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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1-21 (화) 12:29
분 류 문화사
ㆍ조회: 4951      
[삼국] 삼국 시대의 건축 (민족)
건축(삼국시대의 건축)

세부항목

건축
건축(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
건축(선사시대의 건축)
건축(삼국시대의 건축)
건축(통일신라시대의 건축)
건축(발해의 건축)
건축(고려시대의 건축)
건축(조선시대의 건축)
건축(근대 및 현대의 건축)
건축(건축기술의 발달)
건축(참고문헌)

      가형토기(家形土器). 고상주택의 형태를 보여준다. 높이 15.7cm. 호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쌍영총 부부도. 쌍영총 고분벽화 중 주실 북벽의 부부상에 보이는 절. 그림 우측 주인상 옆에 있는 남자가 예를 올리고 있는데 바지를 입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 앞쪽에 모으고 허리를 펴고 있으나 양 무릎을 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안악3호분 전실 내부.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내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무령왕릉 입구. 백제의 무령왕릉(501~523)의 입구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익산 미륵사지. 익산 미륵사지 절터. 백제의 무왕은 미륵이 있는 도솔천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 높이 8.33m. 국보 제9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분황사 모전석탑. 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의 신라시대 모전석탑. 높이 9.3m. 국보 제30호. 634년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다고 한다. 현재 3층까지의 탑신부가 남아있는데 네 모퉁이에는 사자상 한마리씩을 배치했고 탑신 4면의 감실 입구에는 8구의 인왕을 배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황룡사(복원모형).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에 있었던 목탑 복원 모형이다.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으로 건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목탑 양식이며, 현재는 목탑지가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첨성대.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건물. 높이 약 9.5m. 국보 제31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삼국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중국대륙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교류하여 중국의 발달된 각종 문화를 도입하여, 각기 그들의 고유문화와 조화시키면서 선진문화단계에 도달하였고, 나아가서는 중국을 능가하는 개성있는 문화를 이룩하였다.

고구려는 그 시원종족인 부여족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초부터 발달된 기법과 자재로 된 새로운 건축을 가지고 있었고, 백제 역시 건국초부터 새로운 건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소부족국가의 연합체로 시작되었고, 중국과는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격리되어 있어 건국 초기에는 원시적인 건축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의 국권이 안정되고 고구려나 백제와 교섭이 잦아지자 이들로부터 새로운 건축을 배웠을 것이며, 늦어도 5세기초에는 그러한 건축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경주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 큰 무덤 속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나, 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확인된 목곽(木槨)과 목관(木棺) 등의 치목법(治木法)이나 제작기법 등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에는 고분벽화에 그려진 성곽이나 전각(殿閣) 및 주택의 부속건물의 그림, 석주(石柱)와 두공(斗栱) 등을 모각(模刻)한 것과 기둥 따위 건축 세부를 나타낸 그림 등이 있어 당시의 건축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밖에 사찰이나 궁궐 등의 건축유적이 있으며 약간의 문헌자료도 있다.

고분벽화 가운데 성곽그림이 있는 것은 용강대총(龍崗大塚)·삼실총(三室塚)·요동성총(遼東城塚)·약수리벽화분(藥水里壁畵墳) 등이다. 용강대총과 삼실총은 성곽의 일부를 바라본 그림이며, 요동성총과 약수리벽화분은 성곽의 부감도(俯瞰圖)이다.

전각그림이 있는 고분은 쌍영총(雙楹塚)과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대안리(大安里)1호분·팔청리(八淸里)벽화분·통구(通溝)12호분·안악(安岳)1호분들이며, 각저총(角抵塚)에는 전각 내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쌍영총은 장막 속에 맞배지붕으로 된 기와집을 그리고 그 속에 피장자 부부의 초상을 그렸다. 통구12호분은 중층(重層)의 전각그림이며, 안악1호분은 큰 주택의 부감도를 그리고 있다.

이 밖에 고분의 그림은 퇴락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주택의 부속건물그림은 안악3호분·약수리벽화분·마선구(麻線溝)1호분 등에 비교적 많은 종류의 그림이 있고, 대성리(臺城里)1호분·무용총(舞踊塚)·각저총·통구12호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는 부엌을 그린 것이 가장 많고, 그밖에 마구간과 창고 등의 그림이 있다. 고분 묘실에 기둥그림을 그린 것 가운데 두공이 이중으로 된 것은 무용총·쌍영총·안악1, 2호분이며, 단층의 것은 각저총·귀갑총·용강대묘·감신총(龕神塚)이다. 이 밖에 기둥을 도식적(圖式的)으로 그린 고분도 있고, 대성리2호분은 수목형(樹木形)으로 그렸다.

