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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2 (화) 22:07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0409      
[근대] 한국 근대 회화 (민족)
회화(근대 회화)

세부항목

회화
회화(삼국·통일신라시대의 회화)
회화(고려시대의 회화)
회화(조선시대의 회화)
회화(근대 회화)
회화(현대 회화)
회화(참고문헌)

한국 미술사의 '근대'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미술'이라는 신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4년의 신문 보도를 통해서였다. 그 뒤 여러 경로와 매체로 서양화법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혹은 접촉되었다. 1890년대부터 나타난 서양식 교육 제도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기본이 되는 서양화법의 도화(圖畵)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에는 고희동(高羲東)이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마침내 양화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선 시대의 맥을 잇는 전통 회화의 줄기와 서양 문화 수용인 양화의 새로운 줄기가 시대적 특징으로 병존하게 되었다. 그 두 줄기는 방법상 대립적이면서 한국 회화 예술의 새로운 궤도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1. 한국화

[조석진과 안중식]

전통적인 한국화의 근대적 변화는 장승업의 뒤를 이은 조석진과 안중식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그들은 작품 자체에서보다도 1920년대 이후의 확실한 근대적 양상을 개척하게 되는 새 세대를 양성한 측면에서 한층 역사적으로 기여하였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1881년에 정부가 일단의 청소년을 선발하여 중국 톈진(天津)의 기계 제작소로 서양 문화의 각종 기계 조작 및 제조법 연수를 보낼 때에 제도(製圖)부문에 뽑히면서 처음 만났다.

그들은 톈진에서 1년가량 머무르고 서울로 돌아온 뒤 다같이 직업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장승업의 화법에 감화를 받았음이 분명하며, 안중식은 장승업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1900년 무렵에 조석진과 안중식은 서울 화단에서 대표적인 쌍벽 화가로 명성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산수·인물(주로 神仙)·화조·영모·어해(魚蟹) 그림들은 어떤 근대적 특질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19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치는 시기의 주목할 만한 근대적 필치 구사는 오히려 홍세섭의 영모 그림의 참신한 현실적 시각과, 투명한 색채 표현이 서양화법의 수채화를 방불하게 하는 김수철의 꽃 그림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설사 작품에서 이렇다 할 근대적 요소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석진과 안중식은 1910년대까지의 가장 다양한 회화 역량의 두 대가였다. 그들은 수묵과 농채(濃彩 : 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로 산수화와 묵화는 물론 세밀한 묘사의 인물화·화조화에 이르는 모든 수법을 자유로이 구사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1902년에 어진(御眞) 봉사(奉寫)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안중식은 조석진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개화파에 속하였고, 근대적 현실 시각의 실경 작품도 더러 남기는 점에서 작품 내면이 한층 다채롭다. 그는 톈진에 갔다온 뒤 1891년에도 상해(上海) 등지를 여행하였다. 1899년에는 세 번째 중국 여행을 떠났다가 거기서 일본으로 직행하여 약 2년간 머무르며 시대적 견식을 넓히고, 회화의 경지도 심화시켰다.

그의 대표적 실경 그림은 1915년에 국망(國亡)의 현실을 상징하듯 굳게 닫힌 광화문과 그 뒤의 정적한 경복궁 및 백악을 조감한 구도와 정확한 원근법으로 그린 〈백악춘효 白岳春曉〉이다. 같은 해에 그려진 〈영광풍경 靈光風景〉(10곡병풍 연작)도 같은 수법의 사실적인 화면이다. 전통적 한국화의 근대적 사실주의는 바로 이 두 작품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근대주의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1920년대 이후 폭넓게 확산되었다.

조석진과 안중식의 제자 배출은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직후인 1911년에 서울에 등장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를 통하여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3년 교육 과정의 서과와 화과를 설정하고 창덕궁 왕실 지원으로 재능과 뜻이 있는 청소년을 입학시켰던 그 강습소에서 전통 회화 지도를 맡은 중심적인 선생이 조석진과 안중식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근대적 미술 학교인 서화미술회 화과에서는 1914년의 1회 졸업생인 이용우(李用雨)·오일영(吳一英)을 필두로 1918년까지 김은호(金殷鎬)·박승무(朴勝武)·최우석(崔禹錫)·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을 정식 졸업생으로 배출하였다.

