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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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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30      
[현대] 대한민국3-역사 (한메)
대한민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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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대구분]

시대구분은 역사의 흐름을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분하는 것으로 역사인식의 방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사를 상대(上代)·중대(中代)·하대(下代) 내지는 상고(上古)·중고(中古)·하고(下古) 등으로 3구분한 바 있듯이,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역사발전의 체계적 인식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적 역사 연구방법이 도입된 이후에 제시된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모양이 제각기여서 아직 정리가 덜 된 느낌이다. 한국사연구회편 《한국사연구입문》에 나타난 시대구분의 여러 유형을 살펴보면, 첫째 시간의 원근(遠近)에 의한 것, 둘째 사회발전의 단계를 기준으로 한 것, 셋째 민족의 성장과정을 기준으로 한 것, 넷재 주제별에 의한 것, 다섯째 사회발전과 왕조를 혼합하여 구분한 것, 여섯째 지배세력의 변화에 따른 것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연대순(年代順)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시대구분의 설정은 객관적 공감도를 지녀야 하며 당대의 사회구조와 발전과정 등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총체적으로 규정지어져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 시대구분의 역사를 일부 개괄해 보면, 먼저 서양사에서 흔히 사용하는 3분법의 영향으로, 최남선(崔南善)·이병도(李丙燾) 등은 신석기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를 상고 또는 상대, 고려왕조를 중고·중세, 조선왕조를 근세로 각각 구분하였고, 반면에 백남운(白南雲)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 원시씨족사회(原始氏族社會;신석기시대)·원시부족국가(고조선 및 삼한)·노예국가(삼국과 통일신라)·집권적 봉건국가(고려∼조선)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이기백(李基白)은 1967년의 《한국사신론》에서 씨족사회·부조국가로부터 민주주의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18부분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한편 《한국사연구입문》은 지금까지의 제설을 바탕으로 하여 구·중·신석기시대인 원시사회, 청동기시대에서 신라·발해에 이르는 고대사회, 중세사회Ⅰ(고려), 중세사회Ⅱ(조선), 근대사회(개항∼광복) 등으로 나누고 있으나, 최근 들어서는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 과정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에서 원시사회, 고대사회(단군조선∼남북국시대), 고려사회, 조선사회, 근대사희, 민족의 수난과 저항, 현대사회로 나누어 그 동안 왜곡(歪曲)되었던 사실들에 대해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다.

[원시사회]

한국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년에 한반도 전지역에 걸쳐 구석기문화의 유적이 발굴 조사됨으로써 한국문화의 기원이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6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중기·후기에 걸치는 장구한 시기 동안 계속 생존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한반도의 구석기문화인이 오늘날 한국인의 직접 조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반도에는 1만 년 전 빙하기(洪積世)가 끝나고 후빙기(沖積世)가 되면서 새로운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고고학에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 상한을 BC 6000년까지 올려 잡고 있다. 신석기시대 유물상의 특징은 간석기〔磨製石器〕와 토기의 등장이다. 이전 구석기시대인은 뗀석기〔打製石器〕만을 제작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보다 정교하게 만든 간석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토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의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라고 할 수 있으나, 이에 앞서 한때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紋土器〕나 융기무늬토기도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토기의 계통은 명확하지 않으나, 다음 단계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인은 시베리아에 살던 주민과 같은 계통인 고아시아족(Paleo―Asiatics)으로서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는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빗실무늬토기문화 다음에는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가 성립되었다. 이 문화는 전단계의 문화와는 그 주민이나 문화의 계통이 다른 것이었다. BC 10세기경 이 민무늬토기인들은 청동기문화를 성립시키고, 이어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문화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신석기시대 말기로부터 중국 동해안의 화이허강유역〔准河流域〕·산둥반도·보하이만〔渤海彎〕·남만주·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역에 민무늬토기문화가 중심이 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이 성립되어, 퉁구스족에 속하는 예맥족과 한족(韓族)은 이 문화권 안에서 성장하였고 고아시아족으로 추정되는 빗살무늬토기문화인을 흡수하였으며, 이어 주위의 여러 계통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국민족의 주류를 형성해 나갔다.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은 한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평양(平壤) 교외 검은모루의 40만∼5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유적(洞窟遺跡),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굴포리(屈浦里)·부포리의 3만∼10만 년 전 유적,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장기면(長岐面) 석장리(石壯里)의 3만 년 전에서 그 보다 더 오래된 시대에 이르는 유물 포함층,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전곡읍(全谷邑) 전곡리(全谷里)에서 출토된 손도끼〔握斧〕 등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뗀석기와 나무·뼈의 도구를 사용하여 동물을 사냥하였고 열매와 구근(球根)을 채집하며 생활하였다.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BC 5000년경 토기와 간석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토기를 대표하는 것은 꼬챙이〔櫛〕의 가느다란 부분으로 긁어 무늬를 새긴 반달걀모양〔半卵形〕의 기하무늬토기인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가 있다. 도구로서는 돌살촉〔石鏃〕·돌칼〔石刀〕·골창(骨槍)·골섬 등의 수렵·어로 용구 외에 돌보습·돌괭이〔石鋤〕·돌가래·돌낫〔石鎌〕 등의 농업용구가 있다. 유적은 하천의 하류 지역과 해안에 많다. 당시 사람들은 집락(集落)을 이루어 정주하면서 씨족사회를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시대>

