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3 (일) 07:30
분 류 사전3
ㆍ조회: 809      
[근대/현대] 독도의 역사 (민족)
독도(역사)

세부항목

독도(獨島)
독도(자연환경)
독도(어업환경)
독도(역사)
독도(독도문제)
독도(독도에 대한 뿌리의식)
독도(참고문헌)

동국지도 중 독도 부분. 1463년(세조 9) 정척, 양성지가 제작한 ≪동국지도≫에 보이는 독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독도에 관한 인식]

울릉도와 독도는 모자관계에 있는 섬들이다. 가령, 독도의 옛 이름은 우산도(于山島)이지만 혹은 자산도(子山島)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모도인 울릉도의 자도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도는 오랫동안 무인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와 관련지어 가면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내륙의 유민(流民)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 울릉도의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귀복(歸服)한 것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의 정벌이 있은 6세기초(512년, 지증왕 13)부터였다. 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쳐 왔다. 고려가 개창되자 우산국은 이 새 왕조에도 토산물을 바쳤다. 6세기 초엽 이후 우산국은 내륙과 조공 관계를 맺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우산국은 11세기 초엽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갔다. 반면 고려 왕조에서는 12세기 중엽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원들을 울릉도로 파견하였다. 내륙인을 이주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이 무렵, 즉 12세기 중엽부터 울릉도는 동계 울진현(東界蔚珍縣) 관할로 편입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관원을 자주 파견한 결과 울릉도는 물론 독도에 대한 지견도 어느만큼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지리지 울진현조에 비록 ‘혹은’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였지만, “우산(于山)·무릉(武陵)은 본디 두 섬으로 서로 떨어짐이 멀지 않아 풍일이 청명하면 바라 볼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지견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금도 날씨가 맑을 때 울릉도에서 독도를 바라볼 수 있다. 울릉도에는 고려 말부터 내륙 연해민들의 이주가 다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그 초기인 15세기 초엽부터 공도정책을 결정하고 거민쇄환을 위하여 관원들을 자주 울릉도에 판견하였다. 그 결과 울진현 정동(정동)바다 가운데 우산·무릉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 “우산·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 바다 가운데 있다”하고 그 주기(注記)에서 “두 섬은 떨어짐이 멀지 않아 풍일(風日)이 청명(淸明)하면 바라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바로 두 섬에 대한 조선 초기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편찬 연대가 뒤짐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의 지리적 지견을 반영하는 ≪고려사≫ 지리지에 붙어 있던 ‘혹은’이라는 단서가 두 섬에 대한 지리적 지견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르러 비로소 삭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15세기 초엽 이래 울릉도에 대한 공도정책이 계속 시행되어 거민들을 쇄환하고 이들에게 ‘본국(本國)을 모배(謀背)한 죄’를 적용, 처벌한 결과 연해민들의 왕래는 끊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산도나 무릉도는 점차 잊혀져 가는 섬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 동해에 요도(寥島)니 삼봉도(三峯島)니 하는 섬이 있다는, 필경에는 독도와 울릉도를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할 신도설(新島說)이 세종·성종대에 특히 함길도(咸吉道:영안도 永安道) 연해민들 사이에 나돌게 되었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의 우산도·울릉도 기록을 그대로 옮겨 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서 ‘두 섬[우산도·울릉도]이 울진현 정동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계승하면서도 그 주기에서 ‘일설에는 우산·무릉은 본디 한 섬이라고 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고개를 들기 시작한 울릉·우산 1도설은 조선 후기로 들어와 일어난 조·일간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매듭지어지고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울릉도 수토제도(搜討制度)가 실시 되면서 바로 잡혀 갔다.

[독도의 영유권 문제]

조·일 양국 간에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일어난 것은 17세기 말엽(숙종조)이었다. 동래출신 노군(櫓軍) 안용복(安龍福) 등은 1893년(숙종 19) 봄에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그곳에 와 있던 일본인들, 즉 백기국(伯耆國) 미자정(米子町) 대곡가(大谷家) 등의 어부들에게 잡히어 일본으로 끌려 갔다.