고분 내부에 돌기둥을 세운 것은 쌍영총·안악3호분·대성리1호분·요동성총·팔청리벽화분·마선구1호분 등이며, 천왕지신총은 전실(前室) 지붕이 마치 목조건물의 가구를 보는 듯이 도리나 대공을 돌로 만들었고, 주실(主室) 벽면에는 내부로 돌출한 첨차를 돌로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것을 보면, 당시의 목조건축은 근세의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는 별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사찰건축은 불교가 도입된 372년 이후 성문사(省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평양의 구사(九寺) 등 많은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미루어 매우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들 사찰의 터가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으나, 평양 근처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구려시대 절터들이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몇몇은 발굴조사된 바 있다.

금강사지(金剛寺址)라고도 전하는 평양의 청암리절터는 평면 팔각의 넓은 기단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팔각기단을 향한 건물이 있었고, 팔각기단 남쪽에는 문터가 있었다. 이와 같은 배치는 대동 상오리절터와 평양의 정릉사지(定陵寺址)에서도 밝혀졌고, 중앙의 팔각기단은 탑의 기단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가람배치(伽藍配置)는 탑을 중심으로 세 곳에 탑을 향해 금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궁궐건축은 평양시내에 있던 안학궁지(安鶴宮址)의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배치 등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안학궁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쯤 되는 마름모꼴의 왕성 안에 58채의 건물들로 구성되었다.

궁궐은 남·중·북의 삼궁(三宮)과 동궁으로 형성되고 각 궁이 문과 회랑·궁궐건물로 서로 연결되고 있었으며 대체로 좌우가 대칭으로 되어 있었다.

도성으로는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이 있으나 본격적인 도성은 평양의 장안성(長安城)이었다. 장안성은 북성·내성·중성 및 외성으로 구획되어 평지와 산악을 포용한 평면이 삼각형인 큰 성곽이었다. 북쪽은 절벽, 동·서·남의 삼면은 대동강과 보통강(普通江)으로 구획된 천연의 요새지이다.

산성으로는 집안(輯安)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순천의 자모산성(慈母山城), 용강의 황룡산성(黃龍山城) 등이 유명하다.

이들 산성은 읍락에 가까운 험한 산악을 이용하여 공격과 방어에 편리하고 수원(水源)이 풍부한 곳에 축조되었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획하였는데, 거의 모두 삼면이 높은 산이나 절벽에 면하고 남쪽이 경사지로 되고 계곡을 포용하고 있었다.

백제의 건축에 관한 자료로서는 2기의 석탑과 많은 절터와 산성들이 있고 문헌자료는 극히 적다. 중국의 고문헌인 ≪신당서 新唐書≫ 동이전(東夷傳) 백제조에, “풍속은 고려와 같다(俗與高麗同).”고 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조에는 “궁실과 누각대사가 장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宮室樓閣臺擄不無壯麗).”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실·누각·대사 등의 건물은 궁궐 안에 세워졌던 건물이며, 이들은 발달된 새로운 기법과 자재를 사용하여 세워진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양식들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와당(瓦當)이나 유물 등으로 미루어 건축의 가구기법이나 구조는 고구려의 경우와 별다를 바 없었고, 세부양식은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으로 좀더 부드럽고 경쾌한 느낌의 건축이었다고 추측된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미륵사는 이설(異說)이 있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무왕이 건립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최근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지금 남아 있는 석탑은 미륵사의 서탑이며, 동쪽에 똑같은 모습의 동탑이 있었고, 중앙에 좀더 규모가 큰 목탑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탑은 반파되었으나, 탑의 동쪽 부분이 잘 남아 있는데, 목조탑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하여 만든 우리 나라 석탑의 시원탑(始原塔)으로, 따라서 석탑의 구조양식에 약간의 결점이 있었던 탑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미륵사탑의 구조적인 결점을 시정하여 완전하게 석탑구조를 완성한 백제양식의 석탑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백제사찰의 가람배치는 초기의 한성(漢城)시대와 웅진(熊津 : 공주)시대의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후기인 사비(泗歷 : 부여)시대의 것에 대해서만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절터에 대해서는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금강사지(金剛寺址) 및 정림사지가 발굴조사되었고, 미륵사지는 198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가람배치가 밝혀졌다.

그 결과 군수리사지와 금강사 및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나온 회랑이 탑과 금당을 쌓아 강당 좌우, 혹은 강당 좌우에 있는 건물 양끝에 닿는 형식, 즉 1탑식 가람배치임이 밝혀졌는데, 정림사만은 탑이 석탑이었다.