BC 1000년대 중국 북동부인 만주에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청동기문화가 나타나고 있다. 토기는 한국의 팽이 모습을 한 무늬없는 민무늬토기〔無紋土器〕로 변화하였다. 청동기에는 손칼〔刀子〕·끌〔鑿〕·도끼〔斧〕·지륜(指輪) 등이 있다. 농업은 한 단계 더 발달하였고, 돼지·소·말의 사육도 행하여졌다. 사유재산제도는 이 때부터 싹텄고, 권력을 지닌 지배자층이 출현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세워진 고인돌〔支石墓〕은 그 상징이다.

[고대사회]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수세기에 걸쳐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무기·거울·말갖춤〔馬具〕·수례갖춤〔車具〕·공구·장신구 등이 다양하고도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또 청동기와 더불어 철제 무기·농구도 나타났다. 청동기문화·철기문화는 랴오허강〔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북서부 일대를 중심으로 개화하여 곧 남쪽으로 퍼졌다.

<동이족의 문화권과 단군조선>

청동기를 사용하던 민무늬토기인들이 한국민족의 근간이 되는데 이들은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나타나는 동이족(東夷族)으로 알려진다. 동이족은 당시 화이허강 이북의 연해 일대인 장쑤성〔江蘇省〕·안후이성〔安徽省〕의 일부로부터 산둥성〔山柬省〕·허베이성〔河北省〕을 거쳐, 보하이만을 끼고 랴오허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살았던 민족의 총칭이었다.

동이족은 중국 북서지역으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남동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허베이·산둥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산둥 방면의 동이는 은대(殷代)로부터 한족(漢族)과 끊임없는 접촉과 투쟁을 벌였고, 주대(周代)에 이르러서는 화이허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연합세력을 이룬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동이족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정책에 따라 한족에게 점차 동화·정복되거나 구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광의의 동이족이 한(韓)·예맥으로 일컬어지는 민족이었고, 몇 차례의 민족이동을 계속하면서 중국의 북동지방, 만주, 한반도 등지에 우수한 금속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한국사에는 최초의 국가형태를 갖춘 고조선(古朝鮮)이 등장하였다. 13세기의 승려인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桓雄)과 곰의 화신인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고조선을 건국하는 신화가 실려 있다.

즉, 제석천(帝釋天)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풍백·우사·운사 등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신단주 아래 내려와 신시를 베풀고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일을 교화하다가 뒤에 곰에서 화신한 여인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堯)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을 건국,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이 단군신화는 몇 가지 역사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즉 부족의 시조를 하느님의 손자에 비유하는 천신사상, 제사장인 단군과 정치의 수장인 왕검의 동시사용에 보이는 제정일치사회, 단군의 어머니를 곰에 비유하는 곰 토템씨족설, 풍백·우사·운사 설화에 보이는 원시농경사회적 요소가 포괄되어 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숭배 사조가 신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천신사상과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 최초의 부족국가인 고조선의 시조 단군은 BC2세기경 신화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후세에 민족의 시조로 추대되고 이에 따라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성장과정에서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철기문화의 전래와 위만조선>

중국의 전국시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철기문화는 장성 밖으로 파급되어 그 곳에서 북방 스키타이계 청동기문화와 혼합되고 BC 4세기∼BC 3세기에는 압록강중류를 거쳐 청천강과 대동강 상류로 들어와 먼저 서북 평안도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새로운 금속문화의 전래는 생활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가옥은 움집에 온돌장치를 한 것이 나타나고 또한 지상에 목조가옥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세형동검(細形銅劍)·동과(銅戈) 등의 청동기 무기 외에 쇠검〔鐵劍〕·쇠살촉 등 철제 무기를 가지고, 말갖춤을 사용하였다. 무기 이외에도 철기문화의 유적에서는 흔히 가래·낫·보습 등의 발달된 농구가 출토되었다.

