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7 (토) 06:26
분 류 사전1
ㆍ조회: 3147      
[역사] 중세사회 (한메)
중세사회 中世社會 middle society

고대 사회와 근대 사회의 중간 단계 사회.

중세기 역사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400년대부터 시작하여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이은 게르만 여러 부족의 국가 형성 시점, 특히 프랑크 왕국의 형성기에서 백년 전쟁의 종결 및 동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까지로 보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11세기 이래 봉건 국가가 형성되어 농노제에 바탕을 둔 봉건적 생산 양식이 기반을 이루었다.

중세라는 시대 구분은 본래 유럽사를 서술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을 동아시아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경우에는 당(唐)나라 멸망 후 오대십국 시대부터 송(宋)나라를 거쳐 원(元)나라 멸망까지, 인도의 경우에는 노예 왕조로 시작되는 이슬람 왕조 등장에서 무굴 제국의 성립까지, 한국에서는 고려와 조선 두 왕조 시대를 말한다.

[유럽]

<외족(外族)의 침입과 그 영향>

유럽은 8∼10세기에 걸쳐 바이킹·마자르·이슬람교도로부터 외적(外的) 압력을 받고, 한편으로는 프랑크왕국의 정치 조직 분해와 맞물려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은 사회적 결합의 여러 형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와 유럽이 하나의 독특한 유형의 사회를 이루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11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네우스트리아, 아퀴타니아 등으로 불렸던 라인강 서쪽땅에 수개 내지 10여개의 촌락이 포함된 성주령(城主領)이 생겨났고, 촌락은 거주지 주변에 경작지를 넓혀 가는 집촌형(集村型)으로 바뀌었다.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에서는 공동 경작에 의한 삼포제(三圃制) 낙농경영이 일반화되었고,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수차 동력(水車動力)의 이용 등 농업 기술 개량이 현저해졌으며 12세기에는 풍차 동력도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성주령과 제후백령(諸侯伯領)의 새로운 전개>

성주와 농민의 관계는 방위와 생산의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가 13세기에 들어와 권리·의무 관계가 관습법으로 성문화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동시에 농민이라는 신분 단체의 성립을 의미한다. 이 무렵에 기사(騎士) 신분은 성주와 그 가신(家臣)인 일반 영주, 나아가서는 왕후백(王侯伯)을 자처할 만한 존재를 포함한 신분 개념으로 그 폐쇄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있있다. 성주는 침입 전의 프랑크 왕국의 지방행정구인 파구스(pagus)를 분할하여 성을 지었다. 성주의 대부분은 그 고장의 실권자였고, 그 가운데 더 강한 자가 새로이 코메스(伯)를 자칭하거나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가가 설정한 두카투스(侯)를 자칭하였다. 그들은 이미 10세기 후반에 프랑크의 분국(分國)인 카페가(家)와 작센가의 가계가 끊어진 것을 계기로 왕을 선거하였다.

왕권의 이념은 프랑크 왕권, 나아가 로마 제권(帝權)에서 유래하고, 이것은 외족 침입전의 사회적 결합 이념의 지속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봉건 왕정(封建王政)>이란 모순된 개념이며, 중세 유럽은 이 모순 관계를 오히려 도약판으로 삼은 역사였다. 부족적 결합의 전통이 뿌리깊은 라인강 동쪽에서도 11세기 중엽의 성직 서임권 투쟁 이후, 촌락―영주령(성주령)―제주백령의 체계를 목표로 재편성이 추진되었다. 작센가로 시작된 왕권은 로마 제국의 부활을 표방하였으나 사실상 제후백간의 상호 관계는 영방(領邦)분열을 고착시켰을 뿐이었다.

잉글랜드에서 프랑크 왕국에 상당한 것이 앵글로 색슨 왕국이다. 그 지방 행정구는 11세기 중엽 노르망디 후가(侯家)의 잉글랜드 정복과 그 결과로 생긴 노르망 왕가의 성립 이후에도 남아 있었으며, 왕가에 의해 설정된 영주령(매너)·백령(伯領;카운티)은 기존 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이것을 이용하여 왕국을 지배하였다. 12세기 중엽 앙주(플랜태저넷) 왕가의 개막 이후 영주층은 왕권에 대해 자신들을 하나의 신분 단체로 규정하고 의회를 왕권과의 협의기관으로 삼았다. 등족제(等族制) 단계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먼저 달성되었다.

