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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7:46
분 류 사전1
ㆍ조회: 6824      
[삼국] 백제사 개관 (민족)
백제(百濟)

관련 항목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세부항목

백제
백제(역사)
백제(제도)
백제(대외관계)
백제(문화)
백제(연구사)
백제(참고문헌)

[백제사 개관]

삼국 시대 고대 국가 중의 하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건국, 660년에 신라에게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678년간 존속한 백제의 역사는 시조 온조왕에서 사반왕까지의 소국-소국연맹시기, 고이왕에서 계왕까지의 5부체제시기, 근초고왕 이후의 중앙 집권적 국가체제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국-소국 연맹 시기는 지방 분립적 성격이 강하게 온존(溫存)된 시기이며, 5부 체제 시기는 연맹 단계에서 중앙 집권적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종래의 국읍(國邑)-읍락(邑落)을 기반으로 한 사회 단위가 재편되어 성(촌)이 사회 편제의 단위가 되었다.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갖추어진 이후의 백제의 역사 전개는 한성 시대 전기(근초고왕∼아신왕), 한성시대 후기(전지왕∼개로왕), 웅진 시대(문주왕∼무령왕), 사비 시대(성왕∼의자왕)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는 부여족 계통의 한 집단인 온조 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직산의 목지국 중심의 마한 연맹체의 한 구성원이었다. 그 후 백제는 마한의 여러 국들을 병합하면서 한강 유역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이왕 때에는 관제를 정비,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근초고왕대에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했고, 그 토대 위에서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해 북으로는 황해도 신계까지, 남으로는 전라도 지역까지를 영역으로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팽창 정책으로 군사적 압박을 받다가 개로왕대에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는 등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475년에 수도를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겼으며, 무령왕대에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성왕은 16년(538)에 다시 사비성(泗歷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으로 천도하였다. 사비 천도 후 백제는 관제의 정비와 중국 남조 및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확대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신라ㆍ가야와 연합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신라가 나제 동맹(羅濟同盟)을 깨뜨리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고,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가 패함으로써 왕권의 쇠미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후 백제는 귀족 연립적 정치 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구도를 깨기 위해 무왕은 즉위 후 익산 천도를 시도하는 등 왕권 강화를 노력하였다. 의자왕은 즉위 초에 친위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들을 대거 제거함으로써 어느 정도 왕권의 안정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후반기에 신라와 대립하면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또한 측근 세력들에게 정권을 맡기고 사치 생활을 하여 재정을 낭비했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마침내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백제를 구성한 주민들의 계통은 여러 갈래이다. 이 가운데 선주 토착민은 마한의 구성원체인 여러 국들을 구성한 한인이 주류였고, 여기에 예인들이 섞이게 되었다. 한인과 예인들은 주로 백제의 피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지배층 세력들은 왕족과 해씨ㆍ진씨 등이었으며, 왕족과 해씨는 부여족 계통이었다. 4세기 이후 삼국간의 접촉과 중국 및 왜와의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신라인ㆍ고구려인ㆍ왜인ㆍ중국 계통의 사람들도 지배 세력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 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적석총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 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다시 왜에 전수해 일본문화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백제(역사)

1. 건국

백제의 건국사를 정리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본사료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과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백제가 마한 54국 중의 하나로 되어 있는 반면, 백제본기에는 온조왕대에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본기에는 3세기 중엽경인 고이왕대에 이미 6좌평ㆍ16관등제라고 하는 잘 짜여진 국가 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동이전에는 국의 지배자인 국읍 주수가 읍락 거수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두 사서는 3세기 중엽경의 모습을 매우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자료에 신빙성을 두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ㆍ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동이전의 백제국과 4세기대의 백제국은 연속선상의 계승 관계를 가지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은 구체적인 연대나 왕실 계보 및 영역의 확대 등에는 일부 조작(造作)이 가해지거나 후대의 사실이 부회(附會)된 것으로 보는 절충론(折衷論)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백제의 건국 설화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온조(溫祚) 중심의 설화에서는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朱蒙)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瑠璃)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해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비류 중심의 건국 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改嫁)해 고구려 건국을 도왔다. 그 뒤 주몽의 원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온조와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가지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백제를 건국한 주체 세력이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비류와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시기를 달리해 비류 집단은 미추홀에, 온조 집단은 위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 집단은 처음에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그 뒤 정치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百濟)’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온조계 집단이 십제에서 백제로 성장을 보게 된 배경은 청동기 시대 이래 한강 유역이 가지는 문화적 기반이 그 토대가 된 것 같다.

