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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7 (토) 16:30
분 류 사전1
ㆍ조회: 1898      
[국가] 이집트 (두산)
이집트 Egypt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

I. 개관

위치 :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면적 : 99만 7690㎢
인구 : 6818만 5000명(2003)
인구밀도 : 68.3명/㎢(2003)
수도 : 카이로(Cairo)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아랍어
통화 : 이집트 파운드(£E)
환율 : 6.14£E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 1,530$(2003)

면적은 99만 7690㎢, 6818만 5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68.3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이집트 아랍 공화국(Jumhūrīyat Misr al-'Arabīyah)이다. 국토의 일부인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과 접경하여 중동지방에 걸쳐 있다. 동쪽은 이스라엘과 홍해(紅海),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 남쪽은 수단과 접경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동경 25°, 북위 22°의 경위선상에 해당되며 서쪽과 남쪽은 사막을 가로질러 인위적 국경으로 되어 있다. 모두 직선형의 위선을 따른 국경이나 수단과의 동쪽 일부 국경지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II. 자연

1. 지형

이집트의 지형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단순하다. 나일강 하곡(河谷)과 그 유역의 삼각주평야, 수에즈 운하 연안, 이곳을 제외한 넓은 사막지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나일강 하곡과 삼각주평야를 형성하는 나일강은 상류의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靑)나일과 아프리카 중동부 빅토리아호(湖)에서 발원한 백(白)나일에 합류하여 6,671km를 흘러 지중해로 유입하는 대하천이다. 아스완 이하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는 외래하천(外來河川)으로 그 지류의 대부분이 이집트 국내에 있다. 이 하천의 상류부는 여러 군데의 급경사를 이루면서 흐른다.

아스완에서 카이로까지는 양측에 사막으로 된 절벽을 끼고 너비 3~25km의 좁은 지역의 충적지 가운데를 띠[帶] 모양의 하천이 흘러간다. 카이로에서 그 하류 일대에 걸쳐 약 2만 4000㎢의 면적을 가진 대삼각주평야가 전개된다. 이 삼각주평야는 이 하천이 운반·퇴적한 물질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며, 퇴적층이 매우 두꺼운데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시추결과는 163m에도 기저(基底)의 암반에 달하지 못했다. 이 삼각주평야와 나일강 하곡평야는 곡창지대를 이루는 인구조밀지역이다.

하천 유수량의 조절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하천 유수량의 연변화(年變化)가 하안의 충적지에서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그 위협은 사라졌다. 아스완 남쪽으로 인공호인 나세르호가 생겨 이 인공호의 물을 이용하여 사막지방의 관개를 통한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나일강은 농경을 하는 농부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생명선이 되는 젖줄이다. 나일강 동쪽에 마자 고원과 갈랠라·키블리아 산지 등이 발달해 있다.

이 곳은 결정질(結晶質)의 암석과 석회암으로 된 단조로운 고원과 대지가 남쪽의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연이어 발달해 있다. 이 고원의 남부에 하마타 산지(1,977m)가 남서쪽을 향해서 점차로 높아져 해발고도 1,900m 정도에 이른다. 홍해안 쪽은 바다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해안을 따라서 가느다란 해안평야가 발달해 있다. 홍해의 수에즈만(灣)과 아카바만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시나이 반도가 있다. 이 반도는 남으로 갈수록 높아져서 카트리나산(2,637m)에 이르러 최고점이 된다.

사막과 암산으로 된 불모의 지역이기는 하나 석유자원의 매장으로 이집트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시나이 반도와 본토 사이의 수에즈 지협의 저지대에는 한무리의 호소들이 발달해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이 호소들을 연결해서 굴착하여 만든 것이다. 나일강의 서쪽은 인간이 살기에는 어려운 사막이다. 파이윰 저지·카타라 저지 등에 분포한 오아시스들을 제외하면 거의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하다.

