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5:14
분 류 사전1
ㆍ조회: 13872      
[삼국]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2 (민족)
고구려(성립과 발전)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2

세부항목

고구려
고구려(성립과 발전) 1
고구려(성립과 발전) 2
고구려(제도)
고구려(문화)
고구려(연구사)
고구려(참고문헌)

3. 하대의 정세 변동

[귀족 연립 정권 체제]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내외 정세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531년 안장왕이 피살되고, 동생 안원왕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안원왕 말년에 귀족간의 대규모 분쟁이 폭발하였다. 안원왕의 비(妃)는 3명으로, 대부인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과 소부인은 각기 왕자가 있었다. 544년 말 병으로 안원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중부인측(殖群)과 소부인측(細群)이 각각 자파의 왕자를 내세워 대결을 벌였다.

중앙에서 벌어진 양파 사이의 충돌로 궁성을 둘러싼 3일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분쟁에서 소부인측이 패배해 2,000여 명이 피살되었다. 이 와중에 안원왕이 죽고, 중부인측 왕자가 8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이가 양원왕이다. 수도에서 벌어진 양파간의 무력 대결은 중부인군측이 승리해 일단락되었지만, 그 뒤에도 귀족간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551년 당시 지방에 거주하던 승려 혜량(惠亮)은 “우리 나라는 정란(政亂)으로 언제 망할지 모를 지경이다.”라며 신라군에 투항까지 하였다.

귀족간의 내분에서 끝내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강력한 집권화를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 사병집단을 거느린 귀족들이 상호 타협해 실권자인 대대로(大對盧)를 선임하는 잠정적인 귀족 연립 정권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주서 周書≫ 고려전 (高麗傳)에서는, “대대로는 귀족들간에 무력으로 경쟁해 승자가 스스로 취임하며,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원 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는 대대로는 3년마다 선임하는데,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귀족들은 각기 실력대결을 하게 되고, 이 때 왕은 궁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를 지키는 데 급급하는 무력한 존재로 기술하였다. 무력에 의한 집권자의 출현 과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쿠데타 때도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은 중앙에서 반대파를 대거 숙청한 뒤, 반대파인 지방 유력세력들에 대한 공략을 감행하였다.

유명한 안시성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양자간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안시성 성주는 연개소문을 새로운 집권자로 받아들였고, 연개소문은 그를 계속 안시성의 성주로 인정하는 선에서 타결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 의한 반대파에 대한 개별적인 토벌은 비단 안시성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개소문 일파에 의해 철저한 집권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없다. 안시성의 경우가 말해주듯, 중앙귀족들과 각지의 성주들을 포함한 당대의 지배층 귀족들에 의해 새로운 집권자로 승인받았을 따름이다. 전체 정국은 여전히 연개소문 일파의 세력이 보다 강대해졌어도, 근본적으로 귀족 연립정권 체제의 성격을 띠었다. 이렇듯 안원왕 말년의 귀족간의 내분을 고비로 고구려의 정국은 크게 변하였다. 단 그러한 정치 체제의 변화를 야기한 고구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의 양상과 동인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6세기 후반 대외 관계의 변화]

한편 6세기 중반 고구려의 내분을 포착한 신라와 백제는 551년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한강 유역은 나ㆍ제 양국군에 의해 점령되어, 한강 상류지역은 신라가, 하류 평야지대는 백제가 점령하였다. 이어 고구려는 552ㆍ553년에 걸쳐 서쪽의 북제(北齊)로부터 군사적ㆍ외교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신흥 돌궐(突厥)이 등장해 몽고고원에 새로운 풍운이 일어났다. 돌궐은 552년 상전국이었던 유연을 격파하였다. 150여 년 이상 몽고고원을 포함한 내륙 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면서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유연이 돌궐에 의해 격파당하고 그 파동이 확산됨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부 국경선 일대에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었다.