하남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긴 이후 백제는 미추홀의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했으니 이를 보여주는 것이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고 하는 시조 형제 설화이다. 시조 형제 설화는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하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온조 중심의 설화이든, 비류 중심의 설화이든 비류가 형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두 세력이 연맹을 형성한 이후 처음에는 연맹의 주도권을 비류계가 장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후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든 무리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는 것은 온조계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맹의 주도권이 비류계에서 온조계로 넘어간 시기는 대체로 초고왕대로 생각되며,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고이왕대에 이르면 연맹체의 영역도 확대되어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춘천, 남으로는 안성ㆍ성환, 서로는 서해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유역의 새로운 맹주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목지국(目支國)을 중심으로 한 마한과의 관계는 이전의 부용 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① 춘천 중도(中島), 충주 하천리(荷川里), 제천 양평리(陽平里)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농공구와 무기들을 볼 때, 한강 유역이 가지는 선진적인 철기 문화를 들 수 있다. ② 우수한 철제 농기구를 이용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이다. ③ 한강 하류 지역이 지니는 입지적으로 좋은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을 이용해 백제는 내륙지방은 물론이고, 낙랑군ㆍ대방군 및 중국의 진과의 교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한강 유역권에서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한 백제의 성장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① 연맹 내의 세력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은 우보ㆍ좌보와 같은 직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을 임명함으로써 이루어 나갔다. ②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한강 유역에서의 정치적 세력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던 중국 군현에 대해서도 공세적 입장을 취한 것과 약탈적인 침략을 해 오는 말갈(靺鞨)로 표현되는 동북방 방면의 예(濊) 세력에 대결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목지국 중심의 마한 연맹체를 잠식해가면서 마한 전체 사회의 패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247년(고이왕 14) 마한 세력과 중국 군현과의 싸움에서 마한이 패배한 상황을 이용해 백제는 목지국을 병합하고, 마한의 맹주권을 장악하였다. 원래 방계(傍系) 출신이었던 고이왕은 직계(直系)의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는데, 이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고이왕은 대내적 체제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좌장(左將)을 설치해 병마권을 장악하였다. 나아가 좌평(佐平)을 설치해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 또 금령(禁令)을 선포하고 솔계(率系)관등과 덕계(德系) 관등을 만들어 16관등제의 토대를 놓는 등 지배 체제의 확립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 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2. 한성시대

고이왕대에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춘 백제는 중국 군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시기 중국의 서진은 ‘8왕의 난(291∼306)’이라고 하는 왕족들 사이의 반란과 5호(胡)의 침입 등으로 혼란하였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위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낙랑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책계왕과 분서왕은 낙랑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 틈을 타서 초고계의 비류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비류는 즉위 후 김제에 대규모의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하는 등 수리 시설을 확충시켜 농업경제력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서제 우복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는 진씨 세력과 결합해 정치적 기반도 안정시켰다. 이 토대 위에서 근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초고계(肖古系)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왕명(王名)이 초고왕과 구수왕의 왕명에 ‘근(近)’자를 관(冠)해 이루어진 것에서 알 수가 있다.