이리하여 초기 철기인들은 새로운 무기와 농구를 사용함으로써 종래의 고인돌인〔支石墓人〕을 가볍게 구축할 수 있었다. 이 금속문화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토착화로 이어졌다. 이로써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중국 유이민과 토착민과의 연합정권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즉 위만조선은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한 식민정권이라기보다는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이(流移) 동이계 한인(韓人)과 토착 조선인의 연합정권이었던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의 군현>

고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BC108년 멸망하였다. 한은 고조선의 고토(故土)에 낙랑(樂浪)·진번(眞番)·현도·임둔(臨屯)의 4군을 설치하여 중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낙랑군 이외의 3군은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거나 혹은 타지역으로 이전되었으나 낙랑군만은 후대의 4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그 사이 3세기 초에는 낙랑군의 남부에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었다. 낙랑과 대방 2군은 중국 역대왕조의 동방지배 거점이 되었다. 4군 및 대방군의 정확한 오늘날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즉 낙랑군치가 있던 곳은 평양 부근이 아니고 랴오둥〔遼東〕반도로서, 평양 부근에 있던 것은 낙랑군이 아니고 한국인이 세운 낙랑국(樂浪國)이라는 설 등이다.

아무튼 군현 설치 이후의 중국 지배에 대해 한국의 제족은 항전을 시작하였다. 선봉장격인 고구려는 부여족의 일파로서 압록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기원 전후에 왕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 역대의 왕조와 악전고투를 거듭하였고 또 주변 제종족을 정복하면서 4세기 초 낙랑군을 아울렀으며 계속해서 대방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약 400년간 지속된 중국의 한국 일부지역에 대한 지배는 종결되었고, 고구려는 만주에서 한국 북부에 이르는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연대로부터 660년의 백제멸망, 668년의 고구려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삼국이 고대왕권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때, 백제는 8대 고이왕 때이고, 신라는 17대 내물마립간 때부터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시기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불린다. 원삼국시대 이래 철기문화의 급속한 보급은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생활의 능력과 군사능력을 크게 발달시켰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부족통합을 촉진시키게 되었고, 밖으로는 중국의 식민지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왕권의 성립과 그 지배력의 강화를 보게 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교통요충지에서 성장하며 태조왕 때 동해안지역에 진출하였고 청천강 상류지역을 확보하면서 계속해서 랴오둥지방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미천왕 12년(311)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였고, 계속해서 중국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약 100년 늦은 고이왕 때부터 발전하였는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국식민세력과의 힘든 대결을 겪었다. 반면에 3세기 초부터 가야 등 주변세력들과 대항하는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고 있던 신라는 낙랑군과 연결된 부족들, 가야의 지배하에서 조종을 받던 왜(倭) 및 한강 상류지역을 개척하고 있던 백제 등과 빈번한 충돌을 하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삼국은 각각 중국의 제도·문화를 흡수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토지와 인간의 획득을 목적으로 서로 항쟁하였다. 그 가운데 고구려의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신라를 복속시키고 백제를 공격했으며, 중국과 교전하여 광대한 왕국을 세웠다. 그 뒤 장수왕은 도읍을 압록강 중류역의,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인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427),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산성(漢山城)을 빼앗긴 뒤 도읍을 웅주(熊州)로 옮겼고(475), 다시 사비성으로 옮겼다(538). 또 왜와 연맹하여 고구려·신라와 대항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가야연맹을 병합한 뒤, 한강 하류를 장악하고서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삼국의 관등조직은 고구려 14등급, 백제 16등급, 신라 17등급으로 조직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불교의 전래로 부족국가시대에 비하여 크게 확대되고 복잡해진 고대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하는 한편 고도의 다양한 불교문화·예술을 꽃피워 삼국의 고대문화 발전의 길잡이가 되었다. 또 한문학이 수입되어 학문수준이 고양되었으며, 이와 같은 문화축적은 후진국 일본을 교화시키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발해>

삼국이 항쟁하며 발전한 4∼6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남북조(南北朝)의 혼란기로서 한국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6세기 말에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그 힘은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수는 7세기 초 3번에 걸쳐 고구려에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분투로 패퇴하였고, 4번재 침공을 계획하던 중에 자국내의 농민반란으로 인하여 멸망하였다(618). 계속해서 당(唐)도 7세기 중기에 몇 차례나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번변이 고구려의 반격에 굴복하였다.

