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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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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9393      
[삼국/남북국] 신라사 개관 (민족)
신라(新羅)

관련항목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발해

세부항목

신라
신라(역사)
신라(제도)
신라(문화)
신라(연구사)
신라(참고문헌)

서기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다고 하는 왕조 국가. 고대 삼국의 하나로서, 7세기 중엽에 백제ㆍ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이른바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국호 신라는 사로(斯盧)ㆍ사라(斯羅)ㆍ서나(徐那)ㆍ서나벌(徐那伐)ㆍ서야(徐耶)ㆍ서야벌(徐耶伐)ㆍ서라(徐羅)ㆍ서라벌(徐羅伐)ㆍ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혹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수풀의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 한자의 아름다운 뜻을 가장 많이 가진 신라로 확정하였다. ≪삼국사기≫ 찬자에 의하면, 신라의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했다고 하는데, 이는 후세의 유교적인 해석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신라(역사)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대 구분을 참작해 여섯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이 [표] 중 제1기에서 제3기까지를 상대, 제4기를 중대, 제5기 이후를 하대로 구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제1기와 제2기를 상고, 제3기를 중고, 제4기 이후를 하고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주로 왕통의 변화에 따른 독자적인 시대 구분이지만, 신라 역사의 발전 대세를 가지고 시대 구분할 때도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1. 성립과 발전

[건국과 초기의 발전]

제1기는 신라의 건국으로부터 연맹 왕국(聯盟王國)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신라도 다른 초기 국가와 마찬가지로 최초 성읍 국가(城邑國家)로 출발했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서기전 57년이라 했으나, 성읍 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빨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신라 역시 청동기 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권한이 강화된 결과 성읍 국가가 출현한 것이 틀림없는데, 경주 지역으로의 청동기 문화의 파급은 서기전 1세기보다 몇 세기 일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읍 국가로서의 신라는 경주 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ㆍ사량(沙梁)ㆍ본피(本彼)ㆍ모량(牟梁, 혹은 漸梁)ㆍ한기(漢岐, 혹은 漢祉)ㆍ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 지대에서 취락 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 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된 것이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였으며, 그는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ㆍ김씨를 칭하였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2세기 후반에 탈해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세력 집단이 다시 경주로 진출해 신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즈음에 신라는 연합이나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진한(辰韓)의 여러 성읍 국가를 망라해 보다 확대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의 점(點)에 불과하던 성읍 국가로부터 일정한 영역ㆍ영토를 가진 연맹 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주변 국가들에 대한 지배ㆍ복속의 정도는 아직 미약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에 복속한 국가들 중에는 수도 금성(金城)을 침입하거나 또한 토착 세력의 거수(渠帥)들 가운데는 중국 군현과 통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같은 상태는 3세기말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초에 중국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타멸되고,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대 세력이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날카롭게 대립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낙동강 동쪽 사회도 이에 자극을 받아 신라를 맹주(盟主)로 한 국가 통합운 동이 급속히 진전된 결과 4세기 중엽에는 연맹 왕국이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립간 시대의 신라]

제2기는 연맹 왕국의 발전기로서 다음에 전개될 중앙 집권적 귀족 국가를 준비하던 태동기였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이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거서간(居西干)ㆍ차차웅(次次雄)ㆍ이사금(尼師今) 등의 왕호는 그다지 권력자의 의미를 풍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물왕(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ㆍ고처(高處)의 지배자[干]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 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ㆍ석ㆍ김 3성에 의한 교립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실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해 왕위의 부자 상속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내물마립간 때에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중국 북조(北朝)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사신은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았다. 특히,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는 전진의 왕 부견(覽堅)의 “경(卿)이 말한 해동(海東)의 사정이 예와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당한 정복 국가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말해준 것이다.

