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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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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6-군사 안보외교 (한메)
대한민국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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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한국군의 제도확립은 미국의 제도를 기초로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 미국은 남한에 한하여 미군사고문단(KMAG)을 잔류시켜 혼란상태의 군대를 정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한국군대는 뚜렷이 무엇이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실상은 미미하였고, 오히려 경찰의 형태를 빌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대의 지도급 인사들은 일본육사 출신이나 일본군 출신 장교, 중국군 출신 독립군과 기타 국내에서 성장한 세력들로 구성되었으므로 군제도의 확립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것이 1948년 8월 정부 수립에 따라 국방부가 설립되면서 약 5만 정도의 병력을 바탕으로 군대가 창설됨으로써 성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국군의 성장과 제도적 확립은 미군사고문단의 협력과 조력에 크게 힘입었던 바 전문적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교육제도의 확립과 병력의 조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한국군의 창설 당시에 13개의 사관학교가 설립되었고, 1948년에 육군사관학교, 1949년에 보병학교와 참모학교가 세워짐으로써 1950년 6·25가 발발하기 직전까지 장교 9126명, 사병 1만 1112명이 여러 군사교육을 이수하였으며, 9만 5000명의 병력을 바탕으로 8개 사단과 1개의 기갑연대가 조직되었다.

이러던 것이 6·25 중에는 약 40만의 병력으로 증대되었고, 6·25가 끝나기 직전에는 14개 사단 52만 5000명의 병력을 가진 세계적인 규모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1950년의 6·25로 인한 많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재편성되었다. 1953년 12월에 제1군이 창설되고, 1954년 10월에는 제2군이 창설되어 20개의 사단과 10개의 예비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1956년에는 <국방대학>이 설립되었고, 그해 병력 60만에 달하는 규모의 군대로 체계화되었다. 특히 1961년 5·16은 한국군의 제도화와 장교의 전문화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군부세력은 군 내부의 부패와 파벌주의 제거, 군인 처우개선, 국방비 예산지출 엄정화 등의 <정화운동>을 추진하여 군의 건전한 제도화의 바탕을 제공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주한미군 감축과 그에 따르는 휴전선에의 방위전담 및 미국군원(軍援)의 유상화(有償化) 등을 배경 원인으로 한국은 자주국방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주적으로 국방정책을 결정하며 스스로 방위 능력을 배양하려는 자주국방정책에 따라 현대장비보유, 방위산업육성, 예비군의 동원체제 확립, 군사교육강화 등에 주력하여 방위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1970년대에 장비의 국산화가 진전되어 소화기와 탄약류 생산으로 시작한 방위산업이 1980년대 중반에 와서는 거의 모든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미국으로부터도 연간 1∼2억 달러에 이르는 현대 무기를 도입, 신예 항공기를 보유하고 레이더망의 구축, 미사일 보유 등을 통하여 방위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에 힘입어 한국의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지단 수치상으로는 북한에 뒤져 있다. 93년 현재 총병력은 한국이 65만 5000인데 비하여 북한은 103만으로 한국의 1.6배에 이른다. 지상군 주요장비 중 북한의 전차는 주력전차인 T―54계열 전차 2760여 대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신형 T―62 및 경전차 630여 대, 구형인 T―34전차 410여 대를 포함하여 총 3800여 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1800여 대의 2배 이상 수준이다. 해상장비 중 전투함은 한국이 190척, 북한이 434척이며 잠수함은 한국이 1척, 북한이 26척이다. 또한 항공장비에서도 전투기가 한국이 520대인데 비하여 북한은 850대로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한국이 FX계획(차세대전투기 구매 및 공동생산계획)으로 1998년까지 모두 120대의 최신예 FA18 전투기를 보유하게 되는 등 국군현대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고 산업기반 및 기술수준이 북한보다 우수하므로 고도장비 생산의 발전속도는 앞설 전망이다.

