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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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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990      
[조선] 정조 행장 5 (실록)
정조 대왕 행장 5

행장 1
행장 2
행장 3
행장 4
행장 5

왕은 하늘에서 타고난 총명과 슬기에다 너그럽고 인자하고 검소한 마음씨를 지녔다. 육경(六經)을 기본으로 하여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이치를 터득하고 삼고(三古)에 뿌리를 둔 예악(禮樂) 성명(聲明)의 치적을 남기었다. 도(道)는 우주(宇宙)를 요리할 만했고, 덕(德)은 당(唐)ㆍ우(虞) 시대를 재현시킬 만했으며, 공(功)은 만세를 위해 태평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만하여 무슨 덕 하나 혹은 행위 하나만을 들어 명명(命名)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경천 위지(經天緯地)한 것을 일러 문(文), 예악(禮樂)이 다 잘 갖추어진 것을 일러 성(成), 대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확실한 공로를 세운 것을 일러 무(武), 끊임없이 덕을 닦고 업을 개척하는 것을 일러 열(烈), 사물의 이치를 다 알고 천성대로 하는 것을 일러 성(聖),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을 일러 인(仁), 올바른 길을 걷고 화평을 지향하는 것을 일러 장(莊), 선왕의 뜻을 이어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일러 효(孝), 나의 정직으로 상대를 심복시키는 것을 일러 정(正)이라고 하였다.

왕은 15년간을 춘궁(春宮)에 있으면서 문침(問寢) 시선(視膳)의 일이 아니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적(經籍) 연구에 몰두하여 분전구색(墳典邱索)7586) 수사낙민(洙泗洛閩)7587) 기타 구류(九流) 백가(百家)의 전적에서부터 우리 나라 선유(先儒)들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융회 관통하였고 또 성리(性理)의 원리와 학문하는 방법 그리고 옛 성인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과 과거 현자들이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오한 이치도 역시 다 연구하고 찾아냈던 것이다. 급기야 왕위에 올라서는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제때에 대지 못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좌우에다 책을 두고서 밤을 낮삼아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 자신 수양의 방법에 있었서는 이르기를, "극기(克己)는, 자기 성격이 그쪽으로 치우쳐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부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너무 조급한 것이 병인데 '자신을 많이 책하고 남은 적게 책하라.'는 공자의 교훈을 읽고서 자기 기질을 변화시켰던 여백공(呂伯恭)에 대해 내 늘 그를 흠모하면서도 그대로 못하고 있다." 했고, 또 이르기를, "내가 무슨 학문으로 이룬 공부가 있겠는가. 다만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 참고하는 데서 다소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선비라면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래서 '홍의(弘毅)' 이 두 글자에 대해 많은 음미를 해왔었다." 하였다.

학문하는 법을 논하면서도 이르기를, "직내 방외(直內方外), 그 공정을 터득해야 천덕(天德)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직내란 바로 경(敬)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뜻을 견지하는 것이고, 방외란 바로 의(義)를 말하는 것으로 가령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같은 것이다. 사람이 성인이 되게 가르치고 현인이 되게 가르치는 성인의 말씀 천 마디 만 마디가 궁극적으로는 그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모름지기 평상시에 마음을 잘 지키고 천성을 함양하여 그 마음이 언제나 내 속에 존재하고 의리가 항상 내 속에서 밝아야지만 비록 단사 표음(簞食瓢飮)으로 삭막한 고을에 있더라도 천지를 메우고도 남을 호연지기가 그대로 있는 것이고, 또 아무리 거록(鉅鹿) 진터에서 큰 전쟁을 구경하고 동정(洞庭) 넓은 들에서 아홉 마당의 주악을 하더라도 허명 정일(虛明靜一)한 내 마음은 변함없는 그대로 있어야 비로소 큰 군자(君子)가 될 수 있고 큰 사업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했으며, 또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나 강력하게 실천을 못하는 까닭은 다만 그것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문이 물격(物格) 지지(知至) 정도에 이르면 그는 이미 그 지위가 8, 9분(分)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의(誠意) 이하의 공부는 다만 그 본령(本領)을 그대로 가지고서 적재 적소로 거기에 맞게 늘 써나가는 것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문장(文章)에 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문장이라는게 도(道)가 있고 술(術)이 있는데 그 도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술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장이라면 당연히 육경(六經)을 주축으로 삼고 자사(子史)를 보조역으로 하여 최고의 목표를 주자서(朱子書)에다 두어야지만 그 내용이 순정(醇正)하여 도와 술에도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 전설 따위나 주워모은 자질구레한 작품들은 그것이 사람 심술을 제일 못쓰게 만드는 것들이므로 경술(經術)ㆍ문장에 뜻을 둔 선비라면 비록 상을 주더라도 그런 것들은 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는 작가(作家)가 되려고도 해보았고 또 경학(經學)에도 종사해보았고 그리고 또 단정하게 공수하고 무릎 꿇는 것과 법도 있게 걷는 그 방면에도 공부를 해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제왕(帝王)의 학문은 보통 선비와는 또 달라 그보다 더 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심성(心性)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두고 세밀 또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문장짓고 쓰는 그러한 일에다 내 심력을 허비할 것이야 뭐가 있겠는가. 가령 은하수처럼 떠오른 그 상태를 가지고 말하자면 크고 둥근 옥돌 같은 것이 제왕의 문장 격식이요, 꾸밈없는 소박한 거문고가 태고의 가락인 것이며, 성문(聖門)의 말세는 좋은 구름 화창한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명불측의 변화를 일으켰을 때는 아무리 예원(藝苑)의 문장가라도 그것으로는 얘기 거리가 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다 찾아 나열해 놓으면 아무리 전문지식이 있는 큰 선비라도 그렇게까지 해박할 수가 없을 만큼 끝도 없으면서도 모두가 절주에 맞아 《서경》의 전모(典謨), 《시경》의 아송(雅頌)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하였다.

왕이 책으로 꾸며놓은 《존주휘편(尊周彙編)》은 의리를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고, 《대학유의(大學類義)》는 옛것을 가져다 오늘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륜행실(五倫行實)》ㆍ《향례합편(鄕禮合編)》은 민속을 올바르게 계도하기 위함이었고, 《팔가선(八家選)》ㆍ《두륙집(杜陸什)》은 문장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며, 자양자(紫陽子)의 여러 책들은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열기 위해 만든 책들이었다. 그리고 만년에 와서는 촌음을 아끼는 공정으로 복희(伏羲) 선천(先天)의 역(易)에 정력을 집중하였는데 그 책은 아직 여기 있건만 서언(緖言)을 들을 수는 없어 주(周) 문왕(文王)이 후세를 걱정했던 뜻인 공자가 십익(十翼)으로 발휘했던 내용들이 말학도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뭇 어리석은 자들을 계발하게도 못하고 말았으니 아, 이 도(道)가 막힐 징조가 아닌가.

그리고 왕이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통한, 아름다운 종묘(宗廟)와도 같고 수많은 백관(百官)과도 같은 저술을 신들이 명을 받아 편집 교열한 것으로는 삼집(三集)으로 된 《홍재전서(弘齋全書)》 1백 권이 있다. 그 책 머리에다 어서로 기록하기를, "내가 세 살 때부터 수업하기 시작하여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에 대해 약간 들은 바 있으므로 애당초 나 자신이 수사(修辭)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기무(機務)를 살피고 모든 일들을 경륜하는 동안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고 찬란한 공업들을 근사하게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 내 어찌 문장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학문은 추노(鄒魯)를 우두머리로 여기고, 치교(治敎)는 삼대(三代)의 것을 제일로 여겼으며, 덕(德)에 나아가는 계제로는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格致誠正]이었고, 풍속을 선도하는 법으로는 예의 염치(禮義廉恥)였으며, 문장은 의사만 전달되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政敎)에 반영한 것으로는 규장각을 건립하여 집현(集賢)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최고의 우문(右文) 정책을 지향했고, 호당(湖堂) 제도를 모방하여 영선과[英選]를 설치함으로써 인재 양성의 지남(指南)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교 삼물(五敎三物)7588) 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상서(庠序)를 세우고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술(邪術)을 물리쳤으며 경전을 존숭하고 패설류는 물리쳤다. 많은 선비들을 오게 하여 가빈(嘉賓)으로 대우하고 서로 연마하도록 격려하고 권장하여 한 조정에 모여 함께 가도록 길을 열어주었기에 당시 선비들은, 비록 작고 볼품없는 재주까지 위아래로 다 살피시는 왕의 덕화에 의해 고무되고 진작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1천 5백 년이나 뒤에 요(堯)ㆍ순(舜) 문(文)ㆍ무(武)의 전통을 이어 이 땅에 사도(師道)가 엄연히 위에 있었던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힘쓸 것을 생각하라." 했고, 전(傳)에는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떠나고 없으니 이제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했듯이, 왕이 그래서 문(文)이 된 것이다.

