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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8 (월)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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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64      
[성씨] 안동김씨 (전통족보문화사)
안동(安東)김씨2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국(古陀耶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가 견훤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榮可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안동 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고창군(古昌郡) 성주로서 서기 930년(고려  태조 13) 권행(權幸)·장길(張吉) 등과 함께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태사 아부의 벼슬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문호를 개방한 안동 김씨는 부정 습돈(習敦)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원손(遠孫) 계행(係行)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계행의 증손 영(瑛)은 중종 때 무오사화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케 했으며, 그의 아우 번은 공조 정랑을 거쳐 평양서윤으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광해군 때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던 극효(克孝)는 번의 손자로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고,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일찍이 석학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용은 인조 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임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이르기를 "네가 만일 살거던 이 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 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 수전(壽全)의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하며 가지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상용의 아우 상헌은 백부인 대효(大孝)에게 출계하였으며 선조조에서 정시문과와 광해군 때 문과중시에 각각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느날 조회 때 장약관(掌藥官) 박시량(朴時亮)이 나라에서 금한 대분투(大分套 :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겉에 신는 덧신)를 신었으며 부자(富者)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집을 짓는데 부연(附椽 : 장연 끝에 덧 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을 하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상헌이 옥에 가두자 시량의 처자가 영의정(領議政) 오윤겸(吳允謙)에게 가서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였더니 윤겸이 말하기를 "비록 내 아들이 법을 범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하며 마음으로 매우 불쌍하게 여겼지마는 끝내 구해주지 못했으며, 한 왕족(王族)의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짓는데 나라에서 금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가 상헌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하였다고 한다.

상용(尙容)의 아들 광현(光炫)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과거를 단념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연원도 찰방(連源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아버지 상용(尙容)의 유지를 받들어 청(淸)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한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尙憲)의 손자(孫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효종(孝宗) 때 생원(生員)으로 형조(刑曹)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낸 수증(壽增)은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아우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춘천(春川)의 곡운산(谷雲山)에 은거(隱居)했으며,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한 수흥(壽興)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1660년(현종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壽恒)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 창집(昌緝 : 직장을 역임)·창립(昌立 : 사부를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六昌)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昌集)의 아들 제겸(濟謙)이 숙부(叔父) 창흡(昌翕)에게 수학하고 숙종말(肅宗末)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손자 이소(履素)가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昌集)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 : 순원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져서 철종(哲宗)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文章)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명순(明淳 : 창집의 현손)의 아들 중 홍근(弘根)은 헌종(憲宗) 때 공조(工曹)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순조(純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흥근(興根)은 홍근(弘根)의 아우로 헌종(憲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철종(哲宗) 때는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는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인 조근(祖根)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철종(哲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左贊成)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철종(哲宗)의 비(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아버지 문근(汶根 : 인순의 아들로 이순에게 출계)은 돈령부사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몸이 비대하여 <포물대원군(包物大院君)>으로 별칭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창협(昌協)의 인맥으로는 그의 손자 원행(元行)이 왕세손(王世孫)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英祖)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疏)를 올려 사임하고 누차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한 후 학문에 전력했다.

특히 그는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의 2대 주류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이간(李柬)의 낙론을 지지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학설(學說)을 주장했다. 그의 아들 이안(履安)도 아버지의 학문(學問)을 이어받아 학행(學行)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었고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로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앞장섰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인순(麟淳)의 아들 수근(洙根)은 헌종(憲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고 병조(兵曹)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으며, 수근(洙根)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高宗) 때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했다.

병국(炳國)은 철종(哲宗) 때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고종(高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이 뛰어나서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여한 10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창업(昌業)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신겸(信謙)과 윤겸(允謙)형제가 문장과 그림으로 유명했고, 양행(亮行 : 신겸의 아들)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천 부사(宣川府使) 익순(益淳)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諧謔)과 재치가 넘친 싯귀(詩句)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에 와서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명규(明圭),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종한(宗漢), 시종원경(侍從院卿) 병익(炳翊)과  독립투사로 3·1운동에 참가했던 가진(嘉鎭)이 뛰어났다.

개화혁명(開化革命)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음독자결한 석진(奭鎭), 유림의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파리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던 복한(福漢), 민종식(敏宗植)의 의병(義兵)에 가담했던 덕진(德鎭),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흑룡강(黑龍江)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만주에서 재만 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전통을 살렸다.

출전 : 전통족보문화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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