<도시의 형성>

등족은 도시 주민이 만든 신분으로, 구(舊)로마 도시, 프랑크왕국의 성채 도시(城砦都市), 외족 침입 때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시장 도시 등, 그 발생과 원형은 다르지만 촌락―성주령의 형성이라는 동질 역학에 따라 성립하였다. 외족 침입의 경험은 어느 시점에서 도시적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 뒤 브르겐시스(도시서민)라는 신분 단체가 형성되는데, 이들 가운데 상인층은 외족 침입 후 화폐유통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지도적 입장에 서서 제후백권, 나아가서는 왕권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 왕조적 여러 권력 관계의 강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여 북이탈리아의 코무네도시, 북프랑스의 국왕 대관 도시, 제후백권과 공존한 네덜란드·플랑드르의 여러 도시 및 북독일의 동업자(Hanse)도시와 각지에 특유한 도시권이 형성되었다. 한편 각 지방 특산물을 이용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던 직인들은 길드(직능 단체)를 만들고 시정 참여(市政參與)에 나섬으로써 13세기 이후 어느 도시권에서나 문제시되었다.

<교회의 활성화와 그 역할>

또 하나의 신분 단체인 그리스그도 교회도 외족침입 전부터 지속해 온 요소었다. 그러나 교회는 침입 뒤, 외족 침입 전의 융성을 다시 찾지 못하고 유럽 내륙에 겨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활성화의 중심이 된 곳은 지방 교회와 수도원이었다. 침입 후 교구(敎區)조직이 정비되고 촌락―성주령과 교구의 관계가 조정되었다.

11세기 중엽 미술사(美術史)는 로마네스크 성당 건축의 제1차 융성기었다. 유럽 내륙 사회는 이 시기에 비로소 개발 시대로 들어가, 촌락 주민들은 삼림·소택지를 개간하여 경지를 넓히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석조 교회를 세웠다. 교회령·수도원령은 어느 고장에서나 영지 경영의 모범이 되었다. 교인은 사회 복지 담당자의 구실을 하였는데, 16세기에 들어와 도시의 비대화에 따른 사회문제의 증대는 빈민 구제의 <세속화>, 곧 도시 당국이 이를 대신함으로써, 중세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역할의 부분이 탈락되었다.

교회는 또 교육과 문화기관으로서 라틴어를 전하고 연대기(年代記)형태로 그리스도교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12세기에는 이슬람 문화권을 중개하였고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에서 다른 하나의 신분 단체인 <대학(大學)>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은 유럽 고유의 사고형성, 즉 스콜라철학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였다.

[인도]

12∼18세기까지와 무슬림 제(諸)왕조 시대를 중세로 보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 와서는 중세 봉건 제도로 이해하는 입장이 일반화되었다. 12세기초 이래 북인도에 성립한 여러 무슬림 왕조는 이슬람교의 저변확대를 어느 정도 실현하였다. 14세기 중엽에는 무슬림 정권이 데칸 고원 지방에서 성립(바흐만 왕조)하였고 이 정권이 16세기초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16세기초 성립된 무굴 제국은 인도사상 최대의 이슬람 왕조로서 거의 인도 전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무굴 제국의 지배는 지나친 판도 확대로 오히려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북인도에서의 시크교도 영주층의 성장, 자트족 영주층의 강대화, 데칸 지방에서의 마라타 여러 세력의 대두로 인해 발판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18세기초 인도에 진출한 영국의 지배로 중세사회는 해체되었다.

[중국]

당·송의 변혁기(9∼13세기)가 중세적 전환기가 되며, 원나라 멸망까지를 중세로 보는 견해가 일부 학자들 사이에 유력하나, 중국에서는 춘추 전국 시대에 이미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으므로 전혀 다른 시대 구분법이 요청된다.

