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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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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256      
[조선] 조선 시대의 불교 1 (민족)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조선 시대의 불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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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참고문헌)

고려 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배불의 기세는 왕조가 바뀐 조선 시대 초기에 이르러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때에도 불교 배척의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던 유학자들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본격적인 불교 배척을 꾀하였으며, 위정자의 정책적인 불교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시대의 불교는 억압당하고 배척을 받았던 불교 수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불교]

(1) 왕실의 불교 정책

1392년 7월에 이성계(李成桂)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고려 말에는 보우ㆍ나옹 등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무학(無學)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태조는 즉위년에 무학을 왕사로 삼고 궁중에서 승려 200명에게 반식(飯食)을 하였다. 또 연복사(演福寺)에 탑을 중창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해인사의 고탑(古塔)을 중수하면서 탑 안에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안치하고 복국이민(福國利民)을 발원하였다.

1394년에는 천태종의 고승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고, ≪법화경≫ 3부를 금서(金書)하여 고려 왕씨(王氏)들의 명복을 기리게 하였다. 1397년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위하여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으며,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만들게 함으로써 이후 해마다 수륙도량을 열어 군생(群生)의 명복을 빌었다.

이듬해에는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으며, 흥천사의 수선사주(修禪社主) 상총(尙聰)이 선을 닦고 경을 강설하는 승풍을 장려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상서(上書)하자, 태조가 그 뜻을 따랐다. 이 밖에도 건국의 경찬사업(慶讚事業)으로 대장경을 인간(印刊)하고 금은자 사경 등을 하게 하였으며, 사원을 없애고 승려를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변의 여론이 빗발치듯할 때, 개국의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척불정책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를 받은 정종은 숭유 정책의 첫 단계로서 서울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였고, 제3대 태종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숭유 배불 정책(崇儒排佛政策)은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년에 궁중에 있던 인왕불(仁王佛)을 내원당(內願堂)으로 옮기게 하고 궁중에서의 불사(佛事)를 모두 폐지하였다.

1402년에는 서운관의 상소를 좇아 서울 밖의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 전토(田土)의 조세를 군자(軍資)에 소속시키고 사찰 노비(奴婢)를 나누어서 기관에 분속시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노비를 줄임으로써 사원의 토지까지도 삭감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많은 토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이에 1406년(태종 6) 2월에 조계종의 승려 성민(省敏)이 여러 차례 의정부에다 사원과 토지와 노비를 종전대로 둘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의 정승 하륜(河崙)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으므로 성민은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치고 왕에게 척불정책의 완화를 직접 호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종은 오히려 그 해 3월에 전국에 242개 사찰만을 남게 하고 나머지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도록 하였으므로, 242개 사찰 이외에는 모두 폐사(廢寺)가 되고 말았다. 태종은 또 재위 6년에서 7년 사이에 11종(宗)의 종단을 축소시켜 7종으로 만들었다. 태종 6년 3월까지는 조계종(曹溪宗)ㆍ총지종(摠持宗)ㆍ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ㆍ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ㆍ화엄종ㆍ도문종(道門宗)ㆍ자은종(慈恩宗)ㆍ중도종(中道宗)ㆍ신인종(神印宗)ㆍ남산종(南山宗)ㆍ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 7년 12월 이전의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서 총남종(摠南宗)으로 만들고,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쳐서 중신종(中神宗)으로,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을 합쳐서 천태종으로 만듦으로써 조계종ㆍ천태종ㆍ화엄종ㆍ자은종ㆍ중신종ㆍ총남종ㆍ시흥종의 7종으로 줄인 것이다. 또한 국사ㆍ왕사의 제도를 없애고 도첩제(度牒制)를 엄히 실시하였으며, 승려를 시켜 비오기를 기원하는 기우불사를 폐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산릉(山陵)의 곁에 사찰을 세워서 명목을 빌게 했던 옛 관습도 폐지하였다.

제4대 세종은 즉위년부터 더 심한 훼불(毁佛)을 강행하였다. 이에 승려들은 1419년(세종 1)과 1422년에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국내의 심한 불교박해 사정과 이에 대한 구원을 호소하였으며, 세종은 명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배불책을 늦추고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태종 때 폐지한 사찰과 노비 중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것을 모두 정리하였고, 1422년에는 매년 초에 사찰과 산천에 사람을 보내어서 복을 비는 의식과 경행의식을 중지시켰다.

세종의 척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424년 4월에 단행된 종단의 폐합이다. 그는 조계종ㆍ천태종ㆍ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ㆍ자은종ㆍ중신종ㆍ시흥종을 합쳐 교종으로 만듦으로써 지금까지의 7종을 선교 양종(兩宗)의 2종파로 줄였을 뿐 아니라 전국에 사찰 36개 소, 토지 7,950결, 승려 3,770명으로 한정시켜 버렸다. 종단을 폐합하여 축소시킴으로써 사찰의 수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른 적지않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의 큰 재산으로 몰수될 수 있다는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성밖의 승려에게 도성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연소자의 출가를 엄금하였다.

