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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1-21 (화) 12:4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726      
[고려] 고려 시대의 건축 (민족)
건축(고려시대의 건축)

세부항목

건축
건축(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
건축(선사시대의 건축)
건축(삼국시대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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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고려시대의 건축)
건축(조선시대의 건축)
건축(근대 및 현대의 건축)
건축(건축기술의 발달)
건축(참고문헌)

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있는 고려의 불전. 국보 제18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수덕사대웅전의 박공. 맞배지붕의 측면에 人자형으로 붙인 건축 부재. 박풍이라고도 한다. 사진은 고려 후기 목조 건물의 맞배지붕 처리 솜씨를 보여 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월정사팔각구층석탑.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팔각석탑. 높이 15.2m. 국보 제48호. 상륜부의 장식을 제외하고는 전체를 화강암으로 건조한 이 석탑 안에서 은제도금의 여래입상과 동경, 경문, 향목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고려 초기 건축을 비롯한 모든 문화는 신라를 계승했다. 그 뒤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송나라와의 교류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당시 건축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양상을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중기에 들어와서는 남송(南宋)과의 교류로 중국 화남지방에 있던 새로운 양식의 건축이 고려에 도입되어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정착시켰고, 그 말기에는 원나라와의 교류로 화북지방에 있던 또 하나의 새로운 건축양식이 도입되어 다포(多包)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들 두 양식의 건축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나라 권위건축의 주축을 이루었다. 주심포양식은 두공이 기둥 위에만 설치되고 천장가구가 없으며, 따라서 옥개가구재가 옥내에 노출되므로 장식적 의장(意匠)이 많다.

이 양식의 원형은 옥내 공간을 크게 만들 수 있는 구조였으나, 우리 나라에는 원형양식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재래의 건축에 부가됨으로써 원형과는 전혀 다른 우리 나라 특유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봉정사극락전은 재래 건축의 일부에 새 양식이 부가된 과도적인 양식을 나타낸 건물이며, 부석사무량수전에서 비로소 우리의 주심포양식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주심포양식은 고려 말에는 세부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나타냈는데, 수덕사대웅전·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등의 건축이 남아 있다. 다포양식은 주심포양식의 경우와는 달리 원형양식이 그대로 도입되었던 것 같으나, 도입 직후부터 세부적인 변화를 나타내며 조선시대에 가장 성행했다.

이 양식은 두공이 기둥 위뿐만 아니고 기둥과 기둥 사이 상부에도 배치되며, 이들 두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돌려놓인 평방(平枋) 위에 설치되어 천장가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옥개가구재가 천장에 가려져서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장식적 의장이 없다.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이 다포양식의 목조건축 세부를 충실히 모각한 석탑이며, 심원사보광전(心源寺普光殿)은 고려 말에 세워진 다포양식의 목조건축이다.

고려의 석조건축으로는 석탑이 가장 많으며 석조부도도 성행했다. 석탑은 대부분이 신라양식의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세부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데 장식적인 조각이 많아졌다. 백제의 옛터에는 백제양식의 석탑도 몇몇 남아 있다.

그 밖에 이 시대에 들어서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석탑으로 평면이 육각 또는 팔각인 다층석탑이 평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월정사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이 대표적인 예로서, ≪삼국유사≫ 권4의 고구려 영탑사석탑조(靈塔寺石塔條)에 기록된 팔각칠층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고려 말에도 원나라의 영향으로 평면이 아자형(亞字形)으로 된 경천사십층석탑이 나타나기도 했다.

석조부도는 여전히 팔각원당형이 기본형태이나 대석(臺石)에 조식(彫飾)이 많아지고 탑신은 간략화되었다. 또, 이형부도(異形浮屠)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부도도 나타났다. 영전사보제존자사리탑(令傳寺普濟尊者舍利塔)이 석탑형으로 된 것을 비롯하여, 탑신을 편구형(扁球形)으로 만들고 옥개를 연엽형(蓮葉形)으로 만든 정토사홍법선사실상탑(淨土寺弘法禪師實相塔), 보련형(寶輦形)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이다. 또, 말기에 와서는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성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국 후 개성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태조는 법왕사(法王寺)·자운사(慈雲寺) 등의 십찰(十刹)을 창건하고 계속 여러 왕들이 개목사(開目寺)·불일사(佛日寺)·흥왕사(興王寺)·안화사(安和寺) 등을 창건하였으며, 지금도 법천사(法泉寺)·거돈사(居頓寺)·만복사(萬福寺) 등의 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절터 가운데 흥왕사지와 만복사지만 발굴조사되었을 뿐이다.

흥왕사는 중앙에 팔각의 탑을 배치한 중원(中院)과 그 좌우에 동원·서원이 배치되었다. 만복사지는 서쪽에 법당, 동쪽에 목탑이 배치되고, 이 밖에도 그 동쪽에 석탑이 있는 매우 복잡한 가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창건 당시의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1탑3금당식과 같은 형식임이 밝혀졌고, 석탑 등은 후대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불일사지는 표면 관찰로도 일탑식 가람배치로 된 사찰임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가람배치 형식은 매우 다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태조 2년(919)에 도읍을 개성에 정하여 이를 개경(開京)이라고 하였고, 몽고의 침입으로 한때 강화로 왕도를 옮긴 일 이외에는 이성계(李成桂)에게 국권을 넘길 때까지 이곳에 도읍하였다.

도성 안에는 방리(坊里)를 정하고 그 속에 관아·사원·시장 및 민가를 배치하였으며,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여 토성을 쌓아 나성(羅城)으로 하였다.

중경(中京)인 개경 외에 평양을 서경(西京), 경주를 동경(東京), 한양을 남경(南京)으로 정하고 각각 성곽과 이궁(離宮)을 만들었다. 왕궁은 개경의 만월대(滿月臺)에 만들어 문과 회랑, 그리고 궁궐은 능선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겹겹이 배치하였다.

<김정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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