<한·미군사협력>

한·미 군사협력은 한국의 군사·안보문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의 전쟁기도를 억제하는 데 있어 한국은 미국의 전투력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고, 군사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견제역량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최초의 한·미간의 군사관계는 1871년 6월 10일 미국 해병의 강화상륙전에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미해병 450명의 초지진 공략전은 당시 선진국들이 후진지역에서 펼치던 식민전쟁의 전형이었다. 군사적 강자의 입장에서 군사행동의 구실이 될 제의를 해놓고, 개입핑계를 만든 뒤 전쟁을 벌여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1905년의 미·일비밀협정으로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의 독점적 지배하에 둘 것을 양해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에 대해 군사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한·미간의 의미 있는 군사적 관계는 1945년 8월에 시작되었다. 대일전의 승전국으로서의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한반도의 38도 이남에 주둔하였고, 이어 이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게 됨으로써 한국과 밀접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국의 대한군사전력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유럽에 전략적 비중을 더 두었고, 한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949년 6월까지 대부분의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고, 1950년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켰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정책은 한반도의 전쟁과 분단의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6·25가 일어나자 미국의 대한군사정책은 돌변하여 공산주의의 침략을 초기에 분쇄하지 않으면 계속 팽창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즉각 개입하였다. 6·25는 미국의 대한군사전략을 크게 바꾸어 휴전협정 이후에도 지상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강화를 위하여 광범위한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는 군사정책을 채택하였다.

1960년대 초기에 미국은 한국이 간접침략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하지 않다고 판단함으로써 대한군사원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1965년 한·미간에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방대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연평균 약 3억 4000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한국에 제공하였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에 협조함으로써 미군이 한국으로부터 철군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막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 이것을 군사력 강화에 투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의 대한군사전력은 변화하였다.

미국은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가 스스로 전투병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닉슨독트린>에 따라 한국에서 1개 사단을 철수하였고, 이에 카터대통령 때에는 보병 제2사단 철수를 준비하였다. 특히 카터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를 인권문제와 결부시킴으로써 1982년까지 한국으로부터 미지상군과 핵무기를 완전히 철수할 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철수가 남북간의 분쟁 가능성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미국의회에서 맹렬한 반대가 일어나고, 무엇보다도 북한의 병력이 남한을 압도한다는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자 카터행정부는 1979년 7월 한국방문시에 주한미군철수계획을 한반도에서 긴장이 해소될 때까지 보류한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6·25의 경우처럼 북한이 미국의 의도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또 다른 전쟁을 도발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현상유지정책에 따라 미의회는 1978년 대한군사원조 12억 달러를 승인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한국의 방위산업체는 중·장거리 지대지(地對地)미사일을 시험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1980년대에 와서 한·미군사협력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1981년 취임한 레이건대통령은 <강력한 미국의 재건>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보다 적극적인 외교·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

레이건행정부는 미·소간의 전략적 군사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핵무기의 균형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기의 균형도 중요함을 인식하였다. 즉 미행정부는 미·소의 전략적 균형을 위해서는 핵무기뿐만 아니라 해외에 배치된 군사력도 매우 중요한 변수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주한미군철수안을 백지화시켰고, 제2차 한·미안보회의에서는 한국의 군사력증강을 위해 미국의 차관조건을 완화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물론 FX계획과 같은 전력증강사업에 한국이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한국의 군사적 자립도가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군사·안보면에서의 미국의 지원은 당분간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미군사협력에서 주요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이다. 이것들은 80년대 말과 9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흐름을 타고 한·미군사협력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상황에서 주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이다.

첫째는 작전통제권문제이다. 1953년에 체결된 한·미군사협정의 가장 중요한 특색이 미국이 한국의 작전지휘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인데, 한·미군사협정이 양국군사관계의 핵심으로서 현재까지 효력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국은 미국의 동의 없이는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취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의 국내외 변화에 따라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 이양문제가 양국의 주요현안이 되고 있다.

둘째는 방위비문제이다. 제20차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미국측은 한국의 방위비 부담액을 6000만 달러 이상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4000만 달러 선에서 타결을 보았다. 미국은 경제상태가 점차 악화되고 한국의 경제력이 점차 증대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의 방위에서뿐 아니라 페르시아만과 같은 미국의 대외방위지역에 소요되는 경비도 한국이 일정부분 부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한국내에서는 방위비분담액의 증가는 조세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일고 있다.

셋째는 반미감정이다. 한국내, 특히 학생운동권에서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미국이 군의 활동을 묵인하였고, 군사독재정권을 미국이 계속 비호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한국에 대해서의 미국의 존재를 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한국의 반미감정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미국내에서는 반한감정이 고조되어 양국의 관계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다.

[안보외교]

<1950년대>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안보차원에서는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탄생하였다. 당시 한반도 주변 상황은 소련이 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북한의 군사력증강이 이루어지던 정세인 데 반해, 한국은 실질적인 전력을 갖춘 군사력을 키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안보차원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과 북한의 불법성을 알리는 외교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으로 1948년 12월 유엔은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하였으며, 1949년 말까지 미국을 비롯한 30개국이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하였다. 특히 미국과는 1948년 8월 24일에 군사안보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특수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 전에 상황은 대한민국정부에게 불리해졌다.