그러나 세종도 나중에는 불교를 신봉하는 국왕이 되었다. 중년 이후 불경을 즐겨 읽고 내원당을 세웠으며 법요(法要)ㆍ조상(造像)ㆍ조사(造寺) 등에도 열을 올렸다. 그러나 숭유억불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지 못하였고 유생들의 반발만 극한에 달하였다.

제5대 문종도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니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등 배불 정책을 계속하는 듯하였으나, 그의 재위 기간은 2년에 불과하였다.

조선 시대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고 할 수 있는 제7대 세조는 즉위하자 이전까지의 배불 정책을 외면하였다. 본래 신심이 두터워서 평소에 신미(信眉)ㆍ수미(守眉)ㆍ설준(雪峻) 등의 고승과 가까이 지냈던 그는 일찍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공자와 석가의 도에 대하여 그 우열을 언급하게 되었을 때에 하늘과 땅의 차이 같다고 비교할 만큼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은 1447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그에게 ≪석보상절 釋譜詳節≫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1457년에 왕세자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금강반야경≫을 수서(手書)하였고, 명을 내려 ≪능엄경≫ㆍ≪법화경≫ 등을 대조하며 교정하게 하였으며, 홍준(弘濬)ㆍ신미 등으로 하여금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 金剛經說誼≫를 교정하고 오가해(五家解)에 넣어 한 책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또 ≪영가집 永嘉集≫의 제본동이(諸本同異)를 교정하고 ≪증도가 證道歌≫의 언기주(彦琪註)ㆍ굉덕주(宏德註)ㆍ조정주(祖庭註) 등을 모아 한 책으로 인행(印行)하였으며, ≪법화능엄번역명의집 法華楞嚴潼譯名義集≫ 등을 인행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전을 금서(金書) 또는 묵서(墨書)하게 하였으며, 이 모든 경에 왕은 친히 발어(跋語)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미로 하여금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를 중창하게 하고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또 1458년에는 신미ㆍ수미ㆍ학열(學悅) 등에게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나누어 봉안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을 합본하여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출간하였으며,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과 불교 가무극인 연화대무(蓮華臺舞)가 만들어졌다. 1461년 6월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불전(佛典)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에 ≪능엄경언해≫가 간행되었고, 1463년에는 ≪법화경≫을, 해를 이어서 ≪금강경≫ㆍ≪반야심경≫ㆍ≪원각경≫ㆍ≪영가집≫ 등의 경전을 국역, 간행하였다. 이는 세조가 남긴 공헌 중 가장 큰 치적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또 1464년 5월에는 태조가 세웠던 흥덕사(興德寺)의 터에 대원각사(大圓覺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완성하였다. 그 뒤 이 사찰에다 대불상과 대종(大鐘)을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13층의 대석탑을 세워 1467년 사월초파일에 낙성을 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세조는 정인사(正因寺)를 세우고, 해인사ㆍ상원사(上院寺)ㆍ월정사(月精寺)ㆍ청학사(靑鶴寺)ㆍ회암사(檜巖寺)ㆍ신륵사(神勒寺)ㆍ쌍봉사(雙峯寺)ㆍ표훈사(表訓寺) 등 사찰의 중수와 보수를 도왔고,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와 오대산ㆍ금강산의 여러 사찰과 낙산사(洛山寺) 등을 찾아 공양하는 등 외호불사(外護佛寺)를 많이 일으켰다. 그리고 앞서 세종이 폐지했던 도성경행(都城經行)을 부활시켜 성황을 이루게 하였다.

또 왕은 승려에게 범죄의 혐의가 있으면 반드시 국왕에게 먼저 계청(啓請)해서 허가를 받고 난 뒤에 고문하게 하였으며, 관속(官屬)이 함부로 사찰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도승(度僧)과 선시(選試)의 법을 ≪경국대전≫에 명기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가 지금까지의 가혹했던 승정(僧政)을 완화시키고 승려의 권익을 보장하여 줌으로써 승려의 도성출입은 자유롭게 되었고 출가도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자 척불 정책은 더욱 엄하게 행하여졌다. 1471년(성종 2) 6월에는 도성 안에 있던 염불소를, 12월에는 간경도감을 폐지하였고, 1473년 8월에는 사대부의 부녀자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1475년에는 도성 내외의 비구니사찰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1475년 12월에는 국왕의 생일 때 사찰에서 개설했던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하였으며, 1492년 2월에는 도첩(度牒)의 법을 정지시키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정역(定役)과 군정(軍丁)으로 충당시켰다.

성종이 금승(禁僧)의 법을 세워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를 환속시킴으로써 사원은 텅텅 비게 될 형편이었다. 이러한 때에 인수(仁粹)ㆍ인혜(仁惠) 두 대비(大妃)가 금승의 법을 취하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므로 한때 중지가 되었으나 성종의 본심은 척불에 있었으므로 불교의 수난은 멈추지 않았다. 불심(佛心)이 대단했던 인수대비가 불상을 만들어서 정업원(淨業院)에 보냈을 때 유생들이 이를 빼앗아 불태움으로써 대비가 크게 노하였을 때도 성종은 유생들을 벌하지 않았다. 성종은 승려들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사찰을 창건하거나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는 등 척불책을 철저히 함으로써 승려의 수를 줄였고 사원을 폐사로 만들었다.