근초고왕은 당시 대표적인 귀족 세력인 진씨(眞氏)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해 왕권지지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아신왕대까지 진씨 왕비족 시대를 열게 되었다. 왕권을 강화시킨 근초고왕은 지방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담로제(首魯制)를 실시, 영역을 행정 구역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종래 중앙의 유력자를 통한 간접적인 지방 지배가 지방관을 통한 직접 지배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지방관을 통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고 이를 수취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처럼 내적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249 : 수정연대 369)조에 의하면 왜의 신공황후가 근초고왕은 비자벌(지금의 경상남도 창녕)ㆍ남가가(지금의 경상남도 김해)ㆍ안라(지금의 경상남도 함안)ㆍ가라(지금의 경상북도 고령) 등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지금의 전라남도 강진)에 이르고 남만(南蠻) 침미다례(甚彌多禮 : ≪진서≫ 장화전에 나오는 新彌國)를 정벌하고 비리(比利)ㆍ 벽중(陽中) 등 4읍(邑)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 내용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왜곡과 윤색이 매우 심하며,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는데 이용된 중요 자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기사의 역사적 실상은 근초고왕이 가야 지역으로 진출해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했다는 것과 전라도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정복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남으로는 영산강(榮山江) 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했다고 할 수 있다. 전라도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평정한 근초고왕은 북으로는 남진해 내려오는 고구려 세력과 대결하였다. 특히 371년(근초고왕 26)의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여 지금의 황해도 신계 지역까지 영역으로 하였다.

한편 ≪송서≫ 백제전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해상 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遼西) 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고, 일본 열도에도 진출해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상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적인 체제 정비와 대외적 팽창과 발전의 바탕 위에서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 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와 신성성 및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침류왕대에는 불교를 공인해 삼한 소국 시대 이래의 부족적 전통을 극복하면서 보다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확립해 보편적인 세계관의 형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침류왕이 죽은 뒤, 진사왕은 조카 아신(阿莘)의 왕위를 찬탈했고, 또 아신은 진사(辰斯)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족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배후에는 왕비족으로서의 진씨 세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진씨 세력은 군권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이 시기 고구려와의 공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남공으로 아신왕은 58성 7백촌을 점령당하고, 왕제(王弟)와 대신 10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궁지에 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신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태자 전지를 왜에 파견해 구원군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아신왕이 죽은 뒤 전지왕의 즉위를 둘러싼 갈등으로 지배세력 내에 커다란 세력교체를 가져왔다. 왜에 인질로 가 있던 태자 전지(乷支)를 지지한 해씨 세력은 왕제 혈례(勒禮)를 지지한 진씨 세력을 누르게 되었다. 그 결과 왕비족이 진씨에서 해씨(解氏)로 교체되었다. 전지왕 즉위 후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은 상좌평을 설치하고, 군국 정사를 상좌평에게 맡기게 하는 등 실권 귀족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이로써 왕권은 매우 미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은 실권 귀족 중심 체제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개로왕은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했으며,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전제화 정책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치고, 밖으로는 북위가 군사 원조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도가 함락되고, 왕이 사로잡혀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웅진 천도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웅진 시대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포위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미 개로왕도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嗚滿致)ㆍ조미걸취(祖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해 국가 재건에 노력하였다.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책봉해 왕실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안으로는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이 자체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 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백제의 대중국 접촉이 방해를 받게 되었으며, 종래 백제의 영향권내에 있던 가야 세력이 이탈해나가는 등 백제는 국제적 고립의 위기마저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천도 초기의 혼란을 틈타 병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解仇)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을 세워 전권을 휘두르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해구의 반란은 덕솔 진로(眞老)에 의해 평정되고 곧 삼근왕도 재위 3년으로 죽고, 동성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진로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어려운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왕족인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신라와의 동맹 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였다.

또한 사씨(沙氏)ㆍ연씨(燕氏)ㆍ백씨(懶氏) 등 신진 지방 세력들을 중앙에 등용해 한성 시대 이래의 세력과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동성왕은 19년(497)에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신진 세력의 하나인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아 신진 세력 중심의 정치 운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진 세력의 위세가 커지자, 측근 중심의 정치 운영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측근 정치에 반발하는 위사좌평 백가(懶加)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그를 가림성(加林城) 성주로 파견했다가 도리어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무령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무령왕릉지석〉과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을 종합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모형이 된다.