17세기 초엽 이래 막부의 도항면허(渡航免許)를 받아 고기잡이를 해 오던 죽도(울릉도) 근해 어장을 침범했다는 겄이었다. 안용복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측에 울릉도와 자산도(자산도:子山島:우산도 芋山島)가 조선의 지계(地界)임을 주장하였고, 마침내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관백(關白)의 서계(書契)를 발급 받기까지 했다.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륜(宗義倫)은 안용복에게서 관백의 서계를 탈취하는 한편 동래부(東萊府)로 서계를 보내어 조선 어민의 죽도로의 출어 금지를 요청하여 왔다. 대마번(對馬藩)에서는 일찍부터 울릉도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부 내에서 한 때 온건론이 고개를 들기도 하였지만 점차 강경론이 우세하여 갔다. 그리하여 죽도, 즉 울릉도는 강원도 울진현의 속도(屬島)요, 따라서 조선 어민이 범계(犯界)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앞으로 일본 연해민의 울릉도 왕래를 금한다는 내용으로 정부의 입장을 최종 정리한 서계를 일본측에 보내었다. (1694년, 숙종20).

대일본 강경책을 취하면서 정부에서는 삼척첨사(三陟僉使)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파견하였다. 일본인의 침어에 대비하여 민호(民戶)를 이주시키거나 진을 설치할 수 있는지, 그 형세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보고에 따라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왕래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1년, 혹은 2년을 걸러서 한 번씩 수토(순검·수색)한다는 방침을 일단 확정지었다.

울릉도 영유권 분규는 대마도에 새 도주(島主) 종의방(宗義方)이 들어서고 그의 부 종의진(宗義眞)이 뒤를 보살피면서 매듭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종의진도 한 때 강경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지만 막부의 방침이 평화적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이제까지의 교섭 전말을 보고하고 그 지령을 기다렸던 바, 막부에서는 죽도(울릉도)가 조선의 지계임이 분명하므로 일본 어선의 왕래를 금하며, 이 뜻을 조선에 알려야 한다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막부로부터 죽도 도항 금지령(竹島渡航禁止令)이 내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일찍이 막부가 백기국 대곡·촌천(村川) 양가에 내린 죽도 도항 면허를 취서하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용복의 제2차 도일 사건도 분규의 해결을 촉진시켰다. 안용복은 이해 울릉도에 출어한 일본 어선을 송도(松島)로 추격하여 쫓아 버렸다.

울릉도는 물론 “송도는 바로 자산도(우산도)로, 이 또한 우리 나라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옥기도(玉岐島:은기도 隱岐島)를 거쳐 백기주로 가 수주에게 울릉도와 자산도는 관백이 서계까지 발급하여 인정한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주수로부터 전날 경계를 침범한 15명의 적발 처벌과 앞으로의 일본인의 울릉도·자산도로의 범월(犯越)을 금지시키겠다는 등의 다짐을 받고 8월에 강원도 양양현(襄陽縣)으로 돌아왔다.

이런 소식은 대마도를 당황하게 하였다. 도주는 1696년 10월 전 도주의 문상차 건너간 조선 측 역관들에게 일본인의 울릉도 어채를 금한다는 막부의 결정을 전하였고, 다음해 2월 이 사실을 동래부로 알려 왔다. 정부는 일본측으로부터 이런 통고를 받자 ‘간이년’즉 3년에 한번씩 울릉도에 관원을 보내어 수토하는 것을 정식화하였다.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일어나면서 그 수토 방침을 확정지었고, 분규가 매듭지어지면서 이를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수토가 정기적으로 계속 실시됨에 따라 오랫동안 잊혀졌던 울릉도의 지리가 점차 자세히 밝혀져 갔다. 삼척첨사 장한상의 수토 때는 이미 우산도(독도)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헌에서도 우산도를 국토로서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문헌에 나타난 독도]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 彊界考≫ 울릉도조에는 동해에 우릉도와 함께 우산도가 있다는 것, ≪여지지 輿地志≫의 기사임을 들어 우산·울릉은 두 섬으로 하나가 일본측에서 부르는 송도(독도)이며, 모두 우산국 소속이라는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여지지≫는 17세기 중엽인 1656년에 유형원(柳馨遠)에 의하여 저술된, 지금의 실전(失傳) 하는 지리서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용복사 安龍福事 조에서도 송도가 우산도이며, 그것이 조선 영토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준은 18세기 말엽인 1770년(영조 46)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 편찬 사업에도 참여하여 ≪여지고 輿地考≫를 담당 편찬하였다. 그는 ≪여지고≫ 울진조에서 우산·울릉도를 다루면서 ≪강계고≫ 의 울릉도·안용복사조의 기사를 거의 그대로 전재하였다.