당시 신라는 정치ㆍ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왕의 능비문(陵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명이 신라의 국경 지대로 출동해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사 원조는 신라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는 등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 정책을 적극화하자,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에는 백제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 뒤 475년(자비마립간 18)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무력으로 침공, 점령한 뒤에는 백제와 다시 결혼 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 체제를 한층 강화했고, 일선 지대에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이 시기에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단행하였다. 종래의 족제적(族制的)인 6부를 개편하기 위해 469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의 방리(坊里) 이름을 정했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했으며, 다시 490년에는 수도에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하게 하였다.

5세기를 통해 신라의 왕권이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음은 이 시기에 축조된 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한 수많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487년 혹은 지증왕 때에 설치된 김씨왕실의 종묘로서의 신궁(神宮)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

제3기는 신라가 중앙 집권적인 귀족 국가로서의 통치 체제를 갖추어 국왕과 여러 귀족과의 일정한 타협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삼국유사≫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이른바 중고가 바로 이 시대이다. 이 시대는 법흥왕 때의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정치적ㆍ사회적 기반은 전왕인 지증왕 때에 대체로 마련되었다. 502년에 농사를 장려하는 왕명을 공표하는 가운데 우경(牛耕)이 시작된 것은 농업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발달한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종래 구구하게 사용 표기되어오던 국호를 신라로 정했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505년에 지방 제도로서 주군 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국가 체제 확립에 수반하는 조처들이었다. 대외 관계에서도 502년과 508년 두 차례 중국 북조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382년 이래 12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법흥왕 때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중요 관부를 설치하며, 진골 귀족 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 체제를 법제화ㆍ조직화한 시기였다. 520년(법흥왕 7)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관의 공복(公服)ㆍ17관등ㆍ골품제도 등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524년(법흥왕 11) 건립의 거벌모라(居伐牟羅)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한 문책으로 촌 사인(使人)들과 도사(道使)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장(杖) 1백대 혹은 60대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새겨져 있다.

또한 550년경에 세워진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赤城)비에는 호령(戶令) 및 전령(田令)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들 비문들을 통해 당시 율령의 수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얻게 되었다. 율령 제정에 앞서 516∼517년경에는 군사 문제를 전담하는 병부가 설치되었다. 531년에는 진골 귀족 회의의 주재자로 상대등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상대등의 설치를 전후한 527년 내지 535년경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가 있은 뒤인 536년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어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진흥왕 때는 이 기반 위에서 대외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시기였다. 이미 법흥왕 때에 김해에 있던 본가야를 병합해(532) 낙동강 하류 지방에서부터 북상하면서 가야 여러 나라를 위협했고, 이 때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耶)를 병합한 다음 562년(진흥왕 23)에는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고령의 대가야를 공략, 멸망시킴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사업으로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역시 한강 유역의 점령이었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충청남도 天安 혹은 충청북도 槐山)과 금현성(金峴城 : 지금의 충청남도 全義 혹은 충청북도 鎭川)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았다. 이듬해에 ‘개국(開國)’이라 개원(改元)하고, 친정하면서는 백제 중흥의 영주(英主) 성왕과 공동 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탈취하였다. 신라는 처음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 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을 기습 공격해 그들을 몰아냄으로써 한강 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554년에는 신라의 약속 위반에 분격해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沃川)으로 쳐들어온 성왕을 죽이고, 백제의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한편으로는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 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 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556년에는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 일명 碑利城)를 설치했고, 56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는 함흥 평야에까지 진출하였다. 이 같은 진흥왕의 정복 사업은 창녕ㆍ북한산ㆍ황초령ㆍ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에 있는 적성비(赤城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2. 삼국 통일과 중대의 황금 시대

[삼국 통일 전쟁의 수행]

560년대에는 신라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때부터 삼국 통일을 달성하는 660년대까지 한 세기 동안 실지 회복을 노리는 고구려ㆍ백제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국가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진평왕대 후반기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두 나라의 침략은 선덕여왕의 즉위 후 한층 가열해졌다.

