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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5 (일)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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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40      
[조선] 임진왜란 (한메)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선조 25)부터 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문록경장(文祿慶長)]의 역(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 부른다.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격화된 붕당 정치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군사적으로는, 조선 초기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의기관을 설치하여 빈번한 외침에 대비해 왔으나 이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이이(李珥)가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며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나 오히려 배척당하는 실정이었다.

이럴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고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실(豊臣秀吉)]가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그는 오랫동안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통일 이후 각 제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안전을 도모하며 신흥 상업세력 억제를 위하여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쓰시마섬주[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종의조(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했는데,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서 명(明)나라를 치자는 데 있었다. 이에 쓰시마섬주는 가신(家臣)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조선의 일본과의 수호와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서신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어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섬주를 통하여 재차 교섭을 청하면서, 교섭이 뜻대로 안되면 병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침략의 뜻을 내보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에 보빙(報聘)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을 결정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일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했으나, 사신들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서인(西人)이었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여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반면, 동인(東人)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조신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인의 우세와 조정 대신들의 안일을 바라는 요행심으로 대세는 김성일의 의견 쪽으로 기울었고,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의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했다. 그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에서도 비변사의 보고와 빈번한 일본사신의 왕래로 사태를 짐작하고 늦게나마 대비책을 강구했지만 별로 성과가 없었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고 1592년 4월 침공을 명했는데, 이때 일본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이나 되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제 1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하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黑田長政)] 등과 합세하여 3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장으로 하는 제1군은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梁山)·밀양(密陽)·청도(淸道)·대구(大邱)·안동(安東)·선산(善山)·상주(尙州)·문경(聞慶) 등을 거쳐 충주(忠州)에 이르렀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경상좌도를 택하여 울산(蔚山)을 함락하고 경주(慶州)·영천(永川)·군위(軍威)를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 서울로 진군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동래(東萊)에서 김해(金海)로 침입하여 경상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星州)를 지나고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북상하였다.

적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알려지자, 급히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 조령(鳥嶺)·충주 방면의 중로를 방어하도록 했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竹嶺)·충주 방면의 좌로를 방어하게 했으며, 유극량(劉克良)·변기(邊璣) 등에게는 각기 죽령·추풍령을 방비하게 했다. 한편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보내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했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신립의 패보는 민심을 극도로 동요시켰고, 선조는 마침내 서울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향하며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5월 2일 서울을 함락, 본거지로 한 뒤 다시 2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여 가토 기요마사군은 함경도를,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평양(平壤)을 위협했다. 선조는 다시 의주(義州)로 피란했고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6월에 평양을 점령했으며, 가토 기요마사군은 회령(會寧)에서 두 왕자를 붙잡았고 함경도 일대를 정복했다.

한편 해상에서는 첫 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대패로 일본군이 상륙할 수 있었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의 해상 활동이 차단되고 보급로가 끊어졌다. 이순신은 원균의 구원을 요청받고 거북선을 등장시켜 여수를 출발하여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1차는 옥포(玉浦)에서, 2차는 사천(泗川)·당포(唐浦)에서, 3차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해전에서 일본의 수군을 대파, 큰 전과를 올려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한 국내 각처에서는 왜병의 침략 행위에 대한 민족적 항거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은 양반 계층에서 천인 신분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하였으며, 총수는 관군의 1/4이나 되었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정인홍(鄭仁弘)·유종개(柳宗介) 등이 있으며, 이들은 곳곳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편, 선조는 피란하는 도중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는데,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했다.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5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을 공격했으나 패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 등으로 하여금 4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을 공격하게 하여 이를 탈환하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대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그 동안 명군이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자, 왜군도 각지의 의병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전염병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감합인(勘合印;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의 8도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 7개 조항의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붙들어갔던 두 왕자를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冊封)하고 조공(朝貢)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1596년(선조 29)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조선 침구(侵寇)를 꾀하나,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하였다는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못짓던 화의는 결렬되어, 1597년(선조 30)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은 14만 대군을 조선으로 출발시켰는데, 그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미 그 전해 겨울에 거제도(巨濟島)에 이르렀고, 이어 가토 기요마사도 서생포(西生浦)에 침입했다. 1597년 3월부터는 대군이 계속 상륙했고, 7월 말부터 총공격에 나서 경상도를 포함하여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총반격을 가하여 9월의 소사전투(素沙戰鬪)에서 크게 승리하고,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일본군을 대파하여 왜군은 조선의 육·해군에 의하여 봉쇄되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왜군이 총퇴각함으로써 98년 12월에 7년 동안의 전란이 완전히 끝났다.

[결과 및 영향]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나라·일본 등 3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문란했던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인명 손상은 물론 전야(田野)의 황폐가 전국에 미쳐 납속책(納粟策)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서얼허통(庶蘖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종래 신분상의 제약이 느슨해져갔다.

백성의 생활은 처참하여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고 민란이 일어났으며,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이몽학(李夢鶴)의 난은 왜란 중에 있었던 대표적인 반란으로, 일반 민중에 끼친 영향이 컸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그리고 역대 실록 중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하였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국방의 중대성을 절감하고 병제의 개편과 무기개발에 착수했으며,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하였다. 새로운 무기로서 비격진천뢰·화차 등을 발명했고, 조총을 제조하고 불랑기(佛狼機)를 모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고 일본에 대해서는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지기도 하였으나, 민간 신앙으로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일어나는 등 명나라에 대한 사대 사상이 더욱 굳어진 것도 사실이다.

일본 역시 국민 생활이 피폐하고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德川家康)]로 하여금 국내 정복을 가능하게 하여 중앙집권제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많은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경작·노동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하였으며,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 제조 기술을 전수하여 도자기 기술에 큰 발전이 있었고, 또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하였으므로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으며, 만주(滿洲)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淸)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3국의 내정은 물론 동양의 국제 정세를 전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기동>

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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