이들 저지에서는 석회암의 틈을 따라서 곳곳에 지하수가 용출하여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물 이외에도 샘을 파서 오아시스 관개농업에 이용한다. 집약적인 농경지가 발달하여 인구밀도가 높다. 바하리야·파라피라·다흘라·하르가·시와 등 5개의 오아시스가 유명하며 1600년경부터 이집트인에 의해 농경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2. 기후

이집트의 기후는 대부분의 지역이 건조기후에 속한다. 북회귀선이 이 나라의 남부를 지나고, 북부의 지중해연안은 대체로 북위 31°3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일강 계곡과 지중해 연안의 좁은 해안지방을 제외하면 전국이 사막기후가 된다. 내륙으로 갈수록 건조가 심해지고 기온이 높아진다. 서부나 남부지방에서는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은 지역도 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겨울에 약간의 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기온도 1년을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누고 있다. 4~10월은 고온이며 공기가 건조한 하계(夏季)이고, 11~3월의 동계(冬季)에는 낮에는 덥고 야간에는 서늘하다.

또한 환절기에는 남쪽에서 저기압이 진행되어 모래를 동반한 열풍이 내습해온다. 이것이 유명한 캄신이라는 바람이며 때로는 40℃ 이상의 고온을 몰고오는 남서의 열풍이다. 동계에는 지중해 방면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비를 다소 내리며 그 영향은 대체로 나일강 삼각주와 해안의 좁은 범위에 미치는 데 불과하다. 연강수량 100mm 이상이 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거의 비가 없는 지대로서 나일강의 혜택으로 관개 용수의 편의를 얻을 수 없는 곳은 곧 불모의 사막인 것이다. 기온의 교차가 매우 심하고 여름에는 사막에서 낮에 50℃ 이상의 극단적인 고온현상이 나타난다.

III. 주민

이집트 주민은 대부분 코카서스 인종인 함족에 속한다. 총인구의 대부분은 고대(古代)이집트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콥트인 및 누비아인으로 약 60%가 펠라라고 불리는 농민으로 구성된 농촌인구이다. 그 밖에는 수도 카이로를 포함한 도시지구의 거주민으로 아라비아 반도 및 팔레스타인의 아랍혈통을 받은 자와 투르크·아르메니아의 피를 이어받은 자 등이 이주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함어계의 언어가 사용되어 문서 등에 상형문자 및 그의 초서체(草書體)가 사용되었으나 고대 이집트의 멸망과 더불어 그 언어는 콥트어로서 국지적으로 존속해 왔다. 9세기경에 아라비아가 정복한 이래 이집트 전국에 아랍어가 급속히 전파되어 마침내 국어가 되었다. 1964년 헌법에서도 이슬람교가 국교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슬람을 문호의 기반으로서 더욱 강조한다. 국민의 93.7%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하고 나머지 6.3%는 콥트파(東方敎會系諸派의 하나)의 그리스도교도이다. 그 외 유대교도 등이 약간 있다.

IV. 역사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의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나일 삼각주의 하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이집트로 나누어졌다. 상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상이집트의 나르메르(혹은 메네스)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나르메르의 통일은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통일 후, 이집트는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를 제1왕조, 제2왕조라 하는데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 인들의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기원전 약 2800년경의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그의 후계자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피라미드를 기자에 세우게 된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파라오와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제5왕조 군주들이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마네토의 제11왕조(기원전2133~1991년)와 제12왕조(기원전 1991~1785년)에 해당되는 중왕국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 하이집트의 재통일도 시작된다.

통일은 모든 계층이 이집트 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상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네메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파라오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 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곡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를 제2중간기라 부른다. 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후 투트모스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 중 가장 논쟁이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가의 계곡'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등으로 확인된다. 제19왕조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간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었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0왕조의 오랜 평화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가 이어진다. 제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이집트 전역과 중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에티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663~332년의 후기왕조 시대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아시리아인들을 무찌른 하이집트 델타 지역 사이스의 왕자 프삼티크 1세의 제26왕조로부터 시작된다. 2대 군주 네코의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증강되었으며,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특히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 교역이 발달하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상인으로서, 왕가의 용병으로서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27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의 군주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으나 이집트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외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조각과 문학이 흥성했다.