미국정부는 1949년 5월 28일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전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1950년 1월 12일 미국 애치슨국무장관은 한국을 자유중국과 함께 미국의 극동방위선으로부터 제외시킨다는 연설을 하였다. 정부는 5월에 방한한 덜레스 미국무장관 고문에게 북한의 침략 가능성이 긴박함을 설명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6·25가 초기의 대한민국정부에 대한 절박한 위기상황을 지나 장기간의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자 연합국측은 휴전협정 체결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정부에게 상호 휴전을 촉구하였다. 한국정부는 당초 통일에 역행되는 휴전을 강력히 반대하여 왔으나, 결국 휴전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휴전협정 조인 후의 한국의 안전보장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1953년 7월 12일에는 <한·미 양국정부는 정치·경제·방위 등의 협력문제에 대해, 특히 한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상호 노력한다>는 내용의 한·미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한국정부의 안전보장문제는 6·25종결 직후인 1953년 8월 5일에 가진 한·미 대표간의 상호회담에서 어느 정도 타결을 보았다. 이 회담의 결과 10월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 조약의 체결로 오늘날까지도 한·미공동방위의 기초가 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 조약은 제3조에서 일방 당사국이 침략을 당한 경우에는 공동대처하며, 제4조에서 미군의 한국주둔을 인정하며, 제6조에서 이 조약이 1년 전 통고가 없는 한 무기한 유효함이 선언되었다. 이와 같은 한·미방위체제하에서 정부는 1954년 1월 국군 2개 사단을 증설하고 3월 한국군 제1군을 발족시켜 전투력을 증강하는 한편 1954년 9월 27일에는 유엔군사령관 J.E.헐 대장과 경제 및 군사원조에 대한 합의에 서명하여 미국이 55년에 7억 달러를 제공하고, 한국군 증강계획에 지원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에 따라 1955년 2월 22일 한국군 예비사단이 창설되고 5월 29일에는 병기창 건설에 관한 한·미협정이 조인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한 안보를 추진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집단안보기구인 ANZUS·SEATO와 협정을 맺음으로써 안보상 의지할 수 있는 유력한 배경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안보노력은 5·16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정부는 북한이 무력남침하지 못하도록 안보를 계속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변경하지 않았다.

<1960년대>

1961년 5·16은 한국의 안보정책에 있어서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반공체제 강화, 자유우방과의 협력 강화, 자주경제 건설 등 새로운 안보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국내의 정세에 보다 현실적으로 대처하기로 하였다.

1962년에는 아프리카·중남미 및 근동지역에 친선사절단을 파견하여 비동맹국가와 교류를 강화함으로써 안보망 확대외교를 전개하였고, 미국과는 1966년 7월 <한국에서의 미군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제한적이지만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의 재판권을 회복하고 한·미 양국이 안보를 위한 공동임무를 우호와 신뢰를 통하여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져서 한·일간의 안보협력의 기틀이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일본과의 협정에서 명시함으로써 일본의 대북한 접근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자유국가들이 영토보전과 주권유지를 위해 결속하고 협력을 강화한다>라고 하는 취지를 가진 ASPAC에 한국이 적극 참여하여 안보외교를 능동적으로 전개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 사이 북한은 군사력을 크게 증강하였다. 따라서 여기에 대처할 한국내의 방위력 증강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특히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기습사건, 1월 23일 미해군 선박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하여 한국은 휴전협정 서명 이래 가장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이에 미국의 군사지원 강화를 통한 자주국방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1968년 한·미 양국간 협력강화를 위한 정기협의체인 <국방각료회의>가 창설되었고, 이러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1970년에는 <국방각료회의>도 <안보협의회>로 확대되고 거기서 한국군 현대화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을 재확인하였다.

<1970년대>

1960년대의 미·소 화해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1970년대 초부터 미·중 접근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기존 국제질서의 재편과 다극화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960년부터 강력히 추진해 온 자주국방 노력을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국제정세에 적응하여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통하여 안보를 달성하려는 정책을 취하였다.