이에 당은 작전을 바꾸어, 바다 건너 백제를 침공하였다. 이 때, 신라는 숙적을 물리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나·당의 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무너뜨렸고, 또 백제를 원조하기 위해 온 일본군을 백촌강(白村江)에서 대파하였다(663). 뒤이어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내부적 균열이 생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고토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했으나, 당의 한반도 점령에 반대한 신라와 6년간(671∼676) 전쟁을 벌인 끝에 패퇴하고서 쫓겨났다. 당의 철퇴(撤退)에 따라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 광대한 국토를 지배하기 위해 신라는 율령제도(律令制度)를 채용하고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건설을 이루었다. 집사부(執事部)·조부(調部)·창부(倉部)·예부(禮部) 등의 중앙관청, 9주5경 및 군현 등의 지방통치기구, 9서당(九誓幢) 10정(十停)의 군사조직 등을 7세기 말까지 정비하였다.

왕족과 귀족은 골품제에 의해 특권이 지켜졌으며, 그들이 거주한 수도 경주에는 전국으로부터 공물이 운입(運人)되었다. 아울러 장려한 궁전·관청·사원·저택이 세워졌다. 경주 주변에 남아 있는 사원·불상·동종과 고분으로부터의 출토품 등은 당시의 영화(榮華)를 보여준다.

한편 멸망한 고구려지역과 한반도를 경영하기 위해 당이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신성(新城)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만을 통치하게 된 지 20여 년 후 중국은 안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전횡과 밖으로 거란족(契丹族)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나 내우외환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좋은 기회에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으로 알려진 대조영(大祚榮)이 다수의 말갈족(靺鞨族) 세력을 규합하고 지금의 지린성 둔화현〔敦化縣〕 밖에 성을 쌓고 건국의 터전을 쌓은 뒤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을 칭하기에 이르니, 곧 발해(渤海)의 건국이다.

건국 이후 한동안 침체상태를 겪기도 하였으나 중흥의 영주(英主)인 10대왕 대인수(大仁秀)에 이르면서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당시에 <방2천리(方二千里)>였다는 영토가 <방5천리(方五千里)>로 확장되었다. 사실 최성기 발해의 범위는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을 중심으로 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일부, 한반도 북부, 소련의 연해주(沿海州)에까지 미쳤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선진 중국문물을 흡수하여 대규모의 짜임새 있는 수도(首都)를 가졌고, 최근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을 보면 불교문화가 꽤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시라무렌강〔西喇木倫〕에서 흥기하여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야울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한 채, 15대 22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고려사회]

<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

신라 말 고려 초에 걸쳐 한국 고대사회는 중세사회로 큰 전환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역사는 한 민족 한 사회 안에서, 그리고 같은 지역 안에서 자기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중세문화를 성립시킴으로써 고대에서 중세로 계기적(繼起的)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성취는 민족문화의 저변폭의 확대와 민족문화 능력의 전체적 증대에서 온 것이었고, 보다 강력한 민족문화전통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진골귀족(眞骨貴族) 중심이고, 수도 경주의 집중적인 고대문화에 반발하면서 성장한 지방호족(地方豪族)이 주체세력이 되어 성립시킨 중세문화로서의 고려문화는 2가지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로 고려문화는 안으로 신라시대의 고대문화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그리고 밖으로는 중국과 다른 성격의 전통과 사회기반 위에서 문화밀도가 크게 높아지고 개성 있는 문화를 성립시켰다. 그런 까닭으로 선진적인 송(宋)문화를 수입함에 있어서도 모방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독특한 개성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운영원리로서의 유교정치이념(儒敎政治理念)의 수립, 그리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속장경 간행에 나타난 바와 같은 국제적인 문화활동,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독창적인 선교통합사상체계(禪敎統合思想體系)의 수립 등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능력의 발휘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고려문화는 실로 이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말기에 가서 대내외의 시련으로 그 국가 자체는 멸망하였으나, 그 사회 안에서 다음 시대의 주인공을 양성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계속적인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둘째로 고대문화의 모순을 자체적으로 극복하였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문화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곧 새로운 문화의식을 토대로 한 보다 강력한 민족의 공동체의식(共同體意識)을 성립시켰다.