642년(선덕여왕 11)에는 한강 방면의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南陽)이 양국 군대의 합동공격을 받아 함락직전까지 갔으며,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현재의 陜川)은 백제군에 함락되어 대야주 군주(軍主)이던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서부 국경선은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 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대당 외교(對唐外交)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이 지적한 여왕통치의 문제점과 그 대안으로 제시한 당나라의 황족에 의한 신라의 감국안(監國案)이 도리어 신라 정계를 분열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이에 여왕 지지파와 문벌 귀족 세력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중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 일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반란은 이들과 대립하고 있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연합 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내란 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그들은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정치ㆍ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7년 뒤에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해서 김춘추가 즉위,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이로써 제3기는 종말을 고하고, 신라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무열왕의 즉위를 기해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무열왕은 이 같은 군사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수세에서 벗어나 일약 공세로 전환하였다. 바야흐로 종전의 국가 보위 전쟁은 삼국 통일 전쟁으로 대전환을 맞았다.

대당 친선 외교는 당이 고구려와 백제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거중(居中)조정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한 양국간의 군사 동맹 체결로 발전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열왕은 660년 당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무열왕이 죽자 삼국 통일의 대업은 그의 아들 문무왕에게 넘겨졌다. 문무왕은 663년 백제 부흥 운동군을 완전히 진압하고, 668년에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만 당군은 백제 고지(故地)와 고구려 땅에 주둔하면서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려고 하였다. 당의 야욕을 간파한 문무왕은 당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 군대는 옛 백제 땅으로 진출해 이를 송두리 채 차지하였다. 신라와 당 양국간의 긴장과 반목은 이윽고 전쟁 상태로 몰아넣었다. 신라는 670년 이래 당군을 상대로 하여 사투를 벌인 끝에 676년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압록강 너머 만주 지방으로 물러갔다. 이로써 신라는 진정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통일 신라의 황금 시대]

제4기는 왕통상으로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해간 시대이며, 권력 구조상으로 이전과는 달리 왕권이 크게 강화된 전제 왕권시대였고, 문화상으로는 신라 문화의 극성기였다. ≪삼국사기≫의 시대 구분인 이른바 중대가 바로 이 시대이며, ≪삼국유사≫는 이때부터를 하고로 잡고 있다.

신라가 이 시기에 들어와 전제 왕권을 구축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태종무열왕과 아들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크게 고양된 점,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단행된 중앙 귀족의 도태ㆍ숙청 및 지방 세력과의 연계 강화, 집사부(執事部) 중심의 일반 행정 체계와 유교적 정치 이념의 도입과 강행, 나아가 이로 인한 관료제의 발달 등이 전제 왕권의 확립에 기여한 요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집사부 중심의 정치 운영이 전제 왕권의 안전판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본래 집사부는 651년(진덕여왕 5)에 김춘추 일파가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모방해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 설치한 국왕 직속의 최고 관부였다. 이는 품주가 지닌 가신적(家臣的)인 성격을 표면화해 왕정의 기밀을 맡게 됨으로써 그 장관인 중시(中侍)는 국왕의 집사장 구실을 맡게 되었다. 이른바 중대 왕권은 이를 통해 전제화되어 갔다.

제3기가 불교식 왕명시대(王名時代)였다고 한다면, 이 시대는 중국식 묘호(廟號)를 쓰기 시작한 시대로서, 당시 정치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대의 전제 왕권은 신문왕 때에 정력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통일에 따른 중앙ㆍ지방의 여러 행정ㆍ군사 조직을 완성하였다. 중국 제도를 모방해 6전조직(六典組織)을 갖추거나, 제일급 중앙 행정 기구의 관직 제도를 다섯 단계로 정비한 것, 지방에 9주(州)를 비롯해 5소경(小京)을 설치한 것, 수도와 지방에 각각 9서당(誓幢)과 10정(停) 등의 군사 조직을 배치한 것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성덕왕 때에는 전제 왕권하의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ㆍ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경덕왕 때에는 진골 귀족들이 반발하였다. 689년에 폐지된 바 있는 진골 귀족들의 녹읍이 757년에 부활된 것은 귀족들이 전제 왕권의 지배를 벗어나려고 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움직임을 막기 위해 경덕왕은 757년에 전국의 모든 지명을, 759년에는 모든 관청ㆍ관직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이렇게 겉으로는 한화 정책 (漢化政策)을 표방하면서 실상은 국왕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 개혁에 열을 올렸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를 이어 즉위한 혜공왕 때는 전제 왕권의 몰락기로서,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에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과 친위 쿠데타가 잇따랐다. 특히, 768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반란은 전국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얽혀 싸웠다고 하는 대란으로서 3년 동안 지속되었다. 774년에는 반왕파의 중심 인물인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780년에 혜공왕이 김양상ㆍ김경신(金敬信)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태종무열왕 계통은 끊어지고 ≪삼국사기≫에서 시대 구분하고 있는 3대의 마지막 시대인 하대가 개막되었다.

