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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1-21 (화) 12:5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8923      
[근대/현대] 근대 현대의 건축 (민족)
건축(근대 및 현대의 건축)

세부항목

건축
건축(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
건축(선사시대의 건축)
건축(삼국시대의 건축)
건축(통일신라시대의 건축)
건축(발해의 건축)
건축(고려시대의 건축)
건축(조선시대의 건축)
건축(근대 및 현대의 건축)
건축(건축기술의 발달)
건축(참고문헌)

        독립문.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조선 말기의 석조문. 높이 14.28m, 너비 11.48m. 사적 제32호. 영은문을 헐고 1897년 그 자리에 세운 문으로서, 서재필의 구상에 의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였으나,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의 조적수법도 재래성벽의 수법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명동성당.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사적 제258호. 우리 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의 연와조 건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구대한의원본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있는 조선 말기의 건물. 사적 제248호. 건물은 지상 2층인 조적식으로, 네오바로크풍의 시계탑이 주요한 형태 요소로 작용한 서양식 건축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주프랑스대사관. 서울 서대문구 합동. 김중업(1922∼1988)이 설계한 건물이다. 1962년 완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국회의사당.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축가 김정수의 작품이다. 1969년 7월 17일 기공식, 1975년 9월 1일 준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세종문화회관. 1978년 서울시에 의하여 건립된 공연장으로서 회의실과 전시실을 갖춘 종합문화공간. 한국의 전통양식구현이라는 취지 아래 외부벽면을 화강석으로 마감하여 우아하면서 장엄하며,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부조 및 조각, 회화작품 등 수준 높은 예술 조형물을 곳곳에 비치하였다. 1974년 착공, 1978년 준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대한생명사옥.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육삼 대한생명빌딩. 1980년 2월 착공하여 1985년 5월 완공되었다. 지상 높이 249m(해발 264m), 지상 60층, 지하 3층. 연건축면적 16만 6100㎡(5만 200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잠실종합운동장.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종합경기장. 김수근 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다른 문물과 함께 낯선 서구양식이 유입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통건축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체제와 생활의 기능이 서구화함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건축은 우리 나라가 능동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에서 타율적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개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인 만큼 일본의 외교공관시설이 처음으로 들어와 원산(1880)·인천(1883)·서울(1884)·부산(1884) 등지에 그들의 영사관과 공사관이 차례로 세워졌는데, 그것은 초기 일본기술에 의한 의양풍(儀洋風)의 목조 2층건물들이었다.

1890년 이후부터는 서양 각국의 외교공관도 출현하였는데, 러시아(1890)·영국(1890)·프랑스(1896)·벨기에(1905)·독일영사관(1900년경) 등 준 르네상스식 벽돌 2층건물로 격식을 갖춘 것이었다.

또, 신구 기독교의 유입에 따라 배재학당교사(1886)·정동교회(1898)·천주교 명동주교관(1890)·약현성당(1892)·명동성당(1892∼1898) 등 고딕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이무렵 인천의 외국인 거류지에는 주거형식의 외국상인들의 상용건축(商用建築)이 세워졌으며,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관민이 협력하여 독립문(1897)이 건립된 사실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열강의 각축과, 특히 러시아 세력하에 정국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의 환궁을 위하여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중건하면서, 1900년을 전후하여 그 구내에 궁전으로서 몇 개의 서양건물을 세웠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조전은 고전주의적인 수법의 세련된 건물이다.

한편, 1900년대 전반에 전차·철도 시설에 따른 회사건물, 외국선교계통의 종교 및 의료시설들이 세워짐에 따라 양옥건축이 일반시민에게 눈익은 것이 되어갔다.

1905년 러일전쟁 결과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게 된 일본은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를 창설하여 다수의 일본인 기술자를 관리로 침투시켜 침략준비로서의 관아건물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의정부청사(1907)·대한의원본관(1908)·한성재판소(1908)·내부청사(1910) 등 적지않은 건물이 그때 세워진 것이다. 그밖에 기독청년회관·서북학회회관 등 민간의 건물도 약간씩 출현하였다. 이 시기의 건물들은 벽돌 2층의 준 르네상스식인 것이 많았으며, 한옥과 양옥 절충의 점포가 종로 등에 생겨났으나 상가의 대형화로 오래 가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의 행정기구 재조직과 함께 관아건물을 더욱 많이 세우게 되었는데, 1916년에서 1926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세워진 총독부 건물은 르네상스식 석조건축으로 일제강점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밖의 관아건축들은 르네상스식에 바탕을 둔 절충주의적인 것이 많았다.