태조 왕건(王建) 때 후백제와 연결된 거란(契丹)을 경계하고 거란에 망한 발해의 유민(遺民)을 포섭하면서부터 북방의 유목민족(遊牧民族)이나 반농반목(半農半牧)의 민족과는 대립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농반목의 문화단계에 머물러 있던 거란의 침입에 대해서 자기 문화의 수호관념이 강렬하게 성립되어 있었고, 이러한 고려인의 문화의식과 민족의식은 대거란전쟁(對契丹戰爭)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성공하여 거란의 팽창을 막은 것은 안으로 민족의 문화능력에 대해 더욱 자신을 갖게 하였고, 밖으로 고려·송·요(遼)가 정립(鼎立)하는 국제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여 문화의 발전을 한층 더 가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뒤에 가서도 그러한 문화능력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서 30여 년에 걸친 항전을 전개하여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민반란과 무인정권>

12세기 이래 고려 정계에서는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지배체제는 동요되었다. 또 지방에서는 농민의 유망(流亡)과 반란이 일어났다. 그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때까지 문신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무신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였다(1170).

얼마간 무인 상호간의 권력투쟁이 계속되다가 1196년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이 성립하였다. 이것은 한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인정권은 몽골의 침입에 따른 정세변화를 겪다가 무너지게 되었다.

<외압과 몽골의 침입>

고려시대는 아시아의 북방민족이 활약하여 남방 농경민족을 괴롭히던 시기였다. 고려도 북방민족의 남침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0세기 말∼11세기 초에 걸쳐서는 거란(遼), 12세기에는 여진(金), 13세기 이래 몽골(元)족의 침입을 받았다.

특히 몽골은 약 30년(1231∼59)에 걸쳐 고려 전토를 구략(寇掠)하였다. 최씨무인정권은 완강히 항전하였으나, 화친을 주장한 문신파에게 무너졌다(1259). 이후 고려는 몽골의 번국(藩國)으로 전락하여 내정간섭을 받았고, 2차례의 일본원정에 참전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어 14세기가 되자 왜구(전기 왜구)가 내습하여 전 해안선뿐만 아니라 오지까지 황폐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환 중에서 토지는 소수의 권력자 손에 집중되었고, 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잃게 되었으며 관료 가운데에도 토지와 녹(祿)의 지급에서 누락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조선사회]

<조선왕조의 성립과 발전>

조선왕조는 고려 후기에 누적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몽골·홍건적·왜구의 침략과 명(明)의 압박으로 인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려는 참신한 이념을 지닌 사대부문인층(士大夫文人層)과 일부 무장(武將)들에 의해서 개창되었으며, 여기에 하층민의 협조도 크게 작용하였다.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 문인들은 대체로 송학의 이념을 지표로 삼아 불교에 의해서 지탱된 구질서를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개혁의지를 왕조교체로까지 몰고 간 것은 특히 신분이 낮은 문인과 무인들이었다.

새 왕조는 이렇듯 급진적 성향을 가진 세력에 의해서 개창되었으나, 차츰 온건파 사대부가 참여하여 두 흐름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수성(守城)이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5세기 100년간에는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하층민의 경제생활이 개선되고,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폭넓게 절충한 실용적이며 개성 있는 문화가 꽃피었다.

16세기에는 대외관계가 안정되어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안으로는 권력과 부(富)가 지나치게 중앙에 집중하는 폐단이 생기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서 향촌의 자율성을 높이고 문인 위주의 도덕정치를 구현하려는 정치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들이 곧 사림(士林)으로서 그들의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적인 정치감각을 가진 훈구세력(勳舊勢力)과 몇 차례 충돌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16세기 말(선조)에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정치는 정치의 지방적 확산과 활발한 비판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지나친 문약과 파벌〔朋黨〕간의 대립으로 왜란과 호란을 자초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두 난을 거치면서 일부 사림들은 주자학적 사회질서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한계를 느끼고 양명학·고증학·천주교 등 새로운 외래사조와 민간신앙을 흡수하면서 세계사의 진운에 발맞추어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지도층은 주자학을 고수하면서 구질서를 지켜 나가려고 하였다.

