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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15 (일)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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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09      
가야사 특강 (김태식)
가야사 특강 加耶史 特講

김태식(金泰植)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과거의 歷史에 대한 올바른 認識은 미래를 살아나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 民族文化에 대한 劣等意識을 가지고, 민족의 앞날을 悲觀的으로 생각하기도 하니, 이는 植民史觀의 폐해라고 할 것이다.

식민사관 중에서도 보통의 일반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黨派性論과 任那日本府說이 아닌가 한다. 당파성론이라는 것은 본래 우리 민족 내부의 일이고 朝鮮時代의 문화성격을 올바로 인식하면 해소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으나, 임나일본부설은 증거가 별로 없는 고대 가야지역에 대한 일이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민족 감정까지 겹쳐서 해결하기 어려운 難題 중의 난제이다.

원래 한국사를 근대적인 문헌고증 방법으로 연구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그들이 가장 먼저 연구하기 시작한 한국사 분야는 任那 즉 加耶의 역사였다. 19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국학자들은 <<古事記>>나 <<日本書紀>> 등 고대 문헌에 전하는 神功皇后의 新羅征伐 전설을 객관적인 사실로 정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특히 당시에 고구려의 옛 수도인 만주 集安에서 발견된 廣開土王陵碑에서 고구려가 任那加羅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倭寇를 여러 차례에 걸쳐 격파하여 물리쳤다는 銘文이 나오자, 이 논의는 활기를 띠었다.

그후 오랜 연구 성과들이 축적된 이후 일본 東京大 교수인 末松保和는 임나관계 문헌사료들을 정리하여 학문적 체계를 갖춘 이른바 '南韓經營論' 즉 任那日本府說을 1949년에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왜가 서기 369년에 任那加羅를 군사정벌하여, 任那日本府를 중심으로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562년에 이를 신라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이미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 기간에 일본사 교과서, 사전류, 및 그에 대한 英譯版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되었다.

이에 대해 學說史的으로는 많은 반론이 나왔다. 즉 일본 고대국가는 한반도 가야지역을 거쳐간 기마민족에게 정복된 것이라는 江上波夫의 騎馬民族征服王朝說, 일본에는 한반도계통의 이주민이 이룬 소국들이 많았다는 金錫亨의 日本列島內分國說, 가야지역에는 倭人들의 집단거주세력이 있었다는 井上秀雄의 僞倭自治集團說, 가야를 지배한 것은 왜가 아니라 백제였다는 千寬宇의 百濟軍司令部說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야사를 주로 외부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 위의 연구들은 기본적인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즉 왜나 백제가 가야지역을 장기간에 걸쳐 지배했다면 왜나 백제의 문물이 해당 지역에서 다량 발굴되어야 하는데, 근대 이후 80년이 넘게 발굴을 했어도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사학계에서도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연구 경향은 공통적으로 왜에 의한 가야의 대규모 군사정벌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왜의 군사진출을 주장하는 경우에라도 가야의 요청에 의한 소규모의 군대파견을 인정할 뿐이며, 아예 군사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교역이나 외교교섭 만을 상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시각은 역시 가야인이 아닌 일본인의 것이며, 그나마 일본 교과서에는 반영이 되지 않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야사를 독자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고고학자료는 가야의 독자적 문화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라고 표현된 실체는 가야지역에 존재하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정작 그것의 소재지인 가야의 입장에서 이를 해명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그런데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도 가야에 대한 일부의 사실을 전하고 있지만, 가야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정도는 안 되고, 3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을 통해서 약간 보완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다가 한국사학계에서 가야사의 연구는 매우 미미하여, 가야란 그저 6가야가 연맹을 이루고 있다고 알아 왔을 뿐이다. 그러나 근래에 우리 한국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가야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면서, 가야문화의 독자성 및 대략의 분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가야사를 재정리해 보자.