1922년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조선건축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회원 122명 중 우리 나라 기술자는 한 사람뿐이었고, 다음해에 10명이 가입하였는데 대부분은 1919년 첫 한국인 졸업생을 낸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일가를 이루어 작품활동을 한 것은 1930년대 초부터이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전문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서구인 기술자의 설계도 약간 있었는데, 조선호텔·성공회·이화학당·연희전문·숭실전문 등 주로 종교계통의 것이었다. 조선호텔이 네오바로크, 성공회가 로마네스크, 기타 기독교계학교들이 고딕의 각 양식을 취하였다. 1925∼1926년경부터는 지금까지 양식주의(樣式主義)로 일관하던 것과는 그 양태가 달라진다.

그것은 1920년대에 출현한 서구의 합리주의운동이 일본을 거쳐 들어왔고, 또한 〈조선회사령〉 철폐로 일본자본이 우리 나라에 크게 진출하면서 건축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식주의가 전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시대까지 관아건축이 대부분 양식주의로 그 수효를 채워, 그 수는 적지만 은행·미술관·학교 등에 약간씩 그대로 존속하였다. 합리주의적인 건물은 경성전기주식회사(1929)·상공장려관(1929)·체신국분관(1934)·부민관(1935) 등을 비롯하여 주요간선도로에 연이어 나타났다.

1928년경부터는 한편으로 건축에 조선의 향토적 정서를 포함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선 전주·남원·서평양·경주 등 유서깊은 지방의 역사(驛舍)라든가 박물관 등에 채택되었다. 말하자면, 한·양(韓·洋)의 의식적인 절충이라 할 것이다. 1929년경부터 한국인 건축가의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요 건축가로는 우선 박길룡(朴吉龍)을 들 수 있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성북동 김연수씨저택(1929)·조선생명보험사옥(1930)·경성제국대학본관(1931, 지금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동일은행남대문지점(1931)·한청빌딩(1935)·화신백화점(1937)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근대주의 대두 후의 작품이지만, 경박한 기능주의에 흐르지 않은 무게 있는 것들로 평가된다.

다음 박동진(朴東鎭)은 보성전문학교 본관(1934, 지금의 고려대학교)·조선일보사 구사옥(1935)·보성전문학교 도서관(1937)·중앙고등보통학교 본관(1937)·대전지방법원 청사(1939) 등 석조고딕양식 건축에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강윤(姜沇)은 태화기독교사회관(1939)과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음악당·본관·기숙사 등 고딕식 석조건축에 능하나,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는 한·양 절충의 개성있는 작품을 보였다.

그 밖에 박인준(朴仁俊)의 세련된 양옥주택, 김순하(金舜河)의 전라남도청 및 동 강당(1932), 유원준(兪元濬)의 종로일가장빌딩(1936년경)·함흥명보극장(1940년경), 이천승(李天承)의 종로영보빌딩(1937), 김희춘(金喜春)의 남대문로 동경건물회관(1941) 등이 있다. 그중 이천승과 김희춘 등은 해방 후 건축설계의 선도자로서 한국건축을 다음 세대에 잇는 구실을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경제사정과 체제 미확정 등으로 실질적인 건축활동은 소규모의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축인들은 의욕에 넘쳐 광복 즉시 ‘조선건축기술단’을 조직하여 기관지 간행을 통하여 계몽하는 한편, 국민주택설계공모를 하는 등 능동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에 두각을 드러낸 이천승·김희춘·이희태·강명구(姜明求)·송민구(宋旼求)·김정수(金正秀)·김태식(金台植) 등은 6·25전쟁 뒤 건축계의 중견이 되어 활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 중에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국군충효탑설계공모 등 추상적이나마 건축의 의욕은 계속되었고, 그 뒤 전후 복구를 위한 공사는 많은 건축가들의 활동의 장을 마련하였다.