18세기 중엽의 영·정조시대에 부분적으로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보수적 유림의 반발로 미봉에 그치고, 19세기 이후로는 보수파의 일당독재가 출현하였다.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그것이다. 세도정치하에서 국가기강은 극도로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하여 민생은 어느 때보다도 피폐하였으나, 이 시기에도 세계사의 조류에 발맞추어 사회를 혁신하려는 농촌 출신의 향반층(鄕班層)과 도시 출신의 중인층(中人層)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그들은 실학을 더욱 과학적으로 발전시켜 갔으며, 농민·상인·노동자층과 연결하여 민란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왜란과 호란>

당쟁이 격화하던 시기에 왜구(후기 왜구)가 내습하였다. 계속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군이 침입하여 전후 7년간(1592∼98)에 걸쳐 전국토가 병화(兵禍)를 입었다. 이에 대해서 양반·유생·승려 등이 농민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또 해상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일본의 해군을 격파하여 보급을 차단했으며, 명(明)의 원군(援軍)도 참가하여 결국 일본군은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철퇴(撤退)하였다. 그 뒤 후금(淸)군이 2차례(1627,1636∼37) 침입하였고, 조선은 청에게 사대의 예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이러한 외적의 침입, 특히 일본의 침입은 막대한 재해를 입혔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멀지 않아 전재(戰災)로부터 일어나면서, 새로운 발전을 시작하였다. 17세기후반 이래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여, 정기시인 장시(場市)가 전국에 성립되었고, 주조화폐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농업에서는 2모작의 보급에 의해 상품작물의 재배가 성행하였고, 종래의 양반지주 외에 농민 출신의 서민지주가 나타났다. 18세기가 되면서 농업에서 분리된 전업(專業)의 수공업자가 증가하였고, 광산에서는 부역노동에 의한 임금노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구래(舊來)의 특권적 어용상인에 대항하여, 장시를 돌아다니며 행상과 점포를 개설하는 객주(客主)·여각(旅閣;問屋)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경제의 발전은 농민층의 분해를 이끌게 되어, 일부는 부농화(富農化)·지주화(地主化)하였고, 대다수는 영락(零落)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관직과 양반신분의 매매가 일어나 전통적 사회질서를 동요시켰다.

<새로운 사상·문화의 대두>

사회적 변동은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창출하였다. 국교(國敎)로서의 권위를 과시한 주자학이 관념론(觀念論)과 의례론(儀禮論)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자연과 사회의 합리적 인식과 현실비판을 목적으로 한 실학(實學)이 대두되었다. 자연과학·철학·역사학·지리학·농학·언어학에서 문학·미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새로운 기운이 일게 되었다.

그즈음 중국을 경유하여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지식층과 농민층에 폭넓게 퍼져 나갔다. 새로운 사상의 대두를 정부는 두려워하였는데, 이에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1801, 신유사옥)이 시작되어 전통질서를 비판하는 사상을 사설(邪說)로서 이단시하였다. 이 때문에 실학의 정상적인 발전의 길은 저지되었고 소수의 지식층 중에서만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밖에 농민들 사이에서는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민족종교가 널리 퍼졌는데, 이는 서양의 침략에 반대하는 동시에 기성의 신분질서를 부정하였고 농민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였다. 최제우는 처형당했으나(1864) 동학은 농민들의 신앙심을 모았다.

사상계의 변동과 아울러 19세기에는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1811∼12), 남부일대를 소란으로 몰아넣은 진주민란(1862)은 대표적인 예로서 왕조지배체제를 동요시켰다.

[근대사회]

완만하게나마 중세적 사회체제를 내재적으로 극복하면서 근대사회를 지향해 가고 있던 조선왕조는 개항을 계기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강압적으로 편입되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러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통치구조를 개편하고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개국통상 쪽으로 기울어, 조선은 열강들과 갖가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평등조약체제하에서 이루어진 대외무역은 조선의 사회·경제를 점차 반식민지적으로 재편하여 갔다. 조선의 사회세력은 미증유의 사회변동에 대처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세 갈래로 분립하였다.

첫째는 왜양(倭洋)과의 통교를 단절하고 유교적 신분사회질서를 고수하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세력이었다. 둘째는 서양의 법률·제도와 과학·기술을 일정하게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개화세력이었다. 셋째는 조선 후기 이래의 사회개혁론의 전통을 이어받아 토지의 균등분배를 실현하고 신분제도를 타파하려는 농민세력이었다.

위정척사세력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하였고 개화세력은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개혁(甲午改革) 및 독립협회운동을 거쳐 구국계몽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반면 농민세력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운동 및 항일의병투쟁에서 주력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사회세력들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득실과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협력과 대립이 착종(錯綜)하였다. 그리고 각 세력이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상호협력하여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선의 개국 후, 일본인 상인들은 곡물과 금의 지금(地金)을 사들였고, 대신 목면과 잡화를 팔았다. 조선에서는 물가가 등귀(騰貴)하여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유자(儒者)는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서양화한 일본을 배격하였고, 일본에 협력한 민씨정부(閔氏政府)를 공격하였다. 그런 시기에 서울에서 병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반정부·반일의 군란이 발생하였다(1882).