변관식(卞寬植)은 같은 시기에 외할아버지인 조석진의 영향을 받아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였다. 1918년에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한 이한복(李漢福) 역시 일찍이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배웠다. 그런가 하면 고희동도 일본의 미술 학교로 양화 수업을 떠나기 전에 먼저 그 두 선생에게 전통 화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렇듯 조석진과 안중식은 1920년대 이후의 전통 화단을 새롭게 이끈 핵심적 주역들과 직접적 사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은 근대 전통 화단의 분수령이었다. 1919년에 안중식이, 이어서 1920년에는 조석진도 타계하여 그 두 화가로 대표되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 세대의 활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새 세대의 활약]

1918년은 민족 미술가들의 근대적 미술 지향의 의지가 처음 조직적으로 표명된 해였다. 그것은 서화협회의 발족이었다. 발기인은 서화미술회 교수진이던 안중식과 조석진·정대유(丁大有)·강진희(姜璡熙)·김응원(金應元)·강필주(姜弼周)·이도영(李道榮)과 1915년 이후 독자적으로 서화연구회를 운영하던 서화가 김규진(金圭鎭) 그리고 당시 서화계의 또 다른 대표적 인사들이던 현채(玄采)·오세창(吳世昌)·정학수(丁學秀)·김돈희(金敦熙)·고희동 등 13인이었다.

고희동만이 미술 학교 출신의 유일한 양화가이고, 다른 12인은 모두 옛 법을 묵수하던 전통 화가와 서예가 및 서화 겸비자였다. 때문에 그들은 협회 이름을 정할 때에 미술이라는 새 용어를 거부하는 반발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화협회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으로 근대적 미술 운동을 다각도로 도모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 운동과 그 뒤의 여러 사정으로 협회 활동이 유보되다가, 1921년 4월에 가진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약칭 협전)는 종합적 성격의 미술전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여기에는 회원들의 전통 회화와 서예, 신미술의 유화가 출품되었다.

전람회라는 외래의 미술 작품 발표 형식이 민족 사회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1913년으로 서화미술회가 주최한 ‘서화대전람회’였다. 출품자는 서화미술회 회원과 교수진 및 학생들이었고, 따로 고서화의 특별 진열이 있었다. 아직 양화가의 탄생이 있기 전이어서 그때에는 유화 출품은 없었다. 초기 서화협회전의 전통 회화 출품자는 안중식·조석진 이후 협회의 중심적 존재이던 이도영과 서화미술회 출신 신진들이던 이용우·오일영·김은호·박승무·최우석·이상범·노수현 외에 변관식·이한복 등이었다. 한동안 묵화와 유화를 병행하다가 1920년대 중엽부터 전통 회화로 완전히 복귀해 버린 고희동의 출품도 있었다. 그는 이도영과 함께 서화협회의 핵심적 지도자였다.

1920년대 중엽 이후에는 또다른 신진인 김경원(金景源)·백윤문(白潤文)·이영일(李英一) 등이 참가하고, 1930년대에는 배렴(裵濂)·한유동(韓維東)·장운봉(張雲鳳, 뒤에 德으로 개명)·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응로(李應魯)·정운면(鄭雲脈)·김영기(金永基)·이유태(李惟台) 등이 신진으로 출품하였다. 그들은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서화협회전의 민족적 움직임과 단합을 위험시하자 서둘러 시작한 대규모의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도 개별적으로 한때 또는 계속 참가하며 전통 화가로서의 자기 성장과 사회적 위치를 다졌다.

조선미술전에서는 식민지 정착의 일본인 출품자가 처음부터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민족 사회의 출품자에게 경쟁적 혹은 대결적 심리와 정신자세를 다지게도 하였다. 이 전람회의 심사·경연 제도는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었다. 입선·입상·특선자에 대한 신문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이 미술전은 최대 권위의 신인 등용문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신진들은 그 관문을 통하여 화단에 데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운영 규정에서 이 땅의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고착시킨 것은 일본인들의 ‘일본화’도 함께 출품되던 실정이 고려된 ‘서양화’의 대칭이었다. 그것은 민족적 입장에서는 정신적 독자성이 봉쇄당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미술전을 운영함에 있어서 서양화부·조각부는 물론, 동양화부까지도 동경에서 데려온 저명한 일본인 작가에게 작품 심사를 맡겼다.

조선총독부는 초기에는 민족 사회의 반발을 무마하는 계책으로 서화협회측의 이도영을 동양화부 심사원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람회 운영이 총독부의 정략대로 기틀이 잡혔다고 본 1927년의 6회전부터는 완전히 일본 화가에게 심사를 맡겼다. 거기서 일부 조선인 출품작 중에 일본화법을 취한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일시적 현상이었다. 뿌리 깊은 전통과 역사의 흐름을 가진 민족적 체질의 미의식과 표현 감각이 그렇게 쉽사리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는 없었다.