정부는 1970년의 <8·15선언>과 1973년의 <6·23선언>을 통하여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가입함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하는 등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을 함과 동시에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안보외교방향에 따라 중립국과 비적성국(非敵性國)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정부는 아시아·아프리카·중동·중남미 등의 중립국에 매년 사절단을 파건하여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적 지지와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또 비적성 공산국가에 대한 문호개방에 따라 유고슬라비아·헝가리 등 동유럽권 상사와의 교역도 점차 확대하였다. 중립국·비적성국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안보협력보다는 학술·문화·예술 등을 통한 접촉을 확대함으로써 문호개방외교는 안보적 차원에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한편 <주한미군철군>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카터행정부에 대해서도 정부는 보완조치를 요구하여, 1977년 7월 제10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미국은 철군에 선행하여 11억 달러의 해외군사판매차관(FMS)제공, 8억 달러 규모의 군장비 무상이양, 주한미공군강화·한국방위산업지원 등을 약속함으로써 한국의 안보가 보장받게 되었다.

<1980년대>

1980년대에 들어와 국내의 정세의 격변으로 북한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우방과의 안보협력의 필요성은 보다 긴요하게 되었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사건과 옛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 등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두환대통령은 3회에 걸쳐 미국의 레이건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준수할 것과 미군의 한반도 철수계획이 없음을 보장받았고, 한국방위에 필요한 장비의 판매와 방위산업기술을 미국이 계속 제공할 것을 확인받았다.

또한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도 한·미 양국의 제반 군사·안보 협력방안을 논의하였는데, 1986년 4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미국의 대한군사판매차관의 종료에 따른 한국군 전력강화를 위해 미국이 1억 6300만 달러의 차관을 공여하기로 함으로써 한·미 연합방위능력을 높이기로 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 동북아시아에서의 소련의 군사력 팽창과 한반도에서의 북한의 군사력 증강이 이 지역 안보에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등장하자 동북아시아 안보를 위한 한·미·일간의 3각협력의 필요성이 한·일간에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83·84·86년 3회에 걸친 양국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안보협력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한·미·일 3각관계의 새로운 협력시대를 맞게 되었다.

미·일과의 협력 강화를 통한 안보체제의 구축과 함께 정부는 한국의 평화정착노력을 널리 알리고 국제적 지지를 획득하는 전방위(全方位)외교를 전개하였다. 전두환대통령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연속적으로 방문함으로써 이들 지역의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미·소관계가 신(新)데탕트에 접어듦으로써 소련이 한국에 공식적인 경제협력관계를 희망하고 중국 또한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교류에 호응하여 관계가 점차 개선되었다. 또한 동유럽권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국의 외교영역은 대폭 확대되었다. 이른바 <7·7선언>으로 표방되었듯이 한국은 중·소·동유럽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우회적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남북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함으로써 평화적 통일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외교의 지평이 확대되면서 한국의 안보환경도 크게 변화되고 있어 1990년대는 한국 안보외교에 있어서 도전과 기회의 시대가 될 것이다.

<1990년대>

옛 소련이 해체되고 동서냉전체제가 와해되어 전세계적 차원에서 화해협력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지역에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 문민정부 출범 초기부터 동북아의 다자간 안보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주도하는 외교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미국은 1990년대 들어 동북아 안보환경 변화와 재정적자 누증에서 비롯된 국방비 삭감압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대한(對韓) 안보정책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분담 확대요구, 주한미군 감축과 역할조정, 한반도 비핵화정책과 핵우산정책의 병행추진 등과 같은 정책조정을 모색하고 있다.

1993년 11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핵문제, 안보·경제 협력증진방안, 아시아·태평양공동체 형성을 위한 협력방향 등에 관해 폭넓게 논의하였다. 중국은 한·중 수교가 실현된 상황에서 북한의 고려연방제에 대한 일방적 지지를 수정하여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변화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수교에도 불구하고 정경분리원칙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일본의 호소카와〔細川讓熙〕총리는 1993년 11월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일 양국의 새로운 선린동반시대를 선언하고, 북한핵문제 해결 없이는 일·북한 수교 불가 방침을 천명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대아시아 외교활동은 고르바초프시대의 개혁·개방정책을 대체로 계승하고 있다.

1992년 옐친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졌던 것은 한·러 관계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옐친대통령은 조·소(朝蘇) 우호협력조약의 사문화 내지는 변경을 시사했고 한·러간의 우호협력을 다지는 새로운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1993년 옐친정부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철회를 촉구하였고, 한반도의 평화지대로의 전환을 국제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러·중·일·미 4개국 국제회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1993년에 들어 러·북한간에 군사동맹조항 변경문제가 논의되어 조·소 군사동맹조약의 효력이 사문화되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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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