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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09 (일) 21:09
분 류 사전1
ㆍ조회: 927      
[조선] 여수와 이순신의 해전 2 (여수 문화 기행)
여수와 임진왜란 2

에서 계속

출전 : 여수 문화 기행 (http://bora.dacom.co.kr/~winwin3/p2/battle.html)

제2차 출동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제2차 출동은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의 출동이었는데, 이번 출동에서는 사천해전에서 13척, 당포해전에서 21척 당항포해전에서 26척, 그리고 율포해전에서 7척 등 합계 67척의 적선을 격파하고 있다.

원래 제2차 출동은 6월 3일부터 전라우수군과 함께 출동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6월 27일 원균의 급보로 계획이 앞당겨져서 전라좌수군의 단독출전이 되었고, 또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제2차 출동에서는 군선의 피해는 없으나 전사자가 13명이나 나오고 전상자도 36명에 이르게 된다.

제2차 출동때의 주요 함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구선돌격장 급제 이기남
후부장 흥양첨사 배홍립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별도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한후장 본영군과 가안책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참퇴장 전첨사 이응화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

(1) 사천 해전 (5월 29일)

적선수 10척이 사천, 곤양 등지까지 쳐들어 왔다는 원균의 급보를 받은 전라좌수영 함대는 5월 29일 새벽 척수를 출발하여 남해 노량에 도착하니 원균은 다만 3척의 전선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다가 전라좌수영 함대를 보고 달려와 왜적이 사천선창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제2차 출동도]

함대는 쉬지 않고 노를 재촉하여 사천선창에 도착하여 보니, 산이 선창을 둘러싸고 7,8 리나 뻗혔는데 형세가 험준한 곳에 왜적들이 수백명씩 진을 치고 계획적으로 대항할 태세였으며, 바다에는 12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는데 배에도 적도들이 늘어서서 소리를 지르고 야단들이었다. 이순신수사가 상황을 판단하건데 바다가 얕고 벌써 썰물이라 판옥선같은 큰 배가 쉽게 돌진할 수 없고, 날도 또한 어두워가니 무모한 공격을 피하라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적들이 몹시 교만한 태도를 가졌는데 우리가 만일 짐짓 물러나면 저놈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나와 우리와 싸우려고 할 것이니 우리는 적들을 한바다로 끌어내어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10리도 못나와 이순신수사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왜적들이 모두 산에서 내려와 배에 갈아타고 우리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무렵에는 저녁 조수도 밀려들어 큰 배도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전라좌수영함 대는 일제히 뱃버리를 돌려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천해전에서 그 유명한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그 용맹을 떨치는데 이 사천해전이 얼마나 치열하였던가는 충무공의 당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충무공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조총을 맞아 그 후 이 상처 때문에 수년을 고생하게 된다. 왜적의 배 12척을 모조리 불사른 후 사천 땅 모자랑포로 이동하여 밤을 세웠다.

(2) 당포 해전 (6월 2일)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전라좌수영함대는 모자랑포를 출발하여 고성땅 사량도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후, 전선이 당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6월 2일 아침 8시경에 사량도를 출발하여 10시 경에 당포에 이르니 적선 21척이 정박해 있고 왜적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조총을 쏘아대며 저항하려 하였다.

공격의 나팔과 북이 울리자 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당포 포구안으로 진격하여 붉은 비단휘장을 들어친 대장의 배를 먼저 깨뜨리고 바다에 떨어진 장수인 듯한 자의 목을 베니, 왜적들은 갈팡질팡 겁을 내어 도망치는데 총에 맞고 화살에 맞은 자들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함대는 공격을 늦추지 않고 엄습하여 포구안에 있던 적선 21척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그 근처에서 밤을 새웠는데 다음날인 6월 3일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6척을 거느리고 위풍도 당당히 당포에 나타났다. 전라좌수군은 함성을 지르며 우군을 맞이했고 기뻐 어쩔쭐 몰랐다. 이렇게 되어 전라 좌우수군의 연합함대가 편성됐고, 앞으로 할 모든 전투에서 전라좌우수군은 항상 함께 출동하여 대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3) 당항포 해전 (6월 5일)

