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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4 (수) 11:39
분 류 사전1
ㆍ조회: 1383      
[조선] 문과 (민족)
문과(文科)

관련항목 : 무과, 과거

조선 시대 문관(文官)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 고려 시대의 제술업(製述業), 즉 일명 진사과(進士科)의 계통을 이은 제도이다. 조선 시대 과거에는 문과 외에도 무과(武科)와 잡과(雜科)가 있었다. 그 밖에 문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 문과의 일부가 아니고 또 관리 임용제와 직결되는 제도도 아니었던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가 있었다.

철저한 문치주의(文治主義) 아래에 있었던 당시 사회에서는 문과와 생원진사시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사실 이 두 과거는 한편으로 권력 및 권위와 부를 획득하고 그것을 유지 또는 강화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부모에 효도하며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지상의 길이기도 하였다.

[응시 자격]

문과의 응시 자격은 생원진사시와 같았다. 즉, 신분상의 하자만 없으면 누구라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천인(賤人)과 공상인(工商人)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 밖의 어떠한 제한, 예컨대 양반이어야 한다든가, 선대(先代)에 벼슬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든가 또는 농민은 안 된다든가 하는 등의 제한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문과나 생원진사시의 응시 자격에 관해 어떠한 사람들이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조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응시할 수 없는 결격 사유를 밝힌 예가 있을 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국대전≫에 나오는 규정이다. 이 규정에 의한다면, 어떤 죄를 범해 평생동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이른바 죄범영불서용자(罪犯永不敍用者)의 아들, 관리로서 금전상의 부정을 범한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再嫁) 또는 그 밖의 부도덕한 행실을 저지른 부녀자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서얼(庶孽)의 자손들(즉, 子子孫孫)은 문과나 생원진사시에는 응시할 수가 없었다. 즉, 이들이 바로 ‘신분상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합격자와 임용 원칙]

현실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고, 특히 교육 환경이 좋은 가정의 자손들이 아니고는 과거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과거 진출을 위해서는 적어도 15년 내지 20년 간의 수학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양반들이 거의 독점하는 듯한 경향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이 결코 원칙은 아니었다. 또 실제로, 어느 면으로 보나 양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응시하고 합격하였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문과급제 후의 임용과 임용 후의 승진에 있어 차별을 받았으며, 그 차별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후기로 갈수록 ‘좋은 가문의 출신’이어야 한다는 요건이 더 커졌던 것이다.

문과 급제자는 급제와 동시에 전원 임용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해 거의 예외없이 잘 지켜졌다. 물론, 급제 직후 장원(壯元)을 제외하고는 권지(權知)로서 성균관·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 등에 배치되어 일종의 견습 기간을 보내야 했지만(장원자는 규정에 따라 종6품 내지 정7품의 실직을 주었다.), 어쨌든 임용이 보장되어 있었다.

[식년 문과와 비정규 문과]

문과에는 3년에 한 차례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이른바 식년 문과(式年文科)가 있고, 그 밖에 비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임시 특설의 문과가 있었다. 비정규 문과에는 다시 증광별시(增廣別試)·별시(別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의 구별이 있었다(식년시를 포함한 이상의 모든 문과는 언제나 반드시 무과와 함께 병설되었다.).

식년 문과에서는 초시(初試)·복시(覆試) 및 전시(殿試)의 3단계 시험을 거쳐 33인을 급제자로 선발하는 제도를 택하였다. 국왕의 명의로 실시하는 전시에서는 복시(회시라고도 함.) 합격자의 성적 서열만을 결정하였다. 초시는 성균관과 한성부(漢城府) 및 각 도별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이를 각각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 및 향시(鄕試)라고 불렀다.

초시에서 뽑는 인원은 240인이었다. 그 내용은 관시 50인(이 관시는 뒤에 없어졌다.), 한성시 40인, 경상도 30인, 충청도와 전라도 각 25인, 경기도 20인, 황해도와 평안도 각 15인, 강원도와 함경도 각 10인이었다. 그러나 복시에서는 지역별 안배에 관한 어떠한 제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급제자 배출에 지역 간 격차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서울의 비중이 언제나 45%를 넘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시험 과목]

문과의 시험 과목을 보면, 초시·복시·전시의 어느 단계에서나 모두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과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문학적 재능, 그리고 역시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논술(論述) 능력을 시험하는 내용으로 일관하였다. 사서의(四書疑)나 오경의(五經義)는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고, 부(賦)·송(頌)·명(銘)·잠(箴)·기(記)·표(表)·전(箋) 등은 두 번째 부류에, 그리고 전시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었던 대책(對策)은 끝의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관리로서 필요한 실무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통치가 철저하게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덕치(德治) 및 교화(敎化) 위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문과 제도의 운영과 폐단]

앞에서 열거한 각종 별시문과(각종 비정규문과를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에서는 증광시를 제외하고 사전에 충분한 예고 기간도 없이, 그리고 각 지역별로 실시하는 초시를 생략한 채 처음부터 서울에서 한두 차례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때문에 그 격차가 더욱더 심하게 나타났다.