왕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자품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백관들을 올바르게 감독 관리하고 명분과 실상을 종합 검토하여 일처리를 했다. 질(質)을 중시했던 은(殷)과 문(文)을 중시했던 주(周) 그리고 강(綱)을 앞세웠던 한(漢)과 목(目)에 치중했던 당(唐)의 제도들을 두루 알맞게 적용했었다. 그리하여 교화가 간 곳마다 이루어지고 정형(政刑)이 바람처럼 백성을 고무 진작시켜 얼마 있으면 온 나라가 한 덩어리가 되고 그로부터 다소의 세월만 더 걸리면 대성공이 있을 뻔했었다. 남단(南壇)의 제향 의식을 바로잡고, 기곡제[祈穀]를 대사(大祀)로 승격시켜 원구(圓邱) 방택(方澤)의 의의를 갖추었다. 늦은 봄이면 예복에 면류관 차림으로 황단을 배알했으며 경각(敬閣)을 세워 중국 조정에 대한 생각을 표시하고, 한려(漢旅) 제도를 두어 중국 유민의 후예들을 위로했다. 제사 빈객의 예를 친히 보살펴 옛부터 내려온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며, 환묘(桓廟) 올려 모시는 의식을 8회 서갑(瑞甲)의 해에 거행하고는 의폐(衣幣)와 책축(冊祝)을 해마다 꼭 직접 주었고 변두(籩豆) 올리는 일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경건히 거행하게 하여 원묘(原廟)에 대한 예가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 황조(皇祖)를 세실(世室)에 올려 모심으로써 50년에 걸친 그의 치적을 천양하고 백세불천의 덕이 있음을 보였으며, 궁원(宮園)에서 행할 의식을 피눈물을 흘리며 제정했는데 모든 절차가 법도에 알맞고 인정으로 보나 예제로 보나 유감될 것이 없었다.

대현(大賢)을 성무(聖廡)에 모시게 하여 유술(儒術)이 흥성했고 화궁(華宮)에서 뭇 늙은이들을 대우하는 등 은총을 널리 베풀었다. 연사(燕射)의 예를 거행하여 군자(君子)다운 다툼을 구경하고 향음주례[鄕飮]를 익히게 하여 왕도(王道)가 어렵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길ㆍ흉ㆍ군ㆍ빈(吉凶軍賓)의 대례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의문(儀文)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경례와 곡례를 참작하지 않음이 없었고 고금을 통틀어 고증하여 인정에도 어긋남이 없고 천리에도 맞게 모든 예제가 찬란하게 갖추어졌으니 이는 예가 이루어진 것이다.

담월(禫月)에도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던 것은 헌자(獻子)의 남은 슬픔 그것이었고, 술잔 올리고 풍악 울림은 노래자(老萊子)의 봉양 잘하는 그것이었다. 아송(雅誦)을 편찬하여 시(詩) 교육을 널리 보급하고 《악통(樂通)》을 저술하여 음률의 원류를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악관(樂官)을 명하여 격조없는 가락을 지양하고 화평의 음을 되찾도록 했는데 그게 바로 일창삼탄(一唱三歎)의 유음(遺音)이라는 것이었다. 어찌 그뿐이랴. 금슬(琴瑟)과 생용(笙鏞)을 울려 빛나는 조종들을 오시게 하고, 종고(鍾鼓)와 관약(管籥)을 우리 백성들과 함께 즐겨 화기가 감돌고 소리도 아름다웠기에 하늘도 땅도 함께 호응하여 반수(泮水) 뜰에서는 해묵은 옥경[磬]이 나타났던 것이니 이는 모든 것이 찬란했던 영릉(英陵) 시절을 이 몸이 직접 보았던 것으로 그만하면 악(樂)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한부(信漢符)를 만들어 궁성 안이 엄숙해졌으며, 노부사(鹵簿使)를 두어 의장 시위가 정연해졌다. 태상(太常) 제도를 바로 고쳐 범절이 명확하였고, 대정(大庭)에는 표(標)를 두어 조정이 보기에 숙연했다. 관부(官府) 군현(郡縣)에 기록없는 곳이 없고, 양형(量衡)ㆍ율도(律度)가 다 일정한 기준이 있었으며 정책 수립과 인재 등용, 국가 경제와 민생 문제 등 모든 분야에 다 정해진 법과 기율이 있어 하나의 대전(大典)이 성헌(成憲)으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한 왕조의 체제가 질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니 그만하면 법도(法度)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공(百工)들은 서로가 서로를 스승으로 삼고 모든 일들은 다 잘 되어갔다. 강기(綱紀)가 정연하여 조정 정사가 잘되었고, 예양(禮讓)이 흥행하여 민속이 순화했고, 기상이 맑고 깨끗하고 규모가 크고 원대하여 치도(治道)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도(道)를 이탈없이 지키고 있기에 천하가 동화되어 만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왕도 그래서 공을 이루었던 것이다.

왕은 타고난 용지(勇智)에다 세상을 덮을 만큼 신무(神武)하여 비록 백 년 승평(昇平)을 유지하고 북소리 한 번 내지 않았었지만 일단 조정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서는 이 땅덩어리 전체를 한번 뒤흔들고 싶은 개연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병신ㆍ정유년 이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겼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신기(神機)를 써서 뭇 흉물들을 소탕하고 국가 운명을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으며 팔과 겨드랑 밑에서 권간(權奸)들이 재주를 뿌리기도 했으나 담소하면서 그들을 물리쳐 하루가 다 안 가서 조정이 깨끗해졌다. 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손에는 법의 칼을 들고서 사안에 따라 각기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데 사람들은 감히 그 깊이를 엿볼 길이 없어 마치 비와 이슬이 내리다가도 바람이 일고 벼락이 떨어지고 하면서도 하늘 자체는 아무 동요없이 하늘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았었다.

조정 진신 중 혹 한 사람이라도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비록 평소 존경하고 총애하고 예우했던 자라도 그것 때문에 법대로 처리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고 대의(大義)가 걸려있는 선악을 가리는 데는 더욱 엄하였다. 그리하여 궁(宮)과 부(府)가 일체가 되고 속과 겉이 다를 것이 없었으며 궁액(宮掖) 무리들도 감히 함부로 궁중 출입을 못해 안으로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밖으로 먼 지방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마치 몸이 팔을 뿌리고 팔이 손가락을 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어느 사람이거나 마치 밝은 촛불이 눈앞을 훤히 비추고 있는 듯하여 국가 대계를 정하는 데 있어 발언하는 자들이 뜰을 메웠는데 왕은 그 중지를 다 받아들인 다음 한 마디로 독자적인 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이 막힘없이 잘되었으며 무슨 일이든지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행할 정도로 뭇 신하들이 다 승복하고 오직 자기들 직무 수행에 분주했다.

국조의 군영(軍營) 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병폐로 여겨 내외의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다시 옛날과 같은 위부(衛府)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든 무신은 모두 그 길을 통해 진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성질이 사납고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라도 모두 멍에와 채찍을 가해 통솔 범위 안에 있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대로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천 금려(宣薦禁旅)를 두어 무인들 발신의 길을 열어놓았고, 서북인들에게 무예를 장려하여 뛰어난 재목을 구하려고 했다. 전영(前營)을 없애 쓸모없는 병졸을 도태시키고, 양진(兩鎭)을 두어 묵어있는 국토를 넓혔으며, 남쪽 교외에서 대 사열을 하면서 노군(勞軍)의 예를 제정하고, 화성 초루에서 밤 조련을 시켜 성가퀴를 오르는 용감성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그전에 마음먹었던 일을 뒤쫓아 실현해보려고 《무예도(武藝圖)》를 증보하기도 했고 《병학통(兵學通)》을 편찬해서 척계광의 병법을 통달하려고도 했다. 황제(黃帝)ㆍ위료자(尉繚子)의 저술이나 팔진(八陣)ㆍ육화(六花)7589)의 진법도 성명의 눈앞에서는 파죽지세여서 비록 전쟁 속에서 늙은 숙장(宿將)이라도 왕이 가끔 고문을 구하면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또 활쏘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였다. 그러나 50발을 쏠 경우에 항상 그 하나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내원(內苑)에 나아가 조련하고 진법을 익히게 하면서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구경하고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꿩고기 굽고 탁주를 두루 하사하여 장사들을 먹이면서 소무(昭武)의 악(樂)으로 여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영릉(寧陵)의 철장(鐵杖) 목마(木馬)와도 같은 뜻이었다. 《역(易)》에 이르기를, "사(師)는 대중이란 뜻이요, 정(貞)은 바르다는 뜻이니 대중을 바르게 지도한다면 왕(王)이 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왕은 그래서 무(武)가 된 것이다.