연합함대를 편성한 전라좌우수군은 하루를 작전회의로 보낸 다음, 당항포에 적이 있다 는 보고를 받고 즉각 출동하였다 당항포에 이르러 그 곳 지형을 살펴본 즉 포구가 20여리나 깊숙히 들어가 있으나 그 폭이 넓어서 전선이 들어갈만 하므로 먼저 척후선을 보냈더니 적이 있다는 신기전이 올라왔다. 이순신수사는 전선 4척을 포구어귀에 남겨 두어 후미를 경계토록하고, 전선을 일렬로 배치하여 당항포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포구안에 정박하고 있었다. 이 때의 연합함대 지휘권은 한 사람에게 아직 통합되지 않고 이순신, 이억기, 원균 세사람이 똑같은 수사자격으로 지휘권이 각각 독립되어 있었으나 실제전투에 임하면 그동안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인격과 전략이 뛰어난 이순신수사가 자연 지휘를 맡게 되었다.

연합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뚫고 들어가 3도 전선이 교대로 집중공격을 가하니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이 때 이순신수사는 생각하기를 왜적들을 더 이상 공격하면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날 것으로 판단하여 여러장수들에게 전령하기를 <우리가 짐짓 군사를 돌려 포위를 풀고 약간 후퇴하면 저들이 반드시 그 틈을 타서 달아나려고 할 것이니 이 때 좌우에서 추격 섬멸하라>고 한 뒤 약간 후퇴하여 한쪽의 포위를 풀어 놓았다. 그랬더니 예상한데로 왜적들은 3층 누각선을 날개처럼 옹호하고 한바다로 급히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수군함대는 다시 사방으로 포위하여 26척 왜적을 모조리 깨뜨리니 온 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하였다.

(4) 율포 해전 (6월 7일)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한 전라좌우수군은 고성땅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천성, 가덕근방을 수색하던 중, 율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쫓아가니, 적선 7척이 부산으로 향하다가 우리 함대를 보고 달아났으나 율포 바깥 바다에서 모두 잡히고 말았다.

제3차 출동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왜적이 제l차 및 제2차 출동의 7번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자 이 소식은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보고되었고, 수군 참패의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은 조선의 이순신함대를 격파하라는 특명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육상전투에 참가했던 협판안치가 용인에서 웅천으로 내려와 흩어진 수군을 정비하였고, 구괴가륭과 가등가명 등 내노라하는 왜적의 수군장수들이 새로운 전선을 이끌고 조선으로 나와 이순신 타도를 외치게 되었다. 그래서 6월말부터는 왜적들이 10여척 또는 30여척씩 떼를 지어 거제근방에 출몰한다는 원균의 소식을 들은 이순신 수사는 곧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출동할 것을 재의하고 드디어 전라좌우수군 연합함대는 7월 5일부터 7월 l3일까지 제3차 출동에 오르게 된다. 이번 출동에서 우리 함대는 그 유명한 한산도해전에서 59척 안골포해전에서 30척 등 모두 89척의 적선을 격파하는데 제3차 출동은 그 전과도 엄청날 뿐 아니라 풍신수길이 마지막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의욕을 꺾어 버렸다는 점에서 더욱 통쾌한 승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마저 패하자 풍신수길은 주인장 제48호를 다시 내려서 일본 수군은 부산 서쪽으로는 절대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제3차 출동 때의 전라좌수영 함대 편제는 다음과 같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좌별도장 군관 윤사공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우별도장 전만호 송응민
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유군장 발포만호 황정록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한후장 전봉사 김대복
우부장 사도첨사 김완
참퇴장 전첨사 이응화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좌돌격구선장 급제 이기남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
우돌격구선장 군관 이언양
우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1) 한산도 해전 (7월 8일)

7월 5일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우수영함대가 7월 8일 적이 출동한다는 견내량에 이르러 보니 76척이라는 적의 대함대가 전투준비에 부산하였다. 이때 우리측 함대의 수는 전라좌수군이 24척, 전라우수군이 25척, 그리고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이 7척으로 합계 56척 이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에 달하며 넓은 곳이라야 600m를 넘지않는 좁은 해협이다. 이순신 수사가 생각컨데 이 수로는 지형이 너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싸움터로서는 부적당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해전 경험으로 볼때 육지와 너무 가까운 곳에서 싸우노라면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일이 빈번하였으므로 이번만은 넓은 바다에서 왜적의 배는 물론 왜수군들까지도 모조리 잡을 계획을 세웠다.


