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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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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639      
[삼국] 고구려의 통치 조직과 사회 (민족)
고구려(제도) 고구려의 통치 조직과 사회

세부항목

고구려
고구려(성립과 발전) 1
고구려(성립과 발전) 2
고구려(제도)
고구려(문화)
고구려(연구사)
고구려(참고문헌)

1. 정치 체제

[초기의 정치 체제]

고구려 초기의 정치 체제는 5부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고구려 형성의 중심세력 집단이었던 5부는 중앙정부의 왕권하에 귀속되어 통제를 받았으나, 각각의 관인조직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자치체로서의 기능과 결집력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각 부 내에는 하위집단인 부내부(部內部)가 자치력을 지닌 단위집단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자치적인 집단들을 중층적(重層的)으로 통합하는 가운데서 오부와 고구려의 정치 구조가 형성되었다.

즉 부내부 같은 작은 집단들이 각개의 자치력을 상당히 유지하면서 그 중 큰 집단에 의해 통제되고 규합되어 부를 형성했다. 다시 이들 오부가 계루부 왕권에 의해 통제되어 고구려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면은 고구려 초기의 관계 조직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계루부의 중앙 정부에는 왕 아래 상가(相加)ㆍ대로(對盧)ㆍ주부(主簿)ㆍ우태(于台)ㆍ사자ㆍ조의ㆍ선인 등의 관계가 있고, 관직으로는 좌보(左輔)ㆍ우보(右輔)에 이어 국상(國相)이나 중외대부(中畏大夫) 등이 있어 국내를 통괄하였다.

각 부에는 부장 아래 패자(沛者)ㆍ우태ㆍ사자ㆍ조의ㆍ선인 등이 있었으며, 각 부내부에도 사자ㆍ조의ㆍ선인 등의 관인이 있었다. 부장과 부내부의 장은 자기 소속집단의 장인 가[加, 汗, 干]였으며, 상위 통합 체와의 관계에서는 상가ㆍ우태 등이 되었다. 각 관인들은 서로 같은 관등일지라도 각기 그가 속한 집단에 따라 현실적 지위에 차등이 있었다. 가령 부의 사자는 중앙정부의 사자와 같은 위계이지만 동렬에 서지 못하였다. 즉 분립된 상태에서 상하의 위계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는 초기에는 외교ㆍ군사ㆍ무역권 등 대외적인 관계를 제외한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 운영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점차 각 부의 관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게 하는 방법으로 이를 감시하였다. 각 부의 관인을 중앙정부에 등용하거나 그 사람의 소속부에서 위계를 올려주기도 했고, 때로는 부내의 일에 직접 간섭하는 등 예하의 집단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이와 같은 왕실과 부 사이의 통제와 자치의 상호관계는 부와 부내부 사이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다만 중앙 정부의 힘이 부에 점차 강하게 미침에 따라, 부 자체가 단위 정치체로서의 독자성이 적어지고 상대적으로 부와 하위 집단인 부내부 사이의 상하 관계는 점점 약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2세기 말 3세기 초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소노부는 자체적으로 조상신과 지역 수호신ㆍ농업신 등에 제사를 지내는 등, 자치적인 정치체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유지했다.

왕실과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었던 연나부(椽那部), 즉 절노부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면을 유지했던 듯하다. 또한 계루부에서도 왕족 대가(大加)들은 자신의 관인을 두는 등 휘하에 집단을 거느렸다. 이와 같이 상당히 자치적인 여러 집단을 통합해 왕국을 운영해 나감으로써 자연 제 집단의 장들의 모임인 귀족 회의가 중요한 기능을 했고, 왕국 운영 역시 회의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또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에 따라 정복당한 피복속민은 읍락 단위로 집단적으로 예속되었다. 고구려는 옥저의 경우에서 보듯, 각 읍락의 재래의 질서를 용인하고 그 우두머리를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하였다. 옥저ㆍ동예ㆍ양맥ㆍ선비ㆍ숙신 등의 읍락들이 그러한 형태로 예속되었고, 오부는 고구려국 전체에서 볼 때 지배자 집단의 위치를 지녔다.