왕은 왕도(王道)를 존중하고 패도(覇道)는 취하지 않는 것을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고, 현자를 신임하고 척리를 멀리하는 것을 인재 등용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을 교육 지표로 삼고, 허례를 버리고 내실을 힘쓰는 것을 백성 교화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순화시키는 것을 세상을 이끌어가는 권형(權衡)으로 삼았던 것이다. 넓은 도량은 태조(太祖)를 닮았고, 높고 빛난 문장은 세종(世宗)을 본받았으며, 영무(英武)하기는 광묘(光廟)와 같았고, 지행(至行)은 효릉(孝陵)을 닮았었다. 화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일은 선조(宣祖)를 뒤따랐고, 자나깨나 국력 배양에 힘쓰고 대의(大義)를 만천하에 밝힌 것은 효묘(孝廟)와 짝할 만했으며, 현사(賢邪)를 가려 진퇴시키고 매사에 용단이 있었던 것은 숙조(肅祖)의 정치 솜씨였고, 만민이 지향할 표준을 세우고 우리 세신(世臣)들을 보호한 일은 영고(英考)의 마음씀 그것이었다.

봉모당(奉謨堂)을 건립하여 열성조의 신장(宸章) 보한(寶翰)을 모셔두고 19조(朝)의 《보감(寶鑑)》을 편찬하여 태실(太室)에다 두었다. 그리고 다시 《갱장록(羹墻錄)》을 꾸며 선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동시에 선세의 뜻을 뒤따라 실현했으며, 그밖에 적도(赤島)의 비(碑), 귀주(歸州)의 명(銘), 곡주(谷州)의 기(紀), 율원(栗園)의 편(扁), 검암(黔巖)의 갈(碣) 등등 무릇 성적(聖蹟)이 지나간 곳이나 왕실의 뿌리가 되는 고장이면 이렇듯 다 세상이 알게 표장(表章)하였다. 심지어 옛 동판을 모방해 활자를 주조하여 책들이 계속 전해지게 하였고, 남다른 총애의 표시로 술잔을 하사했던 일을 계승함으로써 출중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해마다 두 번 반시(泮試)를 시행하여 중엽(中葉)에 있었던 좋은 제도를 재현하고, 한 달이면 여섯 차례 빈대(賓對)하여 성조(聖祖)의 선정 구현에 몰두했던 일을 본받았다. 관예(觀刈)의 예를 거행하여 농삿일을 권하고 가체(加髢)의 습속을 금하여 사치 풍조를 없앴다.

그밖에도 범위를 가일층 확대하여 충절을 포장하고 공덕을 보답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황폐한 사당에 총광(寵光)을 내려 태백(泰伯)ㆍ중옹(仲雍)의 고상한 뜻을 표출하기도 하고, 단을 쌓아 명의 방효유(方孝孺)와 연자령(練子寧)의 높은 절의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풍성(風聲)을 수립하기도 했다. 곽(郭)ㆍ이(李)ㆍ순(巡)ㆍ원(遠)7590) 과 공로가 같은 이들을 나란히 실어 기울어진 국운을 다시 일으킨 공적들을 기록했고, 한(韓)ㆍ악(岳)ㆍ사(謝)ㆍ정(鄭)7591) 과 지조가 같은 이들을 똑같이 포상하여 나라 빼앗긴 억울한 마음으로 아픔을 참고 견딘 그들 뜻을 추모하기도 했다. 신축ㆍ임인년간에 순국(殉國)했던 자, 기사년의 항의(抗義)했던 자, 무신년의 종정(從征)했던 자, 임오년의 진절(盡節)했던 자들에 대하여도 혹은 즉석에서 감회를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그날 그때를 추상도 해보면서 숨어있는 사실 하나하나를 다 찾아 내어 그에 맞는 은유(恩侑)와 총록(寵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국초 이래 유문(儒門)의 여러 현자들에 대해서도 그가 남긴 저술을 읽고는 마치 아침에 만나고 저녁에 만날 듯이 그를 사모하여 예에 맞게 조두(祖豆)와 분필(芬苾)을 마련하였다. 그야말로 왕은 조종(祖宗)의 자리를 지키고 조종이 하던 정사를 그대로 하면서 가까운 신하를 대하면 곧 조종의 교목(喬木)이라고 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면서는 조종의 적자(赤子)라고 했으며,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 계획 하나 명령 하나까지도 그 모두를 조종의 것을 이어받아 그대로 실현하였다. 이렇듯 꼭 옛법만을 따랐기에 허물도 없었고 잊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제도 하나라도 고치려면 아주 조심조심 신중을 기하여 만년 억년을 두고 조종 유업을 후세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서경》에 이르기를 "대단하다 문왕(文王)이 남긴 교훈이여, 그를 잘 계승하였다 무왕(武王)의 열(烈)이여." 하였듯이 왕도 그래서 열(烈)이 된 것이다.

왕은 생지(生知)의 슬기와 재주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크나큰 육합(六合)에서부터 머나먼 천세(千歲)와 삼교(三敎)의 같고 다른 점, 백대(百代)의 치세와 난세, 심지어 건문(乾文)ㆍ지지(地志)ㆍ갑병(甲兵)ㆍ전곡(錢穀)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이치는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말은 역시 《시(詩)》ㆍ《서(書)》ㆍ《예(禮)》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음양(陰陽) 운행의 묘리라든지 이기(二氣) 굴신의 오묘함 같은 것은 신들로서는 들어보지 못했었다.

왕은 남에게 총명(聰明)을 자랑한 적이 없었지만 매양 자리에 임하면 계독(啓牘)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밖의 묘모(廟謨)ㆍ대장(臺章)ㆍ융정(戎政)ㆍ시사(試事)ㆍ형옥(刑獄)ㆍ재부(財賦)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좌우에서 쉴새없이 주달해도 그를 대응하는 데 있어 늘 여유가 있었다. 왕은 말하기를, "옛분들이 오관(五官)을 일시에 함께 썼던 것은 꼭 재주만 남달라서가 아니라 다만 분수(分數)에 밝았던 것이다." 했는데,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왕에게는 다 득(得)이 되었던 것이다.

남의 좋은 점을 취하기를 마치 강하(江河)가 터지듯이 했다는 대순(大舜)과 같이 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맞으면 아무리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화기에 찬 얼굴로 받아들였고, 뭇 신하들도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그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었으며 말이 혹 성상 뜻에 거슬려도 위노(威怒)를 가한 적이 없었다. 사리에 닿는 말이면 그를 따르기를 구슬을 굴리듯 했으며 대각(臺閣)을 중히 여겨 언젠가 언자(言者)가 승여(乘輿)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정신(廷臣)이 그에게 죄 내릴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까마귀나 솔개의 새알을 깨뜨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 직무에 대해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줄 일이 아니다." 하였다. 구언(求言)의 하교를 자주 내리면서 언젠가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는 성왕 만년(晩年)까지도 바른 말 격한 논쟁을 하는 자들이 많았었는데 근일에는 할 말을 과감하게 하는 자가 없으니 내가 간언을 하게 만드는 성의가 없어서인가?"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선(善)이 다 왕의 것이었던 것이다.

현자를 목마르듯 찾아 경술(經術)로 발신한 자도 있고, 문학(文學)으로 한 자도 있고, 재유(才猷)로 두각을 내민 자도 있고, 세록(世祿)이나 훈구(勳舊)로 나온 자도 있었는데 혹은 그의 재능을 성숙시키기 위해 두고 기르기도 했고, 혹은 높이 선발하여 초천(招遷)하기도 했으며, 혹은 남들이 다 버린 속에서 추려내는가 하면 혹은 쌓인 죄를 탕척하고 쓰기도 하여 맛에 따라 모양에 따라 각기 그의 생김새대로 이동하고 말뚝감은 말뚝으로 쓰고 문설주감은 문설주로 썼다. 하늘이 사(私)가 없고 바다가 물을 가려 받지 않듯이 능력만 있으면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를 적재 적소에 썼던 것이다.

침전(寢殿)에다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 팔황(庭衢八荒)'이라는 네 글자를 침전 벽에다 대서로 써서 걸었으며, 또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하여 그 서(序)를 썼는데, 서에 이르기를, "달은 하나요 물의 흐름은 일만 개나 되는데 물은 이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太極)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이다."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갖가지 재주가 모두 왕의 쓰임이 됐던 것이다. 지학(志學)의 나이 때부터 그 조예가 벌써 상성(上聖)의 경지에 가 있었으나 도(道)를 바라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여 발분 망식을 하고 순서를 따라 가고 또 갔다. 경신년7592) 년에 와서까지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듯이 겸손하기만 하여 자신을, 나이 50에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다는 거원(遽瑗)에다 비유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성인 중에도 더욱 성인이었던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기 천성을 다 찾아 그대로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면 모든 물건에 대하여도 그리할 수 있고, 모든 물건에 대해 그리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왕은 그래서 성(聖)이었던 것이다.