[표현 사고의 변혁]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 동양화부에서 부각된 신진 세대의 표현 사고와 수법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변혁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의도는 양화의 자연 사생법에서 배운 현실 풍경의 관조와 생활 주변의 일상적 시각미에 눈을 돌린 객관적 자연주의였다. 그러한 풍경화와 인물화·정물화에는 그 화면에 알맞은 자연스러운 명제가 붙여졌다.

고전적인 화법의 인습적 추종이나 틀에 박힌 화면 전개를 거부한 그들의 현실 시각 존중은 일본화의 근대적 사생주의에서도 자극받고 있었다. 과거의 관념주의와 형식주의가 배격된 그 근대적 변화는 1920년에 ≪동아일보≫에 기고된 변영로(卞榮魯)의 〈동양화론〉에서 처음 강력히 촉구되었다. 신문학 초창기의 신시(新詩) 개척자인 변영로의 그 글은 근대 미술 비평으로도 선구이다.

변영로는 ‘시대 정신’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잠깐 동양화를 보라. 특히 근대의 조선화를. 어디 호발(毫髮)만큼이나 시대 정신이 발현된 것이 있으며, 어디 예술가의 굉원(宏遠)하고 독특한 화의(畵意)가 있으며, 어디 예민한 예술적 양심이 있는가를. 단지 선인(先人)의 복사요 모방이며 낡아빠진 예술적 약속을 묵수(默守)함이다.” 그는 신화법으로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결론적으로 역설하였다.

예리한 그 방향 제시는 1921년 이후의 새로운 전통 회화 움직임에 곧바로 이어졌다. 표현 소재와 명제의 조용한 변혁은, 예컨대 초기 조선미술전에 출품되었던 고희동의 〈여름의 시골〉, 김은호의 〈아가야 저리 가자〉, 박승무의 〈흐린 달밤〉, 이상범의 〈모연 暮煙〉, 이용우의 〈제7작품〉, 변관식의 〈가을〉, 이한복의 〈엉겅퀴〉, 최우석의 〈봄의 창경원〉, 노수현의 〈산촌귀목 山村歸牧〉 등에서 엿볼 수 있다.

1920년대의 그러한 전통 개혁의 의지는 새 세대 개개인의 특출한 재능과 사제 관계 및 체질적 성향에 따라 크게 두 경향을 형성시켰다. 곧 과거와는 다른 수묵 담채파와 선묘 채색파였다. 전통적 수묵 산수의 개혁파로 말할 수 있는 대표적 신예는 이상범·노수현·변관식 등이었다. 이들의 공통적 관심과 특징은 새로운 자각의 향토적 자연애였다.

1923년에 그들은 중국화풍 탈피와 일본화풍 배격의 자주적 조선화 방향을 모색, 연구하자는 모임의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이용우도 참가하였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20대 초의 청년 화가로서 그들은 각기 자신의 수법을 시도하고 추구하였다. 이상범은 농가와 논밭이 나타내는 평범한 산야를 일관되게 주제 삼아 누구보다도 짙은 향토애의 정경을 표현하였다. 노수현도 자연 풍경과 농촌 생활의 서정을 소재 삼아 필선(筆線)의 깔끔함과 정확한 묘사 태도를 보였다.

변관식은 현실적 자연경일지라도 자신의 화의로 자유롭게 변용시키며 합리적 사실주의에 구애받지 않은 개성적인 면으로 주목을 끌었다. 반면에 이용우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실험 정신을 발휘하였다. 1928년의 조선미술전 출품작이던 바위와 물 그림에 〈제7작품〉이라는 현대적 명제를 붙인 것은 그의 진취적 사고의 한 단면이었다. 박승무는 수묵 담채파의 또 다른 신예였다. 그는 수려한 산세와 수목과 들길을 확실한 사생풍으로 주제 삼았다.

근대적 표현 사고에 입각한 선묘 채색화는 김은호·최우석·김경원·백윤문에 의하여 추구되었다. 동경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수학한 이한복과 역시 일본에서 공부한 이영일의 채색화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서화미술회 재학 때부터 천부적 묘사력의 초상화와 미인화 및 화조화로 두각을 나타냈던 김은호야말로 근대적 채색화의 대표적 개척자였다. 그는 주변에서 택한 여러 모습의 여인상을 섬세한 필선과 현실적인 채색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화조화에서도 독보적 기량을 발휘하였다. 일본화법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 때도 있었으나 그 뒤로 자신의 우아한 수법을 정립시켰다.

최우석의 초기 채색화의 인물과 풍경은 대체로 김은호와 유사하였다. 그러나 한때 최우석이 민족사의 인물상 제작에 집착하였던 내면은 각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하나도 보존되지는 못하나 그는 조선미술전에 〈포은공 圃隱公〉·〈이충무공 李忠武公〉·〈고운선생 孤雲先生〉·〈을지문덕 乙支文德〉 등을 출품하여 민족의식을 나타내었다.