<중세사에서의 역사적 전기(轉期)>

고전기(古典期)를 제외하면 중화 제국기는 초기(진·한∼당), 중기(당말∼명말), 말기(명말∼청말)로 나눌 수 있다. 이때 보통 제국의 대분수령적 전환기라고 하는 당·송의 변혁기가 중세 혁명기·중세적 전환기가 된다. 먼저 국가의 형성 원리에서 보면 효율적인 행정 조직의 시원은 진(奏)·한(漢) 때에 이루어졌다. 즉 관리 등용법(과거 제도)이 확립되고, 문치(文治)가 철저히 이루어져 독재 기구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문벌 귀족·무인(武人)의 전권이 일소되고 신흥 지주·부상(富商)·지방 엘리트(鄕伸)가 지배층으로 등장하여 정치의 사회 지지층이 넓어진 반면 유동적이 되었다.

일련의 정치 개혁과 함께 세제 개혁(兩稅法;당말∼명말)을 통해 나라의 재정기반을 확대·강화함으로써 여러 분야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송나라 이후의 사회에서는 도시와 시골의 분화와 상호보완 관계가 확실해졌다. 지방 농촌에 진(鎭)과 시장지(市場地)가 발달하여 경제 블록이 형성되어 길드·결사(結社)가 조직되고, 지역적·사회 경제적인 자율 조직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활력과 안정으로 인해 인구 규모와 함께 점증하는 사회 경제의 발달이 타성(惰性)으로 저해받기 시작한 때는 명(明)나라 말기였다. 명나라말·청나라초는 근대화의 싹이 보이면서도 국가 조직의 타성으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초기 근대를 향한 과도적 양상을 나타내었다.

[한국]

고려·조선 두 왕조 시대를 중세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삼국 시대에 이미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으므로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편의상 여기서는 고려∼실학 사상(實學思想)이 싹트기 전까지로 상정하여 살펴본다. 고려 시대는 왕조의 기반이 잡히기 시작하자 중국의 관제(官制)를 도입하고 과거 제도를 확립하는 등 유교적 정치 사상을 통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전국의 토지는 국가의 지배 아래에 놓여 관품(官品)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졌는데 이를 전시과(田柴科)라고 하였다. 불교는 태조 이래 국교로 숭상되어 전국에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다. 인쇄술로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고, 송나라·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그림과 도자기가 발달, 고려청자를 만들어냈다.

고려의 귀족 사회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한 결과 1170년(의종 24) 무신란(武臣亂)이 일어났고, 1258년(고종 45) 최의가 몰락하여 왕권이 회복될 때까지 근 90여 년간에 걸쳐 무신들이 정권을 농단했다. 또 외적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은 시기였다.

조선은 태종·세종·세조를 거치는 동안 모든 권력구조가 중앙의 왕권중심으로 개편되는 동시에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세종 때는 영토를 확장하였고 명(明)나라와 일본에 대하여는 선린 우호 정책을 펴나갔다. 특히 당시의 관료 학자들의 노력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특히 편찬 사업이 활발하였고, 각종 기계의 제조 등이 이루어졌다.

연산군 이후는 사화(士禍)와 붕당 정치로 지배 계급의 분열이 일어나고, 유학마저 점차 공리공론을 일삼아 국세(國勢)가 침체해 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임진왜란·병자호란이 일어나 국토는 참혹한 전쟁터로 변하여 문화재는 거의 파괴·약탈·회신(灰燼)되었고 농지는 황폐해졌다. 그러나 이 전화(戰禍)는 한편으로는 자극제가 되어 백성들의 의식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 애국심과 자아 반성 등이 생겼고, 여러 부문에 걸쳐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싹텄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실학 사상이다.

<고원>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윗글 [고려] 호족 (두산)
아래글 [고려/조선] 도호부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00 사전1 [알림] 이후의 내용은 '한국사 사전 2'에 이어집니다. 이창호 2010-07-05 1323
2999 사전1 [조선] 김우명의 졸기 (숙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664
2998 사전1 [조선] 김우명 (한메) 이창호 2002-11-03 1323
2997 사전1 [조선] 김우명 (두산) 이창호 2002-11-03 1242
2996 사전1 [조선] 김우명 (민족) 이창호 2002-11-03 1292
2995 사전1 [조선] 김육의 졸기 (효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335
2994 사전1 [조선] 김육 (한메) 이창호 2002-11-03 1258
2993 사전1 [조선] 김육 (두산) 이창호 2002-11-03 1429
2992 사전1 [조선] 김육 (민족) 이창호 2002-11-03 1826
2991 사전1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이창호 2002-11-03 2356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