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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6-05 (화) 07:48
분 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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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0840. 광개토대왕비

0840. 광개토대왕비

고구려(415), 높이 6.93m,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

태왕릉(太王陵)으로부터 약 500m 떨어진 곳에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하여 415년(장수왕 3년)에 세워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 금석문 중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고, 옛비석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서 웅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웅장한 비석면에 유려한 육조(六朝)의 예서체가 가미된 고구려 특유의 서체로 4면에 모두 1,800여 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 광개토왕의 즉위·대외 진출 업적, 능묘의 관리 문제 등 세부분으로 요약된다. 이 중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은 일제에 의한 비문 조작 의혹과 비문 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한·중·일 삼국 간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5자 불명)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머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王位)에 싫증을 내니, (하느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龍)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 갔다.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왕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위엄있는 무력)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셨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 391)에 건너와 백잔(百殘0을 파하고(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 利城), □□성, 각미성(閣彌城), 모로성(模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 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혈□□□□성(頁□□□□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 城), 어리성(於利城), □□성,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임성(林城),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보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 穰城), 증□성(曾□城), □□노성(□□盧城), 구천성(仇天城)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여생구(南女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太王)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신(□愼: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 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 9년(399)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平穰)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쳐서 신라성(新羅城;國都)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 … 신라성□성(新羅城□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404)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대군을 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를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步軍)과 마군(馬軍)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벌이며, 그 밖의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성, □□□□□□성을 파(破)하였다.

20년(410) 경술(庚戌) 동부여(東夫餘)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인 여성(餘城;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로압로( 社盧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民)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 동해가(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民)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연( 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ㅏ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 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은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 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0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 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 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 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한(韓)과 예(穢)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구 수묘호(守墓戶)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家)였다.

선조왕들이 이래로 능묘에 석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을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노태돈, <광개토왕릉비>, 《역주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pp.16∼21.)

이 비석은 고구려 팽창기의 동아시아 역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웅장하고 당당한 비석으로 세계에 자랑할만한 기념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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