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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08 (수) 12:59
분 류 사전2
ㆍ조회: 920      
[국가] 터키 (두산)
터키 Turkey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는 나라.

I. 개관

위치 : 아시아 대륙 서쪽
면적 : 77만 4815㎢
인구 : 7059만 7000명(2003)
인구밀도 : 91.1명/㎢(2003)
수도 : 앙카라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터키어
통화 : 터키 리라(TL)
환율 : 138만 4000TL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 2,530$(2003)
나라꽃 : 야생 튤립

면적은 77만 4815㎢, 인구는 7059만 7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91.1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공용어로 터키어를 사용하고 있다. 동쪽으로 이란·아르메니아·그루지야,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 북서쪽으로 불가리아·그리스에 접하고, 북쪽으로 흑해, 남쪽으로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海)에 면한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 전부, 보스포루스해협·다르다넬스해협·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의 발칸 반도, 동(東)트라키아 지방에 걸쳐 있다.

II. 자연

터키의 아나톨리아는 중부의 고원과 주변지대의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해발고도 1,130m), 이것을 해안평야가 둘러싸고 있다. 중앙고원은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져 최고봉인 아라라트산(5,185m)에 이른다. 아라라트산에서 흑해를 따라 폰투스산맥, 지중해를 향해서 남서쪽으로 토로스산맥과 안티토로스산맥이 달리며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서(西)아나톨리아산맥이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다. 안티토로스산맥 남쪽의 평야는 시리아·이라크로 이어져 있으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관류한다. 이스켄데룬만(灣)에 면한 아다나평야는 세이한·제이한 양 하천이 안티토로스산맥으로부터 운반해 온 토양을 퇴적하여 매우 비옥하다.

해안평야는 에게해 및 마르마라해 연안 이외에는 협소하다. 흑해 연안은 한서의 차가 적어 차나무·레몬·오렌지 등이 잘된다. 키질이르마크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유역의 바프라평야는 특히 비옥하며 시노프 동쪽 흑해 연안지대는 잎담배 산지로 유명하다. 흑해 연안의 서쪽은 겨울에, 동쪽은 가을에 비가 많다. 동부의 리제는 터키 전지역 중에서 가장 강수량이 많아 연평균 1,788mm에 달한다. 아나톨리아의 서부·남부 평야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는 온난다우하고 여름은 고온건조하다. 연평균강수량은 평지에서 635mm, 산지에서 762mm로, 특히 안탈리아와 아다나 주변에서 벼농사가 성하다.

마르마라해 연안은 지중해성·흑해성 기후의 양쪽 특성을 가지며 가을과 겨울에 비가 많고 봄에도 호우가 내리는 일이 적지 않다. 내륙의 고원지대는 한서의 차가 심하여 겨울에는 -15℃, 여름에는 37℃를 넘는다. 강우량은 봄·가을에 많으며 연평균 203∼304mm이지만 투즈호(湖) 주변은 극히 적다. 동부고지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긴데, 카르스·에르주룸 지방에서는 -40℃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터키는 지진대에 속하며, 흑해·마르마라해·에게해 연안은 제1급 지진대에, 이스탄불 지방은 제2급 지진대에 속한다. 최근 이들 지역에 여러 차례 강진이 발생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99년 8월 수차례의 강진 발생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최고봉 아라라트산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이 산 정상에 도착하였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III. 주민

터키 주민의 대부분은 터키인이며, 소수민족으로서 쿠르드인(人)이 아나톨리아의 동부·남동 지역에,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주로 이스탄불에 거주한다. 주민의 약 90%는 13세기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西進)해 와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터키족이 타민족과 혼혈하여 형성된 터키인이다. 공용어는 터키어이며, 그밖에 쿠르드어·아랍어·그리스어 등도 사용되고 대도시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소통된다. 1928년 라틴 문자가 채용되기 전까지 터키어는 아랍 문자를 사용하였다. 터키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알타이어계(語系)에 속한다. 종교는 수니파(派) 이슬람교도가 99%를 차지하며, 그밖에 그리스도교도·유대교도가 소수 있다.

