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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10-12 (금)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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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32      
[조선] 훈민정음 (두산)
훈민정음 訓民正音

조선 제4대 세종(世宗)이 1446년(세종 28) 9월에 제정 ·공포한 한국의 국자(國字), 또는 그것을 해설한 책의 이름.

국자의 뜻으로는 줄여서 ‘정음(正音)’이라고도 하며, 속칭 ‘언문(諺文)’이라고도 하였다. 글자로서의 훈민정음이 완성된 것은 1443년(세종 25)이었으며, 이것이 제정되자 그 창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금중(禁中)에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해례(解例)와 같은 원리를 연구하게 하는 한편, 그 보급책의 일환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 운서(韻書)를 번역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공포하였다. 이 국자 제정과 ‘해례’ 편찬은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당시 집현전(集賢殿) 학사인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등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뜻이며(訓民正音諺解), ‘정음’은 ‘우리 나라 말을 정(正)히, 반드시 옳게 쓰는 글’임을 뜻한다(釋譜詳節序).

【책으로서의 《훈민정음》】 〈내용〉 책으로서의 내용은 처음에 훈민정음 제정의 동기와 취지를 밝힌 세종의 서문과 예의(例義)로 된 본문 및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원리와 용례를 해설한 해례, 그리고 끝으로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례 부분은 ① 제자해(制字解), ② 초성해(初聲解), ③ 중성해(中聲解), ④ 종성해(終聲解), ⑤ 합자해(合字解), ⑥ 용자례(用字例)로 세분된다.

〈초성의 제자원리〉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에 의하면 초성 중 기본자(基本字:ㄱ ·ㄴ ·ㅁ ·ㅅ ·ㅇ)는 그 자음(字音)이 나타내는 음소(音素)를 조음(調音)할 때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고 하였다. 곧 설음(舌音:ㄴ), 순음(脣音:ㅁ), 후음(喉音:ㅇ)에서 불청불탁(不淸不濁)으로 기본문자를 삼은 것은 그 소리가 가장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치음(齒音)에서 ‘ㅅ’과 ‘ㅈ’은 비록 둘 다 전청(全淸)이지만 ‘ㅅ’이 ‘ㅈ’에 비하여 그 소리가 약하기 때문에 기본자로 삼았다. 다만 아음(牙音)에서 불청불탁(ㆁ)을 기본문자로 삼지 않은 것은 그 소리가 후음(喉音)의 ‘ㅇ’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밖의 초성자(初聲字)들은 이들 기본자에 가획(加畵)하거나 또는 약간의 이체(異體)를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졌다. ㄱ → ㅋ(ㆁ), ㄴ → ㄷ → ㅌ(ㄹ), ㅁ → ㅂ → ㅍ, ㅅ → ㅈ → ㅊ(ㅿ), ㅇ → ㆆ → ㅎ에서 ‘ㆁ ·ㄹ ·ㅿ’ 3자는 이체를 형성한 경우이다. 그리하여 전탁(全濁) 계열의 각자병서(各自竝書) 6초성을 합해서 훈민정음의 23초성체계가 이루어졌다. 이 23초성체계는 동시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자모체계(子母體系)이기도 하다. 위의 23초성에서 후음(喉音) 전청(全淸) ‘ㆆ’은 훈민정음 해례 용자례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이 초성이 《동국정운》의 한자음(漢字音) 표기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전탁계열의 초성 각자병서는 모두 전청을 병서하였고 다만 후음의 ‘ㆅ’만이 차청(次淸)을 병서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제자해에서는 전청의 소리가 엉기면[凝則] 전탁이 되는데 유독 후음은 차청으로 전탁이 되게 한 것은 전청인 ‘ㆆ’이 소리가 깊어서 엉기지 아니하므로 이보다 소리가 얕은 ‘ㅎ’으로써 전탁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들 각자병서는 주로 《동국정운》의 한자음 표기에 사용되었다. 이 훈민정음 초성체계에 대하여 훈민정음 해례 초성해 첫머리에 “정음초성은 곧 운서(韻書)의 자모이다(正音初聲卽韻書之字母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음의 초성체계가 중국 음운학(音韻學)의 자모체계와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 ·반설음(半舌音) ·반치음(半齒音), 또는 전청 ·차청 ·전탁 ·불청불탁 등의 술어가 이를 뒷받침한다.