문헌사료를 통해 볼 때, 일단 가야사의 시작은 서기 42년으로, 그 종말은 562년으로 산정할 수 있다. 그 사이에 '가야'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는 둘이 있어서, 400년경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라고 칭하였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가야라고 칭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4세기 이전의 문화 중심은 김해 지역이고, 5세기 이후의 문화 중심은 고령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4세기 이전을 前期 加耶時代, 5세기 이후를 後期 加耶時代로 구분할 수 있다. 김해 駕洛國 중심의 전기 가야시대에 고령지역 소국의 국명은 伴跛國이었던 듯하며, 고령 大加耶國 중심의 후기 가야시대에 김해 지역 소국의 국명은 南加羅國 또는 金官國으로 칭하였다.

전기가야사는 2-4세기 동안 김해 가락국을 중심한 경남 해안 및 낙동강 유역의 弁辰 13國의 역사를 말한다. 이 시대를 세분하면, 철기를 수반하는 토광목관묘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까지를 가야 문화 기반 형성 시기로 볼 수 있고, 토광목곽묘문화가 형성되는 기원후 2세기代를 加耶諸國 성립시기, 3-4세기는 김해 지역의 우월성이 드러나는 전기가야연맹 시기이면서 가야 문화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성기의 말미인 400년경에 국제 관계에 휘말려 중심 소국들이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단 멸망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되었다.

후기가야사는 5-6세기 동안 고령 대가야를 중심한 경상 내륙 및 낙동강 西岸 10여 소국들의 역사를 말한다. 그 시대를 세분하면, 수혈식석곽묘 문화가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5세기 전반기를 가야제국 복구 시기로 볼 수 있고, 5세기 후반부터 520년대까지는 고령 대가야의 우월성이 두드러지는 후기 가야연맹 시기이면서 가야 문화의 중흥기로 볼 수 있다. 520년대 후반 이후는 가야연맹이 소멸 과정을 겪는 시기인데, 그 중에서도 530년대는 신라, 백제의 침투로 인하여 남부 지역의 일부 소국들이 멸망하는 시기, 540년대는 大加耶-安羅(함안)의 南北二元體制로 분열된 시기, 550년대는 백제의 附庸體制로 들어간 시기였다. 그러나 백제의 관산성 패전 이후 562년에 대가야국이 신라의 습격으로 함락되면서 후기 가야연맹은 종식되었다.

단순한 六加耶聯盟說은 羅末麗初의 설화일 뿐 加耶에 대하여 구체적인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倭의 任那支配說은 증거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문헌 및 유물자료에서 보이는 모든 증거들을 종합하여 볼 때, 가야는 倭나 백제에 의하여 장기간 동안 무력복속당하였던 적은 없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 전통과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끝까지 독립 세력으로서의 존속을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任那日本府 문제에 대한 이해는 이와 같은 가야의 독자적 발전과정 및 자기 존립 노력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任那日本府' 또는 '日本府'라는 명칭은 당시의 것이 아니므로 다른 것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 <<일본서기>>에서 편찬자가 미처 용어를 바꾸지 못한 탓인지, 임나일본부를 지칭하면서 '在安羅諸倭臣' 즉 安羅國에 있는 여러 倭人臣下들이라는 말이 단 한번 나오는데, 이것이 당시의 호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安羅倭臣館으로 용어를 바꾸는 것이 선입견을 배제하는 우선적 조치일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의 사료상에 나오는 안라왜신관은, 530년대 후반부터 550년 경까지 안라왕의 밑에서 가야연맹의 독자적 이익을 위하여 외교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백제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倭는 그들에게 대표 교섭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라왜신관은 안라의 외교적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왜인 관료들이 있는 외무관서와 같은 성격의 것이며, 왜나 백제의 임나 지배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님이 <<일본서기>> 자체의 사료를 통해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이제 가야사에 대한 虛像은 깨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고대사는 아직까지 가야지역의 지배, 또는 최근 일본학계의 표현을 따르면 '임나지역에서의 군사 활동'을 암묵적인 전제조건으로 해서 짜여져 있다. 앞으로 일본고대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의 虛像을 깨치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출전 : 김태식교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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