이상과 같은 고구려 초기의 정치 구조는 근본적으로 부나 부내부를 해체시켜 일원적인 통치 조직을 구축할 수 없었던 당대의 지배 질서의 미숙에 기인하는 것이다. 곧 왕권이나 부장권에 한계가 있고 관료 조직이 동원할 수 있는 통제력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당대까지 공동체적 유제가 강인하게 잔존해 이것이 사회의 기층 조직의 하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피복속민 집단의 경우도 동일한 배경에서 집단적으로 예속되었다.

[관등 제도의 확립]

다원적인 정치 구조를 보였던 고구려 초기의 국가 체제는 정복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광대한 지역이 병합되었고, 사회 분화가 진행되었다. 또 공동체적 유제가 약화되어 감에 따라, 중앙 집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점차 일원적인 지배 조직의 형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일원적인 관등 체계가 정비되고 관직 체계와 지방 통치 조직이 확충되는 등, 관료 조직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먼저 관등 체계를 살펴보면 형(兄)류와 사자(使者)류를 근간으로 해 성립되었다.

사자는 ≪삼국지≫ 동이전에서도 이미 보이고 있다. 당시 부여의 관등에서도 보이며 동옥저에서도 고구려가 그 곳 읍락의 대인(大人)을 사자로 삼아 공납을 수취하였다. 사자는 그 관등의 명칭의 뜻이나 여러 사실로 볼 때, 지방에서부터 조세와 공납을 거두어들이는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형은 고구려어를 직역해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 원래의 뜻이 연장자, 가부장적 가족장(家族長), 또는 친족 집단의 우두머리로서의 장로(長老)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친족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지위가 형제에게 계승되어 나이 많은 세대의 형제들 중 제일 위의 사람(兄)이 이 지위를 차지했는데, 자연 그는 족장인 동시에 연장자였던 셈이다. 즉 형제의 형이라는 뜻과 족장 또는 장로라는 뜻이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었고, 그것을 한자로 직역해 ‘형(兄)’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형’의 관계는 족장층을 편제하는 데 적용되었다. 즉 정비된 고구려의 관등조직은 크고 작은 집단들의 족장 세력을 왕권하에 일원적인 체계로 편제하고, 확대된 영역의 수취 체제를 정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전자는 형의 관계로, 후자는 사자의 관계로 정비되었다.

형류의 관계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3세기 말부터 보이고 있다. 덕흥리 벽화 고분의 피장자인 진(鎭)이 역임한 관직 중에 소대형(小大兄)이 보이고, 모두루 묘지(墓誌)에 그의 선조가 대형을 역임했다고 기술된 것으로 보아, 형류의 관계는 3세기 말 4세기 초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서 전하는 고구려 말기의 관계 조직은 다음과 같다.

① 大對盧(吐胥), ② 太大兄(莫何何羅支), ③ 鬱折(主簿), ④ 大夫使者(謁奢), ⑤牲衣頭太兄(中裏牲衣位頭大兄), ⑥ 大使者(太奢), ⑦ 大兄加(窪支), ⑧ 拔位使者(儒奢), ⑨ 上位使者(乙奢), ⑩ 小兄(失支), ⑪ 諸兄(返屬), ⑫ 諸兄, ⑬ 過節, ⑭先人.