〈중성의 제자원리〉 훈민정음의 중성은 중국 음운학에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초성해와는 대조적으로 중성해 첫머리에서 “중성은 자운(字韻)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초성과 종성이 합성함으로써 음을 이룬다(中聲者 居字韻之中 合初終而成音)”고 하였다. 중성의 세 기본자(基本字: · ㅡ ㅣ)는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의 모양을 본떴다고 한다. 그 밖의 중성자(中聲字)들은 이 기본자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裕 與 ·同而口蹙 ·其形則 ·與一合而成… 留 與 ·同而口張 其形則ㅣ與 ·合而成… 萸 與 ·同而口蹙 其形則一與 ·合而成 癒 與一同而口張 其形則 ·與ㅣ合而成…). 그리고 ‘ 臾硫紐維 ‘ㅣ’에서 일어난 ‘ 裕留萸癒 ’재출자(再出字)라 하였다( 裕留萸癒裕 始於天地 爲初出也 臾硫紐維 起於ㅣ而兼乎人爲再出也).

〈종성〉 훈민정음 본문에는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終聲復用初聲)”고 하였으나 해례 종성해에서는 종성을 사실상 8자 체계로 규정하였다(ㄱㆁㄷㄴㅂㅁㅅㄹ八字可足用也). 그러므로 이 밖의 초성은 종성으로 쓸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 팔자가족용(八字可足用)의 규정을 설명하여 “如恥곶爲梨花 긱의갗爲狐皮 而ㅅ字可以通用 故只用ㅅ字”라 하였는데, ㅿ ·ㅊ ·ㅈ ·ㅅ 등의 받침은 ‘ㅅ’으로 통용된다고 하였다. 종성 합용병서에 대하여 해례 합자해(合字解)에서 종성의 2자 ·3자 합용은 ‘닺(土), ぽ(釣), ㈙때(酉時)’ 등에서 ‘ㄺ ·ㄳ ·ㅩ’ 등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당시 국어 문헌에 보면 종성의 합용병서는, 사이시옷을 제외하면 ‘ㄳ ·ㅧ ·ㄺ ·ㄻ ·ㄼ ·ㅭ’ 뿐이다.

〈합자〉 훈민정음 체계에서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초성 ·중성 ·종성이 음절을 표시하는 결합체를 형성한 점이라 하겠는데, 해례 합자해에서 “초 ·중 ·종(初中終) 삼성(三聲)이 합하여 글자를 이룬다”라 하고 이의 세부규칙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初聲或在中聲之上 或在中聲之左如君字ㄱ在 萸上 業字ㆁ在 癒 左之類 中聲則圖者橫者在初聲之下 ·ㅡ 裕臾萸紐 是也縱者在初聲之右 ㅣ 留硫癒維 是也 如呑字 ·在ㅌ下 卽字ㅡ在ㅈ下 侵字ㅣ左ㅊ右之類 終聲在初中之下 如君字ㄴ在 萸 下 業字ㅂ在ㆁ 癒 下之類,곧 중성 가운데 동그라미 ‘ ·’, 가로 그은 자 ‘ㅡ’ 및 이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중성 ‘ 裕臾萸紐 ’ 등은 초성 아래에 놓이며 ‘ㅣ’ 및 그와 안팎으로 ‘ ·’와 결합된 ‘ 留硫癒維 ’ 등은 초성의오른쪽에 놓이고, 종성은 초 ·중성이 결합된 밑에 놓인다는 말이다.

