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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15 (일) 22:04
분 류 사전2
ㆍ조회: 959      
신비의 왕국 가야를 찾아 (김세기)
신비의 왕국 가야를 찾아

1. 낙동강 유역과 소국의 성장

▲고령지산동 32~35호분 발굴 전경. 사진/계명대박물관

태백산맥 남단의 함백산에서 시작하여 경상남북도의 한복판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흐르는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젖줄로써 선사시대부터 영남문화의 터전을 이루는 강이다. 특히 기원전후 한 시기부터는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의 물길이 만들어 놓은 기름진 평야와 산으로 둘러 싸인 주변의 분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소국(小國)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1~3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에는 馬韓, 辰韓, 弁韓의 三國이 있었는데 마한 54국은 한강 이남의 경기·충청을 중심으로 호남지방에 걸쳐 있었고, 진한 12국과 변한 12국은 소백산맥 이남의 영남일원에 섞여 있으나 대체로 낙동강 동쪽에는 진한 12국이, 서쪽지역에는 변한 12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낙동강 주변과 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변한 소국들이 점차 발전하여 3세기 이후부터는 ‘가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고대의 역사책인 ‘三國遺事’에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5伽耶’ 혹은 ‘6伽耶’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 6가야들이 앞에 말한 변한 12국과 일치되거나 비슷한 명칭들이 많아 삼국시대 ‘가야’는 변한의 소국들이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 가야는 일본의 역사서인 ‘日本書紀’에는 ‘임나(任那) 7국’ 혹은 ‘加羅 10국’으로 표현되어 있고, 한국의 기본사서인 ‘三國史記’에는 ‘가야(伽耶), 가라(加羅)’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결국 이를 종합해 보면 1∼3세기 낙동강 연안에 변한으로 불리던 소국들이 3세기 이후부터는 ‘가야’ 혹은 ‘가라’로 불리면서 5~6세기의 연맹체 정도로 정리되어 삼국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야사는 여러 설이 분분한 가운데 전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연맹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가, 4세기 이후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였다고 정리되고 있으나, 최초에는 대가야는 부 체제를 갖춘 영역국가라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이와 같이 가야사가 복잡한 이유는 가야가 신라나 백제와 같이 완전히 통합된 고대국가를 이룩하지 못하였고, 또 가야인 스스로의 자기 역사를 기록하지 못하여 분명한 가야사를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또 그나마 기록도 매우 소략하여 체계적인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가야사를 이 정도라도 알 수 있는 것은 가야고지에 남아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당시 상황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가야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은 역사서는 ‘삼국유사’의 ‘駕洛國記’와 ‘五伽耶條’인데 이 삼국유사의 6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耶),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의 대가야(大伽耶),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古寧伽耶), 성주의 성산가야(星山伽耶, 혹은 碧珍伽耶), 고성의 소가야(小伽耶) 및 창녕의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이다.

이들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낙동강 유역의 가야국을 보면 가장 상류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함창의 고령가야인데 그 곳에는 傳古寧伽耶王陵이라는 대형 고분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도 봉토분을 포함하는 고분군이 여러 군데 남아 있어 소국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그것을 가야라고 해야 할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이 고령가야를 진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논란이 많은 지역이므로 가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낙동강과 관련하여 가야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은 낙동강 중류에 해당하는 성주의 성산가야, 고령의 대가야 및 창녕의 비화가야, 함안의 아라가야가 있고 하류인 김해의 금관가야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들 낙동강과 관련된 가야 중 하류부터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도록 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에서

2. 낙동강 유역 伽耶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

김세기(경산대 박물관장)

1) 김해의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에 위치하였던 나라인데 변한의 소국이었던 구야국(狗耶國)이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앞서 본 삼국유사에 의하면 구지봉(龜旨峯)에서 6개의 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동자가 태어났는데 그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수로가 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나머지가 5가야의 왕이 되었고, 그래서 수로왕의 금관가야가 6가야연맹의 맹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건국설화로 금관가야가 가야 초기에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금관가야는 낙동강수로를 이용한 내륙교통과 바다를 이용한 북쪽의 중국 군현지역과 일본 등지로의 교통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을 중국 군현이나 일본에 수출하고 그들의 선진문물을 가져와 내륙에 있는 소국(가야제국)에 중계해 주는 중계무역의 이점으로 급격히 발전해가고 그것을 기반으로 4세기경까지 가야연맹의 맹주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는 급격히 발전하는 고령의 대가야 세력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금관가야의 실체가 근년의 발굴조사로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 그 중 중요한 유적이 김해 양동리 고분유적이다. 대형의 목곽묘를 비롯하여 소형의 목곽묘 등 400여 기의 무덤에서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 청동 솥과 철제 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 상당히 발달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금관가야 최고지배층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에서는 대형목곽묘에서 김해식 토기류를 비롯하여 巴形銅器·筒形銅器·수정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철제갑옷·투구 등 철제품들이 다량 출토되었고 특히 철기의 재료로도 쓰이고 화폐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는 덩이쇠(鐵鋌)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통해 보면 당시의 금관가야는 역시 바다를 이용하여 중국·일본 등과의 교역을 주도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했던 금관가야는 5세기가 되면서 신라의 압박과 낙동강 중류 세력의 성장 등으로 급격히 쇠퇴하여 마침내 53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연맹의 위치

2) 함안의 아라가야

아라가야는 삼국지에 보이는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안야국(安耶國)이 발전한 것으로 낙동강 본류와 큰 지류인 남강이 합류하는 합강지점의 남쪽인 함안에 있었다. 이곳은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부로서 수로를 이용할 때 남강 및 낙동강을 통해서 가야 전지역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교통의 요로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계곡을 따라 곧 남해와 연결되는 중요한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유력한 가야세력이었다.

