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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8 (월) 22:22
분 류 사전1
ㆍ조회: 1323      
[성씨] 광산김씨의 역사 (정유대동보)
광산김씨 대사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東國萬性潽)] 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潽)]에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계(先系)는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王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 김흥광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國難)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 서일동(光州 西一洞:현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선조(先祖)의 세거지인 광산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걸처 평장사(平章事:정2품의 벼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손에서는 시조 흥광의 아들 식(軾)이 신라에서 각간(角干:최고관급)을 지냈고, 3세 손자 길(佶)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 되었다.

4세 준(峻)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左僕야:정2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준의 아들 책(策)은 964년(광종 15)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제도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책의 아들 6세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정6품이나 종5품 또는 감찰사의 정6품 벼슬)를 거쳐 1043년(정종 9)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관직), 동년 11월에는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올랐다.

7세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 좌간의대부에 이어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를 지내고, 1074년(문종 28) 태복경(太僕卿)으로 사은사(謝恩使:나라에 베푼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외국에 보내던 사신)가되어 송(宋) 나라에 다녀왔다.

1082년(문종 36) 좌복야에 올라 중서시랑 및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1087년(선종 4) 판상서 호부사(判上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8세 약온(若溫)도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문과에 급제한후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역임하였다.

8세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일찌기 문과에 올라 23세에 조호부 도감판관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연천(連川)에서 여진족을 물리쳐 공을 세워 1122년에(예종 17)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이어 호부상서, 지추밀원사, 문하평장사에 이르러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하였고 그의 아들 광중(光中)은 간의대부(諫議大夫:고려 문하부의 관직)와 비서감(종3품 관직)을 역임하였다.

주정은(主情)은 몽고군(蒙古軍)의 침입을 받아 권지병마녹사(權知兵馬錄事)에 오르고 1264년(원종 5)에 문과에 장원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 1278년(충렬왕 4)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대린(大鱗)의 아들 연(璉)은 충렬왕(忠烈王)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로 동정(東征:일본정벌)하려 할때 출정을 앞둔 어느날 밤 차고 있던 금어(金魚)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의 징후다”하고 출정장군을 사퇴한 명신으로 그후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수(須)는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御史)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1271년(원종 12) 진도(珍島)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고려 최씨 집권 시대에 특수하게 조직된 군대)가 제주(濟州)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단(權但)의 명으로 200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태현(台鉉)은 1302년(충렬왕 28)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 황후 생일날에 축하하러 가던사신)로 원나라에 갔을때 원나라 황제가 모든 진공사는 연경(燕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원나라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대궐을 멀리 떠나 거동할 때에 임시 머무는 곳)에 가는것은 우리 군주(君主)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중서성(中書省)의 허락으로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는 그 충성을 크게 치하하였다.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아들 광재(光載)는 충선왕(忠宣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황(忠惠王)이 원나라에 갈때 호종한 공(功)으로 사복시승(司僕侍承)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올랐다가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역임하고 충정왕(忠定王)때 참의평리(參義平理), 전리판서(典理判書)등을 지냈다.

공민왕(恭愍王)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을 짓고 거상하자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정표를 세우게 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白家)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들로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하고 의례(義禮)에도 정통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황주(黃州)에 은거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킨 약시(若時)는 두문동 칠십 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조선 순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국광(國光)은 감찰(監察)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어 감찰, 지평 등을 역임하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별조판서로서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세조(世祖)가 죽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고 우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1등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다.

그의 동생 겸광(鎌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세조(世祖)때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軍器監正)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이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예몽(禮蒙)은 1432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와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등제하고 이조 및 공조판서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대대로 석학(碩學)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가(大家) 장생(長生)은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1548년(명종 3)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朝鮮禮學)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1688년(숙종 14)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과 연산(連山)의 돈암서원등 10개의 서원에 제향(祭享) 되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集)은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에 이르러 광해군(光海君)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되어 지평(持平), 집의(執義)를 거쳐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올랐으나 공서(功西: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左郞)등 여러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때 대사성(大司成:정3품)을 지내고 효종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南韓山城)이 포위되어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74년(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設: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兩性)에 유배되었다.

조선의 이름난 소설가 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유복자로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충청 남북도,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1679년(숙종 5) 예조참의를 지내고 1685년(숙종 11)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후 주위의 탄핵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 하기위해 전문을 한글로 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가 내려졌다.

조선 초기 한호(韓濩), 양사언(楊士彦),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4대 서가(書架)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을 역임한 계문(季文)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 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불렀다. 어느날 옥당에서 숙직을 하며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뜻밖에 중종(中宗) 임금이 별감에게 술병을 들려 문앞에 서있자 놀라 엎드리니 중종이 말하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찾아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禮)가 필요 있으리오, 친구로서 서로 대함이 마땅하도다”하고 술을 함께 즐겼다고 한다.

그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덕령(德齡)은 봉섭의 아들이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성혼(成渾)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號)를 받아 1594년(선조 27)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았으며 고성(固城)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다가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여 1661년(현종 2) 관직이 복구되고 뒤에 병조참의에 추증 되었으며 178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 되었다.

고종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를 역임한 영덕(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 등은 가문의 기백을 굳건히 지킨 인물들이다.

특히 영덕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통탄하여 자결했으며, 일본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왜적의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지조를 지키다가 자결한 지수(志洙)등 수많은 인물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광산 김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출전 : 광산김씨 보리와 도희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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