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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02:09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263      
[조선] 조선 문화 (한메)
조선 시대의 문화 ('조선' 항목에서)

[문화]

<한글 창제>

조선 시대의 문화적 성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로 알려져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 문화사상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일부 한자의 음만을 사용한 이두나 그 자획의 일부를 떼어 표시하는 구결 등으로 한문에 토를 달아 의사표시를 하기도 했으나 일반 백성은 대개 문맹의 상태였다. 이에 세종은 일상 쓰는 말에 부합하는 민족의 문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누구나 쉽게 문자를 배워 쓰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조선적인 지배 질서를 확립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훈민정책의 일환으로 국자(國字)를 제정하려는 뜻을 가지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새 글자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28자로 된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1443년(세종 25)의 일이며, 그 뒤 오랜 연구와 실제경험을 거쳐 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용비어천가》를 비롯, 불교ㆍ유교의 여러 경전 및 농서ㆍ병서 등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글소설ㆍ한글시가가 지어지면서 한글은 국자(國字)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상ㆍ종교>

⑴ 유학

조선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왕씨 정통의 문란과 배원 친명의 외교 정책에서 찾으려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에 깃든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의 반영이었다. 조선초 성리학은 철학적인 면보다 실제적인 법전ㆍ사장(詞章) 등에 주력한 관학파(官學派;훈구파)가 기성사류(旣成士類)를 형성하였다.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격한 정도전(鄭道傳)과 성리학 연구에 의한 이상적 선정덕치(善政德治)의 근거를 탐색한 권근(權近)이 대표자였다.

조선의 문물 제도가 기틀을 완전히 잡았던 15세기부터는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사림파는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 실천에 심혈을 기울여 실천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뚜렷이 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는 성리학적 의리(대의)의 정치적 합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정몽주(鄭夢周)에서 시작하여 길재(吉再)ㆍ김숙자ㆍ김종직(金宗直)ㆍ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관(學統觀)은 도학적 측면의 의리구현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한국의 성리학이 의리 실천의 차원을 넘어 이론적 탐색이 본격화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황(李滉)ㆍ이이(李珥)를 중심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理氣)해석의 문제를 두고 학계는 퇴계학파ㆍ율곡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ㆍ주기파(主氣派)로 갈라졌다. 주리파는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되어 이황의 집대성을 거쳐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정구(鄭逑) 등으로 계승되고, 주기파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의 집대성을 거쳐 김장생(金長生)ㆍ정엽(鄭曄) 등으로 계승되었다. 한국 성리학의 자랑인 사칠론을 중심으로 한 심성론(心性論) 위주의 심오한 이론탐구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체제합리화에 의한 사회의 안정화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질서가 문란해졌던 16세기말, 성리학의 중심문제로 떠오른 것은 예학(禮學)의 문제였다. 성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라고 할 예학은 정구ㆍ김장생 등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으나, 복상(服喪)문제를 둘러싼 예송(禮訟) 형식은 당쟁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또 한번의 이론논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변화되었다. 이는 경화된 예학적 사회풍토를 사칠론 등의 심성론만으로 뒷받침하기에 부족함을 느껴 우주론의 차원으로 이론을 심화ㆍ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리설의 전통은 19세기 위정척사사상으로 이어졌고, 주기설의 전통은 임성주(任聖周)ㆍ정약용(丁若鏞)을 거쳐 최한기(崔漢綺)에 이르러 서양의 경험론과 결합되었다.

한편 영ㆍ정조 시대인 18세기에는 종래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학풍을 떠나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민생(民生)을 중시하는 실학이 크게 대두, 천문학ㆍ역학ㆍ수학이 발전하였고 새로운 지리서ㆍ역사서ㆍ의서ㆍ농서 등이 간행되었다. 실학자들은 토지제도ㆍ조세제도ㆍ신분제도의 개혁 및 상공업의 중시, 정치ㆍ경제ㆍ사상의 변혁을 제기하였다.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柳馨遠)ㆍ이익ㆍ홍대용(洪大容)ㆍ박지원(朴趾源)ㆍ박제가(朴齊家)ㆍ정약용 등이 있다. 특히 상공업을 일으키고 기술을 도입, 부국강병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北學派) 사상은 뒷날 개화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개화기 민권사상으로 연결되었다.

⑵ 불교

조선은 처음부터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불교 중심의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백성들 가운데는 여전히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사원의 수를 대폭 줄이는 동시에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사원경제를 약화시켰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로 불교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태조ㆍ세종ㆍ세조는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였다.

