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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8:2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030      
[삼국] 백제 문화 (민족)
백제(문화)

세부항목

백제
백제(역사)
백제(제도)
백제(대외관계)
백제(문화)
백제(연구사)
백제(참고문헌)

1. 사상ㆍ신앙

[유학]

고대 국가 형성 이후 백제는 귀족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 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시하였다. 그리고 박사제도가 있었던 것을 보면 유학 교육 기관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유학의 확대, 보급으로 경(經)ㆍ자(子)ㆍ사(史) 등 유학 관계의 서적이 읽히고, 특히 성왕 때는 양(梁)나라에 모시박사(毛詩博士)ㆍ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하기도 하였다.

한편, 백제는 유교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성 시대에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대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문이 사용되고 유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국사도 편찬되었다. 근초고왕대에 처음으로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 書記≫를 편찬하였다. 또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기 百濟記≫ㆍ≪백제신찬 百濟新撰≫ㆍ≪백제본기 百濟本記≫ 등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가 편찬되었다고 한다. 이 삼서는 본래 백제 조정에 의해 편찬된 듯한데 백제의 멸망을 전후해서 일본에 전해졌고, 내용의 일부가 고쳐져 ≪일본서기≫에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문학도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자연히 발달하게 되었다.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장문의 국서(國書)는 비범한 명문이었다. 또 백제 의자왕대의 작품인 〈사택지적비문 砂宅智積碑文〉은 세련된 문장의 노장 사상[불교 사상의 잘못임]이 나타나고 있다.

[불교]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1)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漢山)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아신왕은 불법을 숭신해 복을 구하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사비 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성왕은 겸익이 인도에서 갖고 온 범문율부(梵文律部)를 명승 18명으로 번역하게 하고, 담욱(曇旭)ㆍ혜인(惠仁) 등 고승으로 하여금 ≪율소 律疏≫ 36권을 저술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비담신율서 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戒律)의 역행(力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양나라로부터 열반(涅槃) 등 경의(經義)와 공장(工匠)ㆍ화사(畵師) 등을 청해왔다.

그리고 법왕은 호국의 영장(靈場)으로 왕흥사(王興寺)를, 무왕은 익산에다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이처럼 불교가 성행하자 교리의 연구도 활발해 율학(律學)이 발달하고 삼론학(三論學)ㆍ성실종(成實宗) 등이 연구되었다.

이름난 승려로는 양나라에 유학한 발정(發正), 삼론학의 대가로 일본에서 초대 승정(僧正)이 된 관륵(觀勒), ≪법화경 法華經≫의 독송(讀誦)에 힘써 ≪속고승전 續高僧傳≫에 오른 혜현(慧顯), 중국의 형산(衡山)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운 현광(玄光), 일본에 건너가 ≪성실론소 成實論疏≫를 저술한 도장(道藏) 등을 들 수가 있다. 한편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수하고,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 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도가 사상]

도가 사상(道家思想)의 전래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신선 사상 혹은 방술(方術)은 일찍부터 존재했고, 도가적인 잡술(雜術)도 이른 시기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대의 장군인 막고해(莫古解)가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노자(老子)의 ≪도덕경 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 이미 4세기 중엽에 도가 사상이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왕이 궁남지(宮南池)를 축조하고 못 속에 섬을 만들어 이를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기었다든가 와전(瓦散) 중에 산경문전(山景文塼)이 제작되고, 능산리 제6호분에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것은 신선 사상 내지 도가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왕 초에 관륵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 중에 둔갑방술(遁甲方術) 같은 도교적인 잡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도교적인 문물이 상당히 성행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근래에 부여 능산리에서 발견된 금동 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 고유의 산악 숭배와 더불어 신선 사상 및 도교 사상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기타 신앙]

백제의 신앙은 조상 숭배, 제천 신앙, 산천 신앙, 불교적 제의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오행 사상에 의한 오제 숭배 외에는 토속 신앙의 흐름이 강하게 이어져왔다.

조상 숭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백제 왕실의 근원이 되는 부여족의 족조인 동명에 대한 제사가 동명묘에서 행해졌다. 제천 의식은 고조선의 하늘 숭배와 동일한 계통의 문화를 계승한 부여ㆍ고구려계 시조 설화가 결합된 것으로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과 아울러 삼한의 천군ㆍ소도의 존재에서도 토속 신앙의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산천 신앙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오악 신앙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리고 사비 시대에 불교가 크게 융성하면서 불교적 제의가 많이 행해지고 되었고, 장례에도 불교식 장풍으로서 화장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2. 고분

백제 고분은 적석총과 봉토분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봉토분은 다시 석실분ㆍ석관묘ㆍ토광묘ㆍ옹관묘로 구분된다.