왕은 우애도 대단하여 언젠가 은신군(恩信君) 사당에 가서는 손수 술잔을 올리고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이어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고 친히 비문까지 써 세웠으며, 영묘(英廟)의 여러 귀주(貴主) 및 두 군주(君主)에 대해서도 빈틈없는 사랑의 뜻을 보이며 늘 이르기를, "어버이 마음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하였다. 화완 옹주(和緩翁主)가 하늘에 닿은 죄가 있었지만 법을 어겨가며 너그럽게 용서하고는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몹시 사랑했던 사람이다." 했으며, 찬(禶)이 역적들의 기화(奇貨)가 되어 종묘 사직이 위태위태했었는데 뭇 신하들의 청에 못이겨 비록 사랑을 끊고 법으로 처치하기는 하였어도 오랜 세월을 두고두고 그를 생각하고 또 몹시 슬퍼했었다. 그리고 또 인(䄄)이 나라의 화근이 되어 자전이 누차 윤음을 내렸고 여론도 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처음에는 그를 가까운 섬에다 안치하면서 처자식도 다 함께 있게 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다 대주다가 끝에 가서는 정신(庭臣)들의 강력한 항쟁도 아랑곳 않고 이르기를, "척포 두속(尺布斗粟)의 비난을 한(漢) 문제(文帝)는 면치 못했었는데 오늘의 전은(全恩) 그 한 일이야 어찌 역사에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의 처지를 말하면 동기간이라고는 그 한사람 뿐인데 제신들은 어떻게 차마 정유년에 있었던 일을 나더러 되풀이하라는 것인가?" 하였다.

조정 신료들에 대해서도 그들 사정을 속속들이 다 살펴 아무리 작은 사정이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고 죽고 살고 하는 즈음에 있어서는 더더욱 보살핌이 지극했었다. 언젠가 봄이 되어 꽃구경을 하기로 했다가 하교하기를, "상신(相臣)이 죽어 빈소에 있는데 어떻게 놀이를 할 것인가. 두궤(杜蕢)가 술잔을 올렸던 것7593) 은 그런 뜻에서였던 것이다."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여 마치 부상자 보듯 하였고 방백(方伯)ㆍ수재(守宰)를 면전에 불러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구제의 길을 개유하는가 하면 혹은 각도에 수의 어사(繡衣御史)를 보내 법을 범한 자를 응징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게도 했으며 혹은 조근하러 온 관원을 불러 백성들 질고(疾苦)를 묻기도 했다. 비 한번 내리고 볕 한번 나는 것까지도 신경쓰며 걱정하기를 마치 농부가 자기 농사 걱정하듯 했으며 측우(測雨)하는 그릇 점풍(占風)하는 장대 등을 설치하고 상신(上辛)날이면 사직에 제사지내 풍년의 경사가 있기를 빌고, 정월 초하룻날은 윤음을 내려 농기를 잃지 말도록 미리 권고했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하면 그때마다 마치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듯이 오로지 제휼(濟恤)에만 전념하여 창고를 열어 진구하고, 곡식을 배로 실어다 먹이게도 했으며, 내탕의 것을 덜어내어 돕기도 하고, 곡식 환자를 정지시켜 백성들이 숨을 돌리기도 하였다. 막중한 공헌(貢獻)도 견감해 주고 정당한 왕세(王稅)도 수를 감하는 등 황정(荒政)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벽 위에다 표기해 두고 늘 눈을 돌려 점검했으며 날마다 낭묘(廊廟)의 신들을 접견하고 진구책을 강구했다. 위로와 독려가 어느 도이든 안 간 곳이 없었고 민정을 면밀히 파악하여 만리가 뜰 앞에 훤했으며 사랑이 미치는 곳에 어느 남정 하나 아낙 하나도 굶어 구렁에 굴러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시정(市井)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내무(內貿)의 명칭을 없애고 궁노(宮奴)의 폐단을 단속했으며, 노비(奴婢)인 백성들을 위해서는 추쇄관(推刷官)을 혁파하고 선두안(宣頭案)을 바로잡았으며, 산골 백성들을 위해 엽군(獵軍)을 철폐하고 궁결(宮結)로 내게 하고, 바닷가 백성들을 위해 대선(隊船)을 창설하고 어수(魚鱐)로 정하였다. 전복 진공을 견감하여 제주도 백성들 어깨를 쉬게 하고, 산삼 진공 수를 감해 서도 백성들 힘이 풀리게 했으며, 사랑의 은전을 베풀어 갓난애들까지도 은택이 입혀졌고, 매장 정책을 실시하여 무덤에까지 사랑이 미쳤다. 한 마디로 어느 백성 하나 사랑을 입지 않은 자 없었고 그리하여 윤음이 한 번 내리기만 하면 백성들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왕의 얼굴은 점점 옛날 안색이 아니었으니 그는 우근(憂勤)이 너무 지나친 까닭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병석에서의 마지막 음성까지도 누누이 강조한 것이 농사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니 아,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왕은 형옥(刑獄)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오직 불쌍하고 가엾은 마음으로 단 한 명이라도 잘못된 억울함이 있을까를 염려한 나머지 각도의 녹안(錄案)을 친히 열람하느라 여러 자루 촛불을 다 태웠고, 언제나 몇 십 안건을 심리하거나 혹 판하(判下)할 때면 시신(侍臣)들이 받아쓰기에 해가 다 저물어도 왕은 일찍이 권태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왕은 이르기를, "옥사 처리에 있어서는 어떠한 선입견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살릴 수 있는 자를 살리려고 하지 꼭 죽어야 할 자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옥안(獄案)에 관련이 되어 있는 자의 성명은 잊어버리질 않는데 그것은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의로 하여 그리되는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형(刑)은 정치의 보조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 목숨이 비록 중하다 해도 사건이 윤기(倫紀)나 교화(敎化)와 관련이 있으면 꼭 법에만 구애받을 것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전후 여러 역도들이 저들 스스로 천헌(天憲)을 범했으나 그 우두머리만을 죽이는 데 그치고 추종자들은 다스리지 않았다. 칼과 창 등 시끄러움이 일어나는 것이 언제나 죄없는 자를 죽인 것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왕은 그가 일찍이 근밀(近密)에 있었던 자면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더라도 그를 극률(極律)로 처단하지는 않았고 중세 이후로는 그의 범행이 지극히 중한 자가 아니면 왕부(王府)의 나졸을 내보내지 않았었다. 왕은 이르기를,

"4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실(漢室)의 발판은 풍류 독후(風流篤厚) 금망 소활(禁網疏闊) 이 열덟 글자에 있었던 것이다. 나도 지금 그 자신이 악역(惡逆)을 범했거나 이름이 죄안에 꽉 박혀버린 자가 아니면 모두 소탕(疎蕩)해버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조정에는 대죄에 걸린 사람이 없고 세상에는 애매하게 죄를 당한 집이 없다면 그 어찌 화기(和氣)를 불러 일으키고 국가 운명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비는 바로 그 길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에 두 《명의록(明義錄)》을 만들어 국가의 법과 기강을 정하고 또 흠휼(欽恤)의 법칙을 만들어 제도를 바로잡고 불평의 소지를 없앴다. 죄인을 처자까지 벌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이 배소에 따라가려고 하면 허락했으며, 오래 숨겨졌던 억울함도 모두 왕의 수레 앞에서 호소할 길을 열어주고, 은혜는 저멀리 변방 수졸에게까지 미쳐갔었다. 그뿐 아니라 예경(禮經) 교훈에 따라 나무도 계절에 맞춰 벌채하게 하고, 황충을 바다에 버리게 하여 무릉(武陵)에서 했던 대로 하는 등 작고 꿈틀거리는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살자고 하는 큰 덕화 속에 있었으니 전(傳)에 이른바, 어버이를 사랑하고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고 만물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왕이 그래서 인(仁)이 된 것이다.

왕은 성학(聖學)이 하나에서 열까지가 다만 경(敬)이라는 글자 한 자에 있다고 생각하고 동정(動靜)을 통하여 그것을 기르고 내외(內外) 구별없이 그것을 닦아 정중한 자세로 남면(南面)을 하고서 언제나 전전긍긍 깊은 못가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였다. 하늘을 섬기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상제를 대하고 있는 듯이 무릇 햇볕이 비치는 곳이면 조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조용히 거닐었고 또 북신(北辰)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북을 향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질풍(疾風) 뇌우(雷雨)가 있으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밤을 세워 안절부절 못했으며, 친히 종묘(宗廟)에 제사 모시면서도 예를 갖춘 몸짓으로 문 밖을 나오면서는 조심조심 몸둘 바를 몰라 했고 오르내리며 술잔을 올릴 때는 민첩하기 새가 날듯했기에 제사를 돕는 백관들도 엄숙하고 화목했었다.