이도영의 제자인 김경원은 양화와 일본화에서 영향을 받은 적극적인 채색화로 꽃과 풍경을 즐겨 그렸다. 이한복의 경우도 일본화 기법에 양화의 사실주의를 절충한 채색화로 꽃과 풍경을 다루었다. 이영일은 가장 완연한 일본화 양식으로 꽃과 새와 인물을 그린 작품을 조선미술전에 출품한 존재였다. 백윤문은 그가 사사한 김은호의 수법을 따르며 주목을 받았다.

앞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시기에 전통적 산수화법과 근대적 인물화를 자유롭게 병행시킨 화가로는 지성채(池盛彩)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풍은 뚜렷한 주목을 사지는 못하였다. 그보다도 허백련(許百鍊)으로 대표되는 전통 고수의 제3의 경향이 있었다. 시대의 자각과 고법(古法) 거부 및 창조적 화법 지향의 신흥세가 조석진과 안중식의 제자들에 의하여 주도되던 1920년대에 허백련의 화단 진출은 처음부터 보수적이었다.

신학문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가 정통 남종화법을 연마하게 된 그는 초기 조선미술전에서 그 경향으로 각광을 받은 뒤 광주(光州)에 정착하여 호남화파를 창도하였다. 고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그는 자신의 화면에 전통적 고격성(古格性)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1930년대와 일제 말기]

1920년대에 시작된 전통 회화의 양상 변화는 1930년대의 잇따른 신진 출현과 더불어 더욱 다채롭고 풍성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앞에서 엿본 세 경향은 한층 폭을 넓히게 되었다. 그 시기의 가장 활발한 계열은 김은호를 정점으로 하는 선묘 채색파였다.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1930년부터 조선미술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고 서화협회전에도 참가한 신진은 한유동·장운봉·김기창·장우성·이유태·조중현(趙重顯)·정완섭(鄭完燮)·정홍거(鄭弘巨)·김화경(金華慶)·배정례(裵貞禮)·허민(許珉)·안동숙(安東淑)·이규옥(李圭鈺)·김학수(金學洙)·김재배(金栽培) 등이었다. 이들은 스승의 작품과 기법주의를 본받은 곱고 정확한 필선과 맑은 설채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포함한 인물화와 꽃·새·동물 기타 생활 주변의 대상을 작품 제재로 삼았다. 이들은 1936년에 동문 모임으로 ‘후소회(後素會)’를 만들고 1943년까지 6회의 회원전을 가지며 주목을 끌었다.

이상범의 제자들도 1941년부터 청전화숙전(靑田畵塾展)을 가졌다. 후소회전과 청전화숙전은 매우 대립적이었다. 채색화와 수묵화로서의 대립적 측면이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이상범의 문하생들은 선생의 수묵화 기법과 향토적 풍정 및 야취(野趣) 표현의 특질을 본받았다. 청전화숙전은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제약되던 1943년까지 3회전을 가졌다. 그동안의 동문 출품자는 배렴·심은택(沈銀澤)·이현옥(李賢玉)·정용희(鄭用姬)·박원수(朴元壽)·정진철(鄭鎭澈) 등이었다.

1937년 이후 김은호와 이상범은 다같이 조선미술전 동양화부 참여 작가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한 배경과 함께 그들의 문도들도 대외적으로 뚜렷한 두 경향을 나타냈다. 1939년에 광주에서 시작된 허백련 중심의 연진회(鍊眞會)의 움직임은 서울의 시대적 흐름과는 본질적으로 궤도를 달리하였다. 제3의 지방화파로 태동한 연진회의 정신적 방향은 철저한 전통주의의 남종화법 숭상 및 문인화법의 계승이었다. 허백련 외에 연진회 초기의 대표적 존재인 정운면과 허행면(許行脈) 등이 고법주의를 보인 것이나, 그 뒤의 구철우(具哲祐)·이범재(李範載) 등이 문인화 범위에 그치는 내면이 그 한계를 말하여 준다. 한때 허백련을 사사하였으나 기질적으로 자신의 수법을 실현시킨 성재휴(成在烋)는 예외적 이탈이었다.

그런가 하면, 1930년 이전부터 목포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법을 추구한 진도(珍島)의 같은 허씨 문중 출신인 허건(許楗)이 지척인 광주의 허백련에게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허건은 오히려 서울의 새로운 사생풍 향토주의에 감화를 받으며 경쾌한 필치로 자신의 생활주변의 자연경을 소재 삼았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막바지 단계에서는 전통 화단뿐 아니라 양화계에서도 몇몇 화가가 일제에 협력하는 그림을 강요당하고 혹은 자의로 그린 수치스러운 내막도 있었다.