          [제3차 출동도]

그래서 3도수군은 일부러 후퇴를 가장하여 후퇴하자 왜적들은 의기양양하게 한산도 앞바다까지 뒤쫓아 왔다. 이 바다는 상당히 넓은 곳이기도 하지만 만일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한산도로 도망간다 하더라도 한산도는 조그마한 섬이므로 도망가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순신 수사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일향포성이 온 바다를 울리고 청룡기가 세개씩 올라간 후 나팔과 북이 천지를 진동하자 지금까지 후퇴하던 3도수군은 일제히 뱃머를 돌리고 학익진을 형성하먹 적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거북선이 종횡무진으로 적진을 유린하고 모든 장졸들이 온 힘을 다하여 쏘아대니 왜적들은 기가 꺾이어 전의를 잃고 도망가므로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되고 말았다. 적선 73척중에서 69척이 나포 또는 격파되고 물에 빠진 수많은 적군은 익사하거나 한산도로 도망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산대첩의 전모이고 임진해전사의 분수령을 이룬 득의의 대승리였다. 그러므로 한산도 해전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미국인 Hulbert박사는[Modern Histo ry of Japan]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한산대첩은 조선에 있어서 사라미스해전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에 대하여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2) 안골포 해전 (7월 10일)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조선수군은 하루를 휴식한 다음 7월10일에는 안골포에 남아 있는 적을 소탕하러 나섰다. 안골포 해전에 임한 이순신수사는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세웠으니, 전라우수군은 가덕쪽 안골포 바깥 바다에 포진하여 혹 부산방면에서 올지도 모를 적의 구원함대를 경계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선만 남겨두고 전투에 가담하도록 하고 안골포공격은 전라좌수군이 담당하되 전투능력이 없는 경상우수군 원균함대는 전라좌 수군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안골포에 이르러보니 적선 42척이 정박하고 있는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많은 배가 전투하기가 매우 불편하였는데 왜적들은 모두 육지로 올리가서 대항하고 있었다. 넓은바 다로 유인하려 애를 썼으나 그들은 이미 한산도패전의 쓰라린 경험이 있는 터라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 않았으므로 이순신수사는 파상공격의 작전을 택하였다. 전함대가 서로 교대하여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30척을 불사르고 해질 무렵에 철수하였다.

제4차 출동 (8월 24일부터 9월 2일까지)

한산도해전 후 풍신수길의 특명으로 왜적들이 부산 서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순신수사는 마지막 목표 부산공략에 나서니 이 출동이 8월 24일부터 9월 2일까지 진행된 제4차 출동이었다. 이 기간 동안 조선수군은 장림포해전에서 6척, 다대포해전에서 24척, 그리고 부산포해전에서 약 100여척을 격침시키고있는데, 이때의 조선수군의 함대세력은 173척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측 전투함은 전라좌수군이 24척, 전라우수군 25척 그리고 경상우수군이 6척 등해서 대략 55척 전후의 함대세력이었는데 제4차 출동에서는 거의 3배로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필자가 생각컨데는 갑자기 전투함이 증가될 수는 없는 일이고 너무 장거리의 출동이라 보급품 등의 수송을 위하여 비전투함인 소형 협선이나 고기잡이 배인 포작선까지 모두 동원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제4차 출동의 전라좌수영함데 편제는 다음과 같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
구선돌격장 군관 이언량
(이상 확인)

증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후부장 흥양현감 배홍립
좌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우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별도장 전만호 송응민
유군장 발포만호 황정록
한후장 전봉사 김대복
참퇴장 전첨사 이응화
구선돌격장 급제 이기남
(이상 추정)

이번 부산포 해전은 얼마나 치열하였던지 이 전투중에 녹도만호 정운장군이 전사하여 4차례 출동에서 처음으로 고급지휘관이 전사하고 있다.

[제4차 출동도]

(1) 장림포 해전 (8월 29일)

8월 24일 오후 4시경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우수영함대 l66척은 당포에서 경상우수군과 합류한 다음, 8월 29일 낙동강 하류에 도착하였다 낙동강 어구를 수색하던 중 양산강쪽 장림포에서 왜선 6척을 만나 이를 가볍게 불태워버리고 계속 근방을 수색했으나 더 이상 적을 발견할 수 없어 가덕도 북쪽으로 회향하여 밤을 지냈다.

