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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07 (화)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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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693      
[고려]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 (민족)
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 =팔만대장경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판각(板刻)한 대장경.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판은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대장경은 ≪초조대장경 初雕大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을 중심으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국력을 기울여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하여 판각하였으며,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대장경판을 통하여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문화사에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일반적으로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000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000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고, 고종 때 이것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대장경을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겨진 판으로 지금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해인사고려대장도감(각)판〔海印寺高麗大藏都監(刻)板〕’이라고 함이 가장 정확한 명칭이다. 이 대장경은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강화의 분사(分司)대장도감에서 16년의 기간이 걸려 완성한 것이다.

이 때 최우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내용 교정을 맡아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 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를 정정하였다.

이 대장경판을 새길 때의 배경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 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 판각을 부처님에게 고하고 있다. 1237년(고종 24)에 쓴 이 기고문에 이미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담당관사를 설치하였음이 나타나 있다.

이 대장경판은 성격상 정장(正藏)과 부장(副藏)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장은 ≪대장목록 大藏目錄≫에 수록되어 있는 경을 말하고, 부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지 못한 ≪종경록 宗鏡錄≫ 등 4종을 말한다. 정장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1,497종 6,558권의 경을 말하며, 부장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4종 150권이 있다.

정장의 함별(函別) 구성을 보면 경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639개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첫번째 경인 ≪대반야바라밀다경 大般若波羅蜜多經≫(600권)은 천함에서 시작하여 한 개의 함에 10권씩 묶어 60번째 함의 나함(奈函)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한 개의 경도 분량이 많은 것은 여러 개 함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나, 단권(單卷)의 경인 경우 여러 개의 경이 한 개의 함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함별구성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다. 첫번째 경의 경우처럼 10권씩 묶어 한 개의 함을 구성하고 있는가 하면, 79번째의 경은 12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으며, 1,256번째 경은 6권씩 묶어 한 개의 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함(傷函:函順160番)의 경우는 단권의 경 29권을 수록하고 있다.

이 대장경판의 저본경(底本經)은 천함(經順 1)에서 영함(英函:經順 1087)은 ≪개원석교목록 開元釋敎目錄≫의 경이며 반함(磻函, 經順 1263)∼합함(合函:經順 1387)은 ≪속개원석교록 續開元釋敎錄≫에 있는 경을 수록하였다. 이외의 사함(社函:經順 1088)∼명함(銘函:經順 1262)과 제함(濟函:經順 1388)∼동함(洞函:經順 1497)은 별개의 것인데 이들 판의 저본은 현재 미상이다.

각 판의 대부분은 상하 단변(單邊) 무판심(無版心)이며 권자본형식(卷子本形式)의 판식(版式)으로 한 면에 23행 14자씩 새겨져 있다. 그러나 경순 1256, 1404, 1497은 판심이 있고, 경순 1257은 행자수가 18행(小字는 36行)이며, 자수가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1258은 22행 13∼15자(小字는 44行17字)이고 1259는 21행 13∼14자(小字는 42行16字)이며, 1260은 22행 13자로 전부 소자(小字)이고 1261은 25행 16자이다.