세종은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법회(法會)를 행하였으며, 세조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경을 번역, 간행하도록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짓는 등 사원 및 승려의 보호에도 힘썼다. 그 뒤 성종ㆍ연산군ㆍ중종은 다시 불교억압책을 써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잠시 불교 보호책을 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휴정(休靜) 등이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휴정은 선ㆍ교 양종을 조계종(曹溪宗)으로 일원화하였고, 염불을 선(禪)과 동일시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불교가 배척되던 조선사회의 승려들은 천인 대우를 받았으며, 사찰은 산간으로 밀려났다.

⑶ 서학

1603년(선조 36) 무렵에 명나라에 갔던 사신 이광정(李光庭)이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져온 것이 서양을 알게 된 시초였다. 인조 이후부터는 서양의 많은 문물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과학이나 사상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졌다. 서양인과의 접촉이나 그 문물의 전래는 우선 동양만을 그 전부로 알던 조선인의 세계관을 그만큼 넓혀 주었고, 또 그로부터 얻은 과학지식이나 새로운 식견은 두 전란을 치르고 난 당시의 지식인들의 관념이나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외적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같은 가톨릭서적은 새로운 학문의 대상으로서 실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이는 뒤에 남인학자(南人學者)를 중심으로 한신앙운동으로 번져 갔고, 기존사회가 이미 붕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던 18세기 후반기에는 일부 사회계층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가톨릭사상은 양반 중심의 사회질서나 유교적인 윤리도덕과 생활규범을 혼란케 하는 것이었으므로, 전례문제를 계기로 점차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가톨릭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등 3차례에 걸쳐 큰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신도는 갈수록 늘어 21년 조선교구(朝鮮敎區)가 독립하였으며 문호개방 후에는 그리스도교의 국내선교가 묵인되었다.

⑷ 동학

동학은 60년(철종 11) 최제우가 양반사회의 모순을 해소하고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인내천(人乃天)사상을 기본으로 유ㆍ불ㆍ선 3교를 통합하여 창시한 민중 종교이다. 동학의 교리는 《동경대전(東經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에 담겨 있다. 동학은 1863년 최제우가 체포, 처형되는 등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까지 발전하였는데 여기에 개입된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로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 뒤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동학계통의 유사종교가 속출하여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그 가운데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은 미래국토, 이상향에 대한 대망사상으로, 후천개벽사상과 함께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출현한 민중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1909년(순종 3) 나철(羅喆)은 대종교를 창건, 민족 원시신앙을 체계화하였고, 김항(金恒)은 《정역(正易)》의 체계화를 통해 후천개벽을 주장하였다. 또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강일순(姜一淳)이 전라도 고부(古阜)지방에서 일으킨 증산도와 16년 박중빈(朴重彬)이 창시한 원불교 등이 민중종교로서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⑸ 도교와 민간신앙

고려 후기부터 국가적인 보호를 받던 도교신앙은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초기에는 소격서가 설치되어 제천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 사림들이 도교배척운동을 펴 소격서가 폐지되었고 성리학을표방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도교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여전히 도교계통의 신앙이 전해졌고, 도인(道人)들은 환인(桓因)ㆍ단군(檀君)을 한국 도파의 시조로, 김시습(金時習)을 중조로 내세우면서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무격신앙(巫覡信仰)은 금무(禁巫)라는 국가 정책에 따라 다소 제한을 받았으나 여전히 번창하였다. 무격을 전담하는 활인서(活人署)ㆍ성수청(星宿廳) 등의 관청에 국무(國巫)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하도록 하였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복무(占卜巫)가 성행하였다. 그 밖에 고려 이래의 풍수설(風水說) 및 《정감록(鄭鑑錄)》 《토정비결》 등의 비기ㆍ참서(讖書)가 민간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과학ㆍ기술>

조선 초기에는 천문기기의 제작을 비롯한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유교의 정치철학에 있어서 왕도정치는 천도ㆍ천리와 합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문기상의 변화는 임금의 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현실적으로도 주로 토지경제에 의존하는 농본사회였으므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천문역상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중국의 역법(曆法)을 참고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었고, 이천ㆍ장영실(蔣英實)에게 대소의 간의(簡儀),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천문기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특히 자격루(自擊漏)와 현종 때 제작된 혼천시계 등은 매우 정밀하고 우수한 기기들로서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물리적 원리와 기술을 망라한 것이었다. 1442년(세종 24)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각 도는 물론 군현에까지 배치하여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중농 정책과 관련하여 농학이 발달하였는데, 세종 때 한국의 풍토에 맞는 농사기술과 품종의 개량을 소개한 《농사직설(農事直說)》이 편찬되었고, 후기에도《색경(穡經)》 《농가집성》 《임원경제지》 등 많은 농서가 간행되었다. 농업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시비법(施肥法)이 개발됨에 따라 휴한법(休閑法)을 극복하고 연작법(連作法)을 보급시켰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수전(水田)은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한전(旱田)은 농종법에서 견종법으로 바뀌어갔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삼남지방에서는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하여졌다.