[한성 시대]

한성 시대의 적석총은 서울 석촌동의 낮은 대지 위에 수십기가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현재 3ㆍ4호 두개밖에 남아있지 않다. 제3호분은 동서 55.5m, 남북 43.7m의 평면에 현재의 높이가 4.5m인 대형 적석총으로서 3단까지 추적할 수 있다. 제4호분은 제1단의 평면이 17m, 높이 3m(3단)의 축석총(築石塚)이다. 그리고 양평 문호리의 적석총은 일변 10m, 높이 2.7m의 방형분으로 냇돌을 3단 피라밋형으로 쌓은 것이다. 이것들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석실분은 서울 가락동ㆍ방이동, 여주 상리 등에 분포하고 있는데 대체로 얕은 구릉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석실은 평면이 방형이고, 연도가 동벽 가까이 ㄱ자형과 장방형에 연도가 남벽 중앙에 열린 ‘모’자형의 두 가지가 있다. 이러한 석실분은 구조상 고구려 계통이라 할 수 있다. 토광묘는 이 지역 본래의 묘제로 생각되며, 봉토에는 돌이나 기와를 표토 가까이에 한 겹 깐 것이 특색이다.

[웅진 시대]

웅진 도읍기로 오게 되면 적석총은 없어지고, ㄱ자형 석실분과 장방형 석실분이 유행하고 중국계통의 전축분이 축조되었다. 그리고 분묘의 입지도 평지에서 구릉으로 이전되고, 배수구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ㄱ자형 석실분은 돔형식에 벽에 회칠을 했으며, 장방형 석실분은 서울지구의 장방형 석실에서 발전한 것으로 순수 백제식 석실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축분으로는 현재 공주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만이 남아 있다. 송산리 제6호분은 이 지역 유일의 벽화전분(壁畵塼墳)으로 그림부분에만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이 전축분은 터널형이어서 중국 육조전분(六朝塼墳)의 양식을 받아들였으나 벽화만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령왕릉은 벽화는 없지만 터널형 전축분으로 현실의 크기는 남북 4.2m, 동서 2.72m, 높이 2.93m이고 연도가 달려 있다. 매장은 동쪽에 왕, 서쪽에 왕비를 각각 남침(南枕)으로 누였고, 목관은 흑칠(黑漆)의 두꺼운 목재에 금은의 장식못을 박은 화려한 관이었다. 그리고 연도에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ㆍ매지권(買地券)은 중국 육조(六朝) 묘제를 따른 것이며, 매지권 위에는 양나라의 오수철전(五銖鐵錢)이 한 묶음 놓여 있었다.

[사비 시대]

사비 시대로 오게 되면 ㄱ자형 석실은 없어지고 연도 달린 상자형 석실이 주류를 이루며, 소백산맥 접근지역에서는 가야식의 석곽묘들이 나타나고 있다. 부여 지방에서는 능산리 고분군이 유명한데 현재 6기가 남아 있다. 이 무덤들은 장방형 석실로 고구려식인 것이 주목된다. 능산리 제1호분은 현실의 크기가 2.75×1.12×1.55(높이)m로서 네 벽 및 천장은 잘 물갈이한 편마암판으로 축조했고, 석면(石面)에 사신을 직접 그렸다. 이 사신도는 고구려의 것과 비슷한 것이 주목된다.

한편 영산강 하류인 나주시와 영암군 내에서는 옹관묘의 군집이 있다. 이 옹관묘들은 초기 철기 시대 이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일 봉토 내에 여러 개를 합장한 것이 주류이다. 옹관의 형식에는 단옹(單甕)과 합구식(合口式)이 있으나 합구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나주 신촌리 제6호분은 금동관ㆍ금동식리(金銅飾履)ㆍ철도 등의 부장품이 나와 지방 호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3. 건축ㆍ미술

[건축]

백제의 건축물로는 동성왕대의 임류각(臨流閣), 의자왕 때의 태자궁(太子宮)ㆍ망해정(望海停) 등 궁실 누각과 대통사(大通寺:公州)ㆍ왕흥사(王興寺:扶餘)ㆍ미륵사(益山) 같은 대사찰의 이름을 기록에서 볼 수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궁실 누각 중 공주의 공산성(公山城) 내에서 임류각지(臨流閣址)와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것이 발굴 조사되었다.

백제의 가람 제도는 몇몇 사지(寺址)가 발굴 조사되면서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 조사된 사지로는 부여 지방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ㆍ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ㆍ금강사지(金剛寺址)ㆍ정림사지(定林寺址)와 익산의 미륵사지가 있다. 군수리사지는 목탑지(木塔址)로 생각되는 방형의 기단을 중심으로 중문(中門)ㆍ금당(金堂)ㆍ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ㆍ강당을 회랑(回廊)으로 연결해 탑과 금당을 둘러싼 일탑식 가람배치였다.

이와 같은 일탑식 가람배치는 금강사지ㆍ정림사지의 발굴조사에서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한편 미륵사지는 발굴 결과 중앙에 목탑이 있고 현존하는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조 동탑이 있었음이 밝혀져 3탑ㆍ3금당이라고 하는 삼소(三所) 가람의 형식을 취하였다.