2. 양화

[서양 화법의 수용 배경]

합리적 사실주의의 서양화법이 중국의 북경을 통하여 한국에 알려진 시초는 17세기 인조 연간의 천주상(天主像) 유입과 그밖에 서양 풍속을 소개한 그림이 들어 있던 서양 책의 접촉 등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한 현실감을 수반하는 사실적인 서양화법은 당시 북경의 일부 화가들에게 이미 침투되어 재래 수법에 양풍을 가미한 초상화·화조화·동물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새로운 화풍도 여러 경로로 서울에 알려지고, 몇몇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두량의 〈견도 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작가 미상의 또 다른 개 그림인 〈맹견도 猛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에서 그 양풍 화법의 명백한 영향이 엿보인다. 천주교도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순교한 이희영의 한층 뚜렷한 서양화풍의 〈견도〉(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에 대해서는 1926년에 오세창(吳世昌)이 “서양화법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효시로 여겨진다.”는 발문을 썼다. 이희영은 천주교도로서 예수상을 거듭 그렸음이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다.

앞에 언급한 개 그림들이 비록 서양화법의 영향을 반영하고는 있으나, 그 표현은 어디까지나 종이에 먹과 붓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종래적인 묵화의 테두리에서 양풍 화법을 원용하였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양풍 회화 개척의 초기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화법의 양풍 요소와 무관하지 않게 주목되는 것은 주제의 개 그림 자체가 모두 서양종이라는 점이다.

서양개를 그린 그림 외에 몇몇 초상화에서도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의 양풍 화법이 가미된 예가 있다. 18세기 작품으로 여겨지는 작가 미상의 〈이재(李縡)의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그러한 작례(作例)의 하나이다. 초상화에서는 얼굴 묘사에서만 서양화적인 입체감 표현이 시도되었다. 앞서와 같은 서양화 수법에 대한 관심과 수용 태세를 반증하는 주목할 만한 배경 기록의 하나는 1780년에 연행사(燕行使)를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쓴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속의 ‘양화(洋畵)’ 항목이다.

거기에는 박지원이 북경의 천주교당에서 본 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현실적 색채로 그려진 인물화와 천사들의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묘사에서 받은 충격적 감동과 경탄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 시기에 실물 유화도 적지 않게 유입되었던 사실이 기록에 전한다. 박지원 이외에도 북경의 내왕자들에 의하여 양화 지식이 거듭 전파되었다. 1830∼1840년대의 헌종 연간에 간행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양화’ 항목에 이르면 그 놀라운 색상과 생동감이 특이한 약물 사용 때문이라고 해설할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양화 전문화가의 출현은 191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다만 양화가 출현을 자극하고 가능하게 한 직접적 배경으로서의 사건들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1876년 개항 이후의 일본 및 구미 여러 나라와의 교류와 서양 문물의 잇따른 유입 및 접촉으로 가속된 시대 변화 상황에서 있었던 사건들이었다. 1899년에 왔던 네덜란드 계 미국인 화가 보스(Vos,H.)가 서울에 왔다가 고종 황제와 황태자(뒤의 순종)의 등신대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 크게 화제가 되었던 일은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서울에서 정상적인 유화가 직접 그려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보스는 서울에서 한 달쯤 머무르며 서울 풍경과 다른 인물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런가 하면, 1900년에는 프랑스가 협력을 약속했던 관립 공예 학교 설립 추진의 일환으로 파리에서 초빙된 젊은 도예가 레미옹(Re'mion)이 정부 사정의 변화로 그 학교 계획이 무산되는 바람에 1904년까지 서울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동안 제한된 개인적 도예 생활 외에 수채화도 그린 사실이 있었다. 보스와 레미옹이 서울에서 보여준 양화 기법은 그것을 직접 목격한 한국인에게는 신기함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그때의 목격자의 한 사람이 뒤에 양화 전공을 위하여 일본 유학을 떠난 고희동이었다. 그는 법어학교(法語學校)에 다닐 때에(1903년에 졸업) 어느 날 학교에 레미옹이 놀러 와서 같은 프랑스 사람이던 프랑스어 교사 마르텔(MartelE., 한국명 馬太乙)의 초상을 연필로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명이 뒷날 양화 개척의 결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양화가의 탄생-고희동·김관호·나혜석]

고희동이 법어학교에서 프랑스 어를 공부한 뒤 궁내부(宮內部) 하급 관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림에 흥미를 가져 명성 높던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한동안 전통 화법을 익혔다. 다시 신문화 개척에 뜻을 두고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미술학교 유학 길에 오른 것은 국망 직전인 1909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1910년과 그 다음 해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평양의 부호집 태생이던 김관호(金觀鎬)와 김찬영(金瓚永)이 뒤따라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1913년에는 나혜석(羅惠錫)이 동경의 여자미술학교에 입학, 양화를 전공하여 여성으로서 선구자가 되었다.