6세기 후반 이후 귀족 연립 정권 체제하에서는 대대로ㆍ태대형ㆍ울절ㆍ대부사자ㆍ조의두태형 등 5인의 고위 귀족이 기밀을 장악하고 국사를 도모해 병사를 징발하고 관직을 수여하는 등 국정을 주관하였다. 이 중 최고위직인 대대로는 3년마다 귀족들 사이에서 선임되었다. 이 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력 상쟁을 해 승자가 취임하였다. 세력이 강하고 신망을 얻으면 계속적인 중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가 비록 최고 실권자였지만 전권을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5인의 고위귀족이 합좌해 주요 정무를 집행한 사실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 이는 귀족 연립 정권하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관직 제도]

고구려 후기의 중앙 관직으로는 외국사신을 접대하고 대외교섭 문제를 담당하는 발고추가(拔古鄒加)가 있고 이에는 대부사자가 임명되었다. 또 국자박사(國子博士)ㆍ대학사(大學士)ㆍ사인(舍人)ㆍ통사(通事)ㆍ전용(典容) 등이 있어, 모두 소형(小兄) 이상이 임명되었다. 그 밖의 관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무관으로는 사령관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 일명 莫何邏繡支 또는 大幢主)이 있어 조의두대형 이상이 취임하였다. 그 아래 말객(末客, 또는 末若)은 중랑장(中郎將)과 같은 것으로 일명 군두(郡頭)라 했으며, 휘하 1,000명을 거느렸고, 대형 이상이 취임할 수 있었다. 그 이하 부대 단위의 직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방 제도]

피정복민 집단에 대한 내부적 일은 재래의 수장에게 맡겨 자치를 영위하게 하고, 중앙에선 사자를 보내어 공납을 징수하던 형태에서 벗어나 조정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종반부터였다. 원 5부 지역이었던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는 5부의 자치력이 약화되면서, 하위 단위인 곡(谷)을 대상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4세기대에 영토의 팽창과 함께 지방관의 파견이 증가하였다.

특히 변경의 새로운 영토에는 광역의 지방 단위로 군(郡)이 설치되었으며, 5세기 대가 진전되면서 군제(郡制)가 고구려 영내의 상당한 지역에서 행해졌다. 6세기 중반까지도 군제에 의한 지배가 고구려 영내의 모든 지역에서 행해지지는 않은 듯하나, 주요 지역에선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군의 지방관의 명칭은 ‘수사(守事)였다.

이런 지방 제도의 시행은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중앙 정부가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율령이 반포된 이후 율령에 입각해 지방관이 지역민을 통치하였다. 단양 적성비에서 그러한 율령적 지배의 일단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수취면에서 공납제적인 것이 조세제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은 그 수령(首領)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되어 공납과 군사적인 조력을 하였다. 그들은 계속 지방 제도의 외곽에 존재해서, 율령적 지배와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한편 6세기 후반 이후 중앙 정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 귀족 연립 정권 체제가 성립하였다. 이 무렵 지방 제도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군 단위간에 존재했던 군세(郡勢)의 차이를 인정해, 각 장을 각각 욕살과 처려근지라 하여 지방관의 명칭에 차등성을 반영하였다. 그에 따라 ‘군(郡)’과 ‘수사(守事)’라는 명칭이 소멸되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각각 관할하는 '성(城)'의 크기에서 차이가 있지만, 상하 통속 관계는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병열적인 존재였다. 욕살과 처려근지 아래에 루초(婁肖)를 장으로 하는 현급(縣級)의 행정 단위가 있었고, 루초의 예하에 작은 성과 촌 곡 등이 있었다. 이런 구성은 군제와 다르지 않다. 또 귀족 연립 정권하에서도 여전히 중앙 집권 체제는 유지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6세기 후반 이후 중앙 정계에서의 변동은 고구려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군정권과 민정권을 함께 지니고 있었고, 치소(治所)가 산성 내에 있는 경우가 적지않았다. 지방 제도와 군사 제도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군사 국가적인 면모를 강하게 띠었다. 고구려 말기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 속에서 점차 광역의 지역별 방어 체제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그런 가운데 주(州), 즉 욕살의 성을 중심으로 다수의 성들을 통괄하는 보다 광역의 행정 군사 구역이 편성되어 갔다. 그런 구역 내에는 처려근지급의 성도 포괄되어졌다.