언젠가 겨울 제사에 초헌(初獻)을 마친 후 밤이 너무 추웠던 관계로 제신들이 소차(小次)로 드실 것을 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예복 차림으로 끄덕않고 서 있었는데 제사가 끝났을 때는 하늘은 이미 동이 트고 예복 위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리고 혹시 섭행을 명할 때는 꼭 근신(近臣)을 보내 가서 살피게 하고 재전(齋殿)에 납시어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다가 제례가 끝난 다음 비로소 휴식을 취했다. 철마다 모시는 크고 작은 모든 제사에 있어서도 거의 꼭 재거(齋居)하기 때문에 1년이면 재거하는 날이 3분의 2가 되었다.

언젠가 몹시 더운날 빈연(賓筵)에 납시어 하교하기를, "오늘은 더워서 경들로 하여금 일찍 물러가라고 할 생각이 문득 들었었는데 그것이 바로 들뜬 생각이었다." 하고는, 하루 해를 다 보내고 파조(罷朝)하였다. 그리고는 잔치를 열어 가까이 대하면서 예수(禮數)를 줄이고 활짝 웃어보였는데 그 따스하기가 마치 한 가정의 부자(父子) 사이와도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법전(法殿)으로 나갈 때 군신들 모두가 엎드려 머리를 숙였는데 빈연에서 나왔을 때는 땀이 등에 젖어있었다.

왕은 비록 병석에 누워 있을 때라도 속옷바람으로 신료들을 접견한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빈료(賓僚)나 양방(兩坊)의 관을 역임한 자이면 그가 비록 음관(蔭官)이라도 관직 명칭으로 부르고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퇴조(退朝)하여 사석에 있을 때라도 척원(戚畹)들은 감히 조정(朝政)에 간여를 못했으며 궁중 측근 무리들도 공사(公事)가 아니면 감히 함부로 어전에 오지를 못했었다.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할 때가 많고 환관(宦官)ㆍ궁첩(宮妾)들을 접견할 때는 적다고 한 그 말에 대해서만은 내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정사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놓지 않고 게으른 빛 없이 조참(朝參)ㆍ상참(常參)ㆍ윤대(輪對) 어느 것 하나 폐한 적이 없고 신하들의 장차(章箚)와 중외에서 들어온 주독(奏牘)도 체류된 것이 없었다. 하룻동안 전궁(殿宮) 문안이 끝나고 나면 곧 신하들을 접견하고 밤 깊은 줄을 모르는 때가 많았고 궐문이 열리기도 전에 명령이 내려지는 것이 날마다 보통이었다. 왕은 이르기를, "수성(守成)의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을 걱정하고 하여 자기 직분만 다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하였다. 절제와 검소를 몸소 실천하여 여러 번 세탁한 옷도 입었으며 곤복(袞服)이 아니고는 비단을 입지 않았다. 어선(御膳)도 하루 두 끼에 불과했고 음식 역시 서너 가지에 불과했으며 침전(寢殿)은 장식도 안 한데다 낮고 좁아 비가 오면 새는 곳이 있었다. 왕은 이르기를, "도(道)에 뜻을 두고서 궂은 옷 궂은 음식을 부끄러워하면 그런 자와는 얘기할 것도 없다고하지 않았는가. 성인(聖人)이 소박한 옷 입고 낮은 궁실에서 살고 했기에 덕업(德業)이 날로 전진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위의(威儀)는 반드시 갖추어 언제나 거둥 때면 행차가 질서 정연하여 마치 먹줄로 그어놓은 듯했으며 반항(班行)과 의위(儀衛)도 제자리를 벗어남이 없었고 어좌(御座) 곁에는 도서(圖書) 궤안(几案)들이 각기 일정한 자리가 있었다. 왕은 이르기를,

"경재잠(敬齋箴)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며 그 첨시(瞻視)를 존엄히 하라고. 그렇게 외모를 절제하는 것은 속 마음을 수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아무렇게나 지내다가 집에 들어가 부형(父兄)을 섬기고 밖에 나와 군장(君長)을 섬기려고 하면 장차 무엇이 그 밑받침이 될 것인가. 횡거(橫渠)가 그래서 사람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예(禮)부터 가르쳤던 것이다." 하였다.

급기야 나라에 원량(元良)이 있자, 더욱 교육 방법을 솔선수범으로 하기 위하여 순서있게 유도하는 것이 규범이 있고 법칙이 있었으며, 자신의 소리와 자신의 몸이 바로 상대의 표준이 되고 법이 되어 말하지 않아도 자연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신년 책봉을 받고 관례를 올릴 때 예를 갖춘 모습이 의젓하였는데 그것은 평상시 본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정제하고 장중하고 정직하여 상대로 하여금 경의를 일으키게 한다." 했듯이, 왕은 그래서 장(莊)이 된 것이다.

왕이 영종(英宗)을 섬기면서 하늘에서 타고난 지극한 성품으로 10년 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도 오직 조심조심으로 일관했었는데 효손(孝孫)이라는 칭호를 내린 일이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병신년 국상을 당한 후로 휘일(諱日)만 되면 재계하고 슬피 사모하기를 2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태묘(太廟) 배알 때도 13실(室)7594) 에 이르면 언제나 몸을 굽히고 단정히 서 마치 그 위(位)에서 무엇인가를 본 듯이 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을 배알하여 비바람 추위 더위에도 폐한 일이 없었고, 또 봄 가을이면 각능을 두루 배알하면서 계절 따라 갖는 감상이 가까운 조상이라 하여 더 후하게 하는 일은 없었으나 유독 원릉(元陵)에만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행행하여 죽도록 사모하는 뜻을 표했었다.

자전(慈殿)ㆍ자궁(慈宮)을 섬기면서도 하루 세 번이라도 화한 얼굴 유순한 태도로 의중을 미리 알아 기쁘게 해드리고 물심양면으로 모자람이 없었기에 사랑과 효성이 한데 어우러져 궁위(宮闈) 사이에 화기가 가득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나라에 일이 있으면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내 일찍이 자전께 여쭙지 않고 행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자전 배알 때는 언제나 전문(殿門)을 바라보고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걸으면서, 우리 가법(家法)이 그렇다고 했고, 만수전(萬壽殿)을 수리하면서는 전문 밖에다 막차를 설치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하다가 공사가 끝나서야 내전으로 돌아왔으며, 원릉(園陵) 행행 때는 비록 종일 힘들게 움직였어도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리 날이 저문 뒤에 입궐했더라도 맨 먼저 동조(東朝)로 갔는데 그것은 바로 나갈 때 고하고 돌아와서는 뵙는[出告反面] 뜻이었던 것이다.

을묘년에 술잔을 올리고는 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로서 믿고 우러러 보는 곳이라고는 우리 자궁뿐인데 지금 이 고장에서 이 예를 거행하게 되어 지극한 소원이 대강 풀린 셈이다." 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갑자년(1804년)은 바로 자전의 육순(六旬)에다 자궁의 칠순(七旬)이 되는 해여서 그때 가서 경례(慶禮)를 다시 거행하기로 하고 뿔잔을 화궁(華宮)에 간직해 두게 하고서 좋은 그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어(仙馭)가 이미 떠나고 말았으니, 아, 원통하다.

비궁(閟宮)에 대해서는 지극한 슬픔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 일생을 두고 슬피 사모하였고, 정(程)ㆍ주(朱)의 예를 절충하여 축식(祝式)을 따로 정하고 춘추(春秋) 대의에 따라 주토(誅討)를 가하기도 했었다. 금등(金縢)의 글이 나타나 왕의 효성이 세상에 더욱 알려졌는가 하면 괴대(槐臺)를 세워 후세에 영원한 혜택을 남겼으며, 제사 의식과 기물을 다 갖추어 향사가 예에 어긋남이 없었고,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전성(展省)도 거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즉위하던 그날 내린 그 윤음이야말로 바로 몇 십 가지 대의(大義)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대의여서 우리 신들이 죽도록 높이높이 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하늘이 길택(吉宅)을 주어 면례(緬禮)를 잘 치루었는데 광지(壙誌)를 지어 숨겨진 빛을 드러내고 발인 의식을 성대히 하여 종사(終事)를 잘 마무리했으며, 원호(園號)를 높여 숭보(崇報)를 나타내고 상설(象設)을 갖추어 체제(體制)를 존엄하게 했다. 그리고 화성[陪京]에다 행궁(行宮)을 두어 원침을 수호하는 곳을 더 장엄하게 꾸미고, 어진(御眞)을 재전(齋殿)에 모셔 정성(定省)의 마음을 거기에다 썼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해마다 원침 배알 때면 지지대(遲遲臺)에다 행차를 멈추고 시간을 끌며 멀리 바라보면서 차마 금방 길을 뜨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공부자가 부모(父母)의 나라를 떠나면서는 머뭇머뭇했던 그 뜻이었던 것이다.