조선 시대 문과제도의 운영상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비정규의 각종 별시문과가 빈번하게 설행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500년 간 총 163회의 식년시문과가 있었는데, 임시 특설의 각종 별시문과는 증광별시 68회를 포함, 모두 581회나 되었다. 즉, 정규가 약 22%, 비정규가 약 78%가 되는 셈이다. 이것을 급제자수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 급제자 1만 4620인 중 정규 출신이 6,030인, 비정규 출신이 8,590인으로 그 비율은 41 : 59이다.

더구나 위의 각종 별시문과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증광별시문과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지방 유생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게 운영되었다. 원래 각종 별시문과는 국가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그 경사를 기념해 유생들을 위열(慰悅)한다는 명목으로 실시한 이른바 경과(慶科)였다. 그런데 그 개설 배경에는 언제나 양반 및 양반관료들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실제 운영에서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 기반을 둔 일부 양반층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식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식년시에서조차 지역 간의 균형을 위한 정책적인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아, 그 격차가 매우 심했고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국왕의 통치권이 양반 및 양반관료층의 견제 하에서 언제나 약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점은 명·청대 중국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명청대 중국에서도 과거(물론, 여기에서는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진사과를 가리킨다.)는 3년에 한번씩이라는 원칙 하에 운영되었다. 명대의 경우 치세(治世) 270여 년(1368∼1644) 동안 비정규 진사과는 단 1회뿐이었다(진사과 총횟수는 90회). 다만, 청대에는 입관(入關)으로부터 과거제가 폐지되는 1905년에 이르기까지 261년 동안 25회의 비정규 과거가 은과(恩科)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총횟수는 112회).

그러나 이것도 조선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최종 합격자의 선발에서 미리 책정된 지역 할당제(地域割當制)를 철저하게 적용시켰으며, 이 점은 비정규 과거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문과와 생원진사시의 관계]

끝으로, 문과와 생원진사시와의 관계를 보면, 원래 방침은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입학, 일정 기간의 수학을 마친 사람만이 문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침에는 처음부터 예외가 허용되었으며, 그 예외는 후기로 갈수록 많아졌다. 그 결과 초기 약 100년 간에는 생원진사시를 거치지 않고(따라서 대개는 幼學으로서) 문과에 진출하는 사람이 전체의 15% 정도였는데, 말기 약 100년 간에는 오히려 생원진사시를 거쳐서 문과에 진출하는 사람이 훨씬 적어져 20%에도 미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생원진사시는 문과의 일부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과에는 대과와 소과, 즉 생원진사시가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양과(兩科)는 각각 독립된 별개의 제도로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그 운영도 각각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착각이 나오게 된 것은 ≪경국대전≫에 나오는 “죄범영불서용자 장리지자 재가실행부녀지자급손 서얼자손 물허부문과생원진사시(罪犯永不敍用者 贓吏之子 再嫁失行婦女之子及孫 庶孽子孫 勿許赴文科生員進士試)”의 ‘문과생원진사시’를 ‘문과의 생원진사시’로 잘못 해독한 데서 기인한다. → 무과

≪참고문헌≫

經國大典, 大典會通, 朝鮮初期兩班硏究(李成茂, 一潮閣, 1980), 科擧를 通해서 본 中國과 韓國(宋俊浩, 一潮閣, 1981), 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韓永愚, 乙酉文化社, 1983), 鮮初文科及第者의 進出에 관한 硏究(李秉烋, 啓明論叢 5, 1968), 鮮初 謁聖文科의 硏究(李秉烋, 申泰植博士頌壽紀念論叢 1, 1969), 朝鮮時代 文科에 관한 硏究(宋俊浩, 프린트판, 1975), 李朝式年文科考 上·下(曺佐鎬, 大東文化硏究 10·11, 成均館大學校, 1975·1976), 朝鮮時代의 科擧와 兩班 및 良人(宋俊浩, 歷史學報 69, 1976), 朝鮮初期의 文科의 試驗方式에 관한 論議(崔玉煥,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1987), 朝鮮初期 科擧制와 蔭叙制(李成茂, 韓國史學 12, 1991).

<송준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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