의학ㆍ약학에 있어서는, 세종 때 국산약재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학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의방유취(醫方類聚)》가 편찬되었고, 1613년(광해군 5)에는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서의 하나로 꼽히는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총 23편으로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의학서들과 함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한 이제마(李濟馬) 등 의사ㆍ의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초기의 왕권 확립기와 영ㆍ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기에 각종 서적의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이에 따라 활자의 개량과 인쇄술의 발달이 촉진되어 계미자(癸未字)ㆍ갑인자(甲寅字) 등 정교한 활자가 많이 개발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화차(火車)ㆍ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ㆍ거북선 등 여러 가지 무기가 개발, 주조되었는데 특히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鐵甲船)으로서 임진왜란에서 크게 위력을 발휘하였다.

<예술>

⑴ 문학

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작됨으로써 국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시대에 박인로(朴仁老)ㆍ신흠(申欽)ㆍ윤선도(尹善道) 등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박인로의 <조홍시가>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夫四寺詞)> <오우가(五友歌)> 등이 유명하다. 후기에 이르면서 서리나 기생 등으로 작가층이 확대되었고, 형식면에서 장형화(長型化)되고 내용면에서 사실성을 띤 사설시조가 유행하였으며, 또한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 박효관(朴孝寬)ㆍ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 등 여러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가사(歌辭)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이후 사대부문학으로 자리잡아 은거가사ㆍ유배가사ㆍ기행가사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고, 송순(宋純)을 거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그 뒤 영남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규방가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국문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홍길동전》의 뒤를 이어 《장화홍련전》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옥루몽》 등의 많은 국문소설들이 쓰여졌고 《윤하정삼문취록(尹河鄭三門聚錄)》과 같은 방대한 대하국문소설들도 많이 나왔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지방의 무가에 기원을 두고 발생, 신재효(申在孝)가 사설을 정리하면서 급성장하여 사대부와 서민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한편 한문학은 국문학을 누르면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유지하였다.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은 신라 이래 조선초까지의 시문을 정리하여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문인들의 설화문학이 성행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나왔다. 김시습(金時習)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을 지었으며, 중기에 와서는 한문4대가가 나와 복고적인 고문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후기에는 참신한 문체와 독창적 내용에 관심을 두었던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를 비롯, 당시 사회를 풍자한 <양반전>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증인들에 의한 한문학도 활기를띠기 시작하여 《소대풍요(昭大風謠)》 《풍요삼선》 등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⑵ 미술

조선 초기의 그림은 양반들이 그린 북종화(北宗畵) 계통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남종화로 학풍이 바뀌어갔으며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후기에는 또한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화풍이 유행하였으며,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은 각자 독특한 풍속화를 개척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송설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들어와 김정희(金正喜)가 중국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였다. 도자기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우수한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瓷) 등이 많이 나왔다. 특히 백자는 담백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선의 대표적인 공예 작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도시의 궁궐과 성곽ㆍ성문ㆍ학교 등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조선 시대의 건축물은 대개 규모가 작고 소박하면서도 주위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개성의 남대문(南大門),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을 들 수 있다. → 조선미술

⑶ 음악ㆍ연극ㆍ무용

세종 때 박연(朴堧) 등은 악기를 새로 만들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아악(雅樂)을 대성시켰다. 성종 때는 《악학궤범(樂學軌範)》, 그 뒤에는 《악장가사(樂章歌詞)》 등의 음악서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궁중음악과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가사ㆍ시조ㆍ가곡(歌曲) 외에 각 지방의 민요와 판소리 등이 발달하였다. 무용은 중기 이후 무당춤ㆍ탈춤ㆍ농악ㆍ승무 등 인간적인 내용을 갖춘 표현적인 춤으로 발전하였고, 탈놀이〔假面劇〕인 산대(山臺)놀이와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 등은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조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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