경신년(1800년) 봄 행행 때 읊은 어시(御詩)에

밤을 새운 화성땅 돌아보면 멀기만 해
지지대 서서 자꾸 또 머뭇거리네

했었는데, 그 시를 쓰고는 왕의 행차가 그곳을 다시는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슬픔을 삼키고 아픔을 씹으며 임금 노릇하는 것도 좋은 줄을 몰랐기에 24년간 왕위에 있었으나 뭇 신하들이 감히 휘호 올릴 것을 청하지도 못했었고, 또 당(堂)을 노래당(老來堂)이라 이름하고 누(樓)를 신풍루(新豊樓)라고 이름한 것은 우리 신들로서는 차마 말못할 성상의 은미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서 그 모두가 성상의 효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요(堯)ㆍ순(舜)의 도는 효제(孝悌) 그것이다." 했듯이, 왕이 그래서 효(孝)가 된 것이다.

왕은 광대(廣大)한 영역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고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정미(精微)를 기했으며, 최고 고명(高明)의 경지에 오르고 그리고 중용(中庸)의 도를 통달했는데 이는 도학(道學)의 바름이었고, 천지 사이에다 내놓아도 어긋남이 없고 백세 후에 다시 보아도 의혹될게 없었으니 이는 의리(義理)가 올바른 것이었으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나서 조정(朝廷)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 나서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자 모든 백성, 모든 일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는 다스리는 법과 규모가 바른 것이었다. 성조(聖祖)로부터 정일(精一)의 전통을 이어받고 성자(聖子)에게는 연익(燕翼)의 교훈을 물려주어 시작에서 끝까지가 완성되었으니 이는 왕자(王者)로서 크게 정상의 도리를 따른 것이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이란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상대가 발라지는 것이다." 했듯이, 왕이 그래서 정(正)이 된 것이다.

아, 주공(周公) 이전에는 성인(聖人)이 윗자리에 있었으나 주공 이후로는 성인이 아랫자리에 있었다. 윗자리에 있을 경우에는 그의 도(道)가 행해지지만 아래에 있으면 학(學)이 밝아지는 법이니 요ㆍ순과 공자ㆍ주자가 환경은 비록 달랐으나 그 공로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왕은 공자ㆍ주자의 학으로써 요ㆍ순의 도를 맡아 사문(斯文)을 크게 개척하셨으니, 5백 년을 주기로 한 분씩 세상에 나타나는 명세(命世)의 인물이 바로 왕이었는데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그 수명을 제한했기에 성인과 성인이 주고 받던 전통을 이제 다시 찾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고 학이 밝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했듯이 그 역시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 원통하여라.

신은 지식이래야 성인의 깊이를 알기에 부족하고 문장이래야 그 덕과 모든 아름다움을 그려내기에 부족하지만 그러나 10년을 유악(帷幄)에 있으면서 남다른 은총과 예우를 입었었고 또 대화가 오고 가는 법연에서도 모셔본 적이 있기에 감히 턱도 없는 한두 소견을 내세워 하늘의 태양을 묘사해보려고 한 것이다. 백세 이후에 이 참람된 행위를 용서하고 그 뜻을 슬프게 보아줄 자가 있을 것이다.

