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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2 (월) 05:3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4548      
[삼국] 신라 문화 (민족)
신라(문화)

관련항목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세부항목

신라
신라(역사)
신라(제도)
신라(문화)
신라(연구사)
신라(참고문헌)

1. 학문

경주 계림신라의 문화는 고유한 전통 문화의 바탕 위에 중국 문화를 가미한 점에 특색이 있다. 6세기 이후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건설한 신라의 지배층은 중국 문화를 환영해 받아들였지만, 외래문화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두의 사용]

신라인들은 문어(文語)로는 외국문자인 한자 및 한문을 쓰면서 구어(口語)로는 이와 그 구조를 전혀 달리하는 우리말을 쓰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을 없애기 위해 독특한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발전시켰다. 물론, 이 표기법은 고구려에서 전해진 듯하지만, 신라인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두(吏讀)를 성립시켰고, 7세기 후반에 설총(薛聰)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이 표기법은 일본으로 전해져 그들의 음절 문자인 가나(假名)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 자연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진흥왕순수비 비문은 삼국 통일 이전 신라의 한문 수준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국사의 편찬]

경주 황남동 고분군 (대릉원)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행해진 국가적인 편찬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545년(진흥왕 6) ≪국사 國史≫의 편찬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가 상주해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왕명을 받은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해 왕자(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 통일 이후에도 새로이 관찬 사서를 편찬했을 법한데,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성덕왕 때에 진골출신의 정치가요 역사가인 김대문이 ≪계림잡전 鷄林雜傳≫ㆍ≪화랑세기≫ㆍ≪고승전 高僧傳≫ㆍ≪한산기 漢山記≫ㆍ≪악본 樂本≫ 등 많은 저술을 했다고 한다. 이들 저술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때에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남아 있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에 의해서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는데, 이 역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유교의 발달]

임신서기석신라 시대에는 귀족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 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 통일  이전에는 유교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랑도가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유교 덕목은 신(信)과 충(忠)이었는데,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확인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 국가가 앞장서서 유교 도덕을 널리 국민에게 권장했던 것과 관계가 있는데,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충신정성(忠信精誠)해 나라를 위해 절개를 다하는 인물을 표창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비문에서는 유교의 왕도 정치(王道政治) 이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그런데 통일기에 들어오면 유교는 도덕 정치의 이념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이 설립되었다. 본래 국학은 통일 직전인 651년에 설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으나, 682년에 정식으로 설치되어 3과(科)로 나누어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여기에 입학하는 학생은 나이가 15∼30세로서 대사 이하의 관등을 가진 관료이거나, 무위(無位)인 자에 한정되었으며, 수학연한은 9년이었다.

그리고 국학생들이 졸업할 때 학력을 시험해 3등급을 매겨서 관직에 나아가게 하는 제도가 788년(원성왕 4)에 생겼는데, 이것이 독서삼품과였다. 국학의 입학생은 주로 육두품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유교를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주장하였다. 설총이 지은 ≪풍왕서 諷王書≫(일명 花王戒라고도 함)나 혹은 강수(强首)의 입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골품제 아래서 관계진출에 제약을 받고 있던 육두품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육두품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나아가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10여 조의 시무책 중에는 이 같은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비록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육두품 지식인들의 정치이념은 이후 고려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과학 기술의 발달]

경주 첨성대신라 시대에는 과학 기술도 매우 발달하였다. 통일 이전부터 농업과 정치의 두 부문에 관련이 깊은 천문학이 발달했고, 금속 야금(冶金) 및 세공기술이 뛰어났으며, 건축부문에서는 역학(力學)과 수학의 원리가 응용되었다. 이에는 중국 과학기술의 영향이 매우 컸으나, 신라는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개량, 변형하였다. 특히, 천문학 지식은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도 강했으므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경주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서 천체 관측에 대한 당시의 관심과 아울러 놀랄만한 과학기술의 도입 수용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기술 분야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ㆍ동의 세공 및 도금과 같은 금속 가공 기술인데, 마립간 시대 경주의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은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토기의 제작기술 역시 일찍부터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경주 왕릉에서 유리 제품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유리를 만들어 썼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삼국 통일 후에는 이와 같은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천문학에서는 718년에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해 누각박사로 하여금 시각을 측정하도록 했으며, 혜공왕 때에는 김암(金巖)과 같은 뛰어난 천문학자가 배출되었다. 역학(曆學)도 발전해 674년에는 덕복(德福)이 당나라에서 역술을 배워와 새로운 역법을 만들어 썼다. 또한, 금속 제품의 주조 기술도 발달해 구리로 만든 불상이나 종을 주조함에 기포가 매우 적은 우수한 것을 만들어냈다.