그러면서도 우산도는 일본측이 부르는 송도, 즉 오늘의 독도로 “우산국의 땅” 즉 ‘우리의 땅’임을 보다 분명히 하였다. 이 ≪동국문헌비고≫는 왕명에 따라 역대의 장고(掌故)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이를‘경제(經濟)의 도구’로 활용할 목적으로 편찬된 유서다. ≪동국문헌비고≫에 이어 19세기 초엽에는 ≪만기요람 萬機要覽≫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그 군정편 4, 해방(海防)동해(東海)조에는 ≪증보문헌비고≫에 실려 있는 ≪동국문헌비고≫ 울진현조의 중요 기사를 가감없이 전재하고 있다. 이는 우산도가 일본측에서 부르는 송도로 조선령이라는 ≪동국문헌비고≫의 견해를 ≪만기요람≫에서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만기요람≫은 국왕이 좌우에 놓고 참고할 목적으로 왕명에 따라 편찬된 정무 지침서이다.

울릉도의 지리가 자세히 밝혀져 감에 따라 점차 일본과의 국경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초엽, 즉 1714년(숙종 40) 7월 강원도 어사 조석명(趙錫命)의 영동 지방 해방에 관한 논의 중에, ‘울릉도의 동쪽으로 도서가 잇달아 왜(倭)의 지경과 접하게 된다’고 한 것이 그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신경준의 ≪강계고≫에 이르러서는 우산도가 일본의 영토인 은기도와 접경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한 기록이 일본측 문헌에도 보인다. 17세기 중엽 출운국(出雲國:운주 雲州)관원 재등풍선(齋藤豊仙)이 저술한 ≪은주시청합기≫에 은주(은기도)의 서북쪽으로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가 있으며, 두 섬은 무인도로 오히려 조선과 가깝기 때문에 일본의 서북경(西北境)은 은기도로 한계를 삼는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두 섬이 사실상 조선의 영토임을 상정하려고 한 지적이었다.

울릉도에 관한 지리적 지식의 확대는 지도 작성에도 영향을 주어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독도를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혹은 자산도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동국지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울릉도 밖으로 있는 섬이 우산도라는 인식이 조선 후기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울릉도 개척이 상당히 진전된 19세기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1696년에는 막부의 죽도도항금지령으로 잠잠해졌던 일본인들의 울릉도 내왕이 재개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수토관에 의하여 확인된 것은 1881년(고종 18)에 가서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일본 외무성으로 서계를 보내어 이를 항의하는 한편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檢察使)에 임명, 현지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개척 가능성의 검토를 겸한 것으로, 이제까지의 공도정책의 수정을 시사하는 것는 것이었다. 이규원은 1882년에 울릉도를 검찰하고 그 결과를 국왕에게 복명하였다. 그 요지는 개척이 가능하며, 현재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일본인 70여 명이 벌목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곧 일본 외무성에 공함(公函: 공문에 관하여 주고받던 편지)을 보내어 거듭 일본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는 한편, 울릉도 개척을 결정하고 곧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883년 4월에 우선 각 도로부터 모집한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입거(入居)시키게 되었다. 1882년 이후 정부에서 울릉도 개척에 힘쓴 결과 민호(民戶)의 충실을 보게되어 수토 제도의 폐지와 전임 도장(島長)의 임명이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1895년 1월에는 약 200년간 계속되어 온 수토 제도를 폐지하였고, 곧이어 삼척 월송포만호(越松浦萬戶)가 겸임하여 오던 도장을 없애는 대신 전임 도장을 두게 되었다. 이 도장은 곧 도감(島監)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우릉도가 지방관제(地方官制)에 편입되는 것은 1898년 칙령 제12호를 반포하면서였다.