그러나 문헌에서 아라가야의 성립과 발전과정 등의 역사기록은 찾을 수 없고, 다만 서부 경남 일원에 있었던 여러 세력의 대표격으로 김해의 금관가야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3세기경 안야국(아라가야)을 비롯한 이른바 대상팔국(帶上八國)이 연합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하는 세력으로 되어 있고, 또 6세기 중반 ‘일본서기’에는 가야 여러 세력들이 신라와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가야를 지키기 위한 공동대책을 수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문화로는 현재 함안읍 중심지의 말이산고분군에 직경 20m가 넘는 대형고분들이 줄지어 남아 있어 그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고분에서는 갑주 등의 무구류와 장신구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특히 토기 받침대에 불꽃모양의 구멍을 뚫은 화염문투창 토기는 함안의 특징적인 토기인데 이 토기의 분포지역이 함안을 비롯하여 마산·창원·의령·사천까지 퍼져 있어 아라가야의 영향권이 넓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3) 창녕의 非火伽耶와 성주의 星山伽耶

창녕은 낙동강 중류의 동안지역으로 화왕산의 산성을 배경으로 형성된 가야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비화가야 역시 건국연대나 발전과정은 문헌에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날 뿐 상세한 기록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이 지역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 서안의 유력한 세력인 다라(多羅, 합천 쌍책)를 마주하고 있으며 북서로는 고령 대가야, 남서로는 함안 아라가야의 중간적인 삼각지점이 되고 또 계곡을 따라 신라와 바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신라의 낙동강유역 진출의 거점지역이었다.

신라의 진흥왕이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창녕을 복속시키고 진흥왕 척경비를 이곳에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창녕을 신라의 영역으로 보거나 또는 독자적 영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창녕지방의 고분은 묘제상으로는 가야지역의 일반적인 양식에 이 지역의 특성이 더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신라식인 적석목곽분도 조사된 바 있고 출토유물에도 토기·금동관·귀걸이 등에 신라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거기에 고령양식, 창녕양식이 포함되어 이 지역의 문화가 신라·가야의 두 문화가 복합되어 있는 특성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성주는 낙동강 서안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삼국유사에 성산가야 혹은 벽진가야로 나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성산가야는 국명만 나와 있고 내용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역사서에도 전혀 나오지 않아 사정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성주군내에는 세 곳에 큰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읍내의 성산동 고분군에는 대형봉토분 120여 기가 분포하고 있어 소국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성주군 벽진면에 ‘태자공기돌’이라는 바위는 벽진가야에서 대가야의 왕자를 인질로 잡아와 보내지 않았는데 그 왕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놀던 공기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설로 보나 앞에 말한 토기양식이 판이하게 다른 점으로 보아 대가야와 성산가야는 서로 이질적 문화를 가지고 다른 문화권 속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봉토를 제거한 고령지산동33호분
사진/계명대 박물관

4) 고령의 大伽耶

대가야는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회천이 만들어 놓은 충적평야와 가야산 줄기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해당하는 고령읍에 위치한다.

대가야는 종래 ‘삼국지’에 나오는 미오야마국이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 있어 왔으나, 최근에는 변진 반로국(伴路國)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대가야는 동국여지승람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태양에 감응되어 뇌질주일과 뇌질청예의 형제를 낳았는데 형인 뇌질주일이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고 동생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로 금관가야 중심의 수로설화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대가야는 4세기경부터 급격히 성장하여 5세기에는 야로의 철산을 개발하고 고령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교역하면서 가야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에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주변지역인 합천·함양·거창·산청 지역을 복속시키고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운봉고원과 섬진강을 따라 하동까지 진출하여 가야 최대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 대가야에 대하여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라고 보거나 대가야연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대가야를 어느 정도 집권력을 가지는 부체제(部體制)를 확립한 영역국가로 보는 설이 대두하고 있다.

이 성산동 고분에서는 많은 토기류와 장신구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문화양상이 인접한 고령과는 판이한 성격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토기의 양식이나 묘제의 양식이 오히려 낙동강 동안인 대구 비산동·내당동 고분과 가까워 대구지역과의 친연관계를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대가야 왕권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가야지역 고분 중 최대의 고분유적인 지산동 고분군은 뒤에 주산성을 배경으로 산능선을 따라 산봉우리처럼 큰 봉토분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44호분에서는 주인공 석실 외에 부장실 2개와 주위에 순장곽 32개를 둘러 약 40여명을 순장시킨 순장묘가 발굴되었고, 또 다른 고분에서는 가야식 금동관을 비롯하여 갑옷, 투구, 금동제 마구 등 집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가야식 금관도 있어 대가야의 왕권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토기양식에 있어서도 대가야 토기양식이 확립되었고, 그것이 고령·합천·거창·산청·남원에까지 확산되고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고령의 남쪽,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인 합천군 쌍책면에 위치하는 옥전고분 일대는 다라국(多羅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 옥전고분 발굴 결과, 고분양식도 독특하고 출토유물도 금장식 대도, 갑옷, 투구, 유리잔 등 화려하고 질높은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그런데 유물양식이 낙동강 건너 맞은편의 창녕양식도 있고 경주양식도 있고 독자성이 강한 양식도 있어, 다라국이 한동안 강력한 독자세력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후반부터는 토기양식이 고령양식으로 모두 바뀌고 있어 근처의 다른 지역과 같이 고령의 대가야 영향권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영역을 확보했던 대가야도 6세기 중반(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함으로써 가야 전체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대구은행 발행, '향토와 문화' 1996년도 4권(낙동강편)

출전 : http://ns.daegubank.co.kr/culture/s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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