고구려 멸망 때 남생 예하의 국내주(國內州)에서 그런 면을 엿볼 수 있다. 667년에 작성된 것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전해지고 있는, 압록강 이북의 전황(戰況)을 적은 ‘목록(目錄)’에서 보듯 욕살의 성을 지칭해 ‘주(州)’라고 하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한 것도 그와 연관된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고구려가 멸망함에 따라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런 추세는 통일기 신라에서 주군현제(州郡縣制)로 이어져 정착되었다.

2. 사회 구성

[하호의 성격]

고구려 초기의 사회 구성에 관해서는 먼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읍락유호민 민(명)하호개위노복(邑落有豪民 民(名)下戶皆爲奴僕)”이라고 한 기록이 주목된다. 이 기록은 부여사회에 관한 서술이지만, 당대의 고구려 사회와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 기록의 해석을 둘러싸고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 뜻은 ‘읍락에 호민이 있고, 민은 하호로서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라고 풀이된다. 하호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고구려나 동예ㆍ삼한ㆍ왜의 사회를 기술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하호는 후한대(後漢代)에 부강한 호족인 상가(上家)와 대비되는, 빈한하지만 독립된 가계를 가지고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소작농을 지칭한 용어로 쓰였다. 그러면 ≪삼국지≫ 동이전에서 이 하호라는 용어로 표현된 계층은 중국의 그것과 동일할까? 그러나 이 때 하호는 어떠한 특정 계층의 구체적인 신분적 성격이나 계급적 성격을 파악해 개념화된 것은 아니다. 하호는 당대의 중국인들이 동방 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파악되는, 외형상으로 빈한한 민 일반의 존재를 당시 자기들 사회의 빈한한 민을 지칭하는 용어인 하호와 마찬가지로 기술한 것뿐이다.

호민도 외형상으로 부강한 민호를 하호와 대비해 이원적으로 파악해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하호의 계급적 성격은 중국인이 쓴 용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동이족 사회의 역사적 성격에 의해 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지배 계급]

≪위략≫과 ≪삼국지≫ 동이전에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고구려의 사회상을 기술한 부분에서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하호는 부세(賦稅)를 내어 노객(奴客)과 비슷하다.”거나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짓지 않으며,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명이 되고, 하호가 식량과 고기 및 소금을 날라와 공급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나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1만여 명의 좌식자들이 고구려의 지배층이다. 좌식자에는 왕족을 비롯해 각 부와 부내부의 장들과 그 친족이 속했다.

그리고 사자ㆍ조의ㆍ선인 등과 같은 전문 행정 및 군사요원, 그리고 5부 출신의 일부 전업 전사(戰士)들이 포함되었다. 이 밖에 샤먼(Shaman)과 같은 종교적ㆍ주술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해당되었을 것이다. 이 지배층은 다시 족장층인 가(加)계급과 그 아래 계급으로 크게 구분된다. 전자는 그 뒤 점차 중앙 귀족으로 전신하게 되었으며, 후자도 고대 국가의 중ㆍ하급 귀족이 되었다.

[민의 존재 양태]

(1) 읍락 공동체의 분화

사회 분화가 진전되어 감에 따라 읍락의 구성원인 일반민 중 일부는 자영농으로서 스스로의 가계를 영위해 나갔으며, 자신의 집에 병장기를 가지고 있어 전시에는 병사로서 출전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상승해 사자ㆍ조의ㆍ선인 등이 되어 좌식자의 일원이 되었다. 읍락민 중의 일부는 토지를 상실한 빈농이 되어 용작(傭作)을 하기도 하였다. 고국천왕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만난, 용작을 하며 살아가던 빈농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뒤에 미천왕이 된 을불(乙弗)이 봉상왕의 박해를 피해 산야로 숨어다닐 때, 수실촌의 음모(陰牟)라는 이의 집에서 용작을 하다가 1년 뒤에 그 집을 떠났다. 이는 일종의 머슴살이와 같은 것이었다. 고국천왕이 만난 빈농이나 을불의 경우 모두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지닌 자유민이었다. 이들과 같은 빈민이나 노약자들은 스스로 무장을 할 수 없어, 전시에는 보급품을 운반하는 노역을 담당했던 것 같다. 이러한 류의 민들 중 일부는 귀족의 예민으로 전락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민의 분화 현상은 고구려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미 상당 정도 진전되었으며, 대외적 팽창에 따른 잦은 전란과 막대한 물량의 유입 등에 의해 촉진되었다. 분화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읍락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읍락 단위의 통합력을 해체시켰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삼국지≫ 동이전 단계,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고구려의 정치구조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력을 지닌 부 및 부내부를 왕권하에 중층적으로 통합한 상태였다.