IV. 역사

아나톨리아는 옛날에는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11세기 이후 셀주크투르크의 등장으로 차차 터키 이슬람화하였다. 13세기 말 성립된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은 16세기에 아시아·유럽·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편으로 참전하였다. 패전을 틈타 그리스군이 본토에 침입해오자 1919년 케말 파샤(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루메리아 권리옹호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정부가 연합국과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영토를 연합국에 할양하는 등 터키의 사실상 해체를 결정하였다)을 맺자 앙카라에서 터키 대(大)국민의회를 소집하고 국민군을 조직하여 1922년 9월 그리스군을 완전히 격퇴하였으며, 11월에는 술탄제(制)를 폐지하였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체결된 로잔 조약 결과 세브르 조약의 주요부분이 폐기되어 터키는 소아시아 본토와 동부 트라키아의 확보,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국제관리 참가 등이 인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국 선언이 있었고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권리옹호단은 공화인민당으로 개조되었다. 1924년 칼리프제(制)가 폐지되고 주권재민(主權在民) 대국민의회를 유일한 입법기관으로 하는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이어 승원(僧院)·영묘(靈廟) 폐쇄와 승단(僧團) 금지, 일부다처 금지, 터키모(帽)·베일 금지(1925), 법률의 유럽화, 태양력 채용(1926)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1928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조문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1931년 대국민의회에서는 공화·국가·민주·산업 국유·세속·개혁의 6개 주의가 공화국의 지도원리로서 채택되었으며, 1934년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또한 에타티슴이라고 하는 국가자본주의제도를 채용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한 결과 철강, 섬유, 제지, 화학제품, 식료품 등의 생산이 증대하였다. 한편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도 노력하여 1933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1936년 몽트뢰 조약에 의하여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관리권과 재군비권(再軍備權)을 회복하였으며 1937년 중동의 안정을 위하여 인접국인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사다바드 조약을 맺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1945년 2월 독일·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 중립을 지켰다. 1946년 1당 독재가 종식되고 정당결성의 자유가 허용되자 젤랄 바야르가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1950년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공화인민당을 누르고 제1당으로 등장하였다. 바야르를 대통령으로, 멘데레스를 총리로 한 민주당 정권은 국영산업의 축소, 민간기업의 조성(助成), 민간 외자의 도입을 기본정책으로 하여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발전, 도로·댐의 정비 등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반면 적자 재정에서 오는 인플레이션, 정부의 언론탄압 등에 대한 불만이 군부·언론계·지식층·학생들 사이에 퍼져 1960년 5월 27일 구르셀 장군의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새로 수립된 군사정권(국가통일위원회)은 신헌법을 제정하고 전(前) 민주당 수뇌를 재판·처형했다. 정당활동이 재개되어 공정당(민주당의 후신), 신(新)터키당, 노동당 등이 결성되었다. 196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새 국회가 소집되고 민정이관 후 구르셀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 과반수를 넘는 정당이 없었으므로 공화인민당 총재인 이노뉴가 총리로 임명되어 3차에 걸친 연립내각이 조직되었다.

1965년 10월 총선거에서는 공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단독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좌파의 반정부활동 강화로 국내치안이 악화된 가운데 군부의 압력으로 1971년 3월 내각이 총사퇴하였으며, 이를 대신한 에림 내각에 의하여 11주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3년 10월 총선거에서는 공화인민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단독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여 공화인민당 총재 에체비트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되었다.

1974년 2월 터키 군부는 키프로스 분쟁에 개입하여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1977년 6월 총선거에서도 공화인민당이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안정 다수를 이루지 못하고 좌우 양진영의 대립이 깊어져 무력충돌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1978년 12월 종교갈등과 쿠르드독립운동 등 민족분규의 빈발로 정치적인 위기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9년 10월 중간선거에서 집권 공화인민당이 참패함으로써 21개월 만에 물러났다. 1980년 9월에는 육군참모총장 케난 에브렌 주도하에 전격적인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여 데미렐 총리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V. 정치

1. 외교

터키와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었기 때문에 상호 우호관계의 수립에 노력하여 1921년 우호조약, 1925년 우호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우호불가침조약을 파기함에 따라 터키는 반소·반공적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을 배경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았으며 1948년 이후에는 유럽부흥계획에 의한 경제원조를 받았고, 1952년 2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이어 1955년 이라크와 상호방위조약(바그다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에는 파키스탄·이란·영국도 가입하여 중동 북변(北邊)에서 대소(對蘇) 집단안전보장체제가 수립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혁명 후 터키가 바그다드 조약에서 탈퇴하자 본부를 앙카라로 옮겨 중앙조약기구(CENTO)로서 재발족하였다. 터키의 외교는 이와 같은 반소·반공 군사기구에 의하여 서방측에 밀착하였으며 또한 경제개발을 위한 원조도 전면적으로 서방측에 의존하게 되었다. 1963년 말 일어난 키프로스 분쟁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터키가 전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미국과 서방에서 경제원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12월 소련과의 경제·통상·과학기술협정 및 1986∼1990년 무역협정에 조인했으며 1988년 8월 소련과의 국경을 개방했다.