무령왕은 먼저 백가의 난을 평정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양(梁)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아 국제 관계상에서도 백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한편 무령왕은 유식자(遊食者)들을 귀농시켜 생산력의 증대와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 호남 지역의 적극적인 개발과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한강 유역의 상실로 인해 축소된 경제 기반을 확대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게 되었고 강국을 칭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령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4. 사비 시대

동성왕-무령왕대에 이루어진 안정기반을 바탕으로 성왕은 백제의 중흥과 왕권 강화의 목적에서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 지역에 대한 관심은 동성왕대부터 있었지만 이 때 천도가 단행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성왕의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과 성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으로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 세력인 사씨(沙氏)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비 천도를 결심한 성왕은 사비 지역에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축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나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시가지는 조리제(條里制)에 입각해 정비하였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538년(성왕 16)에 천도를 단행하였다.

천도 후 성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반 조처를 추진해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해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강화하였다. 또한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모시박사(毛詩博士)ㆍ강례박사(講禮博士) 등을 초빙, 문화의 질을 높이고, 선진 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다. 그리고 중인도(中印度)로부터 오부율(五部律)을 갖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 백제적 계율종을 설립시키고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 교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부제(部制) 등 중앙의 중요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수도를 5부로 나누고, 각 부에 5항을 두는 수도의 행정 조직도 완비하였다. 나아가 5방(方)ㆍ군(郡)-성(현)제를 갖추어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해 나갔다. 사비 천도 후 성왕대의 이러한 조처는 동성왕ㆍ무령왕ㆍ성왕으로 이어지는 정치가 왕권 중심으로 움직여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22부가 핵심적인 기능을 하였다. 그 결과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는 정치 일선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그의 필생의 사업으로서 한강 유역 회복 작전을 기도하였다. 먼저 신라ㆍ가야군과 연합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백제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 세력에 변변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군을 물리치고서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결탁한 신라는 군대를 돌이켜 백제가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버렸다. 이로써 양국간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 정벌군을 일으키려고 하자, 당시 원로 대신인 기로(耆老)들은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성왕은 태자 여창(餘昌)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백제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증원된 신라군과 관산성 전투(管山城戰鬪)에서 싸우다가 성왕은 신라 복병에 의해 사로잡혀 전사하고, 전선에 나가 있던 태자 여창도 패배해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 3만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입었다. 신라 정벌군의 출정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행된 것이므로 관산성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 결과 위덕왕의 즉위 초에는 정벌을 반대했던 기로(耆老)들이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해 나갔다. 이로써 점차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정치 운영의 실권을 장악한 세력이 이른바 ‘대성 팔족(大姓八族)’으로 표현되는 사씨ㆍ연씨ㆍ해씨ㆍ진씨 등 8가문이었다. 이 시기에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이 6좌평체제이다. 6좌평제는 사비시대 전기의 5좌평제를 확대, 개편한 것으로서 왕명의 출납ㆍ재정ㆍ의례ㆍ왕궁숙위ㆍ형옥ㆍ병마관계 사무를 관장한 최고 귀족 회의체였다. 6좌평의 부상은 이것이 당시 정치의 중추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 하에서 법왕은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는 등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2년의 단명으로 죽었다. 이에 실권 귀족들은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던 몰락 왕족 출신인 서동(薯童)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 이가 무왕이다. 무왕은 비록 귀족들의 정략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신라에 대한 공격을 적극화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익산을 경영하고 이곳으로 천도하기 위해 왕궁을 짓고 제석사(帝釋寺)의 만들고,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기기도 하는 등 왕실의 권위를 높혔다. 그러나 그의 익산 천도 계획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5. 멸망