동남리사지는 1탑식 가람배치에서 탑을 뺀 형식이며, 미륵사지는 강당을 뺀 1탑식 가람 셋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을 그 뒤에 마련한 특이한 배치였다.

백제는 건국 초에 한강 남안의 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았고, 371년에 한산성(漢山城)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하나 그 자리는 확실하지 않다. 475년에는 도읍을 웅진에 옮겨 도성을 공산성(公山城)으로 정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궁궐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538년 다시 사비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삼았다.

사비에서의 도성은 부소산(扶蘇山)을 뒤에 두고 부소산성의 남쪽 백마강(白馬江) 서쪽 강가일대를 포함한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그 안을 오부오항(五部五巷)으로 구획하여 처음으로 조방제(條坊制)를 갖춘 왕도(王都)를 이룩했다.

도성의 외곽에는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석성산성(石城山城)·노성산성(魯城山城) 등의 성을 축조하여 방어선을 삼고 그 밖에 많은 성을 배치하였다. 백제 영역에는 지금도 많은 성들이 남아 있으며, 그 대부분은 서해안 부근에 배치되고, 평지에는 토성, 산악에는 산 정상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였다.

신라의 건축에 관한 자료로는 가야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몇몇 가형토기(家型土器)와 2기의 석조건물 이외에는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芬皇寺) 등 당시의 사찰유적과 왕성이었던 월성(月城)뿐이다. 가형토기는 대부분이 창고나 축사(畜舍)를 모방한 것이며, 당시의 주택 안채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토기가 한점 있다.

주택의 안채로 보이는 토기는 기와지붕으로 된 맞배집으로 전면 중앙에 출입구인 문 두 짝이 있고, 그 왼쪽에 방을 나타내는 창, 오른쪽에는 부엌을 나타내는 작은 문 3개가 선각되었다.

창고를 모방한 토기는 고상(高床)의 창고를 모방한 것과 내부가 이층으로 된 지상건물 형태가 있다. 축사를 모방한 토기도 지상건물로 된 창고와 비슷한 모습인데, 이들은 모두 긴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를 나타내고 있다.

신라에서 발달된 새로운 기법과 자재로 된 건축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택 안채를 모방한 가형토기나 경주지방에서 발견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목곽이나 목관 등의 제작기법, 호화로운 유물 등으로 보아 늦어도 5세기 초에는 새로운 건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목조건축은 황룡사지 발굴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향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건축과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조건축으로는 첨성대와 분황사석탑이 있다.

첨성대는 원형을 거의 남기고 있으며, 장대석으로 된 정방형 기대(基臺) 위에 위가 좁아진 원통형의 본체를 올렸다. 분황사석탑은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아 탑신이나 옥개를 만든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고신라의 사찰 가운데 가람배치가 밝혀진 것은 황룡사와 분황사뿐이다. 황룡사는 궁궐을 짓기 위한 공사 중에 황룡이 나타나 사찰로 바꾸었기 때문에 창건당시의 가람배치는 매우 특이한 형태였다.

그러나 574년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조(鑄造)하고, 이를 안치하기 위하여 584년에 금당을 중건하여 645년에 오층목탑이 완공되면서 이루어진 중건가람(重建伽藍)이 본격적인 가람배치를 갖춘 것이었다.

이 가람은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를 신라의 개성에 따라서 변형한 신라식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탑 뒤에 세 금당을 나란히 배치한 것이었다.

분황사 역시 황룡사와 같은 형식의 가람배치였으나 동·서 금당이 중금당보다 조금 남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밖에 흥륜사지(興輪寺址)의 경내 일부를 발굴조사한 바 있으나, 그 가람배치를 밝힐 수 있는 본격적인 발굴이 아니었다.

신라의 도읍은 건국 이래 멸망할 때까지 경주였다. 그것은 경주가 가지는 지리적 조건이 자연의 요새지로서의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궁궐은 당초 남산(南山) 서쪽 기슭의 고허촌(高墟村)에 있었고, 이어 금성(金城)으로 옮겼다가 101년(파사왕 22)에 월성(月城)을 축조하여 여기로 옮겼다.

월성은 남천(南川) 북안(北岸)을 남쪽 끝으로 삼고, 반월형으로 축조된 토석혼축(土石混築)의 성으로 본래는 성밖에 해자(垓子)가 있었다.

월성 내부에는 많은 궁전건축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 그 건물의 배치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신라의 산성은 경주를 둘러싼 여러 산에 축조되었으며, 그 밖에 신라 영역 안에도 많은 성이 축조되었다. 이들 산성은 대부분 산꼭대기를 포함하여 산 능선을 따라 석벽을 쌓은 것으로, 석벽은 수직에 가깝게 축조되었다.

<김정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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