페르시아 군주들의 암살, 사망,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전 등을 계기로 델타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페르시아 봉기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제28왕조를 연 사이스 출신 아미르타에우스에 의해 반 페르시아 투쟁은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제29왕조시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세력 균형에 힘입어 이집트가 다시 국제 무대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30왕조에서는 줄곧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제20왕조의 마지막 군주 넥타네보가 페르시아군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누비아로 도망함으로써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페르시아 군주들의 제31왕조가 들어섰다.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롤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여,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야심파이고 보기 드물 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 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계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문학이 이집트에서 발달했다.

V. 정치

1922년 이집트는 왕국으로 독립하여 후아드가 국왕이 되고 헌법을 제정하여 와후드당(黨) 내각이 성립하였으나 영국은 수에즈운하 주류권(駐留權) 등 많은 특권을 보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이 격화하여 1946년에 영국군 철수의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세부검토의 단계에서 팔레스타인전쟁이 일어나 국내의 반영국운동이 더욱 격화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52년 7월 나세르 혁명이 일어나 장군 나기브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공화제는 1952년의 토지개혁, 1956년의 공화국 헌법공포와 J.A.나세르의 대통령취임 등 순조롭게 발전하였으나 1956년의 수에즈전쟁을 계기로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강화하여 수에즈운하 접수, 미스르은행 국유화 등의 정책과 국민을 총동원하는 ‘국민연합’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적극적 중립주의가 강조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58년 2월 시리아와 합방하여 아랍 연합공화국을 결성하여 전 아랍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나 시리아에게 적용한 급격한 혁신정책이 실패하여 1961년에는 시리아가 이탈했다.

시리아 분리 후, 제2차 농지개혁·국민헌장채택·‘아랍 사회주의연합’ 결성 등 대폭적인 사회주의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내정세의 동요와 함께 국제정세도 악화되어 1967년 6월에 이스라엘과의 사이에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아랍측의 대패(大敗)로 끝나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가 점령되고 수에즈운하는 폐쇄되었다. 대통령 나세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일시 사퇴하였으나 국민의 요청에 의하여 전후처리에 임했다. 이스라엘과의 화평교섭·국내정치·경제정세의 부흥 등은 어려운 상황이었고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요르단 정부군의 내전을 종결시키는 카이로협정을 성립시킨 직후, 나세르는 병으로 급사했다.

이집트는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1977년 6월의 법률제정에 의하여 모든 정당들은 아랍 사회주의동맹의 인가를 받은 정당만이 합헌정당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추인되었다. 이 법률제정 이후 인민의회 의원의 정당별 변화가 생기게 되어 국민진보동맹은 정당활동을 정지당하게 되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M.A.사다트는 우선 나세르 노선의 계승을 주장하고 집단지도 체제를 추진하였다. 사다트는 영구헌법의 제정, 아스완 하이댐의 경제건설에의 이용, 소득배증계획 등을 실시하고 1971년 9월에 아랍 공화국 연방의 결성에 의한 국명(國名)을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사다트는 미국의 중동평화 노력에 주목하여 소련과의 유대관계를 끊는 동시에 미국과의 복교(復交)를 실현하여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고 나세르주의로부터 탈피하였다.

1977년 11월 이후부터 중동문제의 독자적 해결을 위한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1978년 9월의 캠프데이비드협정, 1979년 3월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체결 후 시나이반도를 돌려받았다. 1981년 10월에 사다트는 카이로 근교에서 총격으로 피살되었다. 같은 달 14일에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7, 1993년의 당선에 이어 1999년 9월 26일 다시 4선에 성공하였다.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니며 454명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단일후보를 선출한 뒤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당락을 결정하는데, 대통령 무바라크는 1999년 7월 국민민주당의 추천을 받아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야당은 이러한 선거방식을 반대하고 있다.