현존하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석탑이다. 석탑은 목탑(木塔)에서 비롯되었는데, 대표적인 석탑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석탑을 들 수 있다. 이들 석탑은 모두 백제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목조 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초층(初層) 탑신의 부재(部材)는 목조건물의 부재를 모방해 모두 다른 돌을 사용했고, 기둥 위의 3단 층개(層蓋)받침은 공포를 번안한 것이고 옥개석이 넓게 퍼져 추녀 끝이 들려 있음도 목조건축의 추녀와 같다.

백제의 불상으로는 금동불과 석불ㆍ납석상(蠟石像) 등이 남아 있다. 금동불로서는 금동보살입상ㆍ금동보살상ㆍ금동석가여래입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부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은 북위(北魏) 불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특색있는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금동석가여래입상은 광배(光背)에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처를 추복(追福)하기 위한 명문(銘文)이 있어 유명하다.

석불로는 서산 태안면의 마애삼존불과 운산면의 마애삼존불이 있다. 운산면의 삼존불은 높이 2.8m의 거대한 여래입상을 주존으로 오른쪽에 보살입상을, 왼쪽에 반가사유상을 배치한 삼존불이며 두 눈을 크게 뜨고 활짝 웃는 미소가 ‘백제의 미소’의 전형적인 것이다.

[미술]

백제의 회화는 공주 송산리와 부여 능산리에 각각 1기의 벽화 고분이 있다. 그리고 공주 무령왕릉에는 왕비 두침(頭枕)에 세화(細畵)가 그려져 있다. 송산리 제6호분은 전축분으로 벽화를 그릴만한 자리에 진흙을 칠하고 면회(面灰)한 위에 사신도를 그렸다. 지금은 회가 떨어지고 색이 퇴색되어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능산리 석실분에는 네 벽에 사신도와 천장에 연화와 구름무늬가 그려졌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져 백호(白虎)의 머리부분과 연화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연화는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형식이고 운문은 비운(飛雲)인데 꼬리가 길게 끌린 양식이 연판(蓮瓣)의 형식과 더불어 고구려와의 연관을 느끼게 한다.

무령왕릉의 세화는 두침 표면을 옻칠한 다음 귀갑문(龜甲文)을 치고 그 안에 비천(飛天)ㆍ어형(魚形)ㆍ조형(鳥形)ㆍ연화 등을 그렸는데, 어느 것이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도 생동하는 기운을 나타내고 있다. 이밖에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태자상(聖德太子像)을 그렸다고 한다.

[공예]

백제의 공예는 주로 고분출토의 장신구 및 토기ㆍ기와ㆍ전 등이다. 장신구에는 무령왕릉에서 금제관식ㆍ금제귀걸이ㆍ은제팔지ㆍ은제탁잔(銀製托盞)ㆍ두침ㆍ족좌(足座) 등이 출토되었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제9호분 옹관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었고, 신라금관의 형식과 비슷하나 보다 고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근초고왕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七支刀)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 것으로 상감된 명문(銘文)은 한일 고대 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다.

토기는 고구려ㆍ신라의 토기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드러운 곡선과 정교한 문양, 그리고 때로는 회백색의 기표(器表)ㆍ색조(色調)에서 오는 온건한 조형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흑도(黑陶) 같은 토기가 생산되기도 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삼족기(三足器)가 만들어졌고, 후기에는 청록색 또는 황갈색의 유약을 바른 시유(施釉)토기가 제작되었다. 이들 시유토기는 신라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와당(瓦當)은 목조 건축의 성행과 더불어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낙랑계의 영향을 받았으나 6세기 중엽에는 높은 수준에 도달해 3명의 와박사(瓦博士)를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와당에는 연화문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그 표현은 다양하고 온화하다.

서울 광장동에서 발견된 고식의 연화문 와당을 비롯해 모든 연화는 모가 없이 우아한 표현이 특징이다. 미륵사지ㆍ금강사지 등에서 발견된 연화문 연목와(椽木瓦), 부여 가탑리 출토의 귀면문 연목와 등은 다른 두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극히 아름다운 표현이다. 또 미륵사지에서 최근에 녹유를 시유한 와당이 발견되었는데 매우 주목되는 와당이다.

전(塼)은 묘실 축조로 사용되고 있다. 전의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과 연화ㆍ인동문(蓮花忍冬文) 등이 조각되었다. 표현 수법은 다른 유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온건, 우아한 품위가 나타나 있다. 형식은 중국 남조의 연화문이 있는 구형전(矩形塼)과 통하며, 이러한 전으로 축조한 묘실의 내부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밖에 부여에서 발견된 연화ㆍ인동문의 상형전(箱形塼)과 부여 규암면 출토의 방형문양전(方形文樣塼)이 유명하다.

<노중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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