특히, 수학이 발달해 사원 건축 등에 크게 응용되었다. 신라의 최고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교육이 행해졌으며, 717년에는 산박사 제도(算博士制度)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발달된 수학지식은 불국사ㆍ석굴암 등 사원이나 석가탑ㆍ다보탑 등 석탑의 제작에 실제 응용되어 균형미 넘치는 건축물을 낳게 하였다. 또한, 의학도 발달해 692년에는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醫學)을 세우고 의학박사를 두어 중국의 의서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통일기의 신라 의학은 신라 고유의 의술에다가 한방 의학(漢方醫學)을 가미했을 뿐 아니라, 불교의 융성에 따른 인도의학, 그리고 남방 및 서역(西域)의 의학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서적의 보급과 함께 인쇄술ㆍ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최근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목판으로 인쇄된 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또한, 닥나무〔楮〕를 써서 만든 이른바 저지(楮紙)는 색이 희고 질겨서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2. 종교

신라 시대의 종교를 보면 재래의 샤머니즘 외에 불교ㆍ도교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전래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불교의 발달]

이차돈 순교비불교는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를 통해 전해져 처음 북쪽 지방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전도자들은 당국의 박해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소지마립간 때에 아도(阿道, 일명 墨胡子)가 일선(一善 : 지금의 경상북도 善山)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전도에 힘썼으나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그러던 중 521년에 중국 남조인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두 나라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비로소 불교가 신라왕실에 정식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던 법흥왕의 노력은 귀족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실패로 끝났고, 527년(법흥왕 14) 왕의 총신인 이차돈(異次頓)이 창사(創寺) 준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왕과 귀족 세력간에 일정한 타협을 보게 되어 535년경에는 마침내 공인을 받게 되었다.

불교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매우 적합했을 뿐 아니라,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해주는 이론적 근거도 갖추었기 때문에 공인 후 국왕과 귀족 세력 쌍방의 조화 위에서 국가불교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물론, 질병을 고친다든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현세이익을 기원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전반적으로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황룡사 복원 모형그러므로 호국경전인 ≪인왕경 仁王經≫과 ≪법화경 法華經≫이 매우 존중되었으며, 호국의 도량(道場)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황룡사 같은 사찰을 짓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찰에서는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함께 팔관회 같은 호국적인 행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선덕여왕 때 신라의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중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와 황룡사의 사주(寺主)로서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불교를 총관한 자장(慈藏)은 신라 왕실이 석가와 같은 찰제리종(刹帝利種, 크사트리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불법(佛法)과 왕법(王法)을 일치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아가 호국을 위한 전쟁이 동시에 호법(護法)을 위한 싸움이라고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였다. 이처럼 승려들에게 있어서 호국과 호법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을 적극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원광 자신은 비록 전쟁을 용인한 적은 없으나, 진평왕의 명령을 받아들여 〈걸사표 乞師表〉를 쓰기도 했으며, 또한 임전무퇴(臨戰無退) 등 전투에 있어서 용감하기를 권하는 세속오계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윤리적ㆍ실천적 의미의 현세 구복적인 성격에서 점차로 종교적ㆍ신앙적인 의미의 내세적인 불교로 바뀌어갔다. 정토 신앙(淨土信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뚜렷한 증좌이다. 정토 신앙은 통일 직전 왕경의 하급귀족이나 평민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몰락해 지방으로 낙향해간 사람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원효(元曉)는 극락(極樂)에 왕생하는 데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여섯자를 극진한 마음으로 부르면 족하다고 설교하였다. 이로써 교리상의 발전은 물론, 신앙면에서도 위로는 국왕과 귀족을 비롯해 아래로는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갔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한편 통일기에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갔다. 통일 전 국가 불교가 융성했을 때의 승려들은 현실 참여를 강요당하게 되어 교리연구에 소홀하였다. 그러나 각덕(覺德)이 양나라에 다녀온 549년 이래 많은 승려들이 서학(西學)하고 돌아와서 교학불교(敎學佛敎)의 전개에 큰 자극을 주었다. 역시 6세기 후반에 진(陳)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이 진평왕 때 운문산 가슬사(嘉瑟寺)에 머물면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가르쳤던 것은 그 뒤 교학불교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통일기에는 불교에 대한 허다한 저술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이름난 것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ㆍ≪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ㆍ≪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ㆍ≪판비량론 判比量論≫ 등이었다. 그밖에 원측(圓測)ㆍ의상(義湘)ㆍ도증(道證)ㆍ승장(勝莊)ㆍ경흥(憬興)ㆍ의적(義寂)ㆍ태현(太賢) 등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은 내용이 풍부하고 이해의 수준이 높아서 중국 및 일본에 교리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교리의 대립을 가져와 여러 교파의 분립 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종래에는 흔히 5교(敎)라 하여 열반종(涅槃宗)ㆍ계율종(戒律宗)ㆍ법성종(法性宗)ㆍ화엄종(華嚴宗)ㆍ법상종(法相宗)을 꼽아왔으나 최근에 이 5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통일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의상의 화엄 사상과 원효의 화쟁 사상(和諍思想)이었다.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 부도한편, 신라 말기에는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데 치중했던 만큼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존하는 교종과는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선종이 처음 신라에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 때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이해를 얻지 못하다가 헌덕왕 때 도의(道義)가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함에 따라 점차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선종 9산(山)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배경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환영해 후원했기 때문이다. 선종은 신라의 지배 체제에 반발하고 있던 지방 호족들에게 자립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도교의 발달]