1989년 시작된 불가리아 내 터키인들의 집단이주로 관계가 악화되어 같은 해 10월 불가리아와 국경을 폐쇄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고슬라비아나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에 군사개입을 시사하고,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해놓고 있다. 1990년대에는 탈냉전 이후 NATO를 주축으로 한 지역안보구축과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의 준회원국으로서 정회원국 가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주변 이슬람권 국가 및 중동구권 국가와도 경제 관계를 긴밀하게 추진 중이다.

1992년 7월 러시아의 6개 공화국과 터키, 그리스를 포함한 흑해 협력지대의 창설을 주도하는 등 외교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걸프전쟁이 발생했을 때는 자국내의 이라크 송유관을 폐쇄하고 다국적군에게 국내 기지사용을 허가하였으며, 대규모 병력을 이라크 국경지대에 배치하는 등 다국적군에 동조하여 서방의 지원을 약속받기도 하였다.

그리스와는 에게해의 영해, 대륙붕 문제, 키프로스 문제, 상대방 국가 거주 자국 소수민족 문제 등으로 상호  불신, 대립·반목 관계 유지하여왔다. 특히 1999년 2월 PKK 지도자 오칼란 체포 이후 그리스 정부의 오칼란 비호 문제를 둘러싸고 최악의 상태에 있다가 1999년 8~9월 양국의 대지진 발생시 상호지원을 계기로 호전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후 양국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관계개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여왔으며, 2000년 1월 그리스 외무장관의 터키 방문, 2000년 2월 터키 외무장관의 그리스 답방 등으로 분쟁과 대결로 얼룩져온 양국 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하여왔으나, 이후 마찰이 계속되고 있다.

2. 군사

터키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취하고 있다. 만 20세 남자는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으며 복무기간은 대학을 졸업한 장교는 15개월, 일반 사병은 18개월, 대졸 사병은 8개월이다. 미국 및 NATO의 원조로 군대가 근대화되고 있으며 소화기 제조, 함선 건조, 항공기 등의 수리는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단계에 있다. 앙카라에 NATO 동부 지중해 해군사령부, CENTO 본부, 이즈미르에 NATO 남동유럽 연합지상군 및 제6연합전술공군의 사령부가 있다. 2000년 현재 총병력은 61만 명이고 준군사조직인 12만 명의 국경경비대가 있다. 국방예산은 1999년 101억 달러이다. 터키군은 6·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VI. 경제

1. 교통 ·통신

터키의 철도건설은 1856년 시작되었으며 술탄시대에는 철도의 건설·경영이 모두 외국자본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공화국 성립 후 모두 국유화되었다(1924). 총연장 8,000km의 이스탄불∼아다파자리 간 철도의 전화(電化) 계획이 추진되었고, 철도 총연장은 1만 386㎞(1997)이다. 도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원조로 급속히 개량·연장되어 총연장 38만 2397km에 달한다(1997). 고속도로는 1726㎞이다. 해운은 그 대부분이 해사은행(海事銀行)에 의하여 운영되며 주요항으로서 이스탄불·이즈미르·트라브존 등이 있고, 해운 화물의 대부분을 취급한다.

1992년 해운에 의해 수출된 화물은 2600만 톤이고 수입된 화물은 6000만 톤이다. 항공은 정부소유의 터키 항공주식회사에 의하여 운항되며 국내선 외에 유럽선, 베이루트선, 니코시아선, 아테네선 등이 있다. 2000년 현재 121개의 공항이 있다. 1980년대 민간 항공사인 이스탄불 에어라인과 그린 에어라인이 생겼고 국내선과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다. 우편·전신·전화의 통신사업은 운수통신성 산하 우편전신전화청에 의해서 운영된다.

VII. 사회

터키는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가 공업 발전에 따라 증가하고 있으며 2000년 현재 노동인구 중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38%로 줄어들었다. 임금수준은 낮으나 1963년 제정된 노동조합법에 따라 노동조합의 결성이 인정되고부터 단체협약에 의한 임금상승이 현저해졌다.

공화국 성립 후 종교적 인습은 차례로 폐지되었으며, 공화국 헌법에서 국교(國敎)로 제정되었던 이슬람교 역시 뒤에 해당 자구(字句)가 삭제되었다. 1961년에는 헌법상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어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덜하다. 그러나 터키 인구의 약 99%가 이슬람교도(수니파)로 민중에 대한 이슬람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특히 민주당 정권하에서 종교부흥정책에 따라 라디오에서 코란을 낭독하고 각지에 이슬람 사원이 건설되었다.

