작된다.

서기 622년을 기원으로 삼는 태음력인 이슬람력은 종교행사에서만 쓰여왔으나, 혁명 뒤 이것도 공용력이 되었다. 이 역은 1년이 354일이며 월(月)과 계절이 일정하지 않다. 휴일은 이슬람교의 휴일인 금요일이다.

<종교>

이란 전인구의 98%는 이슬람교도로 대부분은 시아파를 신봉하며, 투르크멘족·발루치족·쿠르드족 등이 수니파를 신봉하고 있을 뿐이다. 종교적 소수파로는 유대교도와 아르메니아인·아시리아인 등의 그리스도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바하이교도가 있다. 바하이교는 이슬람에서 갈라져 나온 뒤 19세기 중반 무렵에 일어난 바브교에서 발전한 종교인데 이란이슬람공화국하에서는 비합법화되어 있다.

[문화]

이란인은 위대한 역사적 영광과 빛나는 문화적 유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특히 그들은 시를 좋아하며, 10세기에 나타난 피르다우시의 《왕서》를 비롯하여 15세기 말까지 나온 우마르 하이얌·G.니자미·사디·하피즈 등의 시에 강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시는 지식층 뿐 아니라 국민의 모든 계층이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산문은 시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이란에서는 아랍에 정복된 뒤 그림이 발달하지 못했는데, 13세기 이후 역사서적이나 시서(詩書)의 삽화로서 세밀화를 그려 넣게 되었고, 15∼16세기에는 거장 베헤자드 등 훌륭한 화가가 많이 나왔다. 페르시아의 도자기는 오랜 전통을 지녔는데 셀주크 시대에 특히 융성했다. 페르시아융단은 16세기에 사파비왕조의 보호를 받아 고급스런 물건을 짜내게 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세기에는 유럽에서 페르시아융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 융단은 오늘날에도 손으로 짜고 있는데 값이 비싸기 때문에 이란인들의 재산 축적의 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란인 시아파교도는 시아파 이맘의 순교일(아슈라)에 순교를 기리고,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는 등 종교적으로 열광한다.

한편 고대 이란에서 시작된 전통적 행사인 신년 축일(춘분날;3월 1일에 해당)은 모든 국민에게 가장 큰 축일이다. 이란인은 손님을 반가워하고 예의바르며 의식(儀式)을 좋아한다. 또한 자존심과 자기주장이 강하다. 좋지 않은 자연조건 때문에 물과 푸르름에 대한 동경이 특히 강하여 물과 나무의 새싹을 소중히 한다. 신문 및 월간·주간잡지는 여러 가지 있으나, 헌법상 언론의 자유보장조항에도 불구하고 반이슬람적인 내용 등에는 검열이 상존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한반도 문제에서는 등거리외교를 원칙으로 삼아왔다. 한국과는 1962년 수교합의 뒤 1967년 4월 한국의 상주대사관이 테헤란에 설치되었고, 1975년 8월 이란의 상주대사관이 서울에 설치되었다. 양국간에는 우호조약(1969)·문화협정(1974)·경제기술협력협정(1975)·무역협정(1976)·수산협력협정(1977, 1979)·어업협정(1980) 등을 체결한 바 있다.

통상면에서는 1992년 대한수입 4억 9268만 달러, 수출 1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란은 한국의 중동지역 건설 진출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 나라로, 건설수주는 1987년 3월까지 48건에 15억 달러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41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이란외무부의 국제연구소와 테헤란대학·팔레비대학 등에서는 한국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윤길진>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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