다음 왕인 연산군은 선종의 도회소(都會所)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興德寺) 및 대원각사를 모두 폐하여 공해(公力)로 삼았고, 삼각산의 모든 절에서 승려를 쫓아내어 폐사로 만들었으며, 성내의 비구니사찰을 없앤 뒤 비구니들을 궁방(宮房)의 노비로 만들었다.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로 삼거나 혼인시켰으며, 사찰의 토지는 모두 관부(官府)로 몰수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불교는 더욱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승과마저도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대는 불교가 그 존재성을 완전히 무시당한 시기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그의 생모인 정헌왕후(貞憲王后)의 신불(信佛)에 의해 불교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듯하였으나 배불의 큰 조류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은 어느 왕보다 더 심한 폐불정책을 보여주었다. 1507년(중종 2)의 식년(式年)에 승시(僧試)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승과(僧科)는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불교는 중종에 의해서 선종과 교종의 양종마저도 없어지게 되었고, 그 뒤 무종파(無宗派)의 혼합적인 현상으로 전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당시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횡포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1509년에 몇 사람의 유생이 청계사(淸溪寺)의 경첩(經帖)을 훔쳐간 것과 1510년 3월에 흥천사(興天寺)의 5층 사리각(舍利閣)에 방화한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또 중종은 같은 해에 각 도의 사찰을 폐사로 만든 뒤 토지를 향교에 속하게 하였다.

1512년에는 흥천사와 흥덕사의 대종(大鐘)을 녹여 총통(銃筒)을 만들게 하였으며,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을 연산군 때 헐린 민가에 나누어주게 하였을 뿐 아니라 경주의 동불(銅佛)을 부수어서 군기(軍器)를 만들게 하였다. 1516년에는 ≪경국대전≫에 있는 도승조(度僧條)를 지워서 빼어버리게 하였으며, 1518년에는 도성 남쪽의 비구니처소를 철거시키고 불상을 헐게 하였다. 중종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배불왕이었다.

(2) 배불 속의 고승

건국 초기의 고승으로는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無學)과 그의 제자 기화(己和)가 있었다. 무학은 나옹의 법을 이어받은 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는 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태조가 신도(新都)인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 데 주역이 되었고 다난한 건국사업을 도왔을 뿐 아니라, 태조가 태종에 대한 노여움으로 함흥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는 태조로 하여금 다시 서울로 오게 하여 부자의 사이를 가깝게 하는 데도 공헌하였다. 기화는 배불의 기세가 치열할 때,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오해와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크게 노력한 조선 초기의 명승이다.

특히, 그는 ≪현정론 顯正論≫ㆍ≪유석질의론 儒釋質疑論≫ 등을 지어 불교를 탄압함이 합당하지 못함을 밝혔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는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가의 사상까지를 포함하여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우리 나라 불교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조 때의 고승인 신미(信眉)와 수미(守眉)는 세조가 믿고 숭배한 승려들로서 속리산에서 서로 만난 동갑의 동학(同學)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인경불사(印經佛事)와 간경도감의 역경사업에 큰 힘이 되었으며, 그 밖의 불교 문화 사업과 세조 자신의 신불(信佛)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승려를 일컬어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고 불렀다.

또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도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설잠(雪岑)이라 이름한 뒤 양주의 수락사(水落寺)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茸長寺) 등에서 머물렀다. 그는 여러 차례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교리면에서는 특히 ≪법화경≫에 깊은 조예를 보여 ≪법화별찬 法華別讚≫을 저술하였는데, 선(禪)의 안목으로 ≪법화경≫을 보아 참신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연산군과 중종의 혹심한 척불 속에서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고승으로 정심(淨心)과 지엄(智儼)이 있었다. 정심은 연산군 때에 환속하여 황악산에 들어가서 여자 신도와 거짓으로 혼인생활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숨어 살다가 선법(禪法)을 지엄에게, 교법(敎法)을 법준(法俊)에게 전하여 실낱 같던 법맥(法脈)을 가까스로 잇게 하였다. 지엄은 말년에 지리산 초암에 머물면서 제자의 양성에 몰두하였는데, 후학들에게 ≪선원도서 禪源都序≫와 ≪법집별행록 法集別行錄≫을 가르쳐 여실한 지해(知解)를 얻게 하고, 다음에 ≪선요 禪要≫로써 지해의 병을 제하게 하였으며, 때때로 ≪법화경≫ㆍ≪화엄경≫ㆍ≪능엄경≫ 등의 대승경전으로써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들 불전(佛典)들은 모두가 현재 우리 나라 불교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그 연원을 지엄에 두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영관(靈觀)과 일선(一禪)이 배출되었으며, 다시 영관 밑에서 휴정(休靜)ㆍ선수(善修)의 두 대사가 배출되어 크게 불교를 중흥시켰다.

(계속)

<이기영>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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