(2) 다대포 해전 (9월 1일)

3도수군은 9월 l일 첫닭이 울때 가덕도를 출발하여 아침 8시경에 화준구미에서 적선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그리고 절영도에서 2척등 모두 24척을 남김없이 격파하고 계속 절영도 안팎을 샅샅히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로 곧장 부산 앞바다로 향하였다.

(3) 부산 해전 (9월 1일)

먼저 척후선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대개 500여척의 적선이 선창과 해안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다 이순신수사는 곧 이억기, 원균수사와 약속하기를 <우리 함대가 이미 노출되어 있는데 만일 위세를 가지고 지금 공격하지 않고 다른 해전때처럼 유인전술이라도 쓴다면 적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고 독전기를 높이 휘두르고 북을 두드려 장사진을 짜고 정공법으로 진군하였다. 우리 수군의 위세에 눌린 500여척의 왜적들은 감히 나와 싸우지도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총, 화살, 편전 그리고 철환을 비오듯 쏘아대는데 왜적들 속에는 포로가 된 조선 병정들도 섞여 있어서 우리 수군들을 가슴 아프게 하였다. 이 부산해전이 얼마나 치열하였든지 충무공은 그의 [부산파왜병장]에서 다음과 같이 장계하고 있다.

그동안 4차례 출전하고 l0억회 접전하여 모두 승첩하였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한 싸움이 없겠습니다. 전일의 전쟁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척 미만이었는데 이번은 큰 적의 소굴속에서 500여척과 종일토록 접전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트리고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하였으니 비록 목을 벤 것은 적으오나, 힘껏 싸운 장졸의 공로는 먼저번 어느 싸움보다 훨씬 더하였습니다.

어떻든 이번 부산해전에서 왜적들을 완전 소탕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의 본거지를 위협하여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염려케하였으니 왜적들이 이제는 연해안 약탈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위대한 승리의 종합결과

지금까지 서술한 4차례 출동, 12번의 해전상황을 종합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이 표와 다음에 나오는 피해대비표, 그리고 전 사상자명단은 모두가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의 장계에 의하여 작성한 것이므로 자연히 전라좌수군의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전라우수군이나 경상우수군의 전과는 그들의 수사였던 이억기나 원균의 장계에 나타나 있겠지만 이 두 사람의 장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단지 이 양도 수군의 전과가 전라좌수군의 전과에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고는 짐작이 간다. 그리고 전상자의 명단은 너무 번잡하므로 일일이 적지 않고 인원만 표시하였으나 전사자의 이름을 여기 밝혀 둔것은 이들에 대한 전몰위령탑이라도 꼭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라좌수군의 승리가 물론 불출세의 영웅 충무공의 탁월한 지휘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충무공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여수 지방의 수졸들 특히 여기 기록한 전사자들의 전공에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구나 전사자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이름없는 하급수병이거나 노비들이니 이들의 넋을 달래줄 곳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전라좌수영함대전과일각(임진해전분) (단위:척)

출동별   해전별     조선 함대     일본 함대 전과    비고
         전라좌도 전라우도 경상우도     격파척수
제1차    옥포                50    26  
5월 4일에서 합포  85    -     6    5    5     거북선
5월 9일까지 고성포                13    11     없음
       소계                    

9
연68
42
제 2 차
자 5월 4일
도 5월 9일
사 천
23

23
-


25
3
13
13
거북선
출 동
당 포
21
21
당항포
26
26
옥 포
7
7
소 계
51
연67
77
제 3 차
자 7월 4일
도 7월13일
한산도
24
25
7
73
59
거북선
출 동
안골포
42
30
소계
56
연115
189
제 4 차
자 8월24일
도 9월 2일
장림포


166
7
6
6
거북선
출 동
다대포
24
24
부산포
약500
약100
소 계
173
약530
약130
총 계
연371
약780
약337



※전라좌수군만의 전과임. (충무공 장계에 의거)
임진해전양국(조선·일본)피해대비표

국별

출동별
일본측 피해
조선측 피해
비고
전선
인명
전선
전사자
전상자
제1차
42
다수
없음
없음
1

제2차
67
다 수
없음
13
36

제 3 차
89
다 수
없음
19
114

제 4 차
약130척
다 수
없음
6
25

합계
약328척
다수
없음
38명
176명

※ 본 표중 조선측이라 함은 전라좌수영만을 중심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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