바꾸어 말해 읍락 단위의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된 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 편제와 정치 조직이 아직 성립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사회적으로도 취수혼이 널리 행해지고 있어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결속이 강하였다.

(2) 양인 농민층

점차 민의 존재 양태는 사회 분화에 따른 경제 관계에 의해 다양화되었다. 아울러 왕권과 중앙 집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족장과 족원이라는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예속 형태 외에 고대 국가와 민의 관계라는 측면이 보다 강해졌다. 이는 곧 족원들에 대한 족장의 지배권을 약화시켜, 그들을 국가의 지배하에 귀속시키려는 것이다. 각 부의 족장(加)들의 횡포에 대한 중앙정부의 간섭과 응징 등은, 각 부 단위로 자치가 행해지는 가운데 족장들의 수취와 권력에 제약을 가한 사례들이다.

고국천왕 때 실시되었다는 진대법이나 그 밖의 ≪삼국사기≫에서 자주 보이는 진휼의 기록 등은, 곧 읍락 공동체의 해체에 따라 일어나는 계급 분화과정에서 민이 귀족이나 여타의 호민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국가의 공민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양인(良人)에 대한 기록상의 첫 표현은,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사다함(斯多含)이 가야 정벌전에 참가하고 돌아오자 왕이 공을 인정해 포로 200명과 토지를 주었는데, 그가 전쟁포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인이 되게 했다는 데서 나온다.

이 때 양인이란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권을 보지하고 국가에 직접 귀속된 일반민을 말한다. 이러한 양인의 존재는 비단 사다함의 조처에서 처음 비롯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국 사회에서 국가와 민의 지배 예속 관계에 입각한 양인층의 창출과 형성이 지배적인 양태가 되기 위해서는 족장층의 족원에 대한 전통적인 지배력의 배제가 요구된다. 그것은 곧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의 청산과 지방관에 의한 율령에 입각한 촌락 사회의 지배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3) 조세와 역(役)

국가에 의한 민에 대한 수취상태를 기술한 ≪수서 隋書≫ 고려전에서는 “인세(人稅)는 포(布) 5필, 곡식 5석이며, 유인(遊人)은 3년에 한 번 세를 내는데, 10인에 세포(細布) 1필이다. 조(租)는 상호(上戶)가 1석, 그 다음 호는 7두, 하호는 5두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인세는 인두세인데, ‘포 5필 곡 5석’은 너무나 과중해, 이를 호주(戶主)에게 부과되었던 세라고 보는 견해와, 포 5필이나 곡 5석으로 풀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한편 ≪주서≫ 고려전에서는 "부세(賦稅)는 견포(絹布) 및 속(粟)이며, 그 빈부의 정도에 따라 차등으로 징수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수치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는 당시 민에 대해 빈부격차를 헤아려 차이를 둔 일정액의 부세가 부과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밖에 민에게 역이 부과되었다. 노동력 징발의 기준은 15세였다. 또한 민은 차출되어 군대에 징집되었다. 이 군역은 민에게 부담이 컸다. 특히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때에는 제대로 복무기간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니 이에 따라 민의 경제적 파탄과 몰락이 심각했을 것이다.