신라 시대에는 도가 사상(道家思想)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도가 사상은 장생 불사(長生不死)의 신선 사상의 형태를 띠고 발달했는데, 산악 신앙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경주 서악(西嶽)의 선도산 성모전설(仙桃山聖母傳說)은 선도와 인연이 깊은 서왕모(西王母)의 전설을 연상하게 한다. 진평왕 때 지상의 범골(凡骨)들과는 다른 장생 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세(大世)의 이야기라든지, 혹은 김유신이 중악(中嶽)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닦은 것 등으로 미루어볼 때 선풍(仙風)이 성행하던 신라에는 신선 방술(神仙方術)을 곁들인 도교 문화가 쉽사리 수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674년(문무왕 14)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세 섬은 삼신산(三神山)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며,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은 유교와 더불어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설(說)을 섭렵했다고 하므로 그가 도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가사상은 이처럼 장생불사의 신선사상으로서 관심을 끌었으나,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연 속에 묻히려는 은둔사상도 발달하였다. 감산사(甘山寺)를 지은 김지성(金志誠)이나 당나라의 수도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도사로서 일생을 마친 김가기(金可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라 말기에 지방 세력의 등장과 동시에 유행되기 시작한 사상에 풍수 지리설이 있다. 이는 인문지리학의 지식에 예언적인 참위설(讖緯說)이 가미된 것이었는데, 이를 크게 선양한 것은 승려 도선(道詵)이었다. 그는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이른바 명당을 골라서 근거지를 삼거나 혹은 주택과 무덤을 지어야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수의 쇠왕과 순역(順逆)을 점쳤다고 한다. 이 설은 호족들 사이에서 크게 신봉되었으며, 특히 고려 시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3. 문학

신라 시대의 문학은 원시 심성(心性)의 가장 보편적인 정령관(精靈觀)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가무ㆍ제의에서 발생했는데, 크게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설화 문학과 시가문학]

설화 문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자 우로(于老)나 박제상(朴堤上) 등에 얽혀 있는 단편 사화(史話)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가 역사적 실존인물이고, 내용도 적국(敵國)인 왜에 대한 투쟁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일종의 영웅서사시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시가문학은 민요ㆍ향가 등 다양한 편이다. 민요풍을 띠는 시가로는 〈서동요 薯童謠〉와 〈풍요 風謠〉가 있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武王, 혹은 東城王)이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공주가 몰래 자신과 밀회를 즐긴다는 내용의 동요를 지어 신라 왕경 안의 민중들에게 모략적으로 유포시켰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민중들이 어떤 왕실귀족의 떠들썩한 연애사건을 풍자해 지어낸 노래인 듯하다. 〈풍요〉는 경주 영묘사 내의 조상(造像) 공사와 관련된 일종의 노동요로서 후대에까지 민중 사이에 불렸다.