내우 외환이 겹친 상황에서, 고구려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귀족간의 분쟁을 수습해 귀족 연립체제를 현실로서 받아들였다. 대외적으로는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남부 국경선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었다. 신라는 551년의 전쟁으로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으나, 척박한 이 지역보다 한강 하류의 기름진 평야지대를 탐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 유역과 함흥평야 일대의 지배권을 양도해 주고 휴전을 원해, 양국간에 타협이 성립되었다.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는 553년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 하류 지역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이를 점령하였다. 100여 년 지속되어 오던 나제 동맹이 깨지고 554년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을 감행해,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에 대한 원정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백제군이 패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 뒤 백제와 신라 간에 해를 거듭하는 상쟁이 되풀이되었다. 나제간의 상쟁은 고구려가 주력을 서북부 국경선에 집중해 돌궐의 세력에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구려와 돌궐 간의 전쟁에서 돌궐의 기병대는 요동평야의 고구려 영내까지 공격해 오기도 했지만, 주로 양국간의 분쟁은 요하 상류의 거란족과 속말말갈 등 일부 말갈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국간의 대결은 어느 한쪽의 결정적 승리로 귀결되지 않았고 현상유지 상태였다. 거란족의 일부분은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돌궐과의 대결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넘긴 뒤, 고구려는 다시 남으로 예봉을 돌려 한강 유역의 회복을 시도함에 따라 신라와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온달(溫達) 장군의 전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다. 이에 반도 내에서 삼국간에 치열한 상쟁이 전개되었고, 해를 이은 전쟁의 격동이 삼국사회를 뒤흔들게 되었다.

[수와의 전쟁]

삼국간의 분쟁은 6세기 종반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새로운 국면으을 맞이하였다. 580년 수나라가 건국되었고, 이어 4세기 이래 300여 년 동안 분열상태였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급속히 변모하였다. 수는 돌궐을 격파, 복속시켰다. 200여 년에 걸쳐 다원적인 세력균형 상태를 유지해 왔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이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지향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이러한 수나라의 팽창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해 오던 고구려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남중국의 진(陳)을 멸망시키자, 다가올 위협에 대처해 군비를 강화해 나갔다. 그 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이면으로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의 지향과 다원적 세력균형 체제의 유지라는 양국의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치열한 대립이 전개되었다. 수나라의 세력이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뻗쳐오자 고구려의 안위는 절대적 위협을 받게 되었다. 종래 고구려 세력하에 놓였던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이 수나라의 영향력을 좇아 이탈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수는 고구려 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노골적으로 복속을 강요해 왔다.

강대한 수나라의 국력 앞에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의 위치는 불리해졌다. 휘하의 거란족과 말갈족의 동요를 막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뻗쳐오는 수나라의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한 비상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전쟁의 길을 택하였다. 598년 고구려군이 요서지방에 있는 수나라의 전진기지를 공격해 양국간에 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공으로 이어졌다. 결과는 수나라의 참패로 종결되었고,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게 주요 원인이 되어 곧 멸망하고 말았다.

[당 및 신라와의 전쟁과 멸망]

수나라의 멸망 후 중국대륙의 일시적인 혼란기와 당나라 초기의 과도기를 거쳐, 고구려는 다시 당나라와 대결하게 되었다. 전쟁의 근본 원인은 수나라 때와 동일했다.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분열된 중국대륙의 통일, 돌궐의 격파,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았다. 당에 의해 중국 통일이 이루어지자, 고구려도 그에 대처해 부여성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는 등 대책에 부심하였다.

이러한 위기의식과 긴장된 상황하에서, 다시 귀족들간의 분쟁이 야기되어 연개소문 일파에 의한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연개소문은 집권 후 강경한 대외 정책을 표방해 당나라와의 정면대결 자세를 확고히 하고,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다. 642년 김춘추(金春秋)가 평양을 방문해 양국간의 화평을 모색할 때, 이를 거절하고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정책은 당나라와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이 시기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과, 신라를 제압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확보하겠다는 입장 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격렬한 유혈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그로서는 대외적 긴장과 위기는 그의 지배력을 강고히 하는 데 유리하다는 현실적인 상황판단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당나라와의 대결을 앞두고 다시 신라와의 대결을 고집한 것은 고구려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첨예한 대립은 마침내 양국간의 전쟁으로 폭발하였다. 645년 당태종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침공해 왔다. 당태종의 침공군은 초반 몇몇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였다.

이후 당은 전략을 바꾸어 장기전 전략을 취하였다. 즉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일거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소규모의 군대를 간헐적으로 투입해 치고 빠지는 방략을 취해 고구려의 국력을 피폐케 만들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는 데 주목하였다. 그에 따라 자연 고구려 남부의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신라에 주목하였다.