그들은 1910년의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여러 배경과 경로로 일본 유학 길에 올라 신학문 및 신문화 수학을 꾀한 상당수의 청년 학도들 중의 선택된 서양 미술 지망자였다. 새 시대 개척의 동경 유학 서양 미술 학도들은 1915년부터 유학 과정을 마치고 서울과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럼으로써 한국에서도 마침내 양화가의 등장을 보게 되고, 전통 회화와 병존하며 새로운 시대적 회화 문화를 전개하게 된 양화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앞의 양화 개척자들이 동경 유학에서 익힌 유화 기법은 일본도 서양에서 받아들인지 얼마 안 되는 초기 수준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및 인상파적인 밝은 색채 수법이었다. 1915년에 그려진 고희동의 〈자화상〉(국립현대미술관 소장)과 1916년의 미술 학교 졸업 제작인 김관호의 〈해질녘〉(동경예술대학 자료관 소장)에서 그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김찬영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미술 학교 유학은 하였으나 그 뒤의 제작 활동이 일체 없었다. 반면 나혜석의 유화는 1920년대 이후의 것들이 상당수 전해진다.

고희동과 김관호는 양화가로서의 활동을 10년 이상 지속하지 못하였다. 신미술 유화 개척 선구자로서의 역사적 명예를 그들이 그렇게 중도에 포기한 배경에는 이질적인 양풍 그림에 대한 일반의 백안시와 몰이해가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정신적 좌절에 있었다. 고희동은 유화의 작품 생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사회가 전통 회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1920년대 중엽부터 전통 회화로 전향해 버렸다.

그리고 김관호는 평양에서 부유한 생활을 즐기며 작품에 열의를 보이지 않다가 같은 무렵에 화필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최초의 양화가로 각광을 받던 시기의 작품 실적과 양화계 형성 및 발전에 기여한 공적만으로도 그들의 역사적 위치는 뚜렷하다. 고희동은 동경 유학을 마친 뒤, 그 또한 최초의 조선인 미술 교사로 몇몇 중학교에 출강하는 한편, 그의 집 사랑방에서 그림에 재질이 있는 학생들에게 따로 석고·데생의 목탄화를 지도하여 양화가를 지망하도록 자극하였다. 그때의 고희동 주위의 중학생급 미술 학도들은 1919년에 고려화회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고,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공간도 얻어 연구소를 삼기도 하였다.

1920년부터 고희동을 길잡이로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간 장발(張勃)·김창섭(金昌燮)·이제창(李濟昶) 등이 그 때의 회원들이었다. 그리고 양화가로서의 고희동 자신의 작품 실적은 1921년과 그 다음 해에 시작된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 초기에 몇 번 출품한 뒤 끝나 버렸다. 김관호는 미술학교 졸업 제작인 〈해질녘〉이 그해 가을의 일본 문부성미술전(약칭 文展)에서 일약 특선에 오르면서 화려한 출발을 했다. 서울에서는 창덕궁의 이왕실(李王室)을 비롯한 민족 사회에서 큰 칭송을 받으며 작품 의뢰도 받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고향인 평양에서는 그해 연말에 평양 일원을 그린 유화들로 개인전을 가졌다. 이것은 한국인 양화가로서의 첫 개인전 기록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의 그의 작품 내막은 제2회 조선미술전에 출품된 〈호수〉 정도이다. 그러고는 1925년에 평양에서 김찬영과 소성회(塑星會) 회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한때 서양화법을 지도한 사실이 그의 양화가로서의 활동의 전부이다. 고희동과 김관호가 양화 선구자의 위치를 중도에 스스로 저버린 반면, 여성인 나혜석은 1930년대 후반에 가서 비극적으로 파멸할 때까지 유화가로 뚜렷한 작품 업적을 남겼다.

[양화계의 형성(1920∼1930년대)]

1920년대에 접어들자 양화가의 수는 해마다 급속히 증가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근대적 미술 전람회가 열리면서 일반 시민이 양화의 세계를 접촉하는 기회도 많아지게 되었다. 양화가 포함된 최초의 단체 전람회는 서화협회전이었다. 1918년에 발족한 서화협회는 새로운 민족 미술 창달을 위한 협회 이념을 ‘신구 서화(新舊書畵)의 발전, 동서 미술의 연구’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서화협회전에는 신·구서화와 함께 처음부터 유화 작품 출품이 있었다. 1921년에 열린 첫 회의 유화 출품자는 고희동과 나혜석이었다. 그 뒤의 서화협회전 유화 참가 내막은 조선미술전과는 달리 확실한 목록이 전하지 않고 도록도 간행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1921년에 발행된 ≪서화협회회보≫ 제1호와 다음 해의 제2호에 게재된 회원 명단 중의 양화가 정회원은 고희동 외에 김관호·김찬영·장발·강진구(姜振九)·이제창 등으로 밝혀져 있다.