[향가의 발달]

시가 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향가로 발전했으며, 통일기에는 많은 향가 작가가 나타났다. 소박한 노래 속에 부드러운 가락을 담고 있어 국문학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향가는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노래였으나, 자체가 주원적(呪願的)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신라 시대에는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에는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삼대목 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체의 수를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14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이름난 것이 승려 융천사(融天師)의 〈혜성가 彗星歌〉, 재가승(在家僧) 광덕(廣德)의 〈원왕생가 願往生歌〉, 낭도 득오(得烏)의 〈모죽지랑가 慕竹旨郎歌〉, 승려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 祭亡妹歌〉, 승려 충담사 (忠談師)의 〈찬기파랑가 讚耆婆郎歌〉, 처용(處容)의 〈처용가〉 등이다. 향가는 주로 승려나 화랑과 같은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을 작가로 한 귀족사회의 소산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민중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어 국민 상하간에 널리 애창되었다.

4. 예술

[음악과 춤의 발달]

시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은 또한 종교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지녔다.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의 전래를 계기로 크게 발달하였다. 본래 가야금은 대가야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6세기 중엽에 악사 우륵(于勒)에 의해 신라에 전해져 마침내 대악(大樂, 일명 宮中樂)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우륵은 12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가야지방에서 유행한 노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노래는 비록 지방색이 강한 시골음악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대중의 속악(俗樂)은 아니었으며, 궁중이나 귀족들의 연회에 쓰일 만큼 세련된 음악이었다.

우륵의 제자 중에는 계고(階古)ㆍ법지(法知) 등이 있었고, 가야금에는 하림(河臨)ㆍ눈죽(嫩竹)의 2조(調)와 도합 180개나 되는 악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방아타령 筠樂〉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야금 계통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일기에도 가야금이 악기 중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외에도 많은 악기를 사용하게 되어 기본이 되는 악기는 가야금ㆍ거문고〔玄琴〕ㆍ향비파(鄕琵琶)의 3현 (絃)과 대금(大魁)ㆍ중금(中魁)ㆍ소금(小魁)의 3죽(竹)이 있었으며, 여기에 박판(拍板)과 대고(大鼓)가 첨가되었다. 이 중 거문고는 본래 고구려의 악기였는데, 고구려가 망한 뒤 신라로 망명해온 일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전해져 지리산에서 전존되어왔다. 이것을 옥보고(玉寶高)가 배워서 신조(新調) 30곡을 지었다고 하며, 뒤에 귀금선생(貴金先生)이 이를 보급했다고 한다.

한편, 향비파는 서역의 악기였는데, 그것이 향악(鄕樂) 합주에 쓰이게 됨에 따라 향비파라 불리게 된 듯하다. 이른바 3죽은 향악기였는데, 당악(唐樂)의 합주에도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노래곡조에 맞추어 추는 춤은 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라시대의 음악은 악기와 노래에 춤이 가미된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다. 여기에는 농사의 풍작을 비는 축제 때에 징과 북 장단에 맞추어 요란스럽게 추는 군무가 성행했는데, 가야금이 전래됨에 따라 그 가무는 한층 세련되어갔다.

특히, 중국을 통해서 서역계통의 가면무용이 전해짐으로써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산예(산猊) 등 이른바 신라 오기(五伎)가 성립되었다. 이 밖에도 헌강왕 때에 처용무와 상염무(霜髥舞)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가면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의 발달]

신라 시대의 미술은 크게 건축ㆍ조각ㆍ공예ㆍ회화ㆍ서예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건축

건축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릉ㆍ사찰ㆍ탑파(塔婆) 등이 있다.