[행 지중추부사 이만수(李晩秀)가 제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294면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7509] 단서(丹書) : 주 무왕(周武王) 당시 천하 다스리는 법으로 붉은 참새가 물고 왔다는 붉은 글씨로 된 책. 《대대례(大戴禮)》 무왕 천조(武王踐祚).
[註 7510] 《소학(小學)》 제사(題辭) 제3장의 16구절 : 소학 제사(小學題辭) 중에서 애친 경형 충군 제장(愛親敬兄忠君悌長)에서부터 이배기근 이달기지(以培其根以達其枝)까지의 16구절을 이름. 《소학(小學)》.
[註 7511] 한 광무(漢光武)가 하남(河南)ㆍ남양(南陽)에 관하여 말한 명제(明帝)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었는데, : 광무제 당시에 각 군현의 간전(墾田)ㆍ호구(戶口) 등 기록이 부실한 것들이 많아 그를 정확히 조사해 올리도록 했는데, 진류(陳留) 고을에서 하남(河南)ㆍ남양(南陽)은 조사할 수가 없다는 서간(書簡)을 올렸다. 그것을 본 광무가 성을 내 따져묻자 명제가 장막 뒤에 있다가 듣고서 말하기를 "하남은 제성(帝城)이기 때문에 근신(近臣)들이 많이 살고, 남양은 제향(帝鄕)이기 때문에 근친(近親)들이 많이 살고 있어 그 전택(田宅)들이 제도 이상으로 화려한 것이 많을 것이므로 어느 것을 어떻게 표준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연감류함(淵鑑類函)》 제왕부(帝王部).
[註 7512] 황형(皇兄) : 경종(景宗)을 이름.
[註 7513] 정유년 : 왕 세자가 청정하기 시작한 해임.
[註 7514] 신축년 : 1721 경종 1년.
[註 7515] 임오년 : 1762 영종 38년.
[註 7516] 소헌 왕후(昭憲王后) : 세종 비(世宗妃) 심씨(沈氏).
[註 7517] 제이대부(祭以大夫)의 예 : 장사의 예는 망인(亡人)의 신분에 맞게 하고, 제례는 그 제사를 모시는 아들의 신분에 따라 올리는 것. 아버지는 사(士)이고 아들이 대부(大夫)이면 장례는 사의 예로 치르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모심 《중용(中庸)》.
[註 7518] 복왕(濮王)에게 하던 의식. : 복왕은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生父)였는데,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영종은 자기 생부인 복왕을 황고(皇考)라고 칭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형이라는 뜻으로 황백(皇伯)이라고 하였다. 《송사(宋史)》 권240.
[註 7519] 오향(五享) : 다섯 번의 제향. 1년 4계절의 첫달과 섣달 납일(臘日)에 제향을 올림.
[註 7520] 영종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註 7521] 채확(蔡確) : 송(宋)의 간신(姦臣) 중의 한 사람. 진사(進士)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모두 교묘한 중상 모략으로 옥사를 일으킨 후 남의 자리를 빼앗아 앉았기에 사대부들은 입을 모아 그를 꾸짖었다. 그가 안륙(安陸)에 있으면서 언젠가 거개정(車蓋亭)에 가 놀며 시(詩) 10수를 읊었는데 그 시가 왕실을 헐뜯은 내용이라 하여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양도(梁燾) 등이 연달아 소장을 올려 확에게 죄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송사(宋史)》 권471.
[註 7522] 조조(朝祖)의 예 : 발인(發靷)하기 하루 전에 축(祝)이 혼백(魂魄)을 모시고 사당에 가는 것을 일러 조조(朝祖)라고 하는데, 이는 그 망인이 생전에 먼 곳으로 출타하려면 반드시 사당에 와 고하던 의식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오학록(吾學錄)》.
[註 7523] 신한부(信漢符) : 신부(信符)와 한부(漢符)로서 신부는 대궐에 드나드는 하례(下隷)에게 병조(兵曹)가 발행하는 신표이고, 한부는 궁정 출입의 관비(官婢)들이 차고 다니는 신표이다.
[註 7524] 빈흥(賓興)의 법 : 대사도(大司徒)가 육덕(六德)인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 육행(六行)인 효우목인임휼(孝友睦婣任恤), 육예(六藝)인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로 만민을 가르쳐 그에 능통한 자가 있으면 그를 추천하여 쓰게 했던 법. 《주례(周禮)》 지관(地官).
[註 7525] 서한(西漢) 시대 현량(賢良) 선임 제도 : 한 무제(漢武帝)가 천하에 조서(詔書)를 내려, 현량 방정(賢良方正), 직언 극간(直言極諫)의 선비를 천거하라고 한 제도.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註 7526] 격옥(隔屋) 제도 : 명대(明代)에 과거장의 간사한 짓을 막기 위해 발로 사이를 막아 서로 통래를 못하게 하고, 방을 따로 정해 치도(治道)를 짜내게 하였다. 그리고 안에서는 고시관(考試官)이 맡아보고, 밖에서는 감시관(監試官)이 맡아보면서 또 제조관(提調官)으로 하여금 총괄적으로 살피게 하였음. 《홍재전서(弘齋全書)》 권26 윤음(綸音).
[註 7527] 공거의(貢擧議) : 선거(選擧)에 있어 시부(詩賦) 출제를 지양하고 경(經)ㆍ자(子)ㆍ사(史)ㆍ시무(時務)로 나누어 시험을 보여야 한다는 주희(朱熹)의 주장이다. 《송사(宋史)》 권156.
[註 7528] 용도(龍圖)ㆍ천장(天章) : 송(宋)나라 때 태종과 진종의 어제를 모셔둔 두 전각 이름.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
[註 7529]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7530] 정빈(靖嬪) : 진종의 생모 이씨(李氏).
[註 7531]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註 7532] 녹수(錄囚) : 죄수 신상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시로 조사 기록하는 것. 《한서(漢書)》 하무전(何武傳).
[註 7533] 추인(酋人) : 술 빚는 일을 맡은 관리. 주인(酒人).
[註 7534] 계유년 : 1753 영조 29년.
[註 7535] 등가(登歌)ㆍ헌가(軒架) : 궁중의 음악. 등가는 당상악(堂上樂)으로 노래를 주로 하고 현악기가 주인데 반해 헌가는 당하악(堂下樂)으로서 대례(大禮)ㆍ대제(大祭) 때 많이 쓰이고 악기로는 쇠북ㆍ경쇠ㆍ북 등 타악기가 주종을 이룸.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註 7536] 성조(聖祖) : 효종(孝宗)을 말함.
[註 7537]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7538] 순문약(荀文若) : 후한(後漢) 때 영음(潁陰) 사람 순욱(荀彧). 문약(文若)은 그의 자임. 조조(曹操)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그 공로로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지기도 했는데, 뒤에 조조가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다가 조조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자진하였음. 《후한서(後漢書)》 권100.
[註 7539] 사충사(四忠祠) : 이이명(李頤命)ㆍ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
[註 7540] 사태사(四太師) :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ㆍ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을 이름. 《고려사(高麗史)》.
[註 7541] 수레에서 내려 울 일 : 우(禹)가 길을 나섰다가 죄인을 보면 수레에서 내려 울면서 이르기를 "요순(堯舜)의 백성들은 모두 다 요순과 똑같은 마음이었는데, 지금 과인(寡人)이 임금이 되고 나니 백성들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어 내 그것을 슬퍼하노라." 하였다 한다. 《설원(說苑)》 군도(君道).
[註 7542]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7543]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7544] 경술년 : 1730 영조 6년.
[註 7545] 서서(西序)의 대훈(大訓) : 왕이 죽은 후 그가 평소 귀중히 여기던 물건들을 챙겨 진열하는 것. 성왕(成王)이 죽자, 적도(赤刀)ㆍ대훈(大訓)ㆍ홍벽(弘璧)ㆍ완염(琬琰)을 서쪽 행랑에다 두었다고 했음. 대훈(大訓)은 삼황(三皇)ㆍ오제(五帝)의 글을 말한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고명(顧命).
[註 7546] 방구(方邱) : 토지에 제사하던 단(壇).
[註 7547] 갑자년 : 1744 영조 20년.
[註 7548]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7549] 양 효왕(梁孝王)의 옥사 : 한 경제(漢景帝) 때 태후가 양 효왕 무를 후사로 삼으려 했는데 원앙(袁盎)이 반대하자, 양왕은 자객을 시켜 원앙을 죽였다. 경제가 이 옥사를 전숙(田叔)에게 맡기자 전숙은 정치적으로 해결하길 권하여 양왕이 무사할 수 있었다. 《한서(漢書)》 권37 전숙전(田叔傳).
[註 7550] 《문원보불(文苑黼黻)》 : 정조 11년(1787)에 간행된 22책으로 된 책 이름. 이조 초기 이후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의 문장을 모은 책으로 옥책문(玉冊文)ㆍ반교(頒敎)ㆍ위유(慰諭)ㆍ교명문(敎命文)ㆍ죽책문(竹冊文)ㆍ애책문(哀冊文)ㆍ제문(祭文)ㆍ상량문(上樑文)ㆍ국서(國書)ㆍ노포(露布) 등등이 수록되어 있음.
[註 7551] 계좌(癸坐) : 북동쪽.
[註 7552] 양궁(兩宮) : 영조(英祖)와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말함.
[註 7553] 경진년 : 1760 영조 36년.
[註 7554] 본지(本支)의 시 : 조상의 덕화로 그 자손들이 백세를 두고 번성하리라는 내용의 시.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지집(文王之什).
[註 7555] 반석(磐石) 노래 : 한 고제(漢高帝)가 자손들을 봉하면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그 영토를 들쭉날쭉 서로 엇물리게 배정하였으므로 그를 일러 반석지종(磐石之宗)이라고 하였음. 《사기(史記)》 문제기(文帝記).
[註 7556] 감포(減布) : 영조(英祖) 연간에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종래 양포세(良布稅)라는 명목으로 2필씩 받아오던 것을 1필씩으로 감하였음. 감필(減疋).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19.
[註 7557] 선무포(選武布) : 각 지방의 군관 중에서 무술시험을 거쳐 선출한 군관을 일러 선무 군관이라 하는데 그 군관에게 주는 보포를 말한 것.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20.
[註 7558] 신해년에 제정한 법 : 영조(英祖) 7년(1731) 봄에 제정한 공ㆍ사천법(公私賤法). 아들은 부역(父役)을, 딸은 모역(母役)을 따르게 하였음.
[註 7559] 호혜당(戶惠堂) : 호조 판서.
[註 7560] 남상(南床) : 홍문관 정자.
[註 7561] 구주 문자(口奏文字) : 영조(英祖)가 진전(眞殿)에다 왕세손(王世孫)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주달한 문자. 《영종실록(英宗實錄)》 권103.
[註 7562] 구(耉)ㆍ휘(輝)ㆍ경(鏡)ㆍ몽(夢) : 조태구ㆍ유봉휘ㆍ김일경ㆍ박필몽.
[註 7563] 사자대(思子臺)ㆍ망자궁(望子宮) : 궁전 이름. 무고 옥사로 인해 죄 없이 죽은 여태자(戾太子)를 가련히 여겨 한 무제(漢武帝)가 지은 궁전. 《한서(漢書)》 여태자전(戾太子傳).