한국화 항목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민족적 움직임의 서화협회전이 조선총독부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화협회전을 압도하는 최대 규모의 총합 미술전이자 자극적 심사 경연장으로 삼은 식민지 정책의 조선미술전을 서둘러 시작하여 대외적 권위를 과시하게 하였다. 미술계 진출의 제도적 관문으로 사회적 권위가 따르게 된 조선미술전은 현실적 명리 추구자들에게 서화협회전을 외면하거나 경시하게 한 일면도 보게 하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렇게 기울어질 수는 없었다.

서화협회전의 정신과 의미를 깊이 새기며 끝까지 지키려고 한 확실한 의식의 미술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조선미술전을 거부하며 서화협회전에만 참가한 뚜렷한 저항자도 있었다. 다음은 1936년에 15회전으로 중단될 때까지의 서화협회전 양화 출품자(1회 이상) 명단이다.

고희동·나혜석·장석표(張錫豹)·심영섭(沈英燮)·이승만(李承萬)·김응진(金應璡)·이제상(李濟商)·권명덕(權明德)·정현웅(鄭玄雄)·이제창·김주경(金周經)·이해선(李海善)·이병규(李昞圭)·임용련(任用璉)·백남순(白南舜)·길진섭(吉鎭燮)·김중현(金重鉉)·김호룡(金浩龍)·김창섭·이봉상(李鳳商)·홍우백(洪祐伯)·손일현(孫日鉉)·도상봉(都相鳳)·신홍휴(申鴻休)·송정훈(宋政勳)·임수룡(林水龍)·박광진(朴廣鎭)·공진형(孔鎭衡)·장발·윤희순(尹喜淳)·김용준(金瑢俊)·이종우(李鍾禹)·이관희(李觀熙)·홍일표(洪逸杓)·이동훈(李東勳)·김종하(金鍾夏)·엄도만(嚴道晩)…….

서화협회전의 양화 내막은 초기에는 겨우 몇 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의 10회 기념전에는 모두 20명이 약 50점을 출품하는 발전을 보였다. 그 뒤 마지막 15회전 때에는 26명이 참가하였다. 조선미술전 서양화부 입선자도 처음에는 몇 명에 지나지 않다가 해마다 증가하여 서화협회전과 대비되었다. 조선미술전에서는 중학생과 독학도로부터 일본의 미술 학교에 유학 중이거나 졸업한 신진 및 소수의 기성 작가가 구별 없이 참가하여 일본인 출품자와 입선·특선을 겨루었다. 그 내면과 서화협회전에서의 양화 증가는 곧 민족 사회에 있어서의 양화 정착과 양화계의 형성 과정을 단적으로 말해 준 것이었다.

1944년까지 지속된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여 미술계 진출의 기반을 다졌거나 명성을 구축한 주요 작가를 등장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나혜석·송병돈(宋秉敦)·손일봉(孫一峰)·김중현·이제창·이승만·김종태(金鍾泰)·박명조(朴命祚)·김응진·윤희순·정현웅·홍우백·서동진(徐東辰)·이동훈·이마동(李馬銅)·임응구(林應九)·이인성(李仁星)·이봉상·이철이(李哲伊)·김영창(金永昌)·김원(金源, 본명 源珍)·박영선(朴泳善)·서진달(徐鎭達)·윤중식(尹仲植)·박수근(朴壽根)·김용조(金龍祚)·양달석(梁達錫)·이관희·손응성(孫應星)·박상옥(朴商玉)·심형구(沈亨求)·최영림(崔榮林)·김만형(金晩炯)·김인승(金仁承)·김종하·김흥수(金興洙)·이대원(李大源)·주경(朱慶)·한홍택(韓弘澤)·조병덕(趙炳悳)·장이석(張利錫)…….