황남대총 발굴 모습① 왕릉 : 삼국통일 이전 신라왕들은 생시의 지상의 주거 생활을 그대로 지하의 무덤으로 옮긴다는 취지에서 고총(高塚)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현세의 생활 도구가 고스란히 부장되어 있어 왕릉은 건축뿐만 아니라 공예 혹은 회화를 살피는 데도 보고의 구실을 하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왕경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 수혈식(竪穴式) 적석총을 만들었다. 6세기 후반경에는 왕경의 주변지역으로 흩어져서 산 밑이나 언덕 위에 만들어졌을며, 무덤의 양식 또한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통일 후에는 무덤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 제도(護石制度)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밖에 무덤 둘레에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네 석사자, 방주석ㆍ난간을 배치하며, 무덤 앞에 석상(石床)을 놓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양쪽으로 문무석인(文武石人)과 석주를 배치하는 복잡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경주 불국사 전경② 사찰 : 신라 시대에는 왕경 안에 흥륜사(興輪寺)ㆍ황룡사(皇龍寺)ㆍ영흥사(永興寺)ㆍ분황사(芬皇寺)ㆍ영묘사(靈廟寺)ㆍ사천왕사(四天王寺)ㆍ황복사(皇福寺)ㆍ망덕사(望德寺)ㆍ봉덕사(奉德寺)ㆍ창림사(昌林寺) 등 많은 거찰이 있었다. 현재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그 유지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통일 이전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종래에는 황룡사가 백제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생각해 가람배치 역시 백제계통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발굴 결과 문ㆍ탑ㆍ금당ㆍ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과 강당에서 회랑에 연결되는 것 등은 백제와 같으나, 금당만은 고구려 계통의 삼금당식에 속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세 금당을 탑의 동서와 북쪽에 배치한 고구려와는 달리 이것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밖에도 황룡사는 중문 남쪽에 남문을 또 하나 세웠으며, 사찰의 경계에는 담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가람 배치의 양식이 무척 다양해져, 사천왕사ㆍ망덕사ㆍ감은사ㆍ불국사 등은 금당 앞 양편에 두 개의 탑을 세워두는 이른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중앙지향적인 느낌을 주고 있어 당시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은 경향은 경덕왕 때에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석굴암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③ 탑파 : 탑파는 신라시대 불교 건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통일 이전에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때 백제사람 아비지(阿非知)가 2백여 명의 공장(工匠)을 지휘해 건축했다고 하는 황룡사의 구층목탑은 고려 때 몽고의 병란에 불타 없어졌다.

옛 기록에 의하면 목탑은 전체높이가 80m쯤 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탑의 기단에 배치된 거대한 심초석(心礎石)을 보아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현재 통일 이전 탑파의 모습은 분황사의 모전탑(模塼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석재를 전형(塼形)으로 잘라서 전축(塼築)과 같은 수법으로 축조했으며, 탑의 구조자체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번안한 것이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대체로 기단부가 넓고 높아지며 탑신은 각층이 일정한 체감률을 가지고 조성된 균형잡힌 방형 3층탑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덕왕 때에 건립된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해 감은사터 삼층석탑, 고선사(高仙寺)터 삼층석탑, 원원사(遠願寺)터 삼층석탑, 갈항사(葛項寺)터 삼층석탑 등이 있다. 한편, 특수한 형태의 뛰어난 석탑으로는 석가탑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불국사 다보탑과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화엄사(華嚴寺) 사자탑이 있다. 이밖에 독자적인 형식의 것으로 월성(月城) 정혜사(淨惠寺)터 십삼층석탑이 있다.

(2) 조각

조각으로서는 불상과 각종 석조물이 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① 불상 : 통일 이전의 불상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분황사탑에 조각된 8구의 인왕상(仁王像), 남산 장창곡 (長倉谷) 삼화령(三花嶺) 미륵존상,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속칭 上人巖) 석굴의 마애상 등 모두 석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574년경에 만들어진 황룡사의 금동장륙삼존상(金銅丈六三尊像)은 신라 최대의 거불이며 동시에 걸작으로 이른바 신라 3보(寶)의 하나로까지 손꼽혔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국적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두 불상, 즉 탑형이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78호)과 얕은 삼산관(三山冠, 일명 三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83호)을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통일 이전에는 조각가로 승려 양지(良志)가 있어서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을 비롯해 많은 불상과 와전(瓦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통일기의 불상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나, 감산사의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은 중국ㆍ인도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는 걸작이다. 이는 굴불사(堀佛寺) 사면석불을 거쳐 석굴암의 불상에 이르러 그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② 석등ㆍ석조ㆍ당간지주 : 통일기의 조각작품으로는 불상 외에 석등ㆍ석조(石槽)ㆍ당간지주ㆍ비석ㆍ호석 등 다양한 편이다. 석등은 중흥산성(中興山城) 쌍사자석등과 법주사 쌍사자석등을 꼽을 만하며, 석조는 경주 보문리석조와 법주사 석연지(石蓮池), 당간지주로는 공주 갑사ㆍ망덕사터, 부석사터, 공주 반죽동(斑竹洞), 금산사(金山寺)의 것이 유명하다. 비석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龜趺)와 이수(賂首), 김인문묘비의 것으로 짐작되는 귀부가 남아 있다. 끝으로 원조(圓彫) 혹은 부조(浮彫)된 호석으로는 성덕왕릉과 괘릉(掛陵), 그리고 김유신묘가 대표적이다.

