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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02 (화) 18:57
분 류 사전1
ㆍ조회: 2469      
[조선] 향약 1 (민족)
향약(鄕約) 향약 1

세부항목

향약(조선적 향약)
향약(향약의 종류)
향약(각 도 향약·동계의 운영 실례)
향약(연구 성과와 의의)
향약(참고문헌)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로, 지방자치단체의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는 약속. 넓은 의미로 향촌규약,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약계(鄕約契), 향안(鄕案),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 족계(族契), 약속조목(約束條目)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원칙적으로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에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향약(鄕約)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 〈주자증손여씨향약 朱子增損呂氏鄕約〉이 전국적으로 시행, 보급되면서부터이다. 즉,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 남전현(陝西省 藍田縣)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였다. 이들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하였던바, 이것을 후대에 남전향약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 후 남송 때 주자(朱子)가 이 향약을 가감 증보하여 보다 완비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향약은 향촌사회의 규약이되 주자학적 향촌 질서를 추구하는 실천규범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향약은 중국 송대의 〈여씨향약〉에서 전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사회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상규상조(相規相助)의 자치정책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태조가 동왕 18년(935) 신라 경순왕(金傅)이 항복하자 그를 경주지방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여 부호장(副戶長) 이하 향리들의 일을 처리하도록 한 데서 시작된 고려의 사심관제도는 그 기능이 4가지였다. 즉, ① 인민을 종주(宗主)하고, ② 신분의 유품(流品)을 밝혀 구분하며, ③ 부역을 고르게 하고, ④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중앙 귀족으로 편제된 호족(豪族)들에게 그 출신 고을에서의 기반을 인정하면서 교화와 세금 부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 향촌 운영을 맡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심관제도는 고려왕조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시기적으로 부침되다가 충렬왕대와 충숙왕대에 혁파되었고, 그 뒤 여말선초에 사심관의 기능과 같은 유향소(留鄕所)가 설치되었다. 유향소는 그 설립 목적이 지방의 악리(惡吏)를 규찰하게 하여 향풍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다. 악리는 이른바 원악향리(元惡鄕吏)를 가리키는 것으로, 감사 수령 밑에서 직접 백성과 접촉하여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향리가 수령 방백 이상의 실권을 잡고 가렴주구의 수탈을 자행하는 것을 말하였다.

이들의 발호를 성문율로 규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이후 ≪경국대전 經國大典≫이 반포된 뒤이며, 그 이전에는 향촌의 유력자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케 하여 향리의 악행을 규찰케 하였다. 즉, 조선왕조 초기 법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지방의 품관(品官) 여러 명에게 유향소를 조직케 하여 원악향리의 발악에 대비하는 한편, 향리의 풍속을 돈독하게 하여 행정규찰 및 지방자치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들의 정원은 지방의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의 품관을 각 경재소(京在所)가 선정하였다.

유향소를 설치한 정확한 연대는 사료상 나타나지 않고 국초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처음부터 유향소가 국왕의 명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지방 군현의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향리 교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새 왕조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 태조가 직접 〈향헌조목 鄕憲條目〉을 지어 반포함으로써 유향소의 조직화와 보편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향소는 그 뒤 태종대에 없앴다가 세종대에 다시 설립하였고, 세조대에 또다시 없어졌다가 성종대에 되살아났다. 다시 연산군대에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중종대와 선조대에도 유향소와 경재소의 파거론(罷去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유향소의 존폐 논란은 당시 정치세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훈구파 관료들은 유향소 폐지론에 적극적이었고, 사림파는 유향소 유지론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중종 반정 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 관료들은 유향소의 부진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여씨향약〉을 실시하여 풍속 교정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였다. 즉, 중종 14년 ≪소학 小學≫의 내용에 들어 있는 〈여씨향약〉을 외방 유향소 및 한성 5부, 각 동 약정(約正)에게 공급하여 향약을 실시하도록 명하고 있다. 중종 12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은 〈여씨향약〉을 간행 반포하고, 이어서 ≪언해본여씨향약 諺解本呂氏鄕約≫을 단행본으로 간행 반포하여 향약을 전국에 공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이하 70여 명의 신진 사류들이 참화를 당하자 향약은 폐지되고, 그 뒤 명종(明宗) 때 강제로 시행하기보다는 각 지방의 특수성에 적합한 향약을 설정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이후 조선적 향약 성립의 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향약(조선적 향약)
 
〈여씨향약〉이 보급, 시행되기 이전부터 우리 향촌사회에는 자생적인 결계(結契)가 향촌민들에 의해 조직되어 왔으며, 중앙 정부에서는 교화와 지방 통치에 대한 보조기능을 목적으로 한 〈향헌 鄕憲〉을 반포하여 유향소를 통해 시행코자 하였다. 조선 중종 12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국령(國令)으로 향약의 시행을 독려하였으나 전국적으로 동시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송대 여씨 형제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정서 속에서 만든 향약이, 시대와 지역이 다르고 사회적·문화적 환경이 다른 조선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모순과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각 지방에 적합한 향약을 만들어 지역에 따라 차별성 있는 향약이 실시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향약의 시초는 태조 이성계가 친히 만든 〈헌목 憲目〉 41조였다. 이 〈헌목〉을 그의 손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증보하여 56조로 된 〈항헌〉을 만들어 반포하였다. 태조의 〈헌목〉은 조선 후기의 향약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즉, 향원(鄕員)의 대상을 향중사족(鄕中士族)으로 한정하여 내외 혈통에 하자가 없는 자 및 그 자제에 한했던 것이다.

