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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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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240      
[근대] 한국 근대 불교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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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관리]

조선 중엽 이후 굳게 닫혔던 성문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열려지게 됨에 따라 자유로운 불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을 하여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의 억압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원의 통일적인 통제를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인 국내 수사찰(首寺刹)로 삼고 13도에 각각 하나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하였다. 그 뒤 1902년에는 정부에서 사원의 국가관리를 위하여 궁내부(宮內部)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 관리서는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을 제정하고,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제(中法山制)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사무 일체를 맡아보았다.

대법산은 국내 수사인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수사 16개 절을 지정하였다. 오랫동안 관심 밖에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는 이를 계기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에 소속원 정부의 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가공무원인 관리가 관리주사(管理主事) 등의 사무직에 임명되어 제반 서무를 맡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의 혼란과 공무원의 부패로 인하여 이 관리서가 제도적ㆍ이념적으로는 아주 훌륭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발전을 도모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로 인하여 승려의 위치나 일반적 대우가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관리서와 대법산의 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1904년 1월에 폐지됨에 따라, 그 소관 사무는 내부(內部) 관방(官房)에 옮겨졌다가 2월에는 내부 지방국(地方局)의 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뒤 1906년에 이보담(李寶潭)과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설립하였다.

이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이었으므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여기에서 명진학교(明進學校)라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창설하였다는 것은 길이 남을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진학교는 현대적인 불교교육을 위한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불교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1906년에 세웠던 것으로서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1908년 3월에는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원흥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결정한 뒤 원흥사에다 종무원(宗務院)을 설치하였다. 1910년 서울 전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中央會務所)로 삼을 때까지 원흥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발상지요, 새 불교의 요람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원종의 종정(宗正) 이회광(李晦光)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하기로 합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한 국내의 승려들은 승려대회를 열었고, 1911년 정월에는 영남ㆍ호남의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그 뒤에는 동래 범어사(梵魚寺)로 옮겨, 서울 원종과 맞서서 포교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조선총독부가 생긴 뒤의 일이었으므로, 불교종단도 총독부의 지배하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독부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여 이 땅의 모든 사찰과 승려문제를 규제하였으므로,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도 저절로 없어지고 우리 나라의 불교는 국가의 운명과 함께 조선총독의 관리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교단]

1910년 8월에 나라를 잃은 이 땅의 불교는 1911년 6월 새로운 사찰령이 제정, 반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에서 새로운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총독부 사찰령에 의하여 한반도 내의 교단은 30곳의 본산제(本山制)로 형성되었으며,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중앙에 30본산회의소(本山會議所)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은 조선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敎區)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30본산회의소가 있었으나 각 본사간의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30본산 주지들이 포교 및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하여 연합규제를 마련하고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서울의 각황사(覺皇寺)에 두었다. 그러나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 30본산의 연합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 전국사찰을 통할하고 전국 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앙 통제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總務院)이다. 중앙총무원이 1922년 1월 각황사에 설치된 뒤 그 해 5월에는 같은 각황사에 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佛敎禪敎兩宗中央敎務院)이 설치되었다. 몇 년 뒤에는 양원(兩院)이 하나로 뭉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이 되었다.

1929년 1월 각황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과 교무원의 원칙(院則) 및 교정회법(敎正會法)ㆍ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으며, 7명의 교정(敎正)을 선출하여 종단 최고의 원로기관으로 하였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명실공히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서 근본적인 어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운동(總本山運動)을 전개시키기에 이르렀다.

1941년 봄에 태고사(太古寺: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교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31본산 위에 전국 사찰을 통일적으로 총괄하는 총본산을 두었는데, 그 총본산을 태고사로 삼았다. 1941년 4월 23일부터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으로 발족한 이 종단에서는 제1대종정(宗正)을 중원(重遠)으로 추대하고 그 해 6월 6일부터 총본사인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이 조선불교조계종도 1945년 8월 15일의 광복과 더불어 한국불교조계종(韓國佛敎曹溪宗)으로 정비되어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1945년 10월에는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일제의 사찰령과 당시까지의 사법(寺法)을 폐지하고 새로운 불교교헌(佛敎敎憲)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계종 초대 교정에 박한영(朴漢永)을 추대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식민지정책의 굴레를 벗어나서 불교문화를 무한히 꽃 피울 내일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교육 및 문화 사업]

불교의 현대적 교육은 1906년 명진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각 지방에 불교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는데 이는 젊은 불교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건립이라는 명분으로 각 지방의 사찰재산들이 징발당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명진학교의 교장은 당시 불교연구회 회장이었던 이보택(李寶澤)이 맡았으며, 1907년에는 이회광이 선임되었다.

1908년 불교연구원에 이어서 원종종무원이 원흥사에 들어선 다음 명진학교는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로 고쳐졌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능인보통학교(能仁普通學校)ㆍ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등을 세웠으나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고,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설립하였으나 3ㆍ1운동 때 학림의 학생들이 많이 활약하였고 또 독립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총독부의 제지를 받다가 1922년 30본산연합 제규(制規)가 폐지된 뒤 폐교되고 말았다.

1921년에는 따로 동광학교(東光學校)가 설립되었고, 1922년에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는데, 1925년에 이 두 학교를 병합하여 불교전수학교로 만들었다. 이 불교전수학교는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그 뒤 1940년에는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로 학교명을 고쳤으며, 1946년 9월에는 동국대학(東國大學)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53년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밖에도 서울과 각 지방에는 종립학교(宗立學校)가 설립되어 초ㆍ중ㆍ고등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교육기관 이외에 이 시대의 문화사업으로는 불교지(佛敎誌)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계 최초의 잡지로 발간한 것은 1910년 12월에 창간된 ≪원종 圓宗≫을 들 수 있으나, 이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되었다. 불교 문화의 종합지이며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발행인 권상로(權相老)가 1913년 2월에 발간한 ≪조선불교월보 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잡지는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해동불교 海東佛敎≫가 박한영(朴漢永)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 佛敎振興會月報≫가 이능화(李能和)에 의해 발간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1916년 4월에는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계 朝鮮佛敎界≫를 발간하였으나 3호를 내고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에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총보 朝鮮佛敎總報≫를 발행하여 1920년 5월까지 21호를 발간하였다.

1924년 7월에는 권상로가 ≪불교 佛敎≫를 발행하여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신불교 新佛敎≫라 하였는데 광복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 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에서 발간한 ≪취산보림 鷲山寶林≫, 또 같은 해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가 발행한 ≪조음 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가 발행한 ≪불일 佛日≫, 같은 해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 荒野≫, 1935년에 발간된 ≪불교시보 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하였던 ≪일광지 日光誌≫ 등이 있었다.

<이기영>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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