1954년에는 ‘대한건축학회’가 ‘조선건축기술단’ 후신으로 발족하였고, 1957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의 전신인 ‘한국건축작가협회’가 조직되었다.

1950년대의 주요작품으로는 남산국회의사당현상설계(1959, 미실시, 김수근 외)·명보극장(1957, 김중업)·부산대학교 본관(1957, 김중업)·서울대학교 농과대학교사(1957, 김희춘)·국립중앙기상대(1959, 정인국)·중앙대학교 도서관(1959, 차경순)·동국대학교 본관(1956, 송민구)·정신여자고등학교 과학관(1958, 김정수)·혜화동성당(1958, 이희태) 등이 있는데, 대체로 국제주의적인 경향의 작품들이다.

1961년 5·16으로 시작되는 1960년대는 경제개발과 더불어 건설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서울시민회관(1961, 이천승)과 프랑스대사관(1962, 김중업), 워커힐 각 동(1962, 김희춘 외)·명동성모병원(1963, 김정수), 한양컨트리클럽(1964, 이광노)·예총회관(1964, 강명구)·자유센터(1964, 김수근)·남산시립도서관(1964, 이해성)·제주대학교본관(1964, 김중업)·조흥은행본점(1964,이천승·정인국 외)·유네스코회관(1966, 배기형)·경기도청(1967, 김희춘)·복자기념성당(1967, 이희태) 등이 있다.

이것들은 국제주의적 경향이 기반이 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는 표현적인 노력이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밖에 196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여박물관의 설립 등을 계기로 전통논의가 있었으나, 어떤 귀결점에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국수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의 변화로는 기념적 공공건물의 속출과 업무용 건축의 대형화 및 주거건물의 변모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기념적 건축인 국립극장(1973, 이희태)·국회의사당(1975, 김정수 외)·세종문화회관(1978, 엄덕문) 등은 열주(列柱)를 사용한 고전적 근대주의와 한국적 건물의 세부를 반영한 것이며, 업무용 건물인 동방생명빌딩(1976, 박춘명)·대우센터(1976) 등은 합리주의적 근대주의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거건축은 합리적 기능주의에서 유기적 형태로의 변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와우아파트붕괴(1970), 대연각호텔 화재(1971) 사건 등은 이 시대의 조악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1980년대는 대한생명 63빌딩의 착공과 함께 시작되었다. 대한민국건축대전은 1982년 새로이 탈바꿈되어서 나타났고, 1980년대 초 우리의 근대건축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 건축의 근대화·식민성, 그리고 보존 문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건축사를 보존하고 재생하는 운동’으로서, 중앙청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재사용하기로 한 국무회의 의결(1983)이나 화신백화점의 보존 운동 등으로 이어져 갔다.

1980년대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은 도심의 재개발이었다. 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심 재개발은 서울을 대대적으로 확장시키고 고층화시켜 나갔는데, 이는 1960년대 청계천 복개 등에서 시작된 것으로, 을지로 2가 구역재개발사업(1983)은 물량주의적 작업이었다.

1986년의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의 서울올림픽 개최는 처음으로 국제사회의 인식권에 들어간 것으로, 국립경기장 선수촌·기자촌·올림픽공원 등은 우리 건축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2백만호 주택건설에 따른 분당·일산 등의 주택정책은 여과를 거치지 못하고 강행되어, 그 후유증은 건축 전분야에 퍼지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의 국제그룹 사옥, 중앙일보 신사옥 등에 국외 건축가들이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는 공동책임의 시대로서, 1993년 청주 우암상가아파트의 붕괴, 서울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등은 물량시대, 정신 황폐화시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만달러시대에 걸맞는 건축의 발전은 더욱 요원해지고, 본질적인 사명감이라든지 도덕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후퇴한 느낌이 있다.

청와대에서, 남산에서, 여의도에서, 광화문 한복판에서 또 다시 큰 것이 부서져 나갔다. 우리 모두 경험도 여과되지 않은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에 빠져 지내는 동안 1990년대도 이미 다 지나가고 있다.

<김정동>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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