하지만 도감은 아직 도민중에서 골라 임명하는 자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중앙으로부터 관리가 파견되는 것은 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우용정(禹用鼎)이 울릉도를 다녀 온 뒤의 일이다.
우용정을 울릉도 시찰 위원에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한 것은 일본인들이 잠입하여 수목을 벌채하고 주민들과의 분규도 잦았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우용정은 1900년에 부산 주재 일본부영사 등과 같이 울릉도에 가 분규를 수습하였다. 또 그는 도세(道稅)도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 의하면 울릉도의 호구는 400여 호, 1,700여 명, 경지는 7,700여 마지기에 달하였다.

      칙령 제41호. 1900년 10월 칙령 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칭한 건으로 울릉군을 세우고 그 관할 아래 독도를 포함시킨다는 내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도세가 이와 같았으므로 우용정은 귀경하자 곧 울릉도에 군(郡)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는 정부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그 해 10월 27일에 ‘광무 4년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제정, 반포하였다. 이에 의하여 울릉도는 군으로 개편되고 중앙으로부터 관리가 파견되게 되었다.

위 칙령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2조에서 울도군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전도(鬱陵全島)·죽도와 함께 석도(石島)를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죽도는 오늘의 죽도, 울릉 ‘전도’는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작은 섬과 바위의 통칭이며,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석도를 훈독하면 ‘독섬’ 혹은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1906년 4월의 울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서에서 “본군 소속 독도가 재어(在於) 외양(外洋) 백여 리외에 이살더니……” 운운한 독도는 바로 독섬, 즉 석도에서 차음(借音)한 것이었다.

[일본의 독도 편입문제]

한국 정부가 ‘광무 4년 칙령 제41호’를 제정, 반포한 지 4년여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일본은 일로전쟁 중인 1905년 2월 22일에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 제40호로 ‘량고도’의 영토 편입을 고시하였다.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소위 ‘일본해해전(日本海海戰)’을 앞두고 독도를 전략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량고도 병합 과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각의(閣議:1월 28일)의 결정문이다.

그 요지는 은기도 서북 85리에 있는 무인도(량고도)는 다른 나라에서 점령한 형적이 없고, 1903년 이래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이 이 섬에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한 것이 명백하므로 국제법상 점령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이 섬을 일본 영토로 편입, 죽도로 명명하여 도근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각의의 결정은 정당한 것이엇다고 할 수 없다. 한국은 일찍부터 량고도, 즉 독도를 그 판도로 인식하여 왔다. 그리고 ‘광무 4년 칙령 제41호’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각의의 결정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중정(中井)이 한국령인 울릉도에 불법적으로 주거를 갖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1903년과 1904년 두 번에 걸쳐, 그것도 어기(漁期)에 잠시 출어한 사실을 가지고 이주로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군색하고 무리한 입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각의 결정과 관련하여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일찍부터 일본은 독도를 그 판도로 인식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독도(송도)에 관한 일본 최고의 기록인 재등풍선은 ≪은주시청합기≫ 이래 그러하였다. 특히, 17세기 말엽에 막부의 죽도 도항 금지령이 내리면서부터 일본인들은 독도를 점차 조선 영토로 인식하게 되었다. 1785년 경에 제작된 임자평(林子平)의 〈삼국접양도 三國接刎圖〉·〈대일본지도 大日本地圖〉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다가 19세기 초엽 이후 막부의 울릉도 도항에 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일본인들에게서 점차 잊혀져 갔다.

그 대신 19세기 중엽(막부 말, 명치 초)부터 울릉도를 송도, 독도를 서양 이름인 량고도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량고도의 정식 명칭은 리앙쿠르 암초(Rochers Liancourt)로 1849년(헌종 15)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서양측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 선명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바로 이 량고도에 죽도라는 이름을 붙여 그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1867년에 들어서면서는 일본 관리들까지도 울릉도는 물론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일본 정부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1877년 초에 내무성에 내린 지령에서 지적 편찬상 문제가 되었던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일본령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그런데다가 1883년 초에 조선 정부의 항의에 따라 송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리면서부터 량고도가 조선 영토라는 인식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던 겄이다.