무왕은 재위 33년(632)에 왕자 의자(義慈)를 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무왕은 천도가 좌절된 이후 점차 환락에 빠져 측근들이 권세를 농단하기 시작해 정치정세는 매우 어지럽게 되었다. 무왕이 죽자 의자왕이 왕위를 이었다.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유교 이념에 투철하였다. 그는 우선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제거해 무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것이 일단락된 것이 642년(의자왕 2)에 왕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이 정변에서 의자왕은 내좌평 기미(岐味) 등 유력 귀족 40여 명을 추방하였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나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도 이러한 정치적 변혁에서 온 것이었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초기에는 고구려ㆍ왜와 화친 관계를 수립하고, 지배 질서를 확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15년 이후에 궁정의 측근 세력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행동을 비판한 성충(成忠)의 투옥 사실에서 보듯이 지배 계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생활이 무절제하게 되어진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와 정권의 천단은 백제의 지배 질서를 더욱 문란시켰다. 더구나 한강 유역 상실 이후 신라와의 사이에 형성된 구수(仇讐)관계로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켜나갔다. 특히 미후성(搗銳城) 등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킨 것은 커다란 개가였으나 이는 도리어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와의 결합을 보다 촉진시키게 하였다. 빈번한 신라와의 전쟁이 국력의 피폐를 크게 한데다가 나당 연합군의 결성은 백제를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660년에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침입하였다. 나당군의 공격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절대적 전략 요충지인 기벌포(伎伐浦)는 당군이 통과했고, 대신라(對新羅) 요충지인 탄현(炭峴)도 신라군이 통과하였다. 계백(階伯)이 거느린 결사대 5천명은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와해되어 버렸고, 백강에 다다른 당군을 방어하던 군사도 깨어지고 말았다.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육박해 들어가자 다급해진 의자왕은 태자와 더불어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다. 이에 왕자 태(泰)가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민심이 동요하고 이탈자가 많이 생겨나자 당군에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에 피난갔던 의자왕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당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6. 부흥 운동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과 네 왕자 및 88명의 대신과 장사(將士)와 1만2천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귀국하고,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으로 하여금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비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 유민들에 의한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흥 운동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정신과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한 뒤 보여준 횡포와 약탈이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함으로써 일어나게 되었다.

부흥군의 중심 인물로는 정무(正武)ㆍ지수신(遲受信)ㆍ흑치상지(黑齒常之)ㆍ복신(福信)ㆍ도침(道琛) 등을 들 수가 있다.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서 왕족이었고, 도침은 승려로서 군사를 일으켰다. 부흥군들은 처음에는 백제 멸망 후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거나 자기의 근거 지역의 민들을 규합해 부흥군을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복신ㆍ도침군을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복신과 도침은 중앙군을 형성하고 지방의 여러 성들에 근거한 재지 세력들과 연계해 부흥군을 체계화하였다. 부흥군은 초기에는 임존성을 주된 근거지로 했으나 곧 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들은 661년에 왜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삼아 독립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칭하면서 유인궤의 사신에 대해 고자세를 취하였다. 부흥군은 사비성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면서 신라가 사비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661년 3월에는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 대군을 격파해 남방 지역도 부흥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흑치상지열전에 흑치상지가 2백여 성을 회복했다고 한 것은 당시 부흥군의 성세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부흥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는 나당 연합군의 지배 지역은 극히 제한되었으며, 부흥군은 사비성을 포위해 당군과 신라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렇게 기세를 떨치던 백제의 부흥 운동은 자체 내의 내분으로 와해되었다. 부흥 운동을 주도하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그 뒤 복신은 풍왕과도 사이가 벌어져 풍왕을 암살하려다가 도리어 풍왕에게 살해당하였다. 부흥군 지휘부 내의 내분과 암투는 부흥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나당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내사지성(內斯只城 : 대전광역시 유성) 등 금강 동쪽의 거점 성들이 함락되었고, 거열성(居列城 : 경상남도 거창) 등 남방 지역의 거점 성들도 신라와 당의 군대에 함락되었다. 이처럼 부흥군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나당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나당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왜만이 수군을 보내왔다. 풍왕은 왜의 수군과 연계해 백강과 주류성에 나당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강 전투에서 왜군이 당나라 수군에게 크게 패배했고, 주류성도 공격을 받게 되었다. 황급해진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가고 부흥군의 중심 거점 성이었던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지수신은 임존성을 근거로 나당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지수신도 나당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해 고구려로 도망하고 임존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백제 부흥군의 부흥 전쟁을 끝을 맺고 말았다.

<노중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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