3. 쇠퇴와 멸망

[신라의 쇠퇴]

제5기는 왕통상으로 원성왕 계통이나, 원성왕 자신이 내물왕의 12세손임을 표방한 점에서 혹은 부활 내물왕 계통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권력 구조상으로 보면 진골 귀족들이 왕실에 대해 서로 연합하는 형세를 띠면서도 각기 독자적인 사병 세력을 거느리고 있어 귀족 연립 혹은 분열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야를 전국적으로 확대해본다면 지방의 호족 세력이 크게 대두하고 있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다음에 전개되는 호족의 대동란은 실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었다.

이 시대의 개창자인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인 뒤 즉위해 선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변혁기의 정치적ㆍ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 경쟁에서 승리한 상대등 김경신이 즉위, 원성왕이 되었다. 그는 788년에 국학(國學) 출신자에 대한 관리 등용 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는 등 정치 개혁에 착수했으나, 왕실 직계 가족 중심으로 권력 구조를 개편함으로써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 뒤 애장왕 때는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이 되어 율령의 개정과 오묘 제도(五廟制度)의 확립을 통해 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권력 구조를 강화하려 했고, 김언승이 왕을 살해하고 헌덕왕이 된 뒤로는 이와 같은 노력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왕실 가족 중심의 정치 체제에서 소외된 진골 귀족들의 불만이 커져 822년(헌덕왕 14)에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웅천주(熊川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으나, 호족의 지방 할거적 경향이 이로써 크게 촉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뒤 흥덕왕 때에는 진골 귀족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일대 개혁 정치가 단행되었는데, 그 실효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더욱이 그가 죽은 뒤에는 근친 왕족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 3년간에 걸쳐 2명의 국왕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골 귀족들이 중앙에서 정쟁(政爭)에 휩쓸려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 세력들은 크게 성장해 점차 왕실을 압도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청해진(淸海鎭)을 근거로 한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해상 세력가는 그 두드러진 존재였다.

그 뒤 경문왕ㆍ헌강왕 때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줄기찬 노력이 기울여졌으나,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늦었고, 정강왕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에는 사태가 절망적이 되어 국가 재정은 파탄에 직면하고 말았다. 889년(진성여왕 3)에 조정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들을 반란 세력으로 몰아갔고, 조정은 끝내 이를 수습하지 못해 장기간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신라의 멸망]

제6기는 왕통상으로 제5기의 계승, 연장이었으나, 신라가 50년간의 내란 끝에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 쇠망기이다. 이 시기에 신덕왕ㆍ경명왕ㆍ경애왕 등 소위 박씨왕이 3대에 걸쳐서 등장했으나, 그들 역시 혈통상으로 김씨 왕통에 속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군웅들이 전국 도처에 할거해 신라 조정이 전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왕경 자체도 무방비 상태가 되어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왕경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할 정도였고, 927년에는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주역은 전국 각지에 자립하고 있던 군웅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한 견훤과 궁예(弓裔)였다. 신라는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동안 여맥(餘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정책상 신라와의 친선 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가 후백제에 대해 절대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해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기동>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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