한편, 량고도 영토 편입에 관한 고시도 충분한 절차를 밟은 것이 아니었다. 도근현 고시 제40호가 관보에 게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량고도 편입을 관내에 고시하라는 내무성의 훈렬 제87호조차도 관보에 게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근현 고시는 “아는 듯 모르는 듯하게…현청(縣廳) 문전(門前)에 게부(揭付)”하거나 지방 신문에 게재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국제적으로 영토 편입을 공시”한 것이라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한국이 일본의 독도 병합을 알게 된 것은 1906년에 가서였다. 일본은 이 해 3월 말 도근현 사무관 신서유태랑(新西由太郞)을 책임자로 하는 대규모의 조사대를 독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조사를 마치고 울릉도에 들러 군수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비록 일개 군수에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독도를 병합한 지 1년 2개월여 만에 비로소 한국측으로 알려온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일로전쟁을 매듭짓는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양해한 포츠머드조약이 성립되고 그 결과 일본은 한국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개설한 뒤였다.

그러므로 독도 합병을 더 이상 비밀에 부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울도군 관할의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통보에 접한 울도 군수 심흥택은 3월 29일자로 이 사실을 직속 상관인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1) 울도군 소속 독도, 즉 석도가 울릉도 외양(外洋) 100여 리에 있다는 것, (2) 3월 4일(양 3월 28일) 도근현 은기도사(隱岐島司) 동문보(東文輔) 등 일본 관리들이 군청으로 찾아와 독도가 일본 영토로 되었다고 말하더라는 것, (3) 이들은 도내의 호구·토지·생산량, 군청의 인원·경비·제반 사무를 질문 조사하여 갔다는 것이다.

강원 관찰사 서리 춘천 군수 이명래(李明來)는 4월 29일자 보고서 호외로 심군수가 보고한 내용을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보고에 접한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이에 대한 5월 20일자 지령 제3호에서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부인하였다.

이는 당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참정대신이 독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한편, 심군수는 같은 보고서를 내부(內部)로 보내었는데, 내부도 그 지령에서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독도 병합에 대하여 일본측에 항의하였던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일로전쟁 당시부터 그러하였지만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외부는 폐지되었고 통감부가 사무를 개시하여 그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항의하고자 하여도 항의할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비록 이처럼 일본측에 항의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독도 병합을 묵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명에 따라 편찬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울진조에는 우산도와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이 유서가 간행된 1808(융희 2년) 현재 울릉도와 우산도, 즉 독도(석도)가 울도군에 소속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우산도, 즉 독도를 계속해서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울도군, 즉 울릉도의 소속에 대하여 좀더 언급한다면, 1906년 9월에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강원도에서 경상남도 관할로 이속되었다. 지금처럼 경상북도 관할로 된 것은 1913년 12월부터이다.

<송병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근대/현대] 독도문제 (민족)
아래글 [근대/현대] 독도의 어업환경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28 사전3 [현대] 재17대 대통령선거 이창호 2012-06-19 1398
3027 사전3 [근대] 이상재 (인물) 이창호 2011-10-26 1438
3026 사전3 [현대] 제17대국회의원총선거 (두산) 이창호 2009-07-29 2225
3025 사전3 [근대] 보빙사 (위키) 이창호 2008-03-06 3135
3024 사전3 [근대] 보빙사 (한메) 이창호 2008-03-06 2907
3023 사전3 [근대] 보빙사 (민족) 이창호 2008-03-06 3089
3022 사전3 [현대] 신민족주의 (민족) 이창호 2007-08-21 3198
3021 사전3 [근대] 이인영 (브리) 이창호 2007-08-21 3062
3020 사전3 [근대] 이인영 (한메) 이창호 2007-08-21 2467
3019 사전3 [근대] 이인영 (민족) 이창호 2007-08-21 2775
1234567891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