(3) 공예

영묘사지 출토 얼굴무늬 수막새신라 시대의 공예는 크게 금속 공예와 도기ㆍ토기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왕릉은 구조상 도굴의 위험이 적기 때문에 많은 공예품을 남겨주고 있다. 대체로 5세기를 중심으로 이들 왕릉에서 나온 공예품들은 장신구ㆍ이기ㆍ마구 및 토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장신구 중에는 금관을 비롯해 금귀걸이ㆍ금띠ㆍ금가락지ㆍ금팔찌 등 순금제품이 많다. 이기에는 유리제품의 잔을 비롯해 금으로 만든 고배(高杯)ㆍ은잔ㆍ숟가락, 금으로 만든 바리〔燔〕ㆍ구리항아리ㆍ구리솥 등이 있다. 마구에는 금동(金銅)으로 만든 발디딤〔埼子〕등이 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공예 기술이 더욱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범종과 사리구(舍利具)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오대산 상원사종과 특히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속칭 奉德寺鐘)은 큰 규모에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어 한국종의 특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또한, 감은사터 서탑(西塔)이나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구도 한껏 기교를 부린 우수한 것들이다.

토기에 있어서도 모양이 변화했는데, 특히 유약을 바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끝으로 와당은 종래의 수막새와당 일변도에서 암막새와당ㆍ서까래기와ㆍ귀면와(鬼面瓦) 등 종류가 다양해졌고, 무늬도 연화문 일변도에서 보상화(寶相華)ㆍ인동(忍冬)ㆍ포도ㆍ봉황ㆍ앵무ㆍ원앙 등 다채로워졌다.

(4) 회화

신라 시대에는 황룡사 〈노송도 老松圖〉와 분황사 〈관음보살상〉, 단속사(斷俗寺) 〈유마거사상 維摩居士像〉을 그렸다고 하는 솔거(率居), 8세기말경 당나라에서 활동한 김충의(金忠義), 신라 말기의 승려 출신인 정화(靖和)ㆍ홍계(弘繼) 등 화가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들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천마총 출토 천마도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내부구조상 현실(玄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처럼 벽화를 남길 수 없었다. 다만, 최근 천마총(天馬塚)에서 마구의 다래〔障泥〕에 그려진 천마도와 관모(冠帽)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환형(環形)의 화면에 그려진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와 서조도(瑞鳥圖)가 발견되어 옛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 태장리(台庄里)의 한 석실묘에 연화도와 신장도(神將圖)가 일부 남아 있다. 통일기에는 불교회화 이외에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755년에 완성된 ≪화엄경≫사경(寫經)의 불보살상도가 있을 뿐이다.

(5) 서예

통일 이전의 서예는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금석문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졸(古拙)한 것이었다. 통일기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전해지면서 한결 수준이 높아졌다. 신라시대 최고의 명필은 8세기에 활약한 김생(金生)으로 왕희지체에 따르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서법(書法)은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와 서첩(書帖)인 전유암첩(田遊巖帖)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왕희지체의 대가로는 영업(靈業)이 유명한데, 그가 쓴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은 왕희지의 집자비로 오인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오면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해,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 刹柱本記〉 등을 쓴 요극일(姚克一)과 진감선사비문(眞鑒禪師碑文)을 쓴 최치원이 대표적인 명필로 손꼽히고 있다.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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