[註 7564] 전석(田錫)이 초고 불태운 것 : 송(宋)의 전석(田錫)이 간의 대부(諫議大夫)ㆍ사관 수찬(史館修撰)을 역임하면서 사건만 발생하면 할 말을 다하여 그의 봉소(封疏)가 53권에 달했는데 나중에 그 봉소 모두를 불태워버렸다. 《송사(宋史)》 권293.
[註 7565] 주창(周昌)처럼 대들면서 대답하기는 : 주창(周昌)이 원래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입바른 말을 잘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太子)를 폐하려고 하자 주창이 화를 내면서 더욱 더듬거리는 말로, 면전에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사기(史記)》 권96 장승상전(張丞相傳).
[註 7566] 항양(恒暘) : 제철에 맞지 않게 계속해서 뜨거운 햇볕이 나서 모든 물건을 말리는 것은 임금이 정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았음. 《시경(書經)》 홍범(洪範).
[註 7567] '몽둥이 하나로 치면 한 줄기 몽둥이 자국이 나고, 손바닥으로 후려치면 손바닥만큼 붉은 자국이 남는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34, 논어(論語) 16에 언급되어 있는 말로, 정조가 당시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이란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하여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인용한 내용이다. 《정조(正祖)》 18년 7월 11일조.
[註 7568] 분류(分留) : 환곡(還穀) 방출 때 쓰던 한 가지 방법.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했던 곡물을 추수가 끝난 후 일정한 이식을 붙여 받아들였던 것을 이듬해 봄 다시 방출할 때 그 재고량의 절반은 창고에 쌓아두고 나머지 절반을 방출하는데 그 쌓아둔 절반을 유(留)라고 하고 방출된 절반을 분(分)이라고 함. 《대전회통(大典會通)》 호전(戶典).
[註 7569] 자양 : 주자를 말함.
[註 7570] 오현(五賢) : 조광조ㆍ이황ㆍ이이ㆍ김장생ㆍ송시열.
[註 7571]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ㆍ윤집ㆍ오달재.
[註 7572] 칠의사(七義士) : 병자 호란 이후 청주(淸主)를 죽이고 명(明)과 우리 나라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사전에 그 사실이 청에 발각되어 청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황일호(黃一皓)ㆍ최효일(崔孝逸)ㆍ차충량(車忠亮)ㆍ차예량(車禮亮)ㆍ안극함(安克諴)ㆍ장후건(張厚健)ㆍ차맹윤(車孟胤). 《존주휘편(尊周彙編)》 권13.
[註 7573] 상형(祥刑) : 형벌이란 원래 상서롭지 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써서 불선(不善)을 제거하고 선한 자가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면 결과적으로 대단히 상서로운 것이라는 것. 《서경(書經)》 여형(呂刑).
[註 7574] 삼전(三傳) : 좌전ㆍ곡량전ㆍ공양전.
[註 7575] '하나를 행하면 셋이 좋아진다.' : 나이 어려 아직은 더 배워야 한다고 양보하는 한 가지 일을 하면 자식 노릇하는 도리를 알게 되고, 신하 노릇하는 도리를 알게 되고, 자제 노릇하는 도리를 알게 되어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장유(長幼)의 세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 《예기(禮記)》 문왕 세자(文王世子).
[註 7576] 서씨(庶氏)ㆍ전씨(剪氏) : 서씨는 사람을 해치는 벌레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고, 전씨는 좀 등 기물(器物)을 갉아먹는 벌레 제거를 맡은 관직. 《주례(周禮)》 추관(秋官) 사구(司寇).
[註 7577] 복파(伏波)가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생생한 증험 : 후한(後漢)의 복파 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무릉 태수(武陵太守)가 되자 황충이 모두 바다로 날아들어가 어하(魚蝦)가 되었다고 함. 《동관한기(東觀漢紀)》.
[註 7578]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여놓은 것과 같은 뜻 : 송(宋)의 정호(程顥)가 죽은 후 정호의 아우 정이(程頤)가 묘표(墓表)를 쓰면서 맹자 이후 그 도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명도 선생 한 사람뿐이라는 뜻을 밝혔는데, 그 글이 《맹자》 7편 맨 말미의 장하주(章下註)로 실려 있다. 《오경백편(五經百篇)》 말미에 주희(朱熹)의 장구서(章句序)를 붙인 것도 주희가 유일한 도통 전수자임을 밝힌 뜻이라는 것임.
[註 7579] 토우(土牛) : 흙으로 만든 소. 옛날에 입춘(立春) 전날 흙으로 소 형상을 만들어 대문 밖에다 세워 두고 그로써 겨울 추위를 마지막 보내고 농경(農耕)을 권장하는 뜻을 보였음. 《예기(禮記)》 월명(月令).
[註 7580] 옹정(雍正) 을묘년에 쓴 구례 : 영조(英祖) 11년(1735) 8월에 옹정제 청 세종(淸世宗)이 죽었는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그의 복(服)으로 생포(生布)로 만든 단령(團領)을 가를 홈치지 않고, 생마대(生麻帶)에다 생포로 싼 사모(紗帽)를 썼었음.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1.
[註 7581] 불이참(不貳斬) : 참최(斬衰)복은 두 번 입지 않음. 우리 나라는 명(明)을 천자(天子)의 나라로 여겨 그 나라 황제(皇帝)가 죽었을 때 참최를 입었으므로 다시 청(淸)나라 황제를 위해 참최를 또 입을 수는 없다는 것.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1.
[註 7582] 단경 성후(端敬聖后) : 중종의 원비 신씨(愼氏).
[註 7583] 주량(舟梁) : 왕가의 친영(親迎)을 이름. 문왕(文王)이 태사(太姒)를 위수(渭水) 곁에서 친영하면서 배로 교량을 만들어 이용한 데서 나온 말임.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
[註 7584] 장주(漳州)에서 했던 것 : 주희(朱熹)가 광종(光宗) 때 장주(漳州)를 맡아 다스리면서 그곳 풍속이 예(禮)를 모르고 석씨(釋氏)를 신봉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옛 상장(喪葬)과 가취(嫁娶)의 의식을 추려 뽑아 늘 게시해두고 부로(父老)들이 그것을 익혀 자기 자제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남녀가 승려(僧廬)에 모여 전경회(傳經會)를 갖는 것 등을 금하였음. 《송사(宋史)》 권429.
[註 7585] 지록(池錄)과 요록(饒錄) 두 본 : 《어류(語類)》는 송(宋)의 여정덕(黎靖德)이 140권으로 편찬하기 이전에 이도전(李道傳)이 요덕명(廖德明) 등 32인이 기록해둔 43권에다 장흡록(張洽錄) 1권을 증보하여 지주(池州)에서 발간한 지록(池錄)이 있고, 도전의 아우 성전(性傳)이 황간(黃幹) 등 42인이 기록한 46권을 수집하여 요주(饒州)에서 발간한 요록(饒錄)이 있으며, 채항(蔡抗)이 양방(楊方) 등 32인이 기록한 것을 26권으로 편집해서 역시 요주에서 발간한 요후록(饒後錄)이 있다. 또 오견(吳堅)이 이상 3개 록(錄)에 수록된 것 이외의 29인과 또 아직 간행이 안 된 4인의 기록을 증보하여 건안(建安)에서 간행한 20권의 건록(建錄) 등이 있고 그것을 분류 편집한 것으로 황사의(黃士毅)가 미주(眉州)에서 발간한 미본(眉本) 또는 촉본(蜀本)과 왕필(王佖)이 휘주(徽州)에서 발간한 휘본(徽本) 등이 있음.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子部) 유가류(儒家類).
[註 7586] 분전구색(墳典邱索) : 옛날의 전적을 이른바 삼분(三墳)ㆍ오전(五典)ㆍ구구(九丘)ㆍ팔색(八索)이라 하였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12년.
[註 7587] 수사낙민(洙泗洛閩) : 공자(孔子)의 학통인 수사학(洙泗學)과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그리고 민중(閩中)의 주희(朱熹)의 학문을 말한다.
[註 7588] 오교 삼물(五敎三物) : 오륜(五倫)과 향삼물(鄕三物). 부자 유친(父子有親)ㆍ군신 유의(君臣有義)ㆍ부부 유별(夫婦有別)ㆍ장유 유서(長幼有序)ㆍ붕우 유신(朋友有信)과 1. 육덕(六德)인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智仁聖義忠和), 2. 육행(六行)인 효ㆍ우ㆍ목ㆍ인ㆍ임ㆍ휼(孝友睦婣任恤), 3. 육예(六禮)인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禮樂射御書數).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
[註 7589] 육화(六花) : 진(陣) 치는 법. 당(唐)의 이정(李靖)이 제갈 양(諸葛亮)의 팔진도(八陣圖)를 기본으로 하여 만든 진법. 육화진(六花陣)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 오지(吳志).
[註 7590] 곽(郭)ㆍ이(李)ㆍ순(巡)ㆍ원(遠) : 당(唐)의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ㆍ장순(張巡)ㆍ허원(許遠)을 말한다. 곽자의와 이광필은 안(安)ㆍ사(史)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워 세상에서는 이(李)ㆍ곽(郭)이라고 불리웠으며, 장순은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수양(睢陽)에서 그 고을 태수(太守) 허원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서(唐書)》 권136ㆍ137ㆍ192.
[註 7591] 한(韓)ㆍ악(岳)ㆍ사(謝)ㆍ정(鄭) : 송(宋)의 한세충(韓世忠)ㆍ악비(岳飛)ㆍ사방득(謝枋得)ㆍ정소남(鄭所南)을 말한다 한세충은 북송(北宋)이 망하자 수병(水兵)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진회(秦檜)의 책략에 의해 병권(兵權)을 빼앗기고는 서호(西湖)에 숨어 살며 여생을 보냈고, 악비는 역시 금(金)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중 화의(和議)가 일어나 글르 반대하다가 진회의 참소로 천추의 한을 품고 옥중에서 죽었으며, 사방득은 의병을 일으켜 원(元)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그곳 수도로 압송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고, 정소남은 송나라가 망하자 일생을 원(元)에 대한 적개심으로 보내며 조송(趙宋)만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소남ㆍ사초(思肖) 등으로 바꾸고 앉아도 꼭 남쪽을 향해 앉았다 한다. 《송사(宋史)》 권365ㆍ425.
[註 7592]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註 7593] 두궤(杜蕢)가 술잔을 올렸던 것 : 진(晉)의 대부(大夫) 지도자(知悼子)가 죽어 장례를 치르기 전에 평공(平公)이 사광(師曠)ㆍ이조(李調)를 데리고 술을 마시며 풍악을 울리자 두궤(杜蕢)가 술잔을 들어 사광ㆍ이조에게 각각 한 잔씩을 먹이고 자신도 한 잔 마시고서 흉일(凶日)에는 원래 주악을 않는 것인데 지도자(知悼子)가 죽어 시신이 아직 집에 있으니 그런 흉일이 없는데도 사광이 태사(太師)로서 그것을 임금께 고하지 아니했으므로 그 벌주를 마셔야 했고, 이조는 측근의 신하로서 임금 잘못을 두고 보았으므로 마셔야 하고, 자기는 재부(宰夫)로서 자기 영역 이외의 일을 간섭한 죄로 벌주를 마셨다고 했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
[註 7594] 13실(室) : 영묘(英廟)의 실.

출전 : 정조실록 부록 정조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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