〈방점〉 훈민정음 체계에 있어서 방점(傍點)은 당시 국어의 성조(聲調)를 나타낸 것이다. 훈민정음 본문의 설명에 의하면 “글자 왼쪽에 한 점을 찍으면 거성(去聲), 2점이면 상성(上聲), 없으면 평성(平聲)이며, 입성(入聲)은 점 찍는 것은 같지만 촉급(促急)하다”고 하였다. 훈민정음 언해에 의하면 평성은 ‘가장 낮은 소리’, 상성은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은 소리’, 거성은 ‘가장 높은 소리’, 입성은 ‘빨리 し닫는 소리’라 해석하였다. 이 해석과 위의 훈민정음 본문 및 해례 합자해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국어에는 ‘평 ·상 ·거’의 3성만의 성조가 존재하였으며, 그것도 저조(低調)와 고조(高調), 그리고 이들의 병치(竝置)인 상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이론적 배경〉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및 그 결합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인 삼극지의(三極之義)와 이기지묘(二氣之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극은 천 ·지 ·인 삼재를 말하고, 이기(二氣)는 음(陰) ·양(陽)을 말한다. 성리학적으로 이 삼재와 이기로 우주일체의 사상(事象)을 주재하는 기본이념으로 이해되고, 이 삼재와 음양을 떠나서는 우주일체의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성음(聲音)도 그것이 개념을 표상(表象)하는 그릇이므로, 근본적으로 삼재와 음양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말소리의 체계는 삼재 ·음양의 체계와 반드시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언어관(言語觀)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그 음(音)의 분류에 있어서나 제자 원리에 있어서 그 철학적 이론은 모두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하고 있다. 성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상은 음양(陰陽) ·오행(五行) ·방위(方位)의 수(數)가 있으므로 음의 분류도 오행의 수에 맞추었다. 오행 ·방위, 그리고 초성에 있어서의 춘하추동,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중성에 있어서의 천 ·지 ·인, 일 ·이 ·삼…(一 二 三…)의 수와 같은 것은 모두 성리학적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음의 특징은 음성적 특징과 성리학적 특징의 양면에서 기술되어 있다.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목적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 자체에도 나타나 있지만 세종이 직접 서술한 훈민정음 본문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일용(日用)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國之語音 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첫째, 한국어와 문자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를 제거하자는 데 그 창제 동기와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자(漢字)는 원래 중국어에 의하여 발생, 발달해온 글이다. 따라서 그것은 중국어를 표기하기에 합당한 글자이지, 구조적으로나 음운체계를 달리하는 한국어의 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글자이다. 그러므로 한국어의 구조와 음운 체계에 맞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우리의 음운과 의사를 그대로 표기할 수 있을 때 한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족 문화를 육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모든 백성에게 문자 이용의 혜택을 균등하게 입게 하자는 데 동기와 목적이 있었다. 한자의 체계는 그 구조 ·형식 때문에 기술적(記述的)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훈련이나 기술(技術)이 없으면 익히기 매우 힘들고 또 그것을 완전히 익히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국 자체에서조차 이 한자를 완전히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소수의 지식 ·귀족계급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특히 한국의 경우에도 그것이 귀족 ·지배 계급의 문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백성을 위한 서민의 문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자는 문화의 소산이며 문화의 매개체이다. 문화는 전체 백성의 것이지 결코 일부 지배계급의 특권적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한 세종의 의도이며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이상 실현은 문자 생활로 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도 그 글에서 “문자가 언어와 불일치하기 때문에 학자와 서생(書生)은 그 뜻을 밝히기가 어렵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가 어렵다”고 개탄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연구나 국가의 정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셋째, 선진 문화 섭취에 도움을 주자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정과 동시에 《동국정운》의 편찬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역훈(譯訓)을 시작하였다. 