이들 경순 1256의 녹함(祿函)에서 1261의 무함(茂函)까지는 ≪종경록≫과 함순이 중복되는 경으로서 일반 정장과는 판식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간기(刊記)가 예외없이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다. 이들 간기를 중심으로 정장을 판각연도별로 분류하여 보면 〔표〕와 같다. 이 〔표〕에서 보듯이, 연도별 판각량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장판각의 순서에 있어서도 뒤로 오면서 상당히 경순이 바뀌어 판각되었다. 또한, 같은 경에 있어서도 권순별로 판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도 판하본(板下本) 작성에서부터 초벌새김·재벌새김·마무리새김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각수(刻手)의 능력 및 판각작업의 진행속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권 이상으로 구성된 경에 있어서 경별(經別)로 같은 연도에 판각된 것만 아니라, 권별로 판각된 것이 상당수에 달하고 있고, 판각연도인 간기가 모두 권별간기이기 때문에 간기에 나타난 그 해에 판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장의 판각은 12년 동안 모두 마쳤으며, ≪고려사≫에 나오는 16년이라는 기간은 판각기간이 아니라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조성하는 데 걸린 기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장경판을 만들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전담하도록 하였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경판을 새기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계획 수립하에 산지에서 나무를 베어 진을 빼고 판각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고 판하본 작성 등 판각 시작 전의 사전준비과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248년(고종 35)은 실제의 정장 판각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장목록≫ 1종만을 판각한 해이고, 대장경판을 판각하고 난 뒤의 뒷마무리 작업은 권별 판각을 완료한 뒤 바로 뒤따라 처리하여 판가(板架)에 순서대로 진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간기에 나타난 1248년을 대장경판 판각작업의 총완료 연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판각완료 연도인 1248년을 하한연도로 볼 수 있으며, 일의 시작은 적어도 1233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정장에는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이들 정장의 간기에 분사대장도감이 보이는 경은 모두 72종 529권에 이르고 있다. 판각연도는 계묘년(1243)에서 정미년(1247)까지 5년에 걸쳐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분사대장도감이 무슨 목적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직접 판각을 시작한 연도는 1243년이며, 또한 529권의 분사판(分司板) 가운데 484권의 경은 1243∼1244년의 2년 동안 판각되어, 결국 분사도감에서의 판각이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판각량으로 분사대장도감이 판각 기능면에서만 설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통나무를 잘라 각수가 판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판작업 및 판하본작업까지의 업무를 담당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분사대장도감에서 판하본작업과 연판작업 등 판각을 위한 준비기능을 가지고 대장도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면, 적어도 1242년까지 이들 준비작업을 완료하고 1243년부터 판각기능으로 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간기가 보이는 경들도 모두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만이 아니라, 권별로 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과 섞여 있는 점에서 보면 분사대장도감이 남해뿐만 아니라 강화도에도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분사판의 간기표시에 있어서 1243∼1244년에 판각된 것은 대부분 ‘○○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고, 1245∼1248년 사이에 판각된 것은 ‘고려국’이라는 국명이 없거나 ‘봉칙조조(奉勅雕造)’ 대신 ‘조조’ 또는 ‘개판’으로 한 것 등 일정하지가 않다.

이를 보면 분사대장도감의 기능이 1243년과 1244년은 대장도감과 동격의 위치에 있었으나, 1245년 이후의 분사대장도감은 그 기능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245년 이후의 분사대장도감은 독립된 도감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단순 판각기능만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갑인세(甲寅歲, 1254) 분사대장도감중각(分司大藏都監重刻)’이라는 간기가 있는 ≪종문척영집 宗門燧英集≫이 출현함으로써 분사대장도감의 판각기능은 적어도 1254년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보유판으로 알려진 15종의 경판 가운데,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종경록 宗鏡錄≫·≪조당집 祖堂集≫·≪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 등 4종을 말한다.

이들 4종의 부장판은 1245년에서 1248년 사이에 판각되었다. 4종 중 ≪종경록≫은 1246년에서 1248년까지 3년 동안에 걸쳐 판각되었으나, 나머지 3종은 모두 1245년에 판각되었다. 연도별 간기를 보면 을사년은 ‘을사세분사대장도감조조(乙巳歲分司大藏都監雕造)’ 또는 ‘을사세분사대장도감개판(乙巳歲分司大藏都監開板)’으로 되어 있다.

정미년 (1247)은 ‘정미세분사대장도감개판(丁未歲分司大藏都監開板)’ 또는 ‘정미세분사대장도감조조(丁未歲分司大藏都監雕造)’로 되어 있는 것과 ‘정미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 (丁未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으며,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이라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무신년(1248)은 모두 ‘무신세분사대장도감개판(戊申歲分司大藏都監開板)’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정장에 나오는 분사대장도감판 중 1245년 이후의 간기와 같은 양상이다. 그리고 4종의 부장 중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의 권3지하(卷三之下)에 ‘을사세대장도감개판(乙巳歲大藏都監開板)’이라는 간기가 보인다.