이때 일본을 견제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이 출병하여, 난리를 진압한 동시에 친청보수파정권을 세웠다. 이에 대해 근대적 개혁에 의한 조선의 독립과 부강을 목표로 한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를 누르고 개화파정권을 세웠으나, 청군의 반격에 의해 삼일천하(三日天下)의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1884).

<동학농민운동>

서양열강이 점차로 밀려오고, 조선은 열강항쟁의 무대가 되었다. 조선의 식민지화의 위기는 날로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관료는 혼란에 편승하여 농민에 대한 주구(誅求)를 가중하였다. 이 때 동학의 유대로 맺어진 농민은 반외세·반봉건의 농민혁명운동을 일으켰다(1894). 농민군은 정부의 토벌군을 타파하면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처단, 노비·천민의 해방, 과중세금의 폐지, 토지의 평균분배, 과부의 재혼 허가, 외적과 내통한 자에 대한 처벌 등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농민군을 자력으로 진압할 수 없었던 정부는 청에 출병을 청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도 역시 출병하였다. 일본은 청군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화파정권을 세웠다.

이 정권은 근본적으로, 관료기구의 정비, 화폐·도량형의 통일, 세금의 금납화, 양반(兩班)과 양인(良人)과의 신분차별 철폐, 노비·천민의 해방, 과부 재혼의 자유 등의 개혁을 표방했는데 (1894), 여기에는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 중에 제기되었던 요구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민중의 눈에는 침략의 수단으로 비추어졌으며, 개혁의 성과는 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획득했다고 여겼으나,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고(1895), 조선에서는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득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세불리(勢不利)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공사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군인·깡패를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하고, 반일파였던 명성황후(明成皇后) 를 시해하였다(1895, 을미사변).

<의병>

명성황후 살해는 한국민들을 격분시켰다. 유자(儒者)를 지도자로 하는 의병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일본 및 친일관료에게 저항하였다. 의병의 진압을 위해 정부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사이 러시아와 결탁한 일파는 국왕을 왕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놓았다(1896, 아관파천).

이에 따라 개화파정권은 무너지고, 친러파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연속선상에서, 철도·광산·삼림 등의 이권은 차츰 서양 및 일본에 팔아넘어가 조선의 위기는 한층 심화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급진적 개화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독립협회를 결성하였으며(1896), 조선의 민주화에 의한 독립의 달성을 목표로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쳤고, 자주독립국가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개화파는 한때 정부를 움직여 의회정치를 발족시키기도 했으나 보수파가 반기를 들고 탄압을 가함에 따라 해산되고 말았다(1898).

[민족의 수난과 저항]

<일제의 식민지 정책>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의 불법적인 수단에 의하여 강점된 후 45년의 8·15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1906년 2월 이래의 통감부(統監府)를 조선총독부로 고치고, 일본 육군대장 출신인 데라우치 마사요시〔寺內正毅〕를 초대 조선총독으로 하였다.

초대 총독제를 보면,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실시하였다. 즉 무력지배의 본거로 중앙에 경무총독부(警務總督府)를 두어 경무총감에 주한헌병사령관을 임명하고 그 밑의 각도 경찰부장에는 각도의 헌병대장을 겸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결사(結社)와 정치적 집회는 물론, 옥외에서 행하는 비정치적인 집회까지도 금지하였고, 식민지지배에 비타협적인 인사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하여 검거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을 위압하고자 일반 관리나 학교의 교원들까지 제복과 칼을 착용케 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의 지식이 향상되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사상이 싹터 독립을 주장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식민지 교육만을 강요하여 보통교육과 실업교육만 허락하였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의 특징은 식량·공업원료의 공급지 및 상품판매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적 경제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토지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1905∼18)을 강행하였고, <회사령(會社令)>을 시행하여 민족자본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3·1운동>

일제의 무단통치에 반발하여 서울에서 폭발한 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는 평양·개성·원산·함흥 등의 주요 도시를 거쳐 주변의 농촌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남한 일대로 파급되어, 5월 말까지 전국 230개의 부·군에서 200여 만 명의 사람들이 1500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대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은 비록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이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민족공동의 의사를 온 세계에 알리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역량을 보여주어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특히 3·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즉 민족운동의 형태는 보다 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고 혹은 사회운동과도 연결되어, 새로운 내용을 지닌 독립운동으로 성장하여 갔다. 요컨대 3·1운동은 민족운동사상 위대한 공헌과 전통을 남긴 운동이었다. 3·1운동은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의 새로운 각성을 일으켜, 이후의 거듭되는 민족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무력으로 3·1운동을 진압하고서,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나, 이는 표면적인 현상의 변경일 뿐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민족의 근대적 성장을 근본적으로 탄압하고, 아울러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는 고도의 통치방식으로서 하나의 기만적 회유책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1920∼34년에 걸쳐 산미증산계획 아래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자국내의 정치가 파쇼화의 길을 걸으면서, 대외 침략전쟁수행을 위하여 한국을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였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수탈과 탄압을 가중시켰고 이에 상응하여 한민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한국어의 사용금지와 한국사 교육의 금지 및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항일무장투쟁>