전자는 한국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국음의 표준을 정하자는 데 있었다. 이 《동국정운》의 편찬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타난 것임을 뜻한다. 《홍무정운》을 역훈하게 한 것도 빈번한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어 습득이 불가피한 만큼 중국어에 대한 표준적인 운서를 정함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책에 수록된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하여는 재래의 반절식(反切式)으로도 불충분하고 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서 훈민정음과 같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의 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제정의 경과〉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이 언제부터 구상되었고 착수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 12월조에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했을 뿐, 그 경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처음에는 세종 단독으로 구상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의 중지(衆智)를 모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이리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자 문자 창제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집현전과는 별도로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보급과 이에 부수되는 문헌의 간행 등을 추진하는 한편, 해례와 같은 원리면의 연구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후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는 44년 2월 《운회(韻會)》를 언해하고 같은 달에 최만리(崔萬理) 일파의 반대 상소에 부닥친다. 반대의 골자는 한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듦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인이 만들어 놓은 운서를 뜯어 고치고 언문을 다는 것이 모두 무계(無稽)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45년 4월 《용비어천가》가 완성되고, 이듬해 3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를 명하였으며, 그 해 9월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반포되고, 47년 9월 《동국정운》의 완성 및 《용비어천가》의 반포, 48년(세종 30) 11월 《동국정운》 반포, 55년(단종 3) 봄에 《홍무정운》 역훈(譯訓) 완성 등, 사업은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운회》를 번역한 것은 곧 《동국정운》의 편찬을 뜻하므로 그 사업은 이 무렵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의 작성은 아마도 1444년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착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동안에 중국 운학(韻學)의 이론을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의 찬정(撰定)을 통하여 그 실제적 효용성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자류(字類)를 추려 보면 처음 1443년에 제정하였던 28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운서 편찬과정에서, 또는 국어 표기를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자류가 더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훈민정음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 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언문청에서 곧 간행에 착수, 46년(세종 28) 9월에 완성 ·반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본의 발견〉 반포 당시의 해례가 붙은 《훈민정음》 원본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40년 7월에 경북 안동(安東)에서 발견되어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장과 둘째 장이 떨어져 나간 것(세종 御製 서문과 例義의 일부)을 복원하였다. 그 전까지는 세종 어제 서문과 예의만이 전해 왔으며,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한문 <실록본>과 《월인석보》 권두에 수록된 <언해본(諺解本)>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이 최근 발견되어 서강대학에 보존되어 있고, 박승빈(朴勝彬)이 간수한 단행판각본(單行板刻本)으로 된 언해본, 그리고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있는 사본인 <궁내성본>,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가 간수하고 있는 사본인 <가나자와본>이 있다.