이는 부장 가운데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유일한 것으로 정장에서의 간기표시와는 완전히 다른 표시법이다. 이것은 대장도감에서 판각하였다 할지라도 봉칙판(奉勅板)이 아님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 중 종경록판만은 판수제(板首題) 밑에 권차(卷次)·장차(張次) 표시와 아울러 천자함 표시가 되어 있고 나머지 3종은 마구리(물건의 양쪽 머리면) 부분에만 새겨져 있다.

이 ≪종경록≫은 정장의 경순 1257에서 1262까지와 천자함이 중복되어 있다. 이들 6종의 경은 1243∼1247년 사이에 판각되었고 정장의 일반 체재와는 모두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경들이다. ≪종경록≫이 1246∼1248년 사이에 판각되었고 6종의 경들 중 경순 1259를 제외하고 모두 1245까지 판각되었다.

6종 경의 판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6종의 경 대신 ≪종경록≫을 정장에 편입시키려고 하였고 ≪종경록≫의 천자함을 6종의 경이 수록된 천자함에 중복되게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미 목록이 작성되었고, 녹함에서 무함까지 수록된 6종의 경은 중간에 제외시킬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종경록≫은 30행 17자로서 판크기나 광곽(匡廓)의 크기 등 판체재가 정장과 동일하나, ≪조당집≫은 28행 18자이고,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는 27행 20자이며,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는 28행 18자로 모두 정장과는 자체나 체재가 다르다. 결국, 부장은 그 간기표시 등에서 비록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되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판각이 아니라 단순 판각기능면에서의 분사대장도감판으로 볼 수 있다.

이 대장경 판각은 이를 인출(印出)하여 널리 유포시키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판각을 완료하고 난 뒤 인출사업이 바로 잇따라 있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대장경판을 새기고 난 뒤 처음으로 전질(全帙)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고려 말의 명신인 이색(李穡)이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아 1381년에 인출하여 신륵사에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이 있다.

조선 시대는 1393년(태조 2) 왕명으로 인경(印經)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하였다. 또, 1458년(세조 4) 왕이 신미(信眉) 등에게 명하여 50부를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1500년(연산군 6)에도 인출되었다.

1865년(고종 2) 2부를 인출하여 월정사와 설악산 신흥사에 각각 한부씩 봉안하였고, 1898년에도 인출하였으며, 1899년 상궁 최씨(崔氏)의 발원으로 4부를 인출하여 해인사·통도사·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한부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부는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러한 인출은 소요되는 인력과 물적자원의 동원이 적지 않으므로 국가의 힘이 없이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밖에도 해인사대장경은 승려의 학술연구를 위하여, 또 경신앙(經信仰)의 차원에서, 그리고 일본에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도 상당히 인출이 되었다. 일본은 고려 말부터 수차에 걸쳐 대장경의 인출을 요구하여 왔으며, 왜구에게 납치당한 남녀노소의 송환을 미끼로 조선 전기까지 83회에 걸쳐 대장경을 청구하여 왔다.

그 때 인출된 대장경 63부가 일본으로 전해졌고 세종 때는 대장경판 자체를 하사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대장경판을 주고 나면 후일의 더 큰 요구가 있을 것이라 하여 그만 두었다. 그리고 1915년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경도(京都) 센유사(泉涌寺)에 봉안하고자 인경하였다. 이것은 그 뒤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도서관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 대지진 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 인출된 또 한부는 여러 경로를 밟아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935년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인출하여 선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만주국 붕괴와 더불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현 동국대학교 전신이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비치하고자 한부를 아울러 인출, 지금까지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인사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하여 1953년부터 시작하여 1976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였다. 모두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국의 유명도서관에 보냈다. 이 대장경판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민족적인 염원을 걸고 한자 한자 정성을 기울여 판각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라는 데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國李相國集, 韓國古印刷技術史(金斗鍾, 探求堂, 1973), 高麗大藏經解題(李箕永, 東國大學校, 1978), 羅麗印刷術의 硏究(千惠鳳, 景仁文化社, 1980), 海印寺大藏經板에 대한 再考察(朴相國, 韓國學報 33, 一志社, 1983).

<박상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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