VI. 경제

이집트의 주요산업인 농업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으며, 경제작물로는 목화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이집트의 농업발전에 저해요인이 되어 왔던 토지제도는 1952년 나세르 혁명정권 수립 이후 농지개혁의 단행으로 개선되었고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농업생산구조가 변화하여 경지면적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또 농산물가공도 공업화 계획의 일환으로 발전하여 사탕수수의 제당 및 식료품가공업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이집트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석유자원은 시나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유전지대에서 생산된다. 대부분은 국영 정유공장에서 정제되는데, 수에즈항을 중심으로 정유공업이 발달하였다. 이 석유자원을 원료로 한 석유화학공업의 건설과 새로운 유전개발을 위한 방법이 강구되고 있다. 천연가스 외에 광물로는 아스완 부근의 철광석, 에시바이야 등의 인광석(燐鑛石), 시나이 반도의 망간광(鑛)과 알렉산드리아의 소금 등이 있다. 중공업 제품으로 자동차·트레일러와 농업용 트랙터·디젤엔진 등이 생산되며 전통적인 섬유공업·방직공업이 발달해 있다. 교통은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이 가장 발달해 있다.

나일강은 수단에 이르는 내륙수로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농산물과 광산물의 수송을 주로 한다.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크며 1967년 중동전쟁으로 폐쇄되어 큰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항공교통은 국영 이집트항공이 있고, 카이로 공항은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지니며 아프리카∼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항공의 요충지이다. 이집트항공사(社)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대의 항공사의 하나이다. 중요 항구로는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를 낀 포트사이드와 수에즈항 등이 있다.

주요수출품은 석유와 석유제품, 원면, 면사와 면제품이며, 주요 수출대상국은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미국, 네덜란드 등이다.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수송장비, 화학제품, 윤활유, 연료와 광물이며, 주요 수입대상국은 미국, 독일이다. 이집트의 수출은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유, 원면 등 1차산품이 주종을 이루어 1차산품의 국제시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반면, 수입은 식량 및 중간재, 자본재 등으로 대외 의존비율이 높다.

1998년 동아시아의 외환 위기, 유류가 하락 등으로 수출이 큰 비율로 감소하였으나, 1999년 이후 유류가 상승 등에 힘입어 2000년에는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2000년 GDP 성장률은 6.5%이고 수출은 64억 달러, 수입은 178억 7000만 달러로 무역수지 적자폭이 매우 크다.

VII. 사회

이집트는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과밀한 나라 중 하나이다. 농촌의 잠재실업자와 도시의 실업자는 상당한 수에 이른다. 각지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고, 하루 5회의 예배와 단식월(斷食月:라마단)의 준수 등 주민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이집트인들의 생활양식과 풍습에 이슬람 문화의 종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남녀격리의 습관·남존여비의 경향 등이 있으며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으나 국민생활의 근대화와 더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에는 고대의 가족제도가 있고, 메카 순례자를 존경하는 등 아직도 이슬람의 계율이 충실히 지켜진다.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아즈하르대학과 같은 10세기 이래의 이슬람학술의 본거지와 가장 새로운 교육·문화시설도 있다. 6∼12세까지는 의무교육이고 학비는 국가가 부담하지만 문맹률은 40%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은 아즈하르대학 외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아일샴 대학 등이 있고, 카이로에 미국계의 아메리칸대학이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보존·관리하는 박물관과 연구기관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VIII. 문화

이집트는 카이로 부근 룩소르 및 아스완 부근의 유적보호와 관광자원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적 중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이다.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最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조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또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며 태양신 신앙과 관계 있다.

문화의 꽃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들 수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고대문화의 발달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고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의 발달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앞서며 문학·미술·무용·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현대작품이 공존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IX. 대한관계

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항공협정, 1989년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투자보장협정, 1998년 무역협정, 1998년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과학기술양해각서, 외교연구원간 협력의정서에 서명하고 원자력협력의정서에 가서명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 5억 1590만 달러, 대한수출 2억 597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납사, 동 및 합금, 원유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및 부품, 일반기계, 직물 등이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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