【글자로서의 훈민정음】 앞에서 기술한 훈민정음 체계는 당시 국어의 전면적 표기를 위하여 마련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고유 요소(要素)와 외래 요소까지를 고려에 넣은 체계였던 것이다. 국어에서의 외래 요소는 주로 한자어였으므로 이 한자음의 표기를 위하여 마련한 것이 《동국정운》이었다. 이 《동국정운》의 한자음 표기는 우리 음운체계에 동화한 대로가 아니라 원음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에 고유 요소 표기와의 사이에는 약간의 어긋남이 있었다.

〈초성〉 위의 23자모표 전탁(全濁) 계열의 ‘ㄲ ·ㄸ ·ㅃ ·ㅉ ·ㅆ ·ㆅ’은 한자음 표기에서는 어두에 자유로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국어 표기에서 그 중 ‘ㄲ ·ㄸ ·ㅃ ·ㅉ’의 사용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마꾜眈(仰)’ 등의 예가 있기는 하나, 관형사형(冠形詞形) 어미 ‘-ㄹ’ 밑에서 대부분이 사용되었다. 즉, 고유어 표기에서 어두(語頭)에 표기된 예는 전무하나, ‘ㅆ ·ㆅ’은 순수한 국어 단어의 어두음(語頭音) 표기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23자모표에 포함되지 않은 각자병서 ‘ㆀ ·ㅥ’ 등이 어중(語中)에서 사용되었다(예:괴여爲我愛人而괴긷爲人愛我, 다ゐ니라(觸) 등). 그 밖에 순수 국어 단어의 된소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합용병서(合用竝書) ‘ㅺ ·ㅼ ·ㅽ’ 등과 어두 자음군(子音群)인 ‘ㅴ ·ㅵ ·ㅳ ·ㅄ ·ㅶ ·ㅷ’ 등이 자주 쓰이며, 이 밖에 ‘ㅻ’의 사용도 드물게 보인다. ‘ㅺ ·ㅼ ·ㅽ’은 국어 단어의 된소리를 표기하기 위하여 어두에서 자유로이 쓰인 반면 한자음의 된소리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ㅂ’ 선행의 어두자음군도 글자 그대로 자음군이었으나, 당시부터 후세에 된소리화할 소지를 다분히 지니고 있었던 것들이다. 또한, 상기 28자모표의 후음(喉音) 전청의 ‘ㆆ’은 훈민정음해례 용자례(用字例)에서의 용례에서도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 국어 표기에서도 관형사형 어미 ‘ㄹ’ 오른쪽에 부서(附書)한다는 극히 한정된 환경에서 쓰였고(예:덤 것, 건너 것제 등) 간혹 사이시옷 대신 쓰인 정도이며 그것도 세종 ·세조 때 문헌에만 쓰였다. 초성에는 병서 외에 연서(連書)라 하여 문자를 상하로 결합하는 방법이 있었다. 순경음(脣輕音)이 그것인데 ‘ㅸ ·ㅱ ·ㆄ · ㅹ ’ 등이 있었다. 이것도 28자모에는 들지 않은 것으로 그 중 ‘ㅸ’은 순수한 국어 단어 표기에 사용되었고 그 밖의 것은 중국음 표기(홍무정운 역훈 등)에서만 사용되었다. 이렇게 보면 훈민정음 제정 당시의 순수한 국어 표기를 위한 자음 체계는 [표 5]와 같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성〉 훈민정음 해례 중성해에서의 중성의 합용병서 가운데 2자 합용자인 ‘ 臾硫 · 紐維 ’ 및 3자합용자인 ‘ 臾硫l · 臾維l ’는 문헌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중성자들은 기본자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상의 제시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종성〉 전술한 바 훈민정음 해례 중성해에서는 종성을 8자 체계로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훈민정음》 본문에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終聲復用初聲)”라 한 데 대한 간소화안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는 ‘ㅈ ·ㅊ ·ㅍ ·ㅌ ·ㄿ’ 등의 종성을썼던 일도 있으나, 그 밖의 모든 문헌에서는 이 8종성의 규정이 지켜져 있다. 그러면서도 반치음(半齒音) ‘ㅿ’이 특수한 경우에 자주 쓰였는데, 이 ‘ㅿ’ 종성에 대해서도 해례 종성해에서 ‘긱의갗(狐皮)’에서의 ‘ㅿ ·ㅊ’ 종성을 ‘ㅅ’으로 통용된다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ㅿ’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용법은 ‘ㅇ’ 또는 드물게 ‘ㅸ’에 선행한 위치에 한정되어 쓰였는데, 이는 아마도 이와 같은 위치에서 ‘ㅅ’과 ‘ㅿ’이 중화되어 [z]로 실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위치에 한해서 ‘ㅿ’이 음절말(音節末)에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즉, 훈민정음 제정 당시에는 음절말에 9자음의 대립이 있었던 셈이다. 종성의 합용병서는 실제 문헌에서 국어 표기에 쓰인 것으로는 사이시옷을 제외하면 ‘ㄳ ·ㅧ ·ㄺ ·ㄻ ·ㄼ ·ㅭ’ 등의 6가지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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