이는 양반 가운데서도 그 지역사회의 지도적인 현족(顯族)으로 조직된 향규였다. 한편, 〈향헌〉은 〈헌목〉과 형식은 달랐으나 세족(世族)의 변별을 엄격히 할 것을 논하는 등 신분적 특권과 절제를 역설함으로써 향규의 성격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헌목〉과 〈향헌〉은 그 뒤 공통의 향규로서 조선왕조 500년간 준행되어 왔지만 향약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향헌〉은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군림하는 사족 중 현족들을 위한 향규라고 할 수 있다.

〈헌목〉과 〈향헌〉의 뒤를 이어 조선 향약의 대표적인 역할을 한 것은 퇴계 이황(李滉)의 〈예안향악 禮安鄕約〉과 율곡 이이(李珥)의 〈서원향약 西原鄕約〉, 〈해주향약 海州鄕約〉, 〈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 〈해주일향약속 海州一鄕約束〉이다. 〈예안향약〉은 명종 11년 퇴계가 향리인 예안에 낙향한 후 지방 교화가 미진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배인 이현보(李賢輔)의 유지를 이어 제정한 것이다. 이 향약은 극벌·중벌·하벌의 3대 항목으로 나누어 과실을 징벌하는 조목을 들고 있다.

즉, 극벌은 부모불순자(父母不順者) 외 6항목, 중벌은 친척불목자(親戚不睦者) 외 16항목, 하벌은 공회만도자(公會晩到者) 외 4항목을 설정하였지만 구체적인 치벌(治罰)방법은 명기하지 않았다. 끝에 원악향리 등 4조목을 부기하였으나 이것 역시 징벌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그러므로 〈예안향약〉은 완비된 내용의 향약은 아니지만 과실을 처벌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기타 입교예속 등은 학교교육에서 권도할 것을 주장한 퇴계의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향약은 〈주자증손여씨향약〉과는 관계가 없었으니 우리 나라의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징계하여 가풍과 향풍(鄕風)을 진작케 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향약은 퇴계 생존시에는 시행되지 못하였지만 그 뒤 영남 학파의 전통을 이은 제자, 문인들에 의하여 영남지역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용되었다.

율곡 이이는 〈서원향약〉을 비롯한 4종류의 향약을 제정하고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청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향리 교도에 진력한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서원향약〉은 율곡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부임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미풍양속을 진작키 위해 전임 목사들이 〈여씨향약〉을 참작하여 만든 향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이 향약의 특징은 반(班)·양(良)·천민(賤民) 등 모든 주민을 참여시키는 계조직을 향약조직과 행정조직에 연계시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청주목은 25장내(掌內)였는바, 면 단위 계장과 동몽훈회, 색장을 두어 향약계의 실제적인 단위로 운영하였다. 향약의 내용에서도 조선 초기 〈향헌〉의 내용을 많이 차용한 것 같다.

즉, 이 향약은 권면해야 할 선목(善目)과 규계해야 할 악목(惡目)을 구분, 정리하여 과실상규 조목과 환난상휼 계조직의 약속조목을 혼합한 향규약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임원 구성은 도계장 4인, 매장 내 각 계장 1인(도합 25인), 동몽훈회 1인, 색장 1인, 매리(里)에 별검을 두었으며, 향회독약시 좌차규식(座次規式)은 신분과 직임에 따라 구분하고 같은 신분이나 직임일 때는 연령순으로 좌차를 정하였다.

〈해주향약〉은 해주 석담지방 향민 전체를 대상으로 입약된 것이 아니라 해주지방의 유생이나 향사족들이 권선징악과 상호부조를 통하여 향사풍(鄕士風)을 강화하게 하기 위한 향규약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해주일향약속〉도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여 형식적으로는 향약 같지만 내용상에서는 조선 초기 〈향헌〉이나 퇴계의 〈예안향약〉과 같은 향규임을 알 수 있다. 즉,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면서도 그 외의 각 조목은 그 지방실정에 맞도록 규정한 것이다.

예컨대, 4대 강목 중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2강령에 관한 조목은 더욱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특히 관속의 중대한 범죄가 바로잡히지 않을 때는 약원들을 중심으로 여론을 일으켜 관권을 견제하고 향권을 지켜 나가려는 지방자치적 성격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음이다. 율곡이 만든 일련의 향규 조약들은 그의 학문을 이은 기호지방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보은군수(報恩郡守) 김홍득(金弘得)이 1747년에 작성한 〈보은향약 報恩鄕約〉이다.

<김호일>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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