또한 정부는 1948년 이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종교학교도 설립하여 이슬람교를 기초로 하는 국민도덕의 함양에 주력하고 있다. 초등교육의 충실과 직업교육의 중시가 뚜렷하며 문맹률도 15세 이상 인구의 경우 15%로 낮아졌다(2000).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으로 5년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각각 3년제이다. 중학교에는 보통중학과 직업중학이 있으며, 직업중학에서는 기계·목공·전기·농업·양재 등의 기술교육이 실시된다.

대학으로는 앙카라대학을 위시하여 앙카라중동공과대학, 이스탄불대학, 이스탄불공과대학, 에게대학, 흑해대학 등이 있는데 수업연한은 의과대학 6년, 공과대학 5년, 기타 4년이다. 주요도시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유럽풍이며 수도인 앙카라보다 이스탄불이 최대 규모의 도시를 자랑한다. 도시에서 동양적인 풍경이라고 하면 이슬람 사원의 첨탑 정도일 것이다.

VIII. 문화

터키는 헌법상 국교를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전체 국민의 98% 이상의 절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 교도이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되며 특히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종교적 율례의 영향을 받기 쉽다. 또한 금식월(라마단)이 끝나는 날 이후의 3일과 희생절은 종교 축일로서 성대한 행사가 치러진다.

터키인의 대부분은 스포츠 애호가이며 터키에는 모든 종류의 스포츠 클럽이 있다. 특히 축구나 농구 등의 프로스포츠가 인기가 높으며, 레슬링은 전통적인 터키의 스포츠로서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따고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또한 각지에 스키장이 있어서 겨울에 스키를 즐길 수 있으며, 여름에는 지중해, 에게해, 흑해 등에서 해수욕을 할 수도 있다.

IX. 과학기술

터키 정부는 1855년 국내전신 업무를 시작하였고, 1909년 이스탄불에 터키 최초의 수동식 전화 교환기가 설치되었으며, 우정성이 설립되었다. 1999년 현재 공중 통신 서비스를 위한 본회선수는 1950만 회선이다. 교통부는 통신산업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유선통신을 관리하는 곳과, 주파수를 관리하는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터크 텔레콤은 1997년까지 모든 통신서비스를 독점제공하였으며, 디지털 교환망의 현대화를 추진하여 508대 교환기의 성능을 향상시켰고, 1997년 현재 약 1730만 교환용량을 확보하고, 23.75%의 회선 보급률을 기록했다. 1996년 마마리스, 이즈미르, 이스탄불을 잇는 해저광섬유 망을 2개의 국제 해저광섬유 망에 링크시켰다.

셀룰러 전화 가입자수는 1999년 현재 1210만 명이다. 주요 셀룰러 서비스 사업자로는 터크 텔레콤, 터크셀, 텔심이 있다. 인터넷 서비스는 1996년 터넷의 개통으로 시작되었다. 민간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는 터크 텔레콤의 임대 회선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2000년 현재 인터넷 사용자는 200만 명이다.

1993년 국영방송의 독점을 끝내는 방송법으로 인하여 민간 채널이 합법화되었다. 1997년 현재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사는 국영방송사인 TRT를 비롯하여 5개사가 있으며, 지역방송업자는 국영인 BRTK사와 ATV사가 있다. CATV서비스는 1986년 앙카라에서 처음 시작 된 이후 1997년 6월 현재 10대 도시에서 50만 가구를 대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X. 대한관계

터키는 1957년 3월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북한과는 2001년 6월 수교하였다. 1957년 6월 한국 공관, 1972년 서울 공관을 설치하였다. 1977년 12월 통상진흥 및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이스탄불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1982년 12월 대통령 에브렌, 1991년 총리 아크불루트가 방한하였다. 1986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94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섬유협정, 1999년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6·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는데, 이에 앞서 러시아혁명 이후 1920년대에 러시아 군대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탈출한 200여 명의 터키인이 집단이주, 서울과 대구·부산 등지에서 의류·담요·직물 등을 판매하였으나 8·15광복과 함께 모두 해외로 이주하였다.

1994년 대한수입 2억 7602만 달러, 대한수출 1억 3406만 달러였고, 2000년 현재 대한수입액 12억 600만 달러, 대한수출 51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차량, 섬유, 전자부품, 화학제품 등이며, 주요 수출품은 엽연초, 곡물, 비철강제품 등이다. 한국 교민 및 체류자 538명이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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