1931∼45년 사이에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파쇼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해 무자비한 침략전쟁을 감행한 것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이러한 객관적 정세의 불리함을 역으로 이용하여 무장투쟁의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민족국가건설의 방략을 구체적으로 모색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金九)의 지도 아래 애국단원들이 침략의 원흉들을 직접 공격하는 의열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활기를 되찾았다. 이봉창(李奉昌)은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도쿄〔東京〕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1932.1), 윤봉길(尹奉吉)은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白川〕대장 등 10여 명을 살상하였다(1932.4).

그리하여 1920년대에 침체되었던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신망은 점차 회복되어 갔다. 그렇지만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하자, 임시정부는 전황에 따라 국민당정부와 함께 난징〔南京;1932〕·항저우〔杭州;1932〕·자싱〔嘉興;1935〕·전장〔鎭江:1937〕·창사〔長沙;1937〕·광둥〔廣東;1938〕·류저우〔柳州;1938〕·치장(1939)·충칭〔重慶;1940〕 등지로 근거지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와 함께 좌우익의 통일전선으로 기존의 광복군 전력을 강화하였으며 일부의 병력은 인도와 미얀마전선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이범윤(李範允)의 의군부, 김성극(金星極)의 광복단 등이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고, 김좌진의 피살 후 이청천(李靑天)이 한국독립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최동오(崔東旿)·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 좌익계열인 김무정(金武渟)·김두봉(金枓奉)·박효삼(朴孝三)의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 등이 후자창〔胡家莊〕전투 등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밖에 소위 갑산파(甲山派)라고 불리는 김일성(金日成)·최용건(崔鏞健)·김책(金策) 등이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와 함경북도 갑산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훗날 소련 극동군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일제가 도발한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본군과 무력항쟁을 벌였다. 독립군들이 활약하였던 객관적 조건은 지극히 열악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세력이 있던 현지 사정에 따라, 중국국민당이나 중국공산당 또는 소련공산당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불충분한 장비와 보급 때문에 때로는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맨몸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식민지 조선이 일제의 파쇼지배하에서 신음하던 암흑기에, 민족의 자력해방을 목표로 삼고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였던 독립군의 존재는 항일민족운동의 본류를 이루는 것이었다.

[현대사회]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패배함으로써 한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렇지만 광복이 곧 완전한 민족국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타도세력으로서 미·소 양군이 남북한에 진주함으로써, 광복은 국토와 민족의 분단으로 직결되었다. 미·소 양국의 군정하에서 남북한의 정치·사회세력들은 식민지유제를 청산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극좌(極左)로부터 극우(極右)에 이르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건국방략과 사회구상을 둘러싸고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하였다. 이들을 중화하고 결합시키기 위한 통일지향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주도권은 이미 미·소 냉전체제에 편승하여 남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극우·극좌세력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광복 3년 만에 남북한에는 미·소 양국의 지원을 받는 상이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어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해 버렸다.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은 한국의 근대사가 추구해 온 진정한 민족국가건설의 이상을 배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임무의 배반은 곧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6·25를 거치면서 남북한 정권은 더욱 더 극단적 편향과 대결로 치닫게 되고, 국토와 민족의 분단은 고착되었다. 한반도는 동서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모순의 결절지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북한 정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더욱 극성스럽게 표방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치열하게 체제우위 경쟁을 전개하였다. 남북한 정권이 정력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정책과 국제외교정책은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남북간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배타성과 독재성은 강화되고, 국민들에 대한 이데올로기 주입과 통제 역시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남북의 대립과 반목은 원래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역사의 당위는 국토와 민족의 통일이었다. 그 때문에 남북한 정권은 그 대결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위한 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남북적십자회담,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남북조절위원회의 설치 및 80∼90년대의 남북체육회담, 남북총리회담 등이 그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은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위한 첫걸음에 불과한 시도들이었다. 통일의 문제는 여전히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최대의 역사적 과제이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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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