한편 고구려와의 교섭이 좌절된 뒤,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라와의 연결을 모색하였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 간에 긴밀한 군사동맹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어 신라는 그간 사용해 오던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예복(禮服) 역시 당나라에 맞추어 바꾸는 등 당과의 관계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남북에서 강력한 적대적인 세력을 맞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에 대항해 백제와 연결하고 북방의 유목민 국가와 제휴를 모색했으나, 이는 나당간의 동맹에 비해 훨씬 취약했다.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가 수ㆍ당 침공군과의 대결에서 지녔던 전략적인 최대의 이점이 크게 감쇄되었다. 그것은 대규모 침공군이 안고 있는 보급상의 문제이다. 적군의 긴 수송로는 쉽게 공략할 수 있었고, 그것은 침공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 백제의 멸망으로 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이 남쪽으로부터 공세를 강화했고, 당나라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였다. 이에 당군은 겨울철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는 665년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간의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마침내 668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부흥 운동과 유민의 동향]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는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고구려 전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고, 그 장에는 고구려인을 뽑아 임명하되 당나라 관리를 보내어 실제 통치에 임하였다. 그리고 669년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유력한 민호 2만 8,200호를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는 당시 고구려 말기의 인구 69만 7,000호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폭거였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촉발하였다. 669년 검모잠(劍牟岑) 일파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다. 한편 신라는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당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670년 봄에는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이에 대처해 몇 차례 원정군을 투입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은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고, 673년 호로하(瓠瀘河)에서 부흥군이 패배하자 고구려 남부의 유민들이 신라로 넘어감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뒤 당나라군과의 전쟁은 신라군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편 안승은 부흥군을 이끌고 남하해 신라에 귀속하였다.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그리고 이어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봉해 오늘날의 익산군인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은 676년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해전에서 당군이 패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반도에서 철수했으며,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과 주민은 신라에 귀속케 되었다. 보덕국도 곧이어 해체되어 신라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요동과 그 밖의 옛 고구려 영역에서 상당수의 유민들이 신라로 넘어와 합류하였다. 고구려 유민들 중 일부는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해 몇 개의 집단을 형성해 돌궐 가한(可汗)의 통치하에서 자치권을 형성하였다. 고문간(高文簡)ㆍ고공의(高拱毅)ㆍ고정부(高定傅)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상당수의 유민은 당나라 내지에 옮겨졌다. 669년 당나라 내지에 옮겨졌던 유민집단은 676년 이후 당나라가 요동지역을 강화하기 위해 보장왕과 함께 귀환시켰다. 보장왕은 요동으로 돌아온 뒤 곧 속말말갈과 연결해 반당운동을 획책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나라가 다시 대규모로 유민을 당나라 내지로 이사시켰다. 한편 당나라에 저항한 유민들은 계속 신라와 동부만주, 그리고 돌궐로 이거해 갔다. 그 결과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주(營州) 부근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유민집단은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해 동부 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급속히 그 곳으로 규합되었다. 발해가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은 발해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중국 내지와 돌궐 방면으로 옮겨간 고구려 유민은 점차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흡수, 동화되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을 세워 자립했으나, 곧 이어 9세기 전반 발해에 병합되었다. 수백 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던 고구려의 역사는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노태돈>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삼국] 고구려의 통치 조직과 사회 (민족)
아래글 [삼국]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00 사전1 [알림] 이후의 내용은 '한국사 사전 2'에 이어집니다. 이창호 2010-07-05 1361
2999 사전1 [조선] 김우명의 졸기 (숙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733
2998 사전1 [조선] 김우명 (한메) 이창호 2002-11-03 1358
2997 사전1 [조선] 김우명 (두산) 이창호 2002-11-03 1286
2996 사전1 [조선] 김우명 (민족) 이창호 2002-11-03 1327
2995 사전1 [조선] 김육의 졸기 (효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403
2994 사전1 [조선] 김육 (한메) 이창호 2002-11-03 1291
2993 사전1 [조선] 김육 (두산) 이창호 2002-11-03 1464
2992 사전1 [조선] 김육 (민족) 이창호 2002-11-03 1863
2991 사전1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이창호 2002-11-03 2537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