[노비 계급]

고구려 사회구성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노비이다. 노비는 그 발생 요인에 따라, 일차적으로 포로ㆍ형벌ㆍ약탈ㆍ부채ㆍ매매 등에 의한 노비가 있고, 이차적으로 노비의 자손들인 혈연노비가 있다. 노비는 원시 공동체 단계의 사회가 해체되면서부터 발생했으나, 고구려의 경우 대외적 팽창에 따라 전쟁 포로가 가장 중요한 노비의 공급원이 되었다.

전쟁 포로나 노획된 민호가 모두 노예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노획된 민들의 저항 정도나 그 집단의 경제적 생활 양식 등에 따라, 집단 정주시켜 수취하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모두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본원적으로 당대 사회의 생산 양식과 생산력의 발달 정도에 의해 좌우되었을 것이다. 유명한 염사치(廉斯憮)의 사화(史話)에서 보이듯, 1세기 초반 무렵 한(韓) 땅에 나무를 베러 왔던 중국인 1,500명이 사로잡혀 노예로 사역되었는데, 불과 수년 만에 50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도한 인명의 소모율은 당시 한(韓) 사회에서의 대규모적인 노예 노동의 경제적 일면을 전해준다. 이 점은 철기 문화 농도의 심화와 생산력의 증가 등에 따라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대체로 삼국 사회가 진전되어 갈수록 귀족의 경제 기반의 확충에 따라 포로의 노비화는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사회에서 호강한 귀족들에 의해 민이 약탈되어 노비화된 경우는 ≪삼국사기≫에도 몇몇 사례가 전해지고 있다. 형벌에 의한 경우도 노비화의 주요 동기의 하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죄를 지으면 죽이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고 하였다. ≪구당서 舊唐書≫ 고려전에서는, 모반을 했을 경우 죽이고 그 집안을 적몰한다고 하였다. 이 때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던 것으로 보아진다.

또한 도둑은 12배로 변상하게 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녀를 값으로 쳐서 노비로 삼았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도 노비로 삼았다. 이러한 형벌체계는 곧 일반 채무의 경우에도 적용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빈궁한 민들이 흉년이 들어 자녀를 노비로 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렇듯 인신의 매매와 채무에 의한 노비화가 진행되어, 자연 노비 매매는 항시 행해졌을 것이다. 노비의 자식은 혈연에 의해 신분이 계승되었다. 다만 부모 양계에 신분의 차이가 있을 경우의 구체적인 면모는 분명하지 않다. 당대 고구려 사회의 경제 관계에서 노비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 등도 확실하지 않다.

[집단 예민]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에 따라 흡수된 피정복 집단이 존재하였다. 가령 옥저나 동예의 읍락들은 재래의 읍락질서를 유지하면서 족장을 통해 공납을 바치며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옥저나 동예의 읍락 내에도 노예는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각 읍락은 공동체적 성격이 농후했으며, 집단적으로 고구려에 예속되어 일종의 집단예민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 옥저나 동예와 같은 예맥족 계열의 집단들 외에 선비족이나 말갈족 같은 이질적인 족속들도 일부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그 뒤 고구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예속민 집단의 존재 양태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는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중 상당 부분은 고구려 지방통치 체제의 진전에 따라 지방관의 통제를 받는 일반민으로 편제되었던 것 같다. 일부는 집단 예민적인 존재로 계속 남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질적인 종족인 거란ㆍ말갈 등속의 촌락은 고구려 말기까지도 그들의 예전 촌락체제를 유지하면서 피복속민 집단으로 고구려에 예속되어, 공납과 함께 필요할 때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

(이어지는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보시오.)

<노태돈>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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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7 사전1 [조선] 김우명 (두산) 이창호 2002-11-03 1286
2996 사전1 [조선] 김우명 (민족) 이창호 2002-11-03 1327
2995 사전1 [조선] 김육의 졸기 (효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403
2994 사전1 [조선] 김육 (한메) 이창호 2002-11-03 1291
2993 사전1 [조선] 김육 (두산) 이창호 2002-11-03 1464
2992 사전1 [조선] 김육 (민족) 이창호 2002-11-03 1863
2991 사전1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이창호 2002-11-03 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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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