앞의 명단 중에서도 조선미술전이 요구하였던 아카데믹한 수법의 테두리에서 특출한 재능으로 연특선을 기록하여 1935년 이후 추천 작가가 된 대표적 존재는 김종태·이인성·심형구·김인승이었다. 그리고 말기 조선미술전에는 장욱진(張旭鎭)·권옥연(權玉淵)·박득순(朴得錞)·황유엽(黃瑜燁) 등이 입선을 거듭하기 시작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룹 운동, 새로운 방법의 추구]

신미술 운동으로서의 양화 연구 그룹의 효시는 1919년의 고려화회였으나, 공동 작품 발표를 위한 그룹으로는 1923년에 강진구·박영래(朴榮來)·정규익(丁奎益)·나혜석 등이 참가한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와 그해에 정규익이 또 하나 조직하였던 서울화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과 인천에서 각각 한 번씩의 그룹전을 가졌을 뿐 작품전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1927년에는 김창섭·안석주(安碩柱)·이승만·임학선(林學善) 등이 ‘조선 예술의 창조’라는 이념을 내건 창광회(蒼光會)를 만들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 없이 의욕만 보이다 말았다.

그러다가 한결 본격적인 성격의 녹향회(綠鄕會)가 1928년 서울에서 발족하여 작품전을 가졌다. 창립 회원은 심영섭·장석표·박광진·김주경이었다. 그러나 이 그룹도 1931년에 2회전을 가진 뒤 중단되었다. 다만 2회전 때에 오지호(吳之湖) 등 새 회원이 가담하며 ‘조선 양화의 발전 촉진과 그 대중화’를 표방하였다.

1930년부터 수년 계속한 동경미술학교 동문들의 동미전(東美展)은 전통 회화와 도안·공예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양화부의 비중이 컸던 또 하나의 계몽적 신미술 운동이었다. 그때의 양화 출품자는 이종우·이제창·이병규·도상봉·황술조·이해선·김용준·이마동·홍득순(洪得順)·김응진 등이었다. 1934년에는 이종우 등이 새 양화 단체로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하고 회원 작품전을 가졌다. 그런데 그 회칭이 총독부 당국에 의하여 일본 배격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경고를 받고 그 회칭 사용의 철회를 강요당하여 모임 자체가 해체된 상태였다.

1937년에 가서야 회칭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새 출발의 작품전을 가졌다. 그때의 출품 회원은 이종우·장발·공진형·이병규·황술조·송병돈·김용준·이마동·길진섭·홍득순 등 동경미술학교 출신들과 임용련·백남순·신홍휴·구본웅(具本雄) 등이었다. 그들의 작가적 성향이 당시의 불가피한 여건으로 거의가 일본 양화의 수법을 따르던 보편적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범주였다. 그러나 파리 중심의 새로운 창의적 순수주의 사조에 자극과 감화를 받아 야수파적인 표현과 그 밖의 반전통적 방법을 대담하게 시도하던 구본웅이 포함된 것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목시회 회원 중의 이종우·장발·임용련·백남순 등은 구미에 직접 유학한 화가였다. 그들은 일본 양화와의 동질성에서 벗어나 시야를 구미로 넓힐 수 있도록 전체 양화계에 유형무형으로 작용한 존재였다. 구미에서 체득한 여러 형태의 참신한 표현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린 그들의 작품은 시기적으로 아주 요긴한 자극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 한국 양화 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 원인은 그들 자신의 적극적 가치 투쟁이 미흡하였던 점과 사회 배경에도 있었다. 양화에 대한 일반 사회의 반응이나 관심은 전통 회화에 비교가 안되게 냉담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목시회전도 1938년에 겨우 2회전을 가진 뒤 좌절하였다. 1920년대에 구미로 유학을 떠났던 선택된 소수의 화가들도 그쪽의 혁신적 추구였던 야수파·입체파·표현파·초현실파·추상파 등에는 별로 호응하지 못하고 대체로 종래의 방법에 머물렀다. 그리고 귀국 후에도 이렇다 할 새바람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의 온건한 예술 태도와 관련이 있다.

반면, 1930년대 이후 진취적 예술 의식의 몇몇 새 세대가 일본에서 공부하며 그곳 양화계 일각에 파급되던 서구의 충격적 새 미술 사조와 전위적 조형 정신에 적극 호응한 대담한 작품 활동을 보인 것은 하나의 시대적 필연이었다. 그 대표적 기수는 표현파·야수파 계열의 구본웅 외에 순수 조형주의와 추상파 계열의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시도한 순수한 작품들은 구본웅을 제외하고는 1940년을 전후하여 동경의 반관전파(反官展派) 전람회에서 주로 발표되어 서울 화단이나 민족 사회와는 직접적 관련이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1945년의 광복과 더불어 새로이 틀이 잡히는 양화계에 새로운 창조적 활력소로 연결되었다. 한편, 1930년대 후반에는 오지호와 김주경이 밝고 신선한 색채 구사의 인상주의